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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노여류혁명가 허정숙 여사를 추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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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7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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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8일자 재일본 《총련》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 《The People"s Korea》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리었다.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서인 허정숙 여사가 지난 6월 5일 하오 3시 20분 숙환으로 타계했다. 1908년 7월 16일 서울 태생인 그녀는 82세였다. 고 허정숙 여사의 장례식이 7일 평양에서 《국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장의위원회로는 위원장에 부주석 리정옥, 박성철, 총리 연형묵 그 외 고급 간부들을 포함한 32명의 위원으로 구성 조직되었다. 김일성주석께서 6일 고 허정숙 여사 영전에 화환을 보내고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해 왔다.
장례 예식 중 리정옥 부주석은 조객을 향하여 이같이 절절한 조사를 했다.

…허정숙 여사는 나라와 민족,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그녀의 전생애를 바쳤다. 우리 인민들은 진실로 그녀의 죽음 앞에 치명적 슬픔을 금치 못한다. 고 허정숙 여사는 우리의 조국와 혁명을 위해 바친 그녀의 숭고한 투쟁과 헌신으로 하여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 나라의 저 비극적 피어린 항일 투쟁사, 공산주의 운동사 그리고 분단사에서 결코 그 이름 지울 수 없고 잊혀질 수 없는 처절한 생의 자취를 남기고 역사의 등장 인물이자 증인이었던 한 여인이 이 지상을 떠난 것이다. 그 어느 하루도 피빛으로 점철되고 먹구름 설한풍 잦은 일 없는 우리 조선 땅 근세사 한가운데를 걸어온 여인, 모든 것이 수탈된 굴욕적 식민 치하를 벗어나 자주 독립하는 나라, 누구나 다같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나라, 그것을 그처럼 뜨거이 꿈꾸며 그리며 아낌없이 청춘을 불사르고 그 이상국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 온 정열의 여인…. 일찍이 애국지사 부친을 둔 이유로 항시 위험이 따르고 수난이 많은 가정에서 자라나 미국으로 일본으로 상해로 유학 시절을 지낸 신여성, 그녀는 《맑시즘》에 도취하고 저 피끓는 애국 애족의 마음에 그 청춘과 낭만을 불태웠다. 하기 때문에 일신의 안락도 행복도 초개같이 버리고 한 여인의 몸으로 저 폭풍 몰아치는 혁명의 광야로 달려나갔다. 아릿다운 여인의 옷을 벗고 총검을 메고 말을 달려서….
그녀는 이렇게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내가 꽃나이 청춘 시절에 혁명의 뜻을 품고 중국의 동북 지방으로 떠날 때 슬하에는 나이린 두 아들이 있었다. 아이들을 할아버지의 품에 맡기고 집을 떠나자니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때 아버지가 나의 손을 잡고 하던 말이 나에게 큰 신심을 주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서 마음 놓고 떠나거라. 조선의 뜻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찾아가는 길인데 거기에 무슨 주저가 았겠느냐. 사실 네가 아들이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너를 총을 쥐어 일제놈들과 싸우러 떠나 보냈을 내다. 하지만 네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보니 이래저래 마음을 써오다가 오늘에야 뒤늦게 결심을 내린 것이니 여기 걱정일랑 말고 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떠나가거라. 조선의 용사들이 항일의 총성을 높이 울리 때마다 우린 너도 잘 싸우고 있겠거니 생각하겠다》 나는 아버지의 말에서 큰힘을 얻고 집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 그는 누구인가. 그 이름 또한 우리 역사에서 길이 남을 애국 지사이며 변호사인 허헌 선생을 뜻한다. 그가 바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찾고자 신간회, 건준, 남로당 등 위원장을 지내며 일제에 항거, 투쟁하는 애국 투사들을 변호해 나섰고 수차례의 테러, 옥고를 일상 여사로 치르며 오직 구국일념에 살아온 그녀의 부친이었다.
당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장치국 비서이며 조선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노여류 혁명가 허정숙 여사, 내가 그녀를 만난 지도 어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다만 한핏줄, 한동포라는 단 하나 이유에서 그처럼 이름없는 한 해외 동포 여성을 따뜻히 맞이해 주었던 그분의 자애로운 소박한 모습이 자잔한 애수의 빛을 띄고 내 가습에 피어 오른다.
내가 그녀를 만나던 날 아침, 어쩐지 내 안내 선생은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고 나 또한 예술인들을 마나던 다른 날과는 달리 미리부터 무언지 모를 강압감 같은 것이 느껴져 왔다. 한 나라의 최고위층에 속하는 그녀의 높은 위치도 위치려니와 그보다도 《노여류혁명가》이며 《여노장 공산당》이라는 그 이름 자체가 생각만 해도 무언가 서슬이 시퍼런 사납고 억세며 그리고 냉엄한 그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철두철미한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작전 공작(?)이라면 그 어떤 잔인무도한 행위, 수단 방법도 불사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집행해 버리는 냉혈 인가들…. 솔직히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들에 대한 개념이요. 혹은 그 어떤 매체에 의해서 였건 우리에게 비쳐졌던 그들 공산당의 이미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곳 예술인들이라면 그런대로 나는 그들에게 듣고 싶은 말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평소 《정치》에 대해서라면 더욱이 《공산주의》라면 지식도 관심도 그리고 체험도 없는 나였다. 과연 노익장 여 공산당 지도자인 그 어르신네를 마나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점점 두려워지는 가슴을 안고 차에 올랐다.
