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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시몬느베이유 주옥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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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3,09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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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 평양 체류 시 나는 호텔 주변에 한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책방 점원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특별히 잘 알려지고 사랑받는 소위 《인기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한 권 추천해 골라 달라고. 책방 아가씨는 선뜻 한권의 책을 뽑아 나에게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보십시오. 우리 젊은이들 이 시집을 보지 않은 이 없고 또 주옥양을 모르는 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 두껍지도 장정이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하고 조그만 책자였다. 나는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과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을 때 이미 나는 그에게 매료당하고 빠져들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저 불란서의 시몬느베이유가 있었고 남한에 전혜린이 있었으면 북한에 주옥양이 있다고. 불과 23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잠시 피었다 사라져간 그녀 주옥양. 그러나 그녀는 시몬느베이유처럼 철학자가 아니며 전혜린처럼 유학 시절을 보낸 일도 없는 일개 공장의 여직공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언뜻 위의 두 여인이 떠오른 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러한 비견은 어딘가 모순된 다만 내 지나친 비약이나 아닌가.
그렇다. 그려 주옥양에게는 위의 두 여인에게 있었던 높은 학문이나 지위 그리고 명성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이루어 내기란 결코 쉬운 것도 아니며 우리가 한생애를 살아감에 있어서 그것이 적잖이 유익을 주기도 하는 값지고 귀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참다운 한생애를 살아감에 있어서는 그 못지 않은 또 다른 값지고 귀한 것이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여기 세 여인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었던 저 생애 대한 열정, 진실을 만나기 위한 그 피어린 투쟁, 그리고 그 농도 짙은 진한 삶이 있었으니 그 또한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고귀하고 값 높은 것이 아니겠는가.
젊은 날 인식에 열망과 다함없는 낭만을 구가하여 아낌없이 그 생명을 불태워 버린 전혜린, 그 같은 높은 학문이나 직위에도 불구하고 오직 가난하고 억눌린 자 그리고 수탈당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의 고난에 함께 하며 끝내는 스스로 요절을 자청한 여인 시몬느베이유 그리고 여기 북한에 다만 시와 조국애를 위해 그의 티없이 맑은 영혼, 스물셋 꽃다운 청춘을 송두리째 저 불꽃 튀는 뜨거운 창작의 용광로에 던져 버린 주옥양이 있다. 그들은 동시에 다만 생물적인 삶을 거부했다. 그들은 진실 외면의 안이한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시간에 맡겨진 목숨도 용납할 수 없었다. 사랑과 인식 그리고 창작애의 고뇌에 찬 생애, 진지한 너무나 진지했던 세 여인의 삶의 자세에서 방황하는 인생에 길을 시들어 가는 삶에 여름 소나기 같은 신선함을 다시금 느껴 보며 그 한줄기 공통의 빛을 보는 듯 하다.

백두산!
내 토끼무늬 가방 메던 시절
크레용으로 너를 그리던 그날엔
어린 마음에 나래펴고
네 우에 올랐다.

붉은 넥타이 시절
아버지가 가져온 백두산의 돌을 안고
잠못들던 그 밤엔
내 꿈속에서 네 우에 올랐고

답사 갔던 작업반의 그 동무
백두산 헌시비의 글발을 줄 땐
내 그 시를 읊으며
네 우에 올랐다.

