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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 여연구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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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3,94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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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어깨춤과 함께 전심을 다해 가야금을 튕기는 소녀의 콧잔등엔 땀방울 송글송글 맺히고 스승이 아니라 어머니 같은 여 교수님은 장고를 앞에 놓고 제자의 장단을 맞춰 준다. 때때로 두 여인의 눈이 마주치면 상긋 웃어가며…. 그것은 레슨 시간이 아니라 다정한 두 모녀의 정겨운 풍경 같기만 하다. 어딘가 수심에 찬 애조띤 가락에 흥겨운 장단, 정서 면면한 우리의 선율이 온 방안을 선회하며 흘러넘치는데 방 한구석 스팀에선 더운 김이 실실 소리를 내고 창가에 놓인 화분에 빨간 제라늄이 곱게 피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 나왔다.
4월의 평양음악무용대학, 온통 연분홍 벚꽃으로 뒤덮인 캠퍼스의 꽃숲을 저마다 악기 하나씩 든 청춘 남녀 학생들이 한가이 오고 간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건물 창가마다 제각기 연습에 열중하는 갖가지 악기 소리, 그 불협화음들이 내게는 그리도 아름답게 들릴 수가 없다. 세상엔 아름다운 소리가 많다. 계곡에 시냇물 소리, 동이 틀 때 창가에 우짖는 새소리, 속삭이는 봄비 소리, 고요한 시간에 차그릇 소기, 천사의 옷자락처럼 우아한 모짜르트의 음악, 그리고 심산유곡의 독경 소리, 사랑에 눈물짓는 미녀를 싣고 달아나는 마차 소리…. 세상에 숱한 아름다운 소리 가운데서도 나는 협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불협화음에 그처럼 쉬이 도취하곤 한다. 그것은 왜냐면 나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청춘의 꿈과 낭만이 느껴오는 소리도 드물기에…. 나는 잠깐 현실을 잊은 듯 감미로운 기분에 싸여 캠퍼스를 이리저리 산책하고 있었다.
내가 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이며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신 여연구 여사를 세 번째로 만나게 된 것은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한 기회로 인해서였다. 우린 참으로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선생께선 음악에 재능이 뛰어난 손녀딸의 수재 교육을 상담키 위해 몸소 오셨다 했다. 세 번째로 만나는 우리는 우리의 만남이 그리도 기쁘고 친숙할 수가 없었다.

1985년 12월, 나는 남편 홍동근 목사와 함께 《북과 해외동포간의 대화》에 참석키 위해 구라파행에 올랐다. 그러나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오직 일념 주야로 뛰는 남편을 두었을 뿐 내 자신으로 말하면 남달리 투철한 애국심을 지녔던 것도 아니고 더욱이 지난 40여년 반공 속에 젖어 온 범인에 불과하기에 실은 북의 사람들을 대면할 만한 이해도 준보도 없었던 터였다. 나는 얼떨결에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격》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비행기가 마침내 오스트리아 비엠나 상공에 이르렀을 때 나는 창 밖을 내려다보며 소녀 시절부터 그리던 요한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을 찾기에 황홀해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첨차 하강, 착륙 준비를 하면서부터는 내 가슴은 공포로 죄여 들고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하지 않는가. 과연 내가 올 데를 온 것인가. 내가 첩보 영화 007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남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우리 일행이 각자 짐을 찾아 들고 공항 밖으로 나가려는데 출구 저 편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반겨 손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가. 내가 상상했고 경계했고 무장했던 공산당의 저 비인간적이고 냉혈적이며 공포스런 인간 아닌 인간의 검은 형체는 찾을 길 없고 저 소박한 옷차림하며 그리고 소년소녀 같은 저 화평하고 소탈한 《사람의 미소》가 우선 어리둥절할밖에…. 하지만 그 시간 나의 초긴장이 그리 쉽사리 풀릴 수는 없었다.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 정도가 아니라 엄동에 동태같이 꽁꽁 얼어 절대 방어 상태에 있는 내 꼴이 그들 눈에도 몹시 딱했던지 그 쪽에 기자단 몇 분이 내 앞에 와서 이렇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었다.