내가 그녀를 만날 때 두 동행인이 있었다. 그 한 사람이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부위원장 김수만 시이며 다른 한 사람이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서기장 장봉준 씨였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벤츠승용차는 방향을 알 수 없는 평양 거리를 이리저리 휘돌며 달리고 있었다. 평양의 가을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온 거리를 뒤엎은 황금빛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 그리고 그 아래로 쓸어도 쓸어도 쌓이는 낙엽들…. 《아 참 아름답군요.》 나도 모르는 새 감탄사를 발했다. 그러자 두 신사들이 응수를 한다.
《예, 우리 평양 거리가 참 아름답지요. 그런데 저 낙엽들을 그렇게 열심히 쓸지 않아도 좋은데 우리 사람들은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한단 말이야. 저 낙엽이 그냥 수북히 쌓인 것도 보기 좋은데 말입니다.》
《하긴 저 낙엽이라는 거, 거 흔히 연애 편지에 잘 등장하지 않습니까? 핫핫핫》
나는 흠짓 놀랐다. 공산당들도 그처럼 자연을 관조 음미하고저 하는 그런 시심과 정서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렇게 농담을 하고 연애도 한단 말인가… 《공산당》, 《낙엽》, 《연애》. 나는 속으로 애써 연결을 지어 보려 했다. 자동차가 어느 거대한 석조 건물 앞에 멈추었다. 눈이 부시도록 야한 꽃다홍색 비로도 한복 차림을 한 예쁜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했다.
그 나라 대개의 관공소가 그렇듯 그날 내가 안내되었던 건물 또한 웅대,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치 월트 디즈니의 만화 영화 《신데렐라》에서 과장된 표현에 의해 그려진 그림 같이 까맣게 드높은 천장,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 실내 어디에나 두리두리 깔려 있는 빨간 양탄자, 휘황찬란한 맘모스(?) 샨데리야, 그뿐인가 복도마다 군데군데 늘어서 있는 애국적 소재의 조상들. 접견이 끝난 뒤 2,000여 석의 회의실 등등 건물 참관을 한 뒤 비로소 안 일이지만 그것은 바로 전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연건평 4만 5천여 평방미터의 대형 건물로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의원들의 집회 장소인 《만수대 의사당》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금 내 나름대로 느끼고 판단(?)해 보았다. 《인민 개인의 것은 최소 검박하게, 인민 공동의 것은 최대 화려하게》. 이것이 현재 북과 나의 모습이며 현실정에서 우선 그들이 택하고 있는 방침이 아닐는지….
대기실에서 얼마간의 긴장된 시간이 흐른 뒤 허정숙 여사가 나타났다. 약간 허리가 굽은 수수한 회색 투피스 차림의 소박한 할머니. 그녀는 너무나 인자하고 소탈한 그런 미소와 함께 두 손으로 덥석 내 손목을 잡으며 이렇게 환영해 주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기쁘오, 참으로 잘 오셨수.》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이 여인이 과연 내가 만나고자 한 허정숙 여사란 말인가. 이여인을 두거소 어찌 한 나라의 최고위 관리라 믿을 수 있으며 저 가공할(?) 공산당 여장부라 할 수 있고 그 옛날 총검을 메고 저 중국 대륙을 말을 달리며 싸웠던 혁명가라 할 수 있는가. 또한 그 옛날 해외 유학 시절을 보내며 문학과 역사, 낭만의 세계의 최첨단을 거닐던 저 콧대 높은 멋쟁이 신여성이라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이름없는 한 여성 더욱이 까막득히 연하인 한 여성 앞에 그녀는 너무도 겸손했고 그 어느 촌락 고향 어머니를 대한 듯 소박하고 인정이 넘쳐 흐르는 다만 그런 인상, 그런 거동, 몸가짐이 아닌가. 내 심중에 숨어 있던 두려움, 경계심 같은 것이 일순간에 눈 녹듯 스러져 버렸다. 그러나 황송하게도 미리 준비돼 있던 오찬상까지 맏아 그녀를 다시 살펴보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녀가 그처럼 상대방을 편안케 해주는 그 겸손과 소탈함 그리고 따스함은 세상에서 흔히 보는 다만 서민적 평범한 인정이나 겸양과는 좀 성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무언가 값을 많이 치룬 고차원적인 것임을 재확인했고 느꼈다.
생의 멍에는 누구에게나 벅찬 것. 하지만 가다가는 감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길을 택하여 무언가 범인들의 그것보다는 훨씬 그 폭과 길이가 거대한 짐을 지는 이들이 또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로 다사다난하고 간고한 생의 험로를 걸어온 자. 그래서 보다 깊이 있게 인생을 파악하고 달관한 자의 그런 승화된 인격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고상한 기품이라 할까. 그녀가 나를 편안케 해준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한데 그녀 앞에서 편안해 하는 것은 이역만리에서 찾아온 이방인인 나뿐이 아니고 그 자리에 동석한 두 어른 신사들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혀 상하 관리들의 으레적, 공적인 만남 같지도 않고 마치도 오랜만에 누님을 찾아온 두 남동생 같기도 하고 혹은 어머님을 찾아뵙는 효성스런 두 아들 같기도 한 그런 정답고 화기애애한 가족의 분위기가 아닌가.
