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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가수 최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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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6,891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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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음악의 나라》하면 곧잘 《이태리》를 떠올리곤 했다. 하기는 학창 시절 어느 음악 선생인이 허던 더러 과장된 이야기가 때때로 생각이 난다. 누군가 이태리에 갔는데 어디선가 카루소를 방불케 하는 벨칸토 창법(?)의 명창 소리가 들려와서 그 노랫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았더니 쓰레기를 치우던 도시의 청소부 아저씨가 잠시 일손을 놓고 저 아름다운 이태리의 푸른 창공을 향해 그처럼 혼자 기분(?)을 내고 있더라고. 그러니까 그 나라는 누구나 명창이고 누구나 음악을 사랑하는 《음악의 나라》라고…. 한데 그뿐이겠는가. 모름지기 대음악인이 되고자 꿈꾸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이태리 유학을, 그 무대의 데뷰를 열망해 왔고 또 그래야만이 음악인으로서 무언가 갖출 것을 갖추거나 하는 것처럼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의 경우, 이제는 더이상 《음악의 나라》 할 때 《이태리》를 반드시 그 선도에 놓고 상상하지는 않으리라. 물론 음악에는 갖자지 종류별, 시대별, 나라, 민족, 계층 등등으로 구별돼야 할 여러 가지 성격의 음악이 있으리라. 하지만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음악》이라고만 한다면 북한이야말로 세게 제1위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나라는 한마디로 낮도 밤도 없고 공석, 사석없이 일터, 놀이터 구별없이 남녀노소, 지위상하, 단체, 개인 막론하고 앉아도 서도 모여도 헤어져도 음악, 음악의 나라였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비엔나에서 개최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사흘간의 대화가 끝난 뒤 마지막 날 저녁 대연회가 있었다. 그 나름의 풍성한 잔칫상을 받고 파티가 무르익자 제2부는 노래자랑으로 들어간다 했다. 그러자 우리들 사이사이에 앉아 있던 북측 현재 외교관 부인들이 줄줄이 일어나 나가더니 어디선가 아코디온, 장구 등등 저마다 악기 하나씩을 들고 나와 왕왕 노래 반주를 해대지 않는가. 처음에 그 중 몇 사람이 나갔다 오더니 그 다음 또 나머지 몇 사람이 교대를 해가면서…. 그렇다면 더 나아가 그 또한 공산당들의 검은 작전(?)의 하나로 외교관 부인들은 모두 악사들로 짝을 지어준 것인가. 당의 지령에 따라 아니면 소위 대남 공작원들에게 권총이나 비밀 소형 무전기를 안겨주듯 그들에겐 악기를 무기 삼아 하나씩 안겨 준 것인가. 그리고 뭔가 특수 임무를 위해 음악 밀봉 교육(?)이라도 준 것인가.
당시만 해도 북한이라고 하면 곧 《테러의 나라》요 공산당이라면 무슨 《뿔달린 도깨비》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백 가지 공포와 의심을 품은 채 난생 처음 공산당을 만나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던 나에겐 그 또한 오만가지 희한한 상상과 의심쩍은 추리로 내 심중을 복잡하게 해준 또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의문과 수수께끼는 그후 수년이 지난 뒤 내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할 때까지 풀리지 않은 채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북한 음악에 대한 충격 제1탄이라 할까.
1988년 9월 당시 내 남편만이 소속해 있던 통일 운동체 《조국통일북미주협회》의 몇 분 어른들과 함께 북한 건국 40돌 행사에 초청되어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행사 중 주로 평양을 중심으로해서 보는 모든 것이 화려하고 웅대했으며, 과연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절감, 경탄케 했다. 그런데 그 많은 프로그램 중에서도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우리를 놀라게 한 북한 음악 충격 제2탄 그것은 《행복의 노래》라는 제목의 무려 5천 명이 출현하는 가극이라 할까. 도대체 이지상에 5천 명이 출연하는 대형 가극이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 어느 하늘 아래 있었던가.