《홍 사모님도 말씀 좀 하십시오. 전에 그 미국서 오신 김 교수 부인께서도 처음엔 그랬는데 나중엔 얼마나 말씀도 잘하시고 웃고 재미있었는지요. 하하!》
그들은 유쾌히 웃었지만 내 속이 빤히 드려다 보인 것이 너무 부끄럽고 무안해서 나는 시선도 몸도 더욱더 둘 바를 몰라했다.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남편이 그 중 어느 부인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그 부인은 고상한 빛깔의 스카프를 두르고 베이지 계통의 겨울 코트에 가죽 부츠를 신은 세련된 차림이었다. 《여연구 선생님이셔.》
나보다 훨씬 연상의 그 부인은 한참 연하인 나에게 너무도 겸손히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지 않는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나는 황송하면서도 내심 생각이 복잡했다. 이렇듯 겸손한 것도 혹시나 저 무서운 공산당들의 전략 중하나가 아닌가 하고…. 그후 며칠을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비로소 나는 그 부인의 모습, 거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먼 발치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부인은 미모의 귀부인상에 밝고 덕스런 풍모를 지녔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폐쇄된 공산 사회에 살아온 사람답지 않게 어딘가 서방 세계의 자유롭고 세련된 몸가짐과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져 왔다. 더욱이 대화 모임 마지막 날 연회에서 그녀가 무언가 향수에 젖은 듯 먼 산을 바라보며 《아 목동》를 불렀을 때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것이 내가 그 해 겨울 비엔나를 회상할 때마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여사의 처음 만났을 때의 회화요, 만화다.
1988년 지난해 11월 제2차 방북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그녀에 대한 깊은 인상이 남았을 뿐 특별히 개인적 교분을 가져 보지 못한 미지의 그 멋쟁이 부인을 다시금 만나 보고 싶었다. 우리가 두 번째 만난 것은 11월 7일 오전 평양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인민문화궁전 접대실이었다. 그분이 나를 얼싸안아 반겨 준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분을 다시 만난 나의 기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시간이 왜 그리도 기뻤는지를 나는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지난 44년간 북에서 살아왔고 나는 남에서 살아 온 사람. 한민족, 한핏줄이라는 연 외에는 우리 사에는 다른 아무런 개인적 사사로운 연도 이유도 없는 그분을 만났을 때의 그 영문모를 기쁨의 정체를…. 우리는 두어 시간 정도 자리를 같이 했다. 그것은 접견이 아니라 두 옛 친구의 회포라도 푸는 것 같은 그런 정겨운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여사는 내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들을 자상히 들려주었다.

여사는 1927년 우리나라 일세의 혁명가이며 웅변가였던 부치 여운형 선생과 모친 진씨 사이의 7남매 중 2녀로 태어났다. 혁명가의 자녀답게 그녀의 출생지는 조국 땅 아닌 물설고 낯설은 이국 타향 상해 천무대 거리라했다. 어린 시절 자라난 친정 집은 항상 애국 청년, 혁명가들 망명 식객등으로 장터같이 붐비고 어머니는 하루에도 2~30명의 손님을 치르기 일쑤였는데 그런 덕분에 형제들은 부모님 사랑 위에 또한 그들로부터 공주같이 떠받들리며 귀염도 많이 받고 자랐다 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천하에 두려움이란 없이 오직 구국 일념, 조국 해방을 부르짖고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절세 호걸이며 혁명가인 부친 여운형 씨는 가정에 들어오시면 그럴 수 없이 자애롭고 진보적인 어버지였다고 아름답고 행복했던 소녀 시절을 회상한다. 주말이면 그 아빠를 따라 셜리템플, 보비가 출연하는 활동 사진을 보러 가고 당시의 《미스터 코리아》라는 별명을 들을만치 미남에 건강한 체격이셨던 스포츠맨 아빠의 팔에 매달려 철봉 놀이를 했고 수영하러 온 가족이 인천 송도로, 들놀이 하러 자문 밖으로 다닐 때 그 아빠는 조롱조롱 형제들을 세워 놓고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하셨단다.
그러나 그 아빠는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잊지 않으셨다. 언젠가 장충단 들놀이를 갔을 때 이야기다. 신가하게도 눈 속에 싹이 난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교훈을 주셨다. 풀이 겨우내 눈하고 싸웠고 붕어는 자고 있었던 게 아니라 얼음과 찬물을 참고 있었기에 이제 풀이 이겨서 새싹이 돋고 붕어는 살아 움직인다. 너희들도 이 눈 속에 싹, 얼음 속에 붕어처럼 살면서 그 어떤 추위도 고통도 굳세게 참고 이겨내야 한다라고. 마치 장차 다가올 혁명가 자녀들의 고난과 시련을 미리 예견이나 하신 듯한 교훈이다. 과연 혁명가의 가정이 그리고 그 자녀들이 어찌 범속한 뭇 사람의 그것처럼 어제까지나 안락하고 행복할 수 있으랴.