《동무들, 어서들 들라우!》
그녀는 담화 중에서도 연신 우리들에게 손수 음식을 덜어 주며 친절히 권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의 접견은 다른 날과는 조금 형편이 달랐다. 뜻밖에도 오찬이 차려져 있어서 사무적이고 집중적인 그런 유의 인터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식사를 나누면서 다만 가벼이 담소를 나누며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화제가 오고 갔을 분이다. 또한 팔순 고령의 어르신네에게 너무 장시간 매어 달리기도 송구했다. 하지만 여사는 노장다운 박력 있는 어조로 이런저런 화제와 지난 일들을 들려주었는데 그것은 조로 해방 후 그녀가 중국 연안으로부터 돌아와 이날까지 지난 반세기 조국을 재건, 복구하는데 헌신해 오면서 김일성 주석과 더불어 걸어온 고난의 역정에 얽힌 이야기들이었고 그리고 그녀가 김 주석으로부터 받은 은정과 그 그르침에 대한 회상이었다.
그녀는 8년 전 조국을 방문했던 내 남편 홍동근 목사를 그 당시 첫 방문이래 비엔나, 헬싱키 등지에서 거의 해마다 열리었던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대화》에서 몇 번인가 다시 만나 구면이 된 사이였으므로 그런 이유에서 였던지 화제가 먼저 《종교문제》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렇게 강조해 말하는 것이었다. 세간에서는 우리 웃사람들이 종교를 탄압한 줄로 잘못 알고 있다. 교회당이 벽돌 하나 안 남고 파괴된 것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것이었고 하층 극렬 분자들에 의해 더러 불행한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백 년이 걸려도 재건 못하리라고 미국이 야유할 만큼 온나라가 잿더미 된 상황에서는 먼저 인민들이 먹을 것, 입을 것, 어린 것들 공부시키는 이이 우리네 현실에선 너무도 긴박한 문제들이어서 교회당 먼저 지어 줄 겨를이 없었다. 대신 어디에서나 에배할 수 있도록 《가정예배처소》가 허락되어 있고 또한 김일성 주석은 교인들을 보살펴주고 고무해 준 실례도 많다는 것. 그 중 한 예로 들려준 일제 하 독립 운동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서생의 누이 동생 안신호 여사의 경우….
1945년 해방되던 해 김일성 주석은 사람을 보내어 안신호와 그 일가를 찾도록 했고 당시 남포(진남포)에 살고 있었던 안신호로 하여금 남포시 여맹위원장, 중앙여맹 부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일하도록 했다. 다음해인 1946년 북한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 대표협의회에 참가한 안신호를 김주석이 만났다. 안신호가 평범한 한 종교인에 불과한 자신을 그처럼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불러 준 데 대해 그리고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한 것에 대해 눈시울을 흐리며 감사했다. 그녀를 이윽히 바라보던 김 주석은 그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공연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지식인 기업가, 종교인 등 각계 각층을 망라한 인민의 참다운 민주주의 정권이기 때문에 인민 정권을 수립하는 회의에 응당 애국적인 종교인도 참가하여야 합니다. 남포시 여맹위원장이야 일제놈들에게 오빠인 안창호 선생도 잃었고 아들도 잃었으며 지금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 높은 애국심도 가지고 헌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인들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미국놈들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을 바에야 《조선의 하느님》을 믿어야지 무엇 때문에 《미국의 하느님》을 믿겠습니까. 미국놈들을 믿었댔자 얻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안신호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으나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민주 인사로서 건국 사업에 몸과 마음을 다바쳐 일했다. 그리해서 국가와 김 주석으로부터 크나큰 정치적 신임을 받게 되어 여러 번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어 국사를 논하는 큰 대회 또는 회합에 참석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김주석이 동석한 자리에서 동료 일꾼들로부터 이 같은 우스게소리아닌 비웃음을 당한 일이 있었다.
《어머니느 식사를 받고서는 왜 졸군하십니까? 이제는 해방이 되었는데 예수 믿는 것으 그만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 주석은 이렇게 그들의 빈축을 가로막아 말했다.
《몇 십 년 믿어 오던 예수를 어떻게 갑자기 그만두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만 빌면 일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종교를 믿든간에 그가 지니고 있는 애국심의 깊이와 건국 사업에 어떻게 나서고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종교를 믿는다고 덮어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거나 멀리하며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됩니다.》
일제 하 한때 상해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약혼녀 안신호.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으에 참가한 김구 서생의 안내를 맡아 역사적 민족 통일 사업에도 참여한 바 있는 그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와 민족, 건국 사업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헌신하였고 한 기독자로서 꿋꿋히 신앙 생활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었을 때 국가로부터 애국 열사로 추대되어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등 민족주의 애국 선열들이 누워 있는 신미리 국립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1950년 겨울, 한국전쟁이 한창 처절하던 시기 어느 날 밤, 한 북방의 국경 도시 밤길을 한 대의 달구지가 삐걱거리며 가고 있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탱크도 위생차도 인민군 전사들의 긴 행렬도 오직 남으로 물결쳐 가는데 이 달구지만은 조선 반도 제일 끝인 압록강 연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달구지 위에는 포화에 그슬린 어린 것들이 옹기종기 들어 차 있었다. 한 여인이 어린 것들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데 달구지가 강변쪽에 닿았을 때였다. 갑자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선생님, 우린 안 갈래요. 아버지 원수님 우린 안 갈래요.》
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우리나라에 있지 다른 나라에 가지 않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어대는 전쟁 고아들…. 기슴을 찢는 어린 것들의 울음소리가 국경의 밤하늘을 진동케 했다.
그후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김일성 주석은 말없이 등을 돌려 창가로 가더니만 솟구치는 눈물을 삼키고 이렇게 말씀했다.