물론 음악의 가치 평가 기준을 결코 그 출연 숫자에 둘 것만은 아니겠지만 내가 감탄한 것은 어쨌든 그들의 음악에 대한 그 불같은 열정이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우선 압도당했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5천 명의 출연진들이 그처럼 질서정연히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수없이 바뀌던 그 현란한 원색의 대형 무대 미술, 그리고 박스에서 서너 명의 지휘자가 바뀌면서 계속 반주를 해주는 국립교향악단의 그 고도의 테크닉과 암기력, 그들은 장장 2시간 나마를 전혀 조명도 악보도 없이 어둠 속에서 악기를 그어댔다. 그 또한 세상에서 처음 보는 기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단신, 두번째 북한 방문은 그 누구의 초청도 권유도 더욱이나 강요 같은 것은 받은 바 없는 단독적인 내 자신의 결심과 뜻에 의한 것이었다. 평소에 없던 그 용기와 의욕이 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인지…. 제1차 방문때 내가 그 땅에서 받아 안은 그 무언가 강열한 인상과 감동이 통일 신령이 되어 나한테 북한에 대한 그 무슨 최면술이라도 걸어 왔는지…. 나는 무작정 그 나라, 그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그리고 나의 심정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에 사로잡혔다.
북한 음악 추억 제3탄, 내가 평양에 있는 소년궁전을 방문하고 그 곳에서 우리의 소공자, 소공녀들이 궁중에서 공주와 왕자처럼 맘껏 음악을 배우고 즐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이제 겨우 언어를 떼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젖내나는 어린것들이 저마다 제 몸체만한 악기들을 하나씩 안고 도레미파를 깨우치고 왕왕 합주를 해대는 그 나라의 귀염둥이 쪼무래기들을 바라보면서 그 광양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행복하여 홀딱 반해 버린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더구나 그 나라의 11년제 의무 무료 교육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네 사회 같으며 거액의 돈을 들여 부유층에서나 할 수 있는 음악 교육이 그 나라에서는 완전 무료일 뿐 아니라 재능이 발견되고 본인이 원할 때는 천재 특수 교육까지도 전혀 무료로 받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찡하게 저려 왔다. 그후 나는 계속 몇 번인가 북을 방문하게 되고 매번 방문 때마다 거리에 호텔방에서 시골길에서 학교와 공장, 유치원에서 친지 집에서 가는 곳마다 북한의 음악과 맞부닥치곤 했다. 언젠가 나는 우연히 호텔방 TV에서 《가족노래대항》 프로를 보았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지…. 아들, 며느리, 손자 할 것 없이 저마다 악기 하나씩 안고 지고 메고 나와 실력 발휘(?)들을 하지 않는가. 이를 테면 며느리는 바이올린을, 시어머니는 퉁소를, 시아버지는 아코디온을, 그리고 시동생은 기타를 그런식으로 말이다. 나는 그 가정만이 특별 음악 가족인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타자 또 다음 타자 나오는 가족마다 꼭 같지 않은가….