아, 산같이 쌓아온 그리움
혁명의 성지에 한껏 쏟으며
내 지금
그리도 소원이던 백두산에 오르나니…

1982년 여름이었다. 동해바다의 아침은 아름답고 고요했다. 가끔씩 밀려와 모래사장을 휩쓰는 파도소리 외에는…. 모래 바닥에 누군가 벗어 놓은 여인의 조그만 구두가 바닷물에 젓고 있었다. 그리고 아득한 백사장 저 멀리 한 젊은 여성이 고개를 수그린 채 홀로 거닐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시의 세계에 취하여 파도치는 바닷가가 아니라 지금쯤 시어를 찾아 저 백두산 밀림 속을 헤매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서라, 그녀를 아는 채 말라. 다만 물에 젖고 있는 신발을 젖지 않게 옮겨 주고 물러서야 한다.
그해 여름 함남 흥원군 운포 바닷가 창작초대소에서는 함경남도 내 문학통신원 창작 강습이 열리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어느 지도 교원의 한 사람이 강습에 참가했던 주옥양을 만나 본 마지막 장면이다. 그녀의 지도 교원이자 이미 그녀의 독자가 되어 버린 그가 그후 열흘 남짓 출장을 다녀왔을 때 거기에 있어야 할 주옥양은 이미 지상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강습도중 갑작스런 병고로 함흥으로 실려가게 되었을 때 주옥양은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작품을 당에 보내주세요.》
같은 해 11월의 일이다. 평양에서는 전국통신원 문학열성자회의가 열렸고 문학 예술의 인민 대중화를 위하여 제정된 《6얼 4일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그리고 영예의 수상자로서 주옥양이 선정되었고 딸을 대신하여 그녀의 어머니가 《6월 4일 문학상》 증서와 금메달을 전달받았다.

그대 가슴
서정의 풍만한 호수라면
나는
시냇가 흰 바위 밑의 작은 샘

그대 웃음
신심의 떨기진 꽃이라면
나는
땅을 비집고 튼 애어린 싹

그대 심장은
지향의 사품치는 파도
나는 모래불의 잔잔한 물결
그대 걸음은
창조의 자유로운 수리개
나는 깃을 다듬는 비둘기…

축복하노라
이 봄에 태어난
영광의 시 묶음이여
당과 조국에 드린
아름다운 노래의 다발이여

창가에 피여난 나의 류선화
너 꽃잎 속에 그 향기 보아다오
길가에 늘어선 나의 버들아
너 초록빛 그 날개 한껏 펴다오

그 꽃초롱 내 마음에 설어
멀리 벗이 사는 하늘에
축등처럼 띄우련다.
그 고운 날개 내 마음에 이어
영롱한 무지개를 걸련다.

그대 넘은 험한 고개
나도 넘지 않았다면
그대 겪은 진동의 나날
내 맛보지 못했다면
어찌 있으랴 오늘의 이 기쁨
축복하노라! 축복하노라!

저 맑은 하늘과 기름진 대지여
철의 탑들과 밀림의 메아리여
벌의 오곡과 과원의 설레임이여
초소의 밤들과 명절의 불빛이여
아기의 웃음과 유원지의 꽃수레여
아, 그 모든 것을 축복하노라.

이제 나의 작은 샘도
큰 바다 되려고 쉼없이 흐르리
어린 싹은 호함진 꽃을 피우려
온갖 향기 모으리

모래알의 큰 바위 되려고
어린 새는 큰 날개 펼치려고
잔 물결은 거창한 파도로 일떠서려
폭풍을 휩싸안고 설레이리, 설레이리

오, 천길 별랑에 떨어져도
내 다시 탐구의 절정에 톺아오르고
천도불속을 가게 된데도
내 승리의 미소를 잃지 않으리니

아, 뜨거운 충성의 시를
바치자. 사랑하는 조국에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어머니 우리 당에

이것은 그녀가 어느 문학 동우의 그 문학적 성과를 축하하여 지은 노래이다. 불과 스물 안팍의 어린 나이였으나 그녀는 이같이 창작의 고뇌와 진통 그리고 희열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1975년 그녀는 함흥 시룡마여자고등중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얼마든지 대학 진학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스승도 부모님도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대학 진학을 마다하고 자진해 천리마룡성기계연합기업소의 선반공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일기에 적고 있다.
《…남들이 하나의 대학을 졸업하는 5년 동안의 세 개의 대학을 졸업한면 그보다 보람있는 5년이 어디 있을까! 고급 기능공으로 선반의 능수라 되고 일하면서 공장 대학을 졸업하여 기사가 되고 시 창작의 튼튼한 토대를 쌓는다면 세 개의 대학을 졸업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렇다. 어려운 길로 가자!》
《생활 체엄의 축척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진리를 그녀는 이미 깨우친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크나큰 포부를 펴기에는 기존 교육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부족하리라 생각했던가, 아니면 《노동의 신성함》을 그처럼 미리서 터득한 것일가. 그녀를 가리켜 누구나 《정열가》, 《독학가》라 했다. 그녀는 단 하루도 독서와 시창작을 걸른 적도 쉬어 본 일도 없다. 그리고 선방공이며 공장학교 학생이며 문학통신과 생도인 그녀에겐 학습이나 창작의 시간이 따로 없었다. 그녀의 출퇴근 길, 붐비는 통근차, 공장 휴게실과 탈의실이 그녀의 독서 시간이었고 창작실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간은 천금만큼의 값진 것이었고 써도 써도 모자라는 것이 시간이었다. 다만 2시간의 수면 시간이 철칙이었으나 그나마도 아까와하는 그녀였다. 분초를 아껴 책을 읽고 일에 열중하다 보면 식사를 걸르기 일쑤이고 퇴근길 막차를 놓치기 일쑤지만 그래서 인적없는 밤길 30리를 걸으며 시상을 다듬으며 그나마 2시간의 수면조차 걸르게 되면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그녀였다. 그녀를 가리켜 누구나 《노력가, 무서운 노력가》라 했다.