《그만 하시오.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애들을 한품에 안고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귀한 아이들이 어느때 어떤 폭탄에 맞아 어떻게 될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보배들이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지만 나는 그애들을 잠시 평온한 곳으로 보내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제 전쟁만 끝나면 데려다 더 잘 키웁시다.》
1958년 5월. 전화의 깊은 상처가 가시고 제1차 5개년 인민경제계획이 실시되던 시기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허정숙 여사는 특별 과업을 받아 조선인민대표단 단장으로 외국을 방문케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김주석은 대표단을 불렀다.
《동무들을 오라고 한 것은 이번에 인민대표단이 해야 할 중요한 사업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동무들은 이번에 외국에 가서 우리 아이들을 데려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맡겨 둔 전쟁고아들을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김 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별이 흘러드는 방안을 조용히 거닐며 잠시 생각에 잠기시는 듯 했다.
《조국을 떠날 때 그들의 대부분은 어린이들이었는데 지금은 퍽 컸을 것입니다. 그 애들이 보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낸 다음부터 나는 길가에서 뛰노는 애들만 보아도 압록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울던 전쟁고아들의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려오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애들을 떠나 보내면서 미국놈들을 때려부수고 데러러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다음 곧 데려오려고 했는데 미국놈들이 너무나 혹심하게 파괴해 놓았기 때문에 차마 그애들을 반토굴집으로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애들을 데려와도 마음껏 뛰놀고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으므로 마음 놓고 데려올 수 있습니다. 지금 그애들이 조국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겠습니까. 동무들은 이번에 가서 가장 어려운 전쟁 때에 부모 잃은 전쟁고아들을 맡아 오랫동안 성심성의로 돌보아 준 그 나라 당과 정부와 인민에게 조선 노동당과 공화국 정부와 우리 인민의 진심으로 되는 감사와 경의를 전달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김 주석은 덧붙혀 아이들을 데려올 때 주의하여야 할 점들을 구체적으로 세심히 가르쳐 주었다. 그 얼마나 기쁨에 찬 지시이며 특별 과업인가. 그녀는 영영 잊지 못해 한다. 김 주석의 그 절절한 어버이 사랑을 받아 안고 어린 것들을 데리러 갔을 때 대표단도 어린 것들도 서로 부둥켜 안고 그 얼마나 울었던지…,
그리고 속속 비행기와 배, 기차로 조국을 향해 돌아올 때 의기백배, 목청이 터져라고 부르고 또 불러대던 어린 것들의 합창 소리, 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석 꽃다발 우에

역역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 하라
밀림의 긴긴밤아 이야기 하라
만고의 빨찌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1950년 늦은 가을이었다. 온나라가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 시기, 무려 천여 명에 달하는 문화 예술인들의 대오가 북으로 북으로 후퇴해 올라온 것이다. 그들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나 남해 기슭과 낙동강으로부터 수천 리 길을 헤쳐온 것이다. 허기진 배를 안고 몇날 며칠을 험준한 길을 오는 동안 그들이 입고 온 여름 옷들은 모두 헤지고 신발들은 처져 있었으며 갈라진 손등에는 핏자욱이 어려 있었다. 문화선전성 일꾼 허정숙 여사는 김 주석에게 문화 예술인들의 도착을 보고 했다.
문화 예술인들. 그들은 누구인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그 어느 민족 양심있는 자가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던가. 갖은 수모와 멸시, 압제를 받다 못해 붓을 꺾고 무대를 떠난 수많은 예술인들이 다만 생계를 위하여 노동판에 몸을 던지고 혹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거나 방황과 실의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으나 그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 김 주석은 문화 예술인 대오를 꾸리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그들을 모래 속에 금싸래기 찾듯 한 사람 한 사람 찾았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김주석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그들의 형편을 자상히 물었다. 그들이 옷을 제대로 입었는가. 부상을 당한 자는 없는가. 앓은 사람은 없는가. 대오에서 떨어진 사람은 없는가 등등. 그리고 그들은 조국의 승리와 당을 믿고 따라온 진정한 애국적 혁명가들이라 치하했다. 또한 그들은 아끼고 사랑하며 아무런 불편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 모두에게 솜옷을 공급해 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그 겨울옷으로 말하면 그것은 새로 조직되는 인민 군사들에 보낼 옷이었는데 그것을 후퇴해 온 문화 예술인들에게 돌리도록 천여 벌의 옷을 문화선전성으로 넘겨 주도록 시달했다. 온나라가 초토화된 전란 시기, 무서리가 내리는 추운 겨울 한 벌의 솜옥, 한 켤레의 털신은 평화 시의 그것보다 천백배나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문화 예술인들 가운데 한 벌의 솜옷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이도 있었다.
폭격은 낮에도 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영화 문학 작가들은 등잔불의 심지를 돋구어 가며 작품을 쓰고 연출가들은 방공호에서 연출 대본을 구상했다. 그리고 영화 촬영반이 있는 곳곳에 항공 감시 초소를 세워 놓고 영화를 촬영해 나갔다. 촬영 중에 미 폭격기가 나타나면 방공호로 대피 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인민군 고사포 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촬영을 계속해 나갔다.