나는 내 안내 선생에게 그 기이한 현상의 연유를 물었다. 안내 선생의 대답인즉 대학에서 영화평론을 전공했다는 자신부터가 두 악기를 만질 수 있다고 자랑했다. 즉 북한에서는 모든 인민이 적어도 악기 한 가지 이상 다룰 수 있도록 훈련하자는 것이 당의 방침이라 했다. 물론 그것이 전문가 수준까지 올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각자 스스로 생활 가운데 즐길 수 있을 만큼 기량을 키우자는 것이다. 나는 조금씩 북한 음악에 대한 수수께끼가 푸려지는 듯 했다. 처음엔 신기하고 이상한 광경들로 보였던 기타를 둘러메고 한가로이 시골길을 거닐던 청년,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번쩍번쩍 빛나는 갖가지 금관 악기며 아코디온 따위를 짊어지고 무리져 다니는 모습을 거리에서 흔히 보던 것. 이른 아침부터 무슨 연예인 공연(?)인지 북치고 기타치며 직장 문전에서 합창을 하며 출근하는 일꾼들의 사기를 돋구어 주던 관영, 그리고 어느 공장, 학교, 건설장, 유치원 할 것 없이 가는 곳마다 공용 악기들이 비치되어 있고 음악 소조(특별 취미반)가 있어 각 직장에서 음악 레슴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작장의 전속 악단으로서 때마다 연주를 하기도 해서 그 어느 곳엘 가더라도 사무적 용건만 보고 그냥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손님에게 미리서 음악 잔칫상(?)을 마련해 두었다가 성의를 다한 대접으로써 그들 나름의 푸짐한 음악 공연을 대접하곤 한다. 그뿐인가, 나는 친지들의 가족 모임 잔치가 있을 때마다 가슴을 조여야 한다. 처음엔 수줍은 듯 몸을 도사리는 듯하다가 차츰 잔치 분위기가 고조되고 후끈해지기 시작하면 그땐 저마다 시켜 주지 않아 노래를 부리지 못해 좀을 쑤셔 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그때는 저마다 무슨 키 대보기라도 하듯 자진해서 일어나 노래를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동시에 몇 사람씩 일어나 가지곤 얼굴을 붉히고 미안해 앉기도 하고 서로 양보한다고 법석을 해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독창의 기회를 얻고 보면 얼씨구 내 세상 만난 듯 노래 한 곡조 뽑는 것으로 도저히 성이 안찬다는 듯 대개의 경우 먼저 《혁명시》 한 수를 읊게 되는데 내가 가슴을 조이는 건 바로 그 시간이다.
시를 읊는 그들, 지난날 우리네 신파극의 명배우 저리 가라다. 어찌나 어찌나 열정적으로 감정을 넣어 읊어대는지 그러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도 예사 일이지만 그것이 점점 고조에 고조를 더하다 보면 아뿔사, 저러다 꽝하고 졸도해 뒤로 나자빠지지나 않을까 나는 진정 마음을 조리곤 한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노래가 시작되면 그 또한 한 곡조 노래만으론 부족하여 남자고 여자고 어우러져 그처럼 쉬이 덩실덩실 어개춤이 절로 난다. 그리고 앵콜을 해주지 않아 더 못 부르는 것이 아쉬운 듯 마지 못해 주저앉는다. 의외로 북한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했고 참으로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했고 그리고 음악을 사랑했다.
북한 음악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내가 평양 국제문화회관에 있는 악기 박물관에 갔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대부분의 우리네 민족 악기들이 대폭 개량이 돼 있었다. 이것이 또 어찌된 셈인지, 《죽먹고 전쟁 준비만 하는 나라》로 들어왔는데 어느 하가에 이렇게 악기를 개량하며 태평세월 노래하듯 한가한 놀음(?)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음악을 그처럼 사랑하고 음악에 부은 그들의 담과 슬기를 기뻐하기 이전에 그 모두가 그저 믿기지 않는 신기한 일로만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한가하게도 또 하나 몰두해 온 일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악기를 양음악에 도입, 병행하는 일, 반대로 양악기를 우리 민족 악를 배합, 편성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보자는 것이다. 그 뿐인가 우리 민족 악기의 주법을 양악기에, 양악기의 주법을 우리 민족 악기에 도입, 실험해 보자는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현재 성공적 단계에 이르고 있고 그중 일부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자랑이다. 북한은 정녕 음악으로 동이 트고 음악으로 해가 저무는 나라였다. 전에는 이해하기 어렵던 어느 혁명가의 말이 떠올랐다.
《혁명가는 오히려 로맨티스트이며 낙천가이다》라고 했던….
