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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전쟁》의 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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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9,5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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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이미 작고한 두 문학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어떤 계기와 인연으로 하여 알게 된 두 문학인은 진정 나에게 깊은 감동으로 안겨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이 지상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승리의 영원히 꺼지지 않을 생명의 불길을 저 드높은 산봉우리에 지펴놓고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그들은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다 쓰고 간 사람들이다. 그 한사람이 월북 작가인 박태원 씨, 다른 한 사람이 요절한 천재 여류 시인 주옥양을 말한다.
지난 3년여 우리 두 사람은 오직 《이산가족찾가》 업무에 전심전력으로 봉사해 왔다. 결국 온 집안이 사무실이 되어 버린 우리집엔 주야를 가릴 수 없는 신청자들의 재촉 전화벨 소리, 산같이 쌓이는 신청 서류들로 벌집 쑤셔놓은 듯 번잡하고 소란해야만 했다. 과연 이산 가족 한 사람이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 기쁜 소식을 받기까지에는 간단치 않은 수속 절차와 짧지않은 시간이 경과돼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장의 신청서를 받아들었다.

신청인 : 아들, 박일영
찾고자 하는 이 : 부친 박태원, 누이 : 박설영
가족과 헤어진 년도 : 1950년 여름

이상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들 박일영 씨가 기다리는 소식이 좀처럼 오지를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아들은 우리에게 몇 번인가 재촉 전화를 해왔고 우리는 그를 위해 몇 번인가 《북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앞으로 재촉 전보를 쳤다. 그러나 1990년 7월 평양에서 개최되는 범민족대회가 열리기까지 회신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효성스런 아들의 애타는 심정을 헤아려 그에게 범민족대회에 참가함으로써 가족 상봉을 앞당길 수 있는 기회를 권고하고 돕기로 했다. 우리는 그가 평양에 당도하여 그의 누이와 감격적이고 극적인 상봉의 현장을 목격했고 우리나라의 저명 월북 작가인 그의 부친 박태원 씨는 이미 3년 전에 타계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30년대부터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이효석 씨등과 함께 문예창작활동을 벌였던 작가 박태원은 1950년 월북을 단행하기까지 애국적인 민족 양심의 소유자로서 이미 적잖은 시련의 날들을 보낸 바 있다. 일제하 창씨 개명을 하고 조선말 아닌 일본어로 창작하기를 거부한 이유로, 미제국주의 한반도 식민지화, 군사 기지와의 정책을 지지, 협력해 나서지 않은 이유로 그는 붓을 꺾어야 했고 감옥 출입을 하며 핍박을 받아야 했다. 당시 그에게 세상은 온통 슬픔과 절망, 암흑일 따름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몸이 된 양 번민과 실의의 나날 속에 어둠속에 외로이 헤메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미술인이 아우 박문원 씨와 함께 북한에서 두장의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두 형제는 월북을 결심, 북행 길에 올랐다. 그것이 1950년 여름 인민군대가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의 일이다. 그는 월북하자 곧 종군 작가가 되었다. 그는 인민군대와 함께 했던 전장에서의 생활을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의 애국적 혁명 학교를 수료한 것으로, 값지고 보람찬 생의 체험으로 소중히 여겼다.
종전이 되면서도 그는 다시 문학 초년병의 정열과 용기를 되찾아 새로운 각오로써 문학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당시 그는 순수 문학에서 그 어떤 벽에 부닥쳐 모대기던 중 다만 막연히 역사 소설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하던 터였다. 그래서 손에 닿는대로 역사 소설을 읽고 옛 이야기들을 모아 자료로써 정리해 두기도 하면서 옛 조상들이 겪은 이들을 다시 적으며 거기에서 오늘의 교훈을 얻어내는 일도 뜻이 있으리라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선뜻 붓을 들기엔 아직도 결심이 서지 못했고 용기도 부족했다. 그리고 나이는 이미 50고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만 가슴 한구석 깊은 곳엔 역사 소설에 대한 꿈과 염원을 남몰래 소리없이 앓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이 같은 교시를 받게 되었다.
《옛날의 계급 투쟁을 취급한 소설도 쓸 수 있습니다. 옛날이라고 하여 계급투쟁이 없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노예 사회나 봉건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의 형식이 오늘과 다를 뿐이지 노예주와 노예, 봉건영주와 농도 사이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런 계급 투쟁들도 소설로 잘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농민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쓴다면 역사를 쓰듯 작품을 그저 나열할 것이 아니라 어떤 전형적인 개별적 사람들의 투쟁을 통하여 그때 사회의 농민전쟁 전반과 계급 투쟁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게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의 이같은 권고는 주저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나아갈 길을 밝혀준 횃불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샘 솟는 듯 했다. 비로소 확고한 결심을 했다. 역사 소설을 쓰기로 하고 지체없이 작업에 들어갔다.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생각을 익혀 왔던 갑오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을 쓰기로 했다. 전 16권의 방대한 작품으로 구장된 그 첫 권인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의 제1부를 끝냈다. 많은 독자들이 애독해 주었고 당에서도 격려의 말을 보내 왔다. 더욱 힘을 얻은 그는 제2부 집필을 시작했다.