《그토록 애쓰고 몸부림치건만 어찌하여 시문학, 너는 그 황홀한 대문을 열어 주지 않는가. 너를 가장 사랑하고 너와 함께 일생을 같이 하려는 열렬한 길동무, 정열의 넋이 밤이나 낮이나 너를 찾아 모대기건만 어찌하여 아직도 천 리 만 리 먼 곳에 있는가…. 심장을 불태우자, 불같은 심장으로 쓰자!》
《1980년 4월 일기에서》

그녀가 자기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그 얼마나 진지하고 완강하게 노력을 했는가. 사람들이 먼저 놀라워 한 것은 그녀의 동서고금 명작들로 된 방대한 독서량이다. 기어이 그 목표량을 읽어 냈고 그리고 꼼꼼히 정리해 놓은 그녀의 독서 일지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79년 1만 5천 246페이지, 1980년 1만 6천 768페이지, 1981년 2만 673페이지》

그리고 1982년의 목표량은 2만 5천 페이지였다.
그뿐인가. 그녀의 유품 가운데는 수십 권의 시 습작 학습장 3권의 100시집, 4권의 《나의 수첩》, 그리고 어느때는 한 편의 서정시를 스물한 번씩이나 달리 써 보았고 어느 중편 소설은 거의 전문을 베껴 가며 파고든 노력의 흔적을 남겨 두고 있다. 과연 그녀가 그처럼 시 한 편, 한 편, 그 한마디 한마디 주옥같은 시어를 찾아 적어 내기까지엔 그 얼마만큼 남모르게 인내와 눈물, 모대김의 괴로운 날들이 있어야 했던가. 그녀가 남긴 서간문 한 대목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보고 싶은 작업반 동무…, 그것은 먼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에 차창밖에 흘러가는 바닷가 마을, 제가 작품을 쓰고 있는 강습지를 그냥 지날 수 없어 찾아 들렸다고 할 때 저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것은 저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정거장에서 내려 10리가 훨씬 넘는 어촌길을 걸어온 반장 동무의 신발과 바지가랭이에는 흙먼지가 뽀얗게 올라 있었지요. 반장 동무는 저를 만나자 저의 얼굴에 비낀 고충의 그늘을 한눈에 알아보고 아타깝게 말했습니다.
《옥양이 왜 작품이 안 되오?》
저는 대답 대신 모대김의 흔적인 듯 연필로 지우고 다시 써 놓은 시의 초고를 내놓았댔지요. 반장 동무는 그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나는 시를 한 편도 써 보지 못했지만 모두들 말하기를 시라는 게 완강한 투지와 불타는 열정이라구 하더구만. 자, 옥양이 용기를 내요! 당과 조국이 기뻐할 그런 작품을 기어이 써 내고야 말겠다는 높은 충성심이 있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 우리 작업반 동무들이 좋은 시를 써 낼 그 시각을 기다린다는 것을 명심하오.》
《반장 동무, 그때 한가득 피어 오른 눈물 속에서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 아세요. 그것은 세찬 바다 바람에도 기어이 꽃망울을 터치고야 말 한 그루의 해당화였습니다. 모래불에 깊이 뻗어 내려 보이지 않는 뿌리, 꿋꿋이 세찬 바람을 맞받아 서 있는 굳센 줄기, 순간도 쉼없이 자양분을 빨아 올리는 푸른 잎사귀, 그것들이 있기에 해당화 꽃송이는 그처럼 아름답고 향기 그윽한 것임을 새삼스럽게 느끼였습니다.》