북한의 가요의 여왕, 최삼숙 씨. 그녀는 내가 만난 북한의 유명 인사 가운데서 가정 여러 번 만난 사람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히 정식 만남이 아니고 한 번의 접견 외에는 언제나 벅적거리는 행사중 한가운데서 잠시 잠깐의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그런 만남이었다. 그런데 매번 그럴 때마다 단 한 번도 내가 그녀를 찾은 일은 없고 언제나 그 편에서 먼저 달려와 반가운 인사를 청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몹시도 송수하게 만들곤 했다. 나에겐 좀 괴벽한 버릇(?)이 있어서 엄연히 안면이 있는 유명 인사라 하더라도 무슨 긴요한 용건이 없는 한 굳이 애써 찾아가 손을 내밀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다. 그것은 왜냐면 그들은 언제나 피로할 정도로 주변에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마련이므로…. 그런데 나의 이러한 평소 버릇이 북한에서는 때때로 몹시도 당황케 하고 죄책마저 느끼게 해줄때가 많았다. 내가 최삼숙 씨에게 당한 것과 같은 일은 지난 수년 사이 몇번인가 북을 방문할 때마다 최삼숙 씨 외에도 다른 여러 유명 인사들에게 꼭 같은 경험을 하곤 했다. 참으로 북한 사람들은 겸손을 보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인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북한을 대표하는 인민의 가수 최삼숙 씨. 그녀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평양 국제문화회관 면담실에서 그녀 외에도 다른 여러 예술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였다. 어느 양갓댁 맏며느리 같은 덕스런 풍모에 미모를 갖춘 그녀는 그날 정숙한 한복 차림으로 곱게 단장하고 나왔다. 그 우아하고 안정담 있는 그녀의 분위기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한 나라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대가수의 화려한 위치나 허세 같은 것이 그 어느 한구석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리에 지나는 삼척동자도 그 이름을 외울 만큼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 그 인민들과 더불어 어제도 오늘도 살고 있는 가수 최삼숙씨는 의외로 이남이 가족인 월북 가족이었다.
경남 진주에서 교편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 경북 대구에서 산파하시던 어머님이 1948년 월북하여 그녀는 1951년 지금의 분계선 지대인 개성시 장푼군 구화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구에서 고녀에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서 일본으로 고학을 갔다. 그러다 정치 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던 애국적인 어머니였고 북한에서는 처음으로 젓산유를 창안하여 만들어 내신 연구심 많은 선비 부친을 모셨다.
인민학교 어린 시절의 삼숙은 노래도 잘 불렀지만 발음이 좋고 문학적 소양이 있다 하여 방송극에 출연하기도 하고 동시를 읊기도 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학생소년궁전이 건설되었는데 삼숙은 제1기생으로서 소년궁전에서 피아노를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숙은 예능에만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 공부도 뛰어나게 잘했기 때문에 소녀는 장래 음악가보다는 김일성대학 철학과를 지망하리라 꿈을 갖기도 했다.
부친이 교편을 잡고 계시던 평양 고등체신학교를 졸업하고 집단 진출을 하면서 그녀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도록 배치되었다. 그리고 직장에서 음악소조 활동을 하던 중 어느 날 김 주석도 참석하는 《노동자 축전》이 있게 되었는데 삼숙은 동료 10명과 함께 그 축전 무대에 서도록 되었다. 노래를 들은 김 주석은 《전문가보다 낫다》는 극찬을 했다. 삼숙은 10명 중 선발된 4명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영화음악단에 뽑혀 가게 된다. 그리고 1971년 8월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목요기량발표회》에 유일한 신인으로서 출연을 했는데 삼숙을 유난히 보고 있던 김정일은 《어디서 데려왔는가. 잘 뽑아 왔다. 앞으로 잘 키우면 좋겠다》하는 칭찬을 했다. 그후로 주변에 간부 동지들이 보다 더 삼숙에게 집중, 관심을 쏟게 되고 배려도 하게 되었다. 그 배려의 덕분인가. 삼숙은 빼어난 재능 덕분인가. 1973년 8월, 김 주석이 참석한 외국 대통령 환영연이라는 화려한 무대에 독창자로 서게 되었다. 그날 삼숙은 콩코 노래를 불렀는데 이렇게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앵콜을 한 건 바로 김 주석이었다.