녹음실은 보통 살림집 웃방이었고 현상실과 편집실은 반토굴에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중 영화 제작 사업은 바로 전투 그것이었다. 김주석은 이러한 조건에서 영화인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고 시시로 전화를 걸어 영화인들의 안보와 사업, 생활 등을 염려하며 고무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문화선전성 일꾼 허정숙 여사를 불러 영화인들이 대피할 방공호를 튼튼히 만들 것과 낮에 다닐 때는 절대로 대오를 짓지 말며 야외 작업은 되도록 달밤을 택해서 하도록 자상한 주의의 말을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몇몇 영화인들이 새로 만든 영화를 김 주석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 최고사령부를 방문케 되었다. 김 주석은 그들을 반겨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손을 잡아 주었는데 그는 이렇게 심혀 어린 위로의 말을 했다.
《영화를 만드느라고 손들이 텄습니다.》
그리고 전선에 종군한 영화인들의 온갖 생활 형편에 대해 거듭 캐물었다. 허 여사는 사실대로 보고 드릴 수밖에 었었다. 특별히 현장과 녹음 편집 설비가 변변치 못한 것 그리고 너무도 빈번한 폭격 때문에 작업이 중단되고 피신을 다녀야 한다는 것 등등….
김 주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그리고 말하였다.
《아무래도 영화 부문 동무들을 보다 안전한 후방으로 대피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설비들도 제대로 갖추어 마음놓고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해서 영화 일꾼들과 그 가족들이 저 깊은 후방으로 옮겨 갈 수 있었던 특별 조치가 있게 되었다. 허 여사가 그 특별 조치의 과업을 비로소 성과적으로 끝낸 어느 날이었다.
김 주석은 다시 허 여사를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영화 일꾼들에게 보낼 후방 물자가 준비되었는가고…. 여사는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인들을 떠나 보낸 후 곧 이어서 후방 물자를 뒤따라 보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주석은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물자를 보내는 데는 먼저 토질병을 예방해 주는 미역을 많이 보내 주도록 하라며 최고사령부에 더러 미역이 남아 있을 것이니 그것을 모두 보내 주라고 말했다. 여사가 미역 없는 최고사령부 가족들을 염려했다. 그러자 김 주석은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가 먹지 못하더라도 그 동무들에게 보내 줘야 합니다. 영화 일꾼들이 그처럼 어렵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얼마 후 영화인들은 최고사령부 명의로 된 두 차량의 후방 물자를 접수했다. 그 차량들에는 수십 톤의 미역이 실려 있었고 당과류, 침구, 생활 필수품과 고추장, 된장까지 실려 있었다. 한 톨의 낟알이 귀하던 전란 시 눈물과 환호성 속에 그것을 받아 안은 영화인들에게 그것은 먼 타향에서 받아 보는 사랑이 담뿍 담겨진 고향 부모님의 선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진행 중에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창건된 공화국의 첫 내각 성원들을 발표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던 허정숙 여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첫 《문화선전상》에 《허정숙》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뜻밖에 일이어서 다만 놀라웁고 그리고 꿈만 같았다. 그녀의 나이 불과 40이었고 더욱이 여성의 몸이 아닌가. 착잡하고 흥분된 심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로소 여사가 문화선전상으로 피택이 되기까지의 내막과 그 뒷이야기를 부친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실은 김 주석은 문화선전상으로 여사를 지명했을 때 일부 일꾼들은 난색을 표시하였다. 어떻게 여성이 그런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 우리보다 먼저 혁명을 한 형제 나라에도 그런 전례가 없지 않은가 등등의 반론을 제기하는 측도 있었다. 하지만 김 주석은 이같이 그들을 설득하였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일면적으로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야기된 문제를 놓고 보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여자라는 것으로 하여 한 부문을 책임지고 지도할 수 있겠는가 의문에 붙여서는 안되며 다른 형제 나라에도 그런 실례가 없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당과 혁명에 대한 입장이 투철하고 사업능력과 경험, 군중의 신망이 있는 일꾼이라면 비록 여성이라 하더라도 책임적인 직무를 능히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없으니 우리나라에도 여자상이 었어서 안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어서 김 주석은 자신이 믿는 여사에 대한 신망과 기대를 거듭 강조하였다. 마침내 여사가 문화선전상으로 임명되던 날 저녁 김 주석은 여사를 부른다고 했다. 벅차 오르는 행복감,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김 주석 자택으로 달려갔다. 김 주석은 여사와 함께 내각에서 일하게 되어 기쁘다고 그리고 본래 선전 사업 부문일을 해왔으니 문화선전상 사업이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먼저 고무해 주었다. 또한 문화선전상의 무거운 책임과 높은 위치에 대해서도 이렇게 못박아 말했다.
《동무가 맡은 문화 선전 사업은 범위가 없고 복잡합니다. 그만큼 맡은 책임이 더 무겁습니다. 일을 더 잘하여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해야겠습니다.》
그날 저녁 김주석은 앞으로 문화선전상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조목조목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1953년 9월이었다. 전쟁의 포성이 멎고 정전 협정이 있은 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특별히 전세계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미 제국주의와 견결히 싸워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그 나라 지도자 김일성 주석에게 박수 갈채를 보내며 저마다 다투어 김 주석에게 초청장을 보내 왔다. 김 주석은 그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방문을 떠나게 된 곳이 소련이었다. 김 주석을 대동한 저 화려하고 영예로운 소련 방문단에는 문화선전상 허정숙 여사 또한 그 일원이 돼 있었다. 마침내 방문단 일행이 소련에 도착한 것은 9월 10일. 모스크바 공항에는 이미 수많은 군중들로 운집해 있었다. 축포가 울리고 저마다 손에 손에 꽃을 들고 나와 꽃보라를 날리며 환호성을 울렸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
《승리한 조선 인민 만세!》
《조선 인민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마냥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던 그날, 그 순간의 감동을 여사는 평생토록 지니고 회상하며 살아왔다. 체류 기간 동안 그날그날의 스케줄은 몹시도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소련 내각 수상은 김 주석을 환영하여 크레물린에서 성대한 만찬회를 베풀었다. 김 주석은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여사를 포함한 대표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여사의 차례가 되었다.