그런데 집필 도중 갑자기 시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안과 의사들은 그의 병이 심상치 않은 것을 곧 감지했다. 그것은 치료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머잖아 시력을 아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심각한 병이었던 것이다. 즉시 입원을 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치료를 받았으나 날이 갈수록 시야는 어두워만 갔다. 처음에는 원고지의 절반만이 보이더니 그것이 점점 줄어들어서 나중에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적을 수 있는 원고지의 한 칸만 한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잃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원고지 한 칸의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결심을 다졌다. 실명은 언제 닥쳐올런지 모른다. 역사 소설이기에 사실을 고증해야 할 것도 읽어야 할 새로운 자료들도 많았다. 날로 덮여오는 어둠의 장막과 싸우면서 그는 많은 자료들을 병실에 옮겨다 놓고 서둘러 자료를 분석하고 암기도 하며 발췌해 두기도 했다. 그는 아내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아내는 문학인이 아니며 역사의 지식도 없는 다만 평범한 가정부인일 따름이었다. 피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족한 것을 보충해 가며 힘을 합할 것을.
그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자료 채집을 위하여 청진으로부터 개성에 이르는 먼 여행길에 나섰다. 가는 곳마다 도서관과 박물관을 순례하며 고문서를 찾아 읽기도 하고 그 내용을 자료집에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면 붓뚜껑만치 작아진 시력과 도수 높은 확대경에 의지하여 한 자 한 자 원고를 써 나갔다. 그러던 1965년 봄 어느 날이었다. 봄날의 화사한 별이 온 방안 하나 가득히 비쳐들던 한낮에 있은 일이다. 자료를 읽어 나가던 그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그는 확대경을 누가까이 바싹 가져다 글자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칠흑같은 검은 끝간 데 없는 어둠의 궁륭뿐이었다.
《여보, 벌써 날이 어두웠소?!》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다만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의 손에서 확대경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그에게서 빛은 영원히 사라져 갔다. 그는 침상 위에 누운 채 화석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뜬눈으로 한밤을 새웠다. 과연 이것으로 붓을 놓아야 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한생애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몇날 며칠을 헤어날 수 없는 절망과 번민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당 조직에서 한 일꾼이 찾아왔다.
《우리는 박태원 동무가 새로운 결심을 안고 일어서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주체 조선의 당원 작가로서 그 어떤 시련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작가의 손을 힘껏 부여잡고 절절히 호소했다. 조체 조선의 당원 작가! 그것은 당의 사상과 의지로 숨쉬며 행동하는 주체형 공산주의자의 고귀한 칭호이다. 혁명가, 당원은 조국과 당을 위해 어떻게 살며 싸워야 하는가를 그는 지난날 현실 체험을 통하여 눈물겹게 가슴에 새기었다. 그는 생각했다. 가슴에 그와 같은 고귀한 당증을 품은 자신이 당 앞에서 다진 맹세를 어기고 인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창작 전선에서 물러설 수 있는가. 비록 실명은 되었으나 기대를 저버리고 창작 전선에서 물러설 수 있는가. 그는 결연히 일어섰다. 그리고 창작의 고심어린 투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구술하여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제2부를 마쳤다. 또다시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가족들에게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읽어 주도록 하면서….