《어디서 이런 뛰어난 새 독창자를 뽑아 왔는가. 최대한 높이 평가해 주라.》
삼숙은 그날 밤 너무 감격스러워 며칠을 두고 잠을 이루지 못했고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2년의 세울이 흘렀다. 국가에서는 몇 사람의 《공훈배우》명예칭호를 받게 된 후보의 명단이 올려졌다. 그것을 받아 본 김정일은 직접 이름을 짚어 지적했다.
《이 명단에 어찌해서 최삼숙이 빠졌는가. 명단에 이름을 추가해라.》
삼숙은 데뷰한 지 4년도 못 되어 100여 편의 영화 음악을 녹음했고 마침내 공훈배우의 명예칭호도 따내게 되었다. 그리고 당의 배려에 의해 음악대학 통신과를 수료, 최우등으로 졸업한다. 한편 그렇게 되기까지엔 저명한 민요 가수인 스승 강운경 씨의 헌신적인 가르침이 뒤에 있었는데 불행히도 얼마 못가서 스승께서는 병환으로 타계하시고 그후론 김정일이 때마다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지도와 비평을 함으로써 친히 스승이 되어 준다고.
그러나 삼숙의 진로는 그렇게 항상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목소리가 작고 음량이 적어서 성악가로 꿈을 갖기엔 낙심될 때가 많았고 언젠가는 아주 단념해 버릴까 하는 고민과 방황의 시기도 없잖아 있었다. 또한 결혼을 한 후 두 아이를 분만한 뒤 몹시 허약해진 신체적 악조건에 부닥쳤을 때 어느땐가는 너무 과로한 탓이었는지 목에 성대결절이라는 중상이 생겨 크게 충격을 받고 절망속을 헤매인 때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때마다 《음량이 작으면 영화 음악 녹음 독창 가수로 키워라. 성대에 이상이 생겼거든 일본에 보내서 명의를 찾아 진단 치료 받도록 하라》며 항상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고 극진한 배려를 해준 건 언제나 김정일이다. 그리해서 이름 없는 한 방직공으로 하여금 오늘날이 있게 한 것은 오직 그 은덕 덕분이라고.
어디까지나 조선 민요를 부리기 위한 그리고 어디까지나 조선 여성 특유의 소리를 내기 위한 조선 민요 발성법에다 서양 발성법을 결합하여 《태도가 고상하고 부드러운 순한 노래의 가수》로 정평이 난 최삼숙 고유의 노래는 계속 인민의 사랑을 받으며 발전, 승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1982년 김일성 70돌을 맞으면서 최삼숙은 인민배우러소 승격이 될 뿐 아니라 김일성 수령 표창장 그리고 김정일 표창장을 모두 휩쓸어 그 나라 최고의 영예를 한몸에 받아 안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연 2,600회 녹음 2,760곡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름난 명가수의 자세가 아닌 어디까지나 탐구하는 음악도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녹음을 끝냈을 때 어느 정도 원만히 잘했다면 기쁘지만 대체로 언제나 만족이 없고 부족점이 있다 하면 녹음 하루종일 끝내고 집에 가도 계속 귀에 쟁쟁하고 괴롭지요. 그리고 그 어느 한 소절 때문에 몇날 며칠을 두고 씨름하고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보다 좋은 노래로 인민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선 좀더 문학적, 철학적 깊은 사색의 생활이 필요하고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았을 때에도 계속 연구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녀는 잠시 말을 그치고 벌써부터 아가씨가 가져다 놓은 사과를 손수 정성껏 깎아 나에게 권했다. 그런데 사과를 보니 우리에겐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그 향기로운 홍옥이 아닌가. 사과알이 그리 크지는 못했지만 검붉은 빨간색이며 그윽한 향기며 영락없는 그 옛날 고향의 맛, 조선의 맛이었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긴장이 조금 풀린 그 시간, 나는 그녀의 가정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그렇찮아도 제가 여기에 선생님께 자랑하려고 이렇게 사진을 가져왔답니다.》
그녀는 과연 비둘기처름 행복한 가족 사진을 서너 장 내놓았다.