그녀는 그 어느 한때인들 낙심치 않기 위해 스스로 모질게 채찍질하며 살았다. 그녀의 학습장에는 여러 곳에서 이 같은 어록을 남기고 있다.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있으면 참다운 실천이 따르는 법이고 참다운 실천이 있으면 빛나는 결실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게 했으며 그 삶을 불태우게 했는가. 다만 단순한 심미주의에 의한 예술적 충동 혹은 타고난 재능 그뿐이었을까.


백두 밀림 속의 길
얼마나 걷고 싶던 길인가
얼마나 오고 싶던 길인가

그리움에 젖어 한자욱
뜨거움에 젖어 또 한자욱
줄지어 선 이깔들도 생각에 잠겼는가
내리는 눈송이도 추억을 불러오는가

이 길이구나
이 강산에 빛이 없던 그 세월
20대의 청년장군 우리 수령님께
백만 강적과 싸우시며 넘나드신 길


백두 밀림의 길
여기 이어지지 않았던가
내 어릴 적 유치원 선생님 도와
채송화꽃 줄 맞춰 심던 길

가슴 뜨겁구나
태어나 첫자욱 떼여 지금껏
내 포석 깔린 길로만 걸은 것은
기쁨의 주단길로만 걸은 것은
아, 우리 수령님 너무도 많은
역사의 숫눈길 걸으셨기 때문이 아니련가

쌓이고 쌓인 노고의 그 자욱을
내 보답의 몇 언 리면 다 갚으랴
기나긴 창조의 그 숫눈길을
내 몇 만 번 다시 태어나면 다 따르랴

그래서 한자욱 또 한자욱
바다 같은 생각 없인 걸을 수 없고
산같은 맹세 없인 옮길 수 없는
아, 숫눈길! 백두 밀림 속의 길이여!

그녀의 일기, 시작, 학습장 등에 있는 글귀에는 당과 조국에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충성심이 구석구석 서려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문학 그것은 곧 애국의 길이며 당과 조국에 대한 다함 없는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었고 충성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 같은 애국심, 창작의 열정은 왜인지 저 혁명의 성산 백두산을 향하여 차츰 그 초점을 모으게 되고 그 드높은 고원으로 고원으로 고조 승화돼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에서 그녀는 잠시 예기치 못한 꽃숲을 만나게 된다.

《그 동무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사랑, 사랑의 고백이라니?! 그렇다면 통근차로 출퇴근하는 길에서, 휴식일에 도서관으로 오가던 거리에서 주고 받은 하많은 이야기들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아니야, 난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나를 키워 준 어머니 당에 내 노동의 성실한 땀방울이 스민 빛나는 창조물을 바치기 전에는! 내가 그토록 바라는 시 문학의 화원에 나의 열정으로 불타는 한송이 꽃을 피우기 전에는!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리라. 황홀한 것이리라. 어느 소설에서 읽은 것처럼, 옛 이야기에서 들은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직 일러, 사랑의 달콤한 공상으로 넋을 빼앗긴다면 애무와 유혹의 세계에서 귀중한 시간을 흘러 보낸다면 독서의 저 아득한 수평선에 언제 닻을 내리며 시 창작의 탐구와 열정의 산악은 언제 헤쳐 넘을 수 있으랴. 뜨개코를 세며 탁상보를 뜰 수도 있다. 휴식날의 공원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매분 매초를 사색과 탐구, 창작의 보람차고도 먼 길을 굳세게 걸어갈 것이다. 그 길에서 우리 시대 삶의 보람과 처녀 시절의 황홀한 꿈을 꽃피워 갈 것이다. 나는 내일 그 동무를 꼭 만나야 하겠다. 그런데 오늘 저녁과 같이 가슴이 황량거리면 어쩌나?! 그래도 만나야 해, 그리고 꼭 말해 주어야 해, 내 희망의 봉우리에 톺아 오른 그때에 가서 오늘의 고백, 애틋한 사랑의 고백을 서로 나누자고! 창가에 비친 푸른 달빛이여 나를 유혹하지 말라!》 《1982년 5월 일기에서》

