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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통일 시인 최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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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3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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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그해도 저문 세말의 어느 날 아침 비엔나 교외 어느 한적한 숲에 자리하고 있는 《엘도라도》라는 이름의 호텔 로비에는 적잖은 숫자의 사람들이 외출 준비를 하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사흘간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에 참석하여 진지하고도 열띤 통일 세미나를 마친 남과 북 아니 해외 동포와 북 회원들의 그날 일정이 《비엔나 시가 관광》으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그날도 쌀쌀했고 창 밖엔 이른 아침부터 새록새록 하이얀 눈발이 내려쌓이고 있었다. 좀처럼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나는 그 시간 쇼올을 어깨춤에 두르고 홀로 창가에 다가가 그림처럼 실감이 가지 않는 비엔나 숲속 아름다운 설경에 도취해 있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그처럼 쉬이 나에게 최면을 걸어오고 나 또한 아름다움 앞엔 그지없이 취약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환경은 금시 내가 서 있는 현실, 그 시간, 장소 그리고 나 자신 그 모두를 잊게 했다. 나는 그 시간 속에 있는 집단으로부터 이단자가 되어 눈보라 저 멀리 가이없는 곳 환상의 나래 따라 그 어디론가 빠져 나가려 하고 있던 참이었다.
《화가 선생님, 밤새 잘 쉬셨습니까?》
차분히 가라앉는 음성으로 누군가 등뒤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이가 있었다. 나는 소스라쳐 돌아보았다.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네이비블루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안경을 쓴 중년의 신사…. 그런데 웬일인가. 그는 초면의 사람에게 말을 건네 오고 있으면서도 그 안중엔 한가닥의 미소도 비쳐 있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도 청동 조각처럼 차디찬 것이었고 조금도 흐트러진 데란 없이 단정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만 안경 너머로 빛나는 그의 안광이 몹시도 지성적이며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지난 밤 송별 연회석에서 그렇듯 열정어린 음성으로 자작시를 낭송한 북의 시인이었다.

아득한 하늘끝에 우리를 기다려
눈감을 줄 모르는 고향의 창문들 위에
코흘리개 시절을 숨막히게 불러오는
냇물과 황토길, 호원의 들꽃 위에
나는 새긴다. 《자주통일》

철새와 구름 따라 유랑의 길에 나설 제
나를 부여안고 몸부림치시던
어머니의 백발과 소금발 돋은 적삼 위에
꿈속에도 따라오며 이 몸을 휘감던 늙은 버드나무 위에
세월의 눈보라가 앗아간 낡은 신발들과
눈물의 편지들 위에
나는 새긴다. 《자주통일》

포그늘에 시드는 남녘의 청춘들 위에
아우성의 도시들과 한숨짓는 광양 위에
찬이슬에 지고이는 고아들의 눈물 위에
터럭손에 짖꺾이는 누이들의 통곡 위에
나는 쓴다. 《자주통일》

세월로도, 소낙비로도 가셔낼 길 없는
광주의 피바다, 눈물바다 위에
오늘도 보복을 불러 구름처럼 일어서는 한많은 넋 위에, 피외침 위에
나는 새긴다. 《자주통일》
(후략)