《어때요? 우리 세대주(남편) 미남이지요? 호호, 영화 촬영 기사인데 미남자라고 촬영 그만두고 배우되라는 권유를 많이 받습니다. 대작 촬영할 때 엑스트라가 많이 필요하면 촬영기사들도 모두 합세하라 할 때가 있는데 수줍음이 많아서 배우는 고사하고 그것도 부끄럽다고 이리저리 도망 다닌딥니다. 솔직히 말해면 처녀 때 제기(구애)해 오는 사람 너무 많았지요. 그러나 전 냉정한 가다였지요.》
《가다》이건 일본어가 아닌가. 북한 여성에게도 때때로 일본어가 섞여 튀어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허허거렸다간 모두 달라붙겠으니까. 그리고 그때가 한참 가수로서 상승기였기 때문에 결혼 문제는 좀 덮어두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인연은 할 수 없던가 보죠. 우리 세대주와 결혼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중매 결혼인데 세번이나 맞부닥쳐 가지고 맺어진 인연이랍니다. 우린 피차에 한 번씩 딱지를 놓았던 사이랍니다. 처음엔 그 양반이 잘못된 내 사진을 보고 그랬고 난 나대로 뭐 별로 신통찮은 것 같애서 그랬고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1년이 지난 후 또 누가 같은 사람을 소개해 왔겠지요. 그런데 그때 어머님 말씀이 그만하면 《레베루》도 딱 맞갔다. 어떻냐? 하시고, 평양대극장 옆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 그사람이 서 있는데 가로등에 비친 그 사람 모습이 그땐 어딘가 눈빛이 빛나는 것 같고 괜찮다 싶더군요. 그런데 실은 연애와 정이 없는 결혼이어서 그랬던지 결혼 후 처음 3년은 다투기도 많이 하고 참 힘들었지요. 한데 3년이 지나고 나니 차츰 안정이 되더군요. 아이들은 10살짜리 딸 하나 6살자리 아들 하나 있습니다. 딸아이는 현재 예술학원에서 손풍금을 배우고 있지만 변성되면 성악을 시키고 싶고 학교에서 최고 성적인 10점을 받은 아들아이는 외국어 특수 교육을 시킬 작정이지요. 휴일이면 항상 바삐 돌아가는 나보다는 아빠가 아이들 데리고 산보 다니고 솜씨 좋으신 친정 어머니께서 아이들에게 약밥, 수정과 같은 별식도 만들어 주시고 그럽니다.》
그녀에겐 1년 내내 팬들의 편지가 배달되고 연말연시엔 한해 평균 800여통의 신년 축하장이 날아든다. 길을 걸으면 지나던 인민들이 그녀를 붙들고 더 늙지 말고 고운 노래 오래오래 불러 달라 간청이고 버스에 오르면 저마다 좌석을 내준다고 법석이어서 고역이고 그 중에서도 가정 송구해 못견딜 것은 목욕탕에 가면 노모님들까지도 기어이 등을 밀어 주겠다고 강제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때때로 해외 연주를 다닌다. 그런데 그 또한 《최삼숙은 무대 가수이기보다 녹음 가수이므로 항상 녹음실에 갇혀 있는 것 답답할 터이니 때때로 해외에도 나가 보도록 하라》는 김정일의 특별 배려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련, 중국, 프랑스, 일본, 싱가폴, 버마 등등 적잖은 나라들을 순회 공연한 바 있는데 그 어느해인가 유네스코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에 갔는데 친선의 뜻을 도모하기 위해 샹송을 한 곡조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혀지에서 벼락같이 배워 불러야 했기에 몹시도 혼백이 났었다고….