《문화선전상입니다. 조선의 여성상입니다.》
그러자 좌중은 놀라운 표정들을 하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 주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은 여자가 어떻게 국가 사업의 한 부문을 맡아서 지도하겠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동무는 제대로 잘 하고 있습니다. 남자 못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여사는 또다시 눈앞이 흐려짐을 느꼈다. 생각이 많아졌다. 그럴 만한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을 국가 최고의 영예로운 몸으로 추대하여 《여성상》을 만들어 준 것만도 감당하기 어려운 크나큰 은정이건만 오늘은 또한 외국에까지 나와서 아낌없는 찬사의 말로써 떠받들어 주고 내세워 주지 않는가. 돌이켜보건데 우리 조선여성 가운데 그 누가 이 같은 위치에 서 보았고 이 같은 대접을 받은 일이 있는가. 도대체 우리 조선 여상들이 그 어느 한때라도 전정한 의미의 인간 대접을 받고 그 신성한 권리를 누려 본 일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제 이름 석자 하나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숙명처럼 여기며 다만 희생과 눈물 속에 살아온 우리네 아낙네들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의 정숙이 있는 것은 그것은 다만 김 주석이 허정숙이라는 한 여성에게 베푸는 은정과 대우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북한 아니 나아가서 전 세계 여성에 대한 주석의 뜻인지도 모른다. 김 주석은 말하지 않았던가.
《여성은 혁명의 한쪽 바퀴를 담당한다》라고.
여사가 감회에 젖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소련 내각 수상이 잔을 높이 추켜들며 이렇게 흥분된 어조에 큰소리로 말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첫 여성상을 키우신 조선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사업 성과를 축하하여 축배를 들 것을 제의합니다.》
모두가 기립을 했다. 그리고 축배 잔들을 높이 쳐들었다.
그해 여름의 심한 장마는 30년래의 큰 비라고 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날이면 날마다 그칠 줄 모르고 퍼부어댔다. 강물들이 범람하고 대령강의 물도 무섭게 불어났다. 가족들이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어이 여장을 꾸려 길을 떠나셨다. 《내가 총장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 어찌 이 전시에 학교가 개학을 하는데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시면서….
다음날 새벽이었다. 김 주석이 있는 최고사령부에는 사회안전상으로부터 이 같은 비상 보고가 들어왔다. 김일성대학 총장이신 허헌 선생께서 정주로 가시던 중 대령강에서 조난을 당하셨다는….
비보를 들으신 김 주석은 몹시 놀라워하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허헌 선생께서 서거하시다니! 그는 죽을 수 없습니다. 조국 통일도 보지 못하고 그가 어떻게 죽는단 말입니까!》
보다 상세한 보고를 들으신 김 주석은 선생을 그처럼 위험한 물사태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게 한데 대하 크게 노하며 일꾼들을 질책하였다. 그리고 격하신 어조로 이렇게 즉각 지시를 내렸다. 선생의 시체를 찾기 위한 긴급 조치를 취하여 총지휘 본부를 조직하고 이 사업을 사회안전상이 직접 책임지고 집행할 것이며 현장에 가까운 박천군, 정주구, 안주군 당 위원회들 그리고 그 주변의 조선경비대, 인민군부대들과 토론하여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도록.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강과 산골짜기들은 일대 물난리를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경비대 대원들과 인민군 군인들, 인민들이 떨쳐나서 몇날 며칠을 강 주변을 찾아 헤매였으나 시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김 주석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사업 진행을 물었다. 책임 일꾼들이 몹시 송구스러워하며 더이상 시신을 찾을 가망이 없음을 보고 드렸다. 김 주석은 격노한 음성으로 이렇게 답하셨다. 《바다가 아무리 넓다한들 혁명 동지의 시체를 찾을 수 없단 말인가. 당과 정부의 중책을 지니고 혁명승리를 위하여 충실히 싸우다가 희생된 선생을 찾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바다 밑을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야 한다.》
그날 저녁으로 김 주석은 시신을 찾기 위한 대책을 다시 데우고 더욱 강화해 주었다. 인민군대와 해군함선 그리고 잠수함까지 3,000여 명의 군대를 더 동원시켜 준 것이다. 그런데 그때로 말하면 미제 침략자들의 하기 공세로 인해 전선의 형편은 그 어느때보다도 긴박했고 악화일로의 어려운 때였다. 하기 때문에 함선은 물론 전투원 한 사람이 새롭고 귀한 시기였다. 하지만 김 주석은 그들을 선생의 시신을 찾는 일에 아낌없이 돌려주었다. 시신을 찾는 작업은 일대 전투였다. 김 주석의 혁명 동지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과 의리에 감동된 일꾼들이 성심을 다하고 힘을 합하여 찾은 결과 16일만에 마침내 정주 앞바다에서 시신을 발견해 내었던 것이다.
일찍이 혁명의 길에서 전우를 잃었을 때마다 그처럼 애통해하며 부득이 전투 상황이 여의치 않아 쓰러진 전사를 그대로 놓아두고 떠나야 했을 때는 못내 가슴 아파하다가 다시 적의 포위망을 뚫게 되었을 때는 허리에 치는 눈길을 헤치고 천 리라도 만 리라도 되돌아가 기어이 그 전사를 고이 묻어 장례를 치르고서야 돌아서던 김 주석. 그는 이번 선생의 죽음 앞에서도 순직한 혁명 동지를 그대로 뒤에 남긴 채 떠날 수 없었다.