그녀는 찾아든 사랑의 사신도 단호히 뿌리치고 저 동해안 바닷가 문학통신창작 강습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백두산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그녀의 문학 수업을 돕고자 모였던 강습소의 교원들은 오히려 그녀의 시의 세계에 심취한 독자들이 되었고 그녀의 천재성을 감안하여 교원 중에 가장 권위 있는 노교원에게 그녀에 대한 특별 지도를 맡기도록 했다.

터치노라 백두산아
층층 하얀 명주필인 듯
키를 넘는 흰 눈에 뺨을 비비며
이내 작은 심장 한껏 터치노라

티없이 푸르른 너의 천지물은
바치는 삶에 진함 없을 나의 피!
치솟아 아아한 너의 일만산악은
죽어서도 변치 않을 나의 신념!

오, 백두산 백두산아
네 우에 한 번 오르면
몸도 마음도 새로 태어나거니
나는 너의 딸! 백두의 딸!

내 만일 한 점의 티라도 낀다면
어디서나 다시 백두산에 오르리
내 만일 꽃으로 폈다 시들면
여기 올라 다시 필 자리 찾으리

아 내 한생
어디서나 백두산에 오르리
삶의 순간마다
언제나 그 언제나 백두산에 오르리

그런데 《백두산》연작의 마지막 편인 《고향》이 사작되었을 무렵 어느 날 이었다. 돌연 저 무섭고 잔인한 죽음의 마수가 그녀를 덮여 올 줄이야. 강습장에서 시작에 열중하던 그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백두령봉에 향도성 솟아 올라
역사의 눈석이가 시작되었고
찬란한 향도성 미래를 불러
공산주의 봄 우뢰가 터지였나니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병원 입원실, 어둡고 긴장된 표정으로 침상을 둘러서 있는 의사들 속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난 아프지 않아요. 어미니, 그 원고…》
딸의 생명이 경각에 이른 시간, 억이 막히는 어머니는 다만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흐느끼고 있었다.
《딸이 찾는 원고를 주십시오.》
의사가 조용히 권고했다. 어머니는 품속에서 원고를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듯 몸 부림쳤다.
《난 왜 쓸 수 없을까요. 어머니 좀 받아 써주세요.》
딸은 어머니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금시라고 떠오른 생각이 사라질까 두려운 듯 서둘러 한마디씩 부르기 시작했다.

향도성 받들어
맑고 푸른 저 하늘이 펼쳐졌는가
우러러 그 품에 향기 드리려
아름다운 꽃들도 피여났는가

그녀는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도 한 시인이 노래를 짓는 다기보다는 그 어느 애국 열사의 마지막 장열한 투쟁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의사들은 긴급 회의를 열었다. 그녀의 병은 현대 의학이 해결할 수 없는 치유 불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서정시 《고향》을 끝낼 때까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회복한 그녀는 다시금 한마디, 두마디씩 시를 이어갔다.

향도성 솟아오른 역사의 고향은
노래로도 시로도 다할 수 없는
혁명의 성산 아, 백두산, 백두산이었다!

이렇게 결구를 마친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가느다란 미소를 띄웠다. 어머니가 눈물젖은 음성으로 딸의 시를 낭독해 주었다. 그녀는 흐려져 가는 의식을 애써 가다듬으며 끝까지 듣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언젠가 내가 백두산 기슭에서 본 한송이꽃 하이얀 만병초 그것이 혹시나 주옥양의 혼령이 아니었을까.
........................................
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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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주옥양의 이야기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방영되었어요~!!! 남녘여성인 제가봐도 너무 안타까운 여류시인이더군요? 공장노동자로 일하면서 시인의 꿈을 이루었지만 원인모를 몹쓸병으로 1982년 7월17일 향년 만2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죠~!!!! ㅠㅠㅠㅠㅠ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전혜린이나 시몬느 베이유처럼 부유하거나 부족함없이 자란 여성이 아닌 가난한 집안의 선반공출신 시인으로써 그래도 짧지만 굵게살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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