그는 당초에 16권의 장편을 3권의 장편으로 구성을 고쳤고 제목을 《갑오농민전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주체적인 확고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소설의 주인공들인 피압박 근로 인민들의 당시 생활상을 보다 생동히 그려 보이고자 했다. 그는 전라도와 그 일대의 농촌에 살면서 이조 말기를 체험한 늙은이들을 수소문하여 수많은 도시와 농촌을 다니기도 했고 어느 때는 갑오년에 살았다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민요들을 수지하여 자자구구 파고들며 연구하기도 했다.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아내가 전라도와 접경한 경상도의 한 농촌에 살았다는 팔순 노인을 만나 이조 말기 가혹한 봉건적 수탈로 인해 먹을 것이 떨어진 농민들이 겨울날 콩잎, 팥잎으로 끼니를 에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그는 아내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 이외에는 또 다른 진기한 자료는 없었는지. 그러나 아내는 《콩잎, 팥잎》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는 이미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진 저녁 시간이었으나 아내를 앞세우고 그 어느 깊숙한 산촌 마을을 향해 길을 찾아나섰다. 《콩잎, 팥잎》 그 같은 자료야말로 그가 목적하는 바였고 당시의 피압박 근로인민들이 더는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비참한 생활상과 사회 제도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낼 수 있는 실마리의 귀중한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의 집필은 이제 점점 본궤도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설 제1부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에게 또 하나의 큰 불행이 들이닥쳤다. 그가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진 것이다. 의사들이 환자보다 더 안타까워하며 응급치료를 했다. 그러나 의사들의 지극한 인술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신의 감각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사고 능력에는 별지장이 없었다. 그는 퇴원을 하자 곧 원고 구술을 시작했다. 가족들은 그러한 불행에도 낙심치 않고 집필을 계속하는 아버지와 남편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시각도 전신의 감각도 없는지라 그는 낮과 밤을 전혀 가리지 못하게 되었다. 낮도 밤도 새벽도 없이 원고를 불러댔지만 가족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받아 적으며 그의 입에서 갑오농민전쟁 이야기가 계속 나오기만 바랐다.
창작 사업은 다시 생기를 얻고 날로 열기를 더해갔다. 때로는 하루에 30매도 넘는 원고가 쌓였다. 그런데 그 무슨 잔인한 운명의 장난인가. 악마의 횡포인가. 그에게 남은 그 정도의 신체의 자유마저 앗아가고자 또 하나의 병마가 그를 덮쳐 온 것이다. 이번에는 혈전이라는 이름의 병명이었다. 그는 또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사흘 동안 무의식 상태에서 식물 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났을 때 그는 반신불수에서 전신불수로 변해 있었고 입과 성대가 그 기능을 잃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두뇌 활동 또한 약화되어서 자주 정신이 흐려지곤 했다. 참으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가족들도 이번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감각이 없어진 몸체였으나 그는 몇 번이고 그 위에 떨어지는 물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암흑의 끝에 오히려 동이 터오는 법, 그 같은 절망의 시간에 그에겐 오히려 알 수 없는 신비한 빛이 고요히 비쳐들었다. 그는 소리없이 외쳐 보았다.
《나는 당과 조국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혁명 전사다. 당과 조국에 충성 다하는 혁명 전사에게 못해 낼 일이란 없다.》
그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그리고 투지와 의욕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다. 그는 우선 기억력과 사고 능력을 되살리고자 고심했고 투쟁을 했다. 《자유》, 《독립》, 《조국통일》등등 어휘들을 생각해 보고 간단한 산수 문제도 풀어 보고 어려운 한시도 기억해 내고자 했다. 차츰 혼돈에서 질서를 잡아가고 희미하던 것이 밝아 오면서 생각이 하나의 과녁을 향해 통일 집중해 가고 있었다.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소망의 미명이 비쳐 오는 듯 싶었다. 하지만 생각이 정리되어 가고 내면에 몇 권의 소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말뿐인데 언어가 트이지 않고 성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문제는 어찌해야 할지…. 그것을 생각하면 또다시 천 길 만 길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때 어느 날이었다. 현관에서 왁자하는 손기척이 났다.

《당 중앙위원회에서 왔습니다. 박태원 동무의 건강 회복에 쓰라고 위대한 수령과 당 중앙에서 사향 한 보를 보내주었습니다.》

김 주석과 당 중앙의 극진한 배려는 그에게 기적을 배풀어 주었다. 그는 그 약을 복용한 후 말문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당과 김 주석의 사랑의 손길은 그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었다. 이미 60고개를 넘은 그의 아내가 이미 여러 해를 남편 수발에 시달려 온 탓인지 갑자기 청각이 나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 당에서는 특별히 주문하여 마든 최신형의 보청기를 아내에게 보내 왔다. 두 내외는 다만 감동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당과 김 주석에 대하여 충성할 것을 맹세, 다지고 또 다졌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도 젊은 날의 기백을 되찾아 열정적으로 줄기차게 집필의 전진을 계속해 나갔다. 마침내 1977년 여름 《갑오농민전쟁》 제1부가 출판되어 세상에 나왔다. 책이 되어나온 자신의 작품을 손더듬으로 만져 보는 그에겐 기쁨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과연 뜻한 바대로 당과 김 주석에게 기쁨을 돌리고 인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자가 되었는지 혹은 쓸쓸히 버리받은 책이나 아닌지….
그런데 출판 후 얼마 후의 일이다. 어느 날 작가동맹의 한 일꾼이 찾아왔다. 그는 다음과 같은 김 주석의 마을 전달하고 왔다.