1951년 9월 7일 이었다. 평양 모란봉 지하 극장에서 고 허헌 선생의 장례식이 성대히 진행되었다. 전선의 상황은 여전히 불안 초조 속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같은 쫓기는 형편에서도 김 주석은 고인과의 영결을 하기 위해 식장에 나왔다. 비애에 젖어 몸을 추세지 못하는 주석은 전선의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 한들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우리가 바래다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나왔노라고 하였다. 그리곤 잠시 고인의 사진 앞에 묵념을 하시다가 손수건을 누가에 가져다 댔다. 마침내 예식이 시작되고 장례의 순서 순서가 엄숙히 진행되었다. 이윽고 장엄하고도 구슬픈 추도가의 주악이 울리었다. 운구 위원들이 나와 발인의 태세를 했다. 그리고 서서히 영구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그때였다. 김 주석은 검은 완장을 가져오도록 하여 두르고 손수 영구의 오른쪽을 메는 것이 아닌가. 장래는 잠시 어수선했다. 모두가 놀라움과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순간 그 누구도 감히 김 주석이 하는 일을 권유도 만류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모두 그 광경 앞에 아연해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지상 그 어느 나라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는가.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부하의 영구를 친히 메고 모란봉 지하 극장의 층계를 한 단 한 단 올랐다. 모두는 다만 숙연하여 말을 잃은 채 한 사람 두 사람 김 주석의 뒤를 따라 나설 뿐이었다.
장례를 치른 뒤 얼마 뒤의 일이다. 딸 허정숙 여사는 슬품에 젖은 나머지 전혀 입맛을 잃어 버리고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이른 새벽 갑자기 김 주석이 부른다고 했다. 영문을 모른 채 허겁지겁 최고사령부로 달려갔다. 김 주석은 아침 이슬을 맞으며 뜰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여사를 보자 반색을 하며 따뜻히 맞아 주었다.
《오느라고 수고했소. 어서 들어갑시다.》
김 주석 앞에 마주 앉게 되자 여사는 무언가 감사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주석의 얼굴을 대하고 보니 그간에 쌓인 설음부터 북받쳐 올라와 제대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 띠엄띠엄 말을 더음었을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창가엔 뽀이얀 아침 햇살이 고요히 비쳐들기 시작했다. 김 주석은 먼 산을 바라보며 수심에 찬 무거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동무는 자기 가슴이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내 가슴이 더 아픈지도 모르오. 지난 정월에서 김책 동무가 갔고 이번에는 동무의 아버지가 가고 이렇게 내가 이끼고 믿던 사람들이 모두 먼저 갔고….》
김 주석의 말끝이 다소 떨리는 듯 흐려져 갔다. 김 주석은 허헌 선생 사망 후 그간의 시산을 찾고 국장을 치르고 난 과정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 그리고 허헌 선생에 대한 감회어린 회고담 등을 들려주시었다. 그리곤 저으기 여사를 살펴보았다.
《정숙 동무… 그간에 퍽 상하였소. 자, 우리 건너가서 아침 식사나 합시다.》
여사는 집에 가서 먹겠다고 사양을 했다. 김 주석은 설득을 하였다. 집에 가야 함께 식사할 사람도 없을 터이니 굳이 함께 하자고.
김 주석의 따뜻한 권유에 못이겨 식장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어느 사이 차렸는지 거기엔 흰죽 두 그릇과 오이김치가 놓여져 있지 않은가.
《나도 목이 메는데 동무는 더할 것이 아니겠소. 밥이 목에 걸려 안 넘어 갈 것 같아서 죽을 쑤라고 했소.》
비로소 깨달았다. 이른 아침에 부른 까닭을. 여사가 부친을 떠나 보낸 후 불면의 밤을 지새며 끼니도 애우는 둥 마는 둥 수척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여사를 불러 단 한끼라도 따뜻히 함께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애틋한 정이 여사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또다시 뭉클한 무엇이 가슴에 치솟아 눈물로 변하고 그것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식탁을 적시는 것이었다. 김 주석은 손수 수저를 들어 여사의 손에 쥐어주며 말씀을 이었다.
《동무는 몸도 건강치 못한데 어서 들어야 합니다. 동무가 들어야 나도 들지 않겠습니까. 동무가 안 들면 나도 안 들겠습니다. 동무가 드는 걸 보아야 내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듭시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난 울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정숙 동무, 어서 나와 같이 듭시다. 산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어서 그치시오. 어서…》
김 주석은 여사의 등을 어루만지며 어린애 타이르듯 했다. 하는 수 없이 여사가 마음을 다잡아 먹고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럼!… 그렇게 들어야 합니다. 천천히 나하고 이 죽을 다 듭시다.》
김 주석은 비로소 수저를 들었다. 한 술 또 한 술 그렇게 해서 여사는 아버지를 여읜 후 처음으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식사가 끝나자 김주석은 말하였다. 이젠 아버지가 없으니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찾아오도록 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힘을 내어 살며 일해 나가야 한다고…. 그리고 떠나오는 여사를 문 밖까지 나와 오래도록 지켜봐 주었다. 슬픔에 젖어 돌아가는 딸자식을 혹은 누이를 못내 마음 놓이지 않아하는 저 오라비의 혹은 어버이의 애정어린 눈빛으로….