시인 최승칠 씨가 비분에 못이겨 《분단의 아픔을 모아》라는 제목의 이같은 시를 부르짖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내 남편 홍동근 목사와 그분 사이엔 절반 농당조의 이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최 선생, 내가 좀 실망(?)했습니다. 난 최 선생 시 가운데 으레 《혁명》이라던가 《수령님 예찬》의 귀절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선생의 시는 너무나 서정적이어서 좀 놀랐습니다.》
《홍 목사 선생님,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을! 우리 공산당 나라 사람들에게 서정이나 낭만이 없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건 너무나 잘못 아신 겁니다. 우리 조국의 문학 아주 다양합니다. 그리고 서정도 풍부하고요.》
그리고 교대로 같은 연회석상에서 이번엔 내 남편 홍동근 목사가 그들 북한 대표단에게 한아름의 기독교 서적 《성서주석과 해방신학 서적》을 선물로 증정하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같이 일침(?)을 놓는 듯한 반응의 말을 했다.
《홍 목사 선생님은 역시 《선교》에 대한 관심이 많군요. 선생님은 매번 《대화》때마다 선생께서 꼭 하실 일을 기어이 하고야 마는군요.》
그후 세미나가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은 꽤 많은 시간의 대화를 가지면서 남편은 그에게서 갖가지 새롭고 신기한 정보(?)를 얻어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내 남편을 놀라게 한 것은 그가 《기독자》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남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에는 전혀 공개적인 교회도 신앙의 자유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의 고백이 잘 믿기지 않았으나 그러면서도 기쁨과 놀라움을 넘어 어느정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거듭 그에게 캐묻고 추궁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고. 그의 답변인즉 그는 문학을 할 뿐만 아니라 4개 국어를 통할 수 있는 어학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전세계의 수많은 서적을 대하고 보니 자연 기독교 서적 또한 접해 볼 의무도 기회도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또한 때때로 해외 여행 시엔 외국의 시찰들을 돌아볼 수도 있었고 그것을 즐겨했노라고.
그날 아침 우리 일행들을 실어나를 관광 버스는 꽤 많은 시간을 지체케 한뒤 비로소 나타났다. 호텔 로비에서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나에게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왔다. 우선 그의 첫 질문은.
《화가 선생님은 무슨 그림을 그리십니까?》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는 여전히 미소가 없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의 질문이 그처럼 냉소적으로 들린 것은. 그것은 마치도 물질보다는 이념이 먼저인 것 같은 공산진영의 사람이 이념보다는 물질이 먼저인 것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에게 이렇게 따지는 듯 도전하는 듯 나에게 느껴졌다.
《화가 선생, 도대체 당신은 무슨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십니까. 그 많은 자유, 풍부한 물질 속에서 그 어느 만큼이나 그 자유와 물질을 값있게 사용하면서 그 어느 만큼이나 짭잘하고 알찬 쓸만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단 말입니까.》라고.
미소가 없는 사람(?), 무신론 사회에 몸담아 살면서도 자신이 《기독자》라고 꺼리낌없이 말한 북한의 시인 최승칠 씨. 그는 우리 두 내외에게 충격에 가까울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다. 그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이산가족찾기》와 《남북문화예술교류》의 중책을 맡게 되었고 그 외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범민족대회, 4.15 봄 예술축전 등등 평양에서 개최된 국제적 혹은 거국적 행사 때마다 수차에 걸쳐 평양을 방문케 되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문학인 최승칠 씨를 못잊어 하면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마음속에서 간곡히 원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 7월 평양에서 범민족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묵고 있던 고려호텔은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해외 각국에서 몰려온 동포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붐비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 내외가 복잡한 승강기를 비집고 들어섰을 때다. 한 청년이 우리를 보자 반색을 하면서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저 홍 목사 선생님이죠? 제가 최승칠 씨 아들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홍 목사 선생님을 무척 뵙고 싶어하십니다.》
청년은 훤칠한 키에 코가 우뚝한 미남 청년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이같이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니까 그는 연령보다 훨씬 젊어 보였던 것이다. 우리야말로 이산 가족이라도 찾은 듯 기쁘기 그지 없었다.
《야, 이거 정말 반갑군. 우리야말로 이렇게 올 때마다 최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어 했는데!》
내 남편은 청년의 손을 잡았다.
시인 최승칠 씨가 인삼주와 청자기, 신간 문예 작품집 등 정성어린 값진 선물들을 마련해 가지고 우리의 호텔로 찾아 온 것은 바로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우리는 진정 죽마고우를 만난 듯 잃었던 혈육이라도 찾은 듯 기뻐했다. 그는 《미소없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반가움에서 서로 잡은 손을 언제까지나 놓을 줄 몰라 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손과 손에서 나는 확인했다. 그 어느때보다 생명감 넘치는 시인의 혼과 열정을, 그 무엇으로도 끊을수 없고 그 어떤 빙하 시대가 온다 한들 그것만이 냉각시킬 수 없는 우리의 저 사모치는 동포애를….