《소설 《갑오농민전쟁》은 잘 썼습니다. 박태원 동무가 역사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태원 동무와 같이 역사 소설을 쓰는 사람이 귀중합니다. 우리나라에 역사 소설이 얼마 없는 것이 결함입니다. 역사 소설을 주체적 입장에 튼튼히 서서 많이 쓰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는 벅차 오르는 기쁨과 흥분된 감정으로 하여 한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과연 인간의 참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를…. 그런데 기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김 주석과 당 중앙에서는 그에게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기로 결정을 본 것이다. 그리고 곁들여 평소 음악을 즐기는 그에게는 고급 전축과 약품들 그리고 아내에겐 고급 시계와 양복지를 선물로 하사했다. 그는 다시금 감개무량함을 금치못해 하며 돌이켜보았다. 작가가 작품을 썼고 아내가 그 남편을 도왔다. 그 무슨 특별한 일을 했으며 상을 받을 만한 남다른 공로를 세웠단 말인가.
훈장 수여식 및 선물 전달식장에 남편을 대신하여 참석한 아내가 남편의 충성 결의문을 이렇게 대독했다.

《……, 저는 꾸지람을 들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수령님께서와 당중앙에서는 꾸지람 대신에 애를 썼다고, 수고를 했다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시고 저의 아내에게도 귀중한 옷감과 고급 시계까지 보내주시니 저는 무엇이라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70평생 다난한 생을 걸어온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감격이며 최상의 영광입니다. 이제 저는 더 한이 없습니다. 다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 행복한 자리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리운 혁명 동지들! 몹시도 보고 싶은 작가 동지들! 우리 모두에게 길은 하나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영광스러운 당 중앙의 신임과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한목숨을 바치는 충성의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단 하 길입니다. 저는 저에게 남은 모든 것을 다하여 저에게 이렇듯 크나큰 영예와 은덕을 베풀어 주신 어버이 수령님과 당 중앙의 크나큰 사랑과 배려에 보답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금년 중에 《갑오농민전쟁》 제2부를 끝내며 계속하여 제3부를 완성함으로써 충성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이어서 그의 아내 또한 이 같은 답사의 말을 했다.
《……그는 지금 다함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어버이 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기 전에는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생을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버이 수령님께서와 당 중앙 앞에 다진 맹세를 실천하기 위하여 단 하루도 창작을 중단하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가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갑오농민전쟁》 제2부를 마치고 제3부에 들어갔을 때 완료하지 못한 채 다시 언어 장애가 왔고 그리고 영원히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 제3부의 마무리를 해야 할 사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그의 아내뿐이었다. 당에서는 긴급히 대책을 세웠다. 아내로 하여금 단기간이나마 작가 학습을 받도록 배려를 했다. 아내는 학습을 받고 자료를 답습해가며 그리고 하루하루 그 생명이 꺼져 가는 남편의 모습과 원고지를 번갈아 초조히 바라보며 밤을 세워 원고를 적어 나갔다. 그리고 매번 검열을 받기 위해 남편에게 낭독을 한다. 그러면 남편은 손짓으로 그것을 통과 또는 부결의 신호를 했는데 결국 《갑오농민전쟁》 제3부의 마무리는 7번의 부결 끝에 그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당과 김 주석 앞에 다진 저 충성의 맹세를 완료한 뒤 1986년 7월 그 생의 막을 내리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두 눈이 앞을 못본 지가 벌써 17년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시각은 어둡지 않았으며 나의 생활은 불행하지 않다. 눈은 비록 감았으나 나의 하루하루가 빛없이 흘러가지 않으며 몸은 비록 자리에 누워 있으나 마음은 활기를 잃지 않고 있다. 나는 당과 수령님의 햇발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 그루의 나무처럼 싱싱하고 행복하다. 병마다 죽음이나 그 어떤 어두운 그림자도 나의 이 행복을 빼앗거나 가리울 수는 없다.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몸이 답답하고 불편할 것이라고 경솔히 판단하지 말라. 죽은 나무에도 꽃을 피운다는 옛 전설과도 같이 신기하고 행복한 나날 속에 나는 살아가고 있다. 나의 가슴속에는 당과 수령님에 대한 충성심이 샘물처럼 고여 오르며 그것은 나의 삶을 더 한층 빛내어 주고 있다. 위대한 당과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주체의 사상, 주체의 빛발 속에는 병이나 늙음은 있어도 불행은 없다.》

이별 40년만에 아들 박일영 씨가 그 부친을 찾았을 때 부친은 이미 지상에 있지 않았다.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맞이해 준 것은 다만 부친께서 20여 년 세월 집필하시던 책상 아닌 주인 없는 빈 침대일 뿐이었다. 북녘 땅 새 어머니의 권유에 못이겨 부친의 침대에서 며칠의 밤을 지새운 아들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즉시 부친의 유고 집 대하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출판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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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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