이제 여사의 이야기는 끝나가고 식탁도 물릴 시간이 되었다. 나는 자리를 뜨기 전에 한 가지 여사에게 묻고 싶고 확인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1960년대 초반이 아니었을까…. 남한에서는 한 권의 베스트셀러가 된 자전적 소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허헌 씨의 차녀이며 여사의 친여동생 허근욱 씨의 소설 《내가 설 땅은 어니냐》이다.
해방 직후 일시 부모님을 따라 월북했다가 다시 월남해 온 그녀가 당시 북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바닥쳐 겪어야 했던 그녀로서의 부조리와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 남하하지만 월남 이후 그녀가 반공 사회에서 걸어야 했던 형극의 나날 가운데 저자의 내면적 싸움과 절절한 고독이 강력한 호소력과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감명 깊은 작품이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실로 분단 비극이 낳은 문학이며 쓰라린 체험기였다. 허정숙, 허근욱 자매…. 그들은 곧 민족 분단의 표상이며 증인 가운데 증인들이었다. 정숙 언니가 북녘 따에서 저 처첨한 전란을 겪어야 했고 또한 피눈물 흘리는 전후 복구와 재건에 몸자쳐 생의 전투를 벌이는 동안 넘녘 땅의 근욱 동생은 모든 것을 되찾고자 남하했으나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잃어야 했고 북녘 땅 가족들이 고위 집권층이라는 사실이 크나큰 죄목이 되어 그녀는 창살 없는 감옥, 수인 아닌 수인이 되어 저 무인지경 독도를 홀로 살면서 고독에 울고 공포에 몸서리쳐 왔다. 실로 두 자매가 짊어져야 했던 저 엄청난 생의 고난과 슬픔…, 그 책임을 그 죄과를 그 누구에게 항변하며 그 누구에게 물을 수 있는가.
나는 퍽이나 조슴스레 여사와 허근욱 씨와의 인척 관계를 여쭤 보았다. 여사가 의외로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예, 홍 선생께서 말하는 그대로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런 것 글에다 쓰지 말아 주시유. 내가 동생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이제와서 또 무슨 누라도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여사의 안색은 좀전과는 달리 어딘가 우수에 찬 쓸쓸한 그늘이 감돌았다.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여사의 출생지이며 고향이 실은 남녘 땅 서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그 곳에서 기독교 학교인 배화고녀를 다니며 아름답고 행복한 소녀 시절을 보냈고 일본관서학원대학을 유학했다. 그리고 남녘 땅 서울에서 당시 민족 운동의 여명기인 1920년대 그녀의 열혈 애국 동지들 특별히 이른바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해방 운동의 선구자들이며 혁명가들이었던 그들, 박헌영과 그의 아내 주세죽, 김단야와 그의 연인 고명자, 조봉암과 그의 아내 김조이 등 그들과 어울려 이상을 불태우고 애국 투쟁에 몸바쳐 나섰던 것도 바로 남녘 땅 서울인 것이다. 그리해서 특별히 주세죽, 고명자, 허정숙이 장안의 《여성 혁명가 3총사》로 불리운 것도 또한 그녀가 이상제, 홍명희 등과 함께 일제 하 최초의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총단결한 민족통일전신인 《신간회》에 참여하고 그리고 기모할란, 융각경 등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그녀가 여성들의 통일연합전선인 《근우회》를 창설한 것도 바로 남녘 땅 서울인 것이다.
나는 그 의미를 알 듯했다. 동생 이야기를 떠올리자 잠시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던 남모를 비애의 그림자가, 더는 언급을 회피하고자 하는 듯 보이던 그녀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온 그의 아픔의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실은 역사의 돌풍 속에 젊은 날의 응지를 품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 온 그녀, 그리고 피와 살을 나눈 동생을 그렇게 잃어야 했던 그녀, 그녀야말로 실향민이었으며 이산 가족 철조망 분계선 저 너머 서울의 푸른 하늘이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민족해방전선을 펴고자 결사 투쟁을 벌이던 서울의 거리거리 골목골목이 때로 그립지 않았겠는가. 또한 홀로 떠나간 동생으로 하여 가슴 애태우며 잠 못이루는 밤은 없었겠는가.
나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녀가 70 고령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지난 1981년 이래 조국 통일을 위해 해외 기독자, 학자 그리고 사업인 등 동포들과 연대하여 통일을 위해 연합 전선을 펼치는 데 최전선 선두에 서서 지도 역할을 해왔으며 남북 이산 가족을 찾기 위한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를 창설, 위원장으로서 지나간 10여 년 5천여 이산 가족 상봉을 실현케 하는 등 퉁일 전선의 선구자이며 민족화왜의 어머니로서 그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비상한 정열이 그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그런데 선구자는 언제나 피를 뿌리며 스스로 제물이 되어 자신의 몸을 희생의 어린 양으로 바칠 뿐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한다.
그날 그녀와의 만남은 이 자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다. 허정숙 여사, 그녀는 떠나갔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그리운 동생을 만나지 못하고 아니 그녀의 80 평생 전생애를 바쳐 싸워 온 민족의 마지막 해방, 통일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갔으나 저 통일 전선에 바친 그녀의 고난에 찬 한생애는 남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이 땅 위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통일이 오는 그날까지 떨기떨기 찬란한 통일의 꽃을 피워 가리라는 것을….
허정숙 여사, 그녀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애국자였다.
삼가 허정숙 여사 영전에 명복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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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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