1933년 함경남도 태생인 최승칠 씨는 1956년 김일성종합대학 문학과를 졸업한 이래 주로 신문기자로서 문필 생활을 하는 한편 창작 활동을 해오고 있는 북한의 명성 있는 문사 중 한 사람이다. 나는 수년만에 그를 다시 만나 비로소 그를 포함한 북한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즉 분단 이후 북한 문학이 추구하고 말하고자 하는 그 주의 주장이 무엇인지 또한 북한 문예 정책이 있다면 어떤 것이며 하는 등등 나의 욕심(?)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몰염치한(?) 욕심일 뿐 우리에게 그 같은 큰 주제를 두고 충분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시간적 여유도 그리고 단 시간에 그처럼 많은 것을 받아 소화할 수 있는 북한 문학에 대한 나의 예비 지식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인다운 재치있고 섬세한 표현, 예리한 직관의 말들을 통해 북한 문학과 그 사회에 대한 생각, 그의 세계관 등 단편적이나마 원칙적이고 철학적인 참고가 될 사실들을 들려주었고 그후 나는 북한 문학 일반에 관한 서적들을 뒤적이면서 나름대로 북한 문학에 대한 이해를 가져보려했다.
북한 문학. 그들은 선언하기를 《문학은 곧 인간학》이라 했다. 왜냐하면 문학은 결국 인간을 그리고 인간에게 복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문학 속에 인간 문제를 밝혀 냄으로써 생활의 진리를 깨우쳐 주며 참된 삶의 길로 이끌어 준다는 의미에서다. 하기 때문에 북한에 있어서 문학은 인간 교양의 참된 교과서이며 삶과 투쟁의 무기로써 사명을 지닌다. 그러면 문학이 인간을 어떻게 교양한다는 것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참된 삶의 길이라는 것인가. 그들은 말한다. 자연과 사회, 그 운명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고상한 정신 세계를 지닌 주체사상에 기초한 공산주의 새 인간, 그것을 그들은 이상의 인간 전형으로 구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육체적 생명보다 사회 정치적 생명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면 나라 없는 인민에게 자주성이 있을 수 없고 자주성이 없는 인간에게 참다운 삶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 곧 인간학이어야 하는 북한 문학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문학의 인민성으로 그들의 문학이 결코 소수의 특수층을 위한 것이 아닌 절대 다수 인민 대중을 위해 존재하며 지향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회주의 제도하에서 나라의 주인이며 역사의 주체이며 혁명, 건설의 주인은 결코 소수의 부르조아나 인텔리 계급이 아닌 바로 인민 대중이기 때문이다. 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이라면 어디까지나 인민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문제를 반영, 묘사함으로써 인민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 그들의 문제를 심오한 예술성, 높은 사상성으로 풀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북한에서는 문예 창작 활동 또한 소수의 전문가들뿐이 아닌 전인민 대중이 군중적으로 문예 창작 활동에 참여하도록 정책적인 장려를 해며 제도화하고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소수의 전문가들의 힘만으로는 보다 성과적으로 주체적 혁명 문학을 이룩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 문학의 주인은 인민 대중이기에 보다 풍부히 생동하게 인민 대중의 감정과 정서, 사상이 담겨지도록 하기 위함이며 보다 많은 문학 인구를 확충하자는 방도에서다. 그리해서 인민 대중이야말로 진정한 인민 대중 문학의 창조자이며 향유자이자 진정한 평화자로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을 표방하며 제국주의의 문화적 침투를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형식주의와 신비주의, 자연주의 혹은 예술지상주의 그리고 복고주의 또는 허무주의 등 일체의 부르조아적 사대주의적 문학 예술을 가리켜 퇴폐 문화 예술이라 하여 단호히 배격한다. 반면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 내용을 담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에 심혈을 기울인다. 예컨대 민족성의 토양에 인민성의 뿌리를 내리고 시대성에 부합되는 작품, 또한 대체로 실재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긍정이 지배적이고 긍정적 모범에 의해 부정이 극복되는 그리하여 인민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며 그들을 고무해 주며 깨우침을 주고자 하는 작품들이 그 주류를 이루어오지 않았겠는가. 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은 민주 건설 시기에는 민주 개혁의 주인공을, 한국 전쟁 시기에는 전사 영웅을 전후 복구 건설 시기에는 복구 건설자를 천리마 시대에는 천리마 기수의 전형을 창조해 왔다.
북한의 문학, 그들이 추구해 온 문학이란 그 어떤 것일까. 김정일의 문학론에서 이 같은 대목을 발견한다.
《훌륭한 문학 예술 작품의 특징은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는 고상한 내용과 세련된 형식의 완벽한 통일에 있다.》
그렇다.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는…》 문학이라 했다. 그러면 그들 사회에서 지금의 현시대에서 요구되는 문학, 인민이 지향하고자 하는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시인 최승칠은 회고했다. 1989년 3월 남한의 작가 황석영이 그 생애를 건 비장한 각오와 함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돌연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와 함께 한 감동적 35일의 날들을. 그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그를 통일전선의 동지가 되었으며 그리고 남과 북의 문학이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먼저 작가 황석영이 외세를 업고 민중을 압제 수탈하는 통치배, 자본가들에 대하여 항거하는 민중의 작가임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조국의 자주 통일을 부르짖으며 통일 지향의 문학 운동을 펴고 있는 남한의 진보적 작가들을 대변하는 그를 보면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훨씬 더 많이 발견했다. 자주 통일 운동은 반통일 세력인 압제자들을 반대하여 인민 대중이 벌이는 정의로운 투쟁이다. 자주 통일은 민족의 숙원이며 역사적인 최대의 과제이다. 그것이야말로 애국적 민족 문학이 될 것이며 무궁무진한 창작의 대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남의 민예총(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이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지도위원인 황석영과 북의 문예총 위원장 백인준, 부위원장 최영화, 작가동명통일문학 담당 조정호 부위원장 등 남과 북의 문학인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남과 북의 작가들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교류와 합작 등의 방법으로 통일 지향의 민족 문학 운동을 공동으로 펴 나갈 것에 대한 합의서를 작성하여 서명한 문건을 교환했다. 이제 그 이념이나 창작 경향에 관계없이 평화 통일 위업이라는 하나의 길에서 더불어 창작 활동을 펴나가고자 하는 북녘 땅에는 우리들이 그처럼 잊지 못해하는 월북 작가들 홍명희, 리기영, 박태원 그리고 시인 박팔양, 박세용 등을 위시해 소설 부문에 천세봉, 신진순, 석윤기, 리종렬, 시인으로 리찬, 조기천, 백인준, 최승칠, 오영재 그리고 영화 문학에 리춘구, 박봉하, 오혜영 등등 그 땅에 무수한 작가들이 존재함을 본다.
그리고 그들은 다짐한다. 통일전선 그 한길에서 남녘의 문사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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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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