나는 어떤 샹송을 불렀는가. 그리고 그때 부른 노래를 잠시 들려 달라했다. 나는 북한의 가수가 샹송을 불렀다는 것이 또한 신기하게 들렸기에…. 그녀는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띄우더니 아주 고운 불어 발음으로 조용히 몇 소절 불러 보였다. 그것은 쟈크린느후랑쑤와의 18번으로 저 유명한 샹송, 바로 《La Mer》였다.
지나온 세월 그녀가 부른 숱한 노래들은 저 산곡의 샘물처럼 북한 땅 전국 방방곡곡으로 산 넘고 물 건너 가슴에서 가슴으로 흘러 흘러갔다. 그리해서 인민들이 괴로울 때 함께 기뻐했고 그들이 눈물을 뿌릴 때 함께 울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 일손에 힘을 주었고 가슴엔 꿈과 소망을 심어 주었다. 그렇다. 음악의 나라, 북한엔 참으로 범람하듯 노래가 많은 나라였다. 불과 몇 차례 그 나라를 출입해 온 이방인 나에게도 이제는 귀에 익은 노래들이 꽤 여러 편이 된다.
《수령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 《잊지 말자, 우리 우정》, 《동지애의 노래》, 《그 누가 나에게 그르쳤던가》, 《그대밖엔 내몰라라》, 《기다려다오》, 《통일열차 달린다》
그리고 최근 젊은이들의 힛트송 《휘파람》

《어제 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벌써 몇 달째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복순이네 집 앞을 지날 때 이 가슴 설레여 나도 모르게 안타까이 휘파람 불었네….》 《혁명 시인, 조기천 작시》

하지만 그 나라엔 힛트 중의 힛트, 탑 중에 탑, 그 어느 노래도 경쟁에 대상이 되지 못하는 가장 인기 높은 포플러송이 하나 있다. 그들은 앉아도 서도 모여도 헤어져도 이제는 그들의 주제가가 되어 버린 저 하늘 땅에 사모치는 노래. 그것은 우리의 어린것들이 부르다가 그들의 언니 오빠들에게 가르쳐 주고었고 또한 그들은 그들의 부모형제, 스승에게 가르쳐 준 노래, 그러다가 그 노래는 지뢰밭, 가시 철망도 두려워 않고 저 저주할 분계선을 성큼 뛰어 넘었다.
그대요, 고요히 가슴문 열고 귀를 기울여 보라. 들려오지 않는가. 저 북녘 땅 우리 동포의 가슴을 찢고 피를 토하듯 불러대는 저 노랫소리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북녘 땅에서 통일의 아침이 밝아오는 그날까지 이 노랫소리가 그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코!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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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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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인민의 여가수 최삼숙선생님~! 저는 음치에 노래도 못부르는 삼류가수들같은 아이돌가수들의 노래실력을 보면 정말 개탄을 금치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북녘가수들의 노래실력은 어느나라의 인기가수들보다 훨씬 더 실력이 좋고 발성도 좋습니다! 최삼숙선생님의 언니분이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이신 최현숙선교사님이신데 몇년전에 이산가족상봉도 하셨던분으로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노래부를수있게 간절히 희망하는바입니다!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1950년대~1980년대까지 북녘여가수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보았지만 다른나라의 여가수들과는 달리 모두 무채색내지 은은한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노래불렀으니....! 화장도 무용배우들과는 달리 은은하고 연하게해서 너무 우아하고 고상해보여서 보기좋았어요~!!!!!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더군다나 삼촌이 바로 남한의 국민가수인 남인수선생님이시잖아요? 친일논란으로 혼란을 일으켰던....!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그리고 이곳 남녘으로 입국당한 닝보 류경식당 종업원 12명중에서 최삼숙선생님의 딸인 리은경씨가 포함되었다는 사실 충격적이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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