여사께서 배화고녀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학부 재학 중 당시 나이 19세가 되기까지 그 부친과 함께 한 것은 오직 3년간이라 했다. 그 3년을 뺀 19년동안 그 부친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상해로 일본으로 소련으로 그리고 동남아로 해외 망명에서 수삼 년만에 돌아아 반길라치면 또 하루아침에 어디론가 사러졌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장소는 언제나 남산 헌병대 아니면 형무소였다. 저녁이면 남편을 아빠를 기다리는 가족들 앞에 테르를 당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경아케 한 것도 그 몇 번이던가. 그러나 이것이 그 부친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런 일처럼 이렇게 늘 말씀하셨다.
《혁명가는 절대로 침상에서 편안히 죽지 않는다. 내가 아무때는 서울 한복판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줄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조선 인민을 위한 것이며 그 표징이 될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슬퍼 말고 자부를 자기라. 싸워라! 싸워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어느 날 부친께서는 또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셨다가 얼마 후 돌아오셨는데 북한을 다녀온 사실을 뒤늦게 안 미 군정장관 하지중장과 이런 통쾌하고 재치있는 논박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약이 올라 발끈한 하지중장은 《보고 없이》 북행한 것에 대해 문책을 하려들자 부친께서는 이렇게 말 펀치를 먹였다.
《내가 내 집에서 웃칸에 가던 아래칸에 가던 네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항시 순국의 각오와 테러의 위협 속에 사시던 부친께서는 결국 자식들을 두고 그 어떤 단안을 내리셨다. 연구, 원구 두 딸만이라도 미리서 북한으로 보내기로. 두 자매는 부친의 뜻을 받아 먼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것이 부친과의 마지막 영원한 이별인 줄도 모르고….
여사의 인생 노정 제2장은 월북, 김주석 댁에서 한가족이 되어 그 댁 두 내외로부터 친자식 같은 극진한 사람과 보호를 받으며 시작된 청년 시절로 부터라 할까. 두 자매는 월북하자 얼마 안 가서 곧 모스크바 유학 길에 오른다. 당시 전공 과목은 철도공학.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유학생들은 모두 귀국하겠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김 주석은 학업 중단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조국의 장래를 위하여 더욱 분발할 것과 오직 학업에 전념할 것을 촉구했다. 심지어 유학생들의 이국 땅에서의 식성을 염려해서 쌀과 고추장까지 보내주면서….
그런데 어느 날 천지가 무너지는 부친의 비보를 들은 것도 당시 유학 중에 일이다. 부친께서는 과연 자신의 예언대로 결국 미군정의 흉탄을 맞고 혜화동로타리에 피를 뿌리며 쓰려져 돌아가셨다. 모스코 푸라우다 신문이 조선의 큰별이 떨어진 것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그날 학교 당국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수업 중에 있는 두 딸에게 그들이 받게 될 크나큰 충격과 비탄을 조금이라도 여리게 하기 위해 날이 저물 때까지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해준 그 인가적 배려와 온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했다.
마침내 6년의 유학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 불비의 전화가 휩쓸고 간 조국은 문자 그대로 허허발판 잿더미였다. 일미터 일미터마다 널려 있는 시체들을 헤치고 전인민이 재건에 나서야 했다. 가마니에서 움악에서 찬비를 맞으며 주먹밥 먹으며…. 그러나 해방된 기쁨에 힘들 줄 모르고 지칠 줄 몰랐다. 여사는 생각에 잠긴 듯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평양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다》라고.
여사뿐이 아니다. 나는 여러 번 이런 말을 그 땅에서 들었다.
《전시 때보다도, 오히려 재건 당시 이야기를 하면 더욱 설움이 밀려오고 눈물이 난다》고. 그 나라에 가면 남녀노소 상하없이 어디서 누구를 만나보아도 그처럼 불타는 나라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것에 대한 이유를 나는 여기에서 찾는다. 그 나라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노동자 되어 삽 들고 곡괭일 들어 나라를 건설하고 도시를 가꾸는 일에 참여한 것으로 들었다. 자신이 몸소 투신하여 피와 땀을 부은 것에 대한 절대적 애착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힘들면 힘들수록 허리 한 번 더 졸라매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했습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그들의 건강을 염려한 국가에서는 인민들의 지나친 열의와 노동을 제지하는 일에 고심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40대 여성으로부터 들은 이와 같은 얘기는 쉬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그들의 철두철미한 애국심, 그것은 믿을 수 있었다. 나라가 재건돼 가면서 여사는 외국어 교육 기관의 교편 생활, 조국전선 서기국장,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전전 역임해 오다 1983년 이래 현재까지 최고 인민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와 인민을 위해 한평생을 바쳐 헌신, 복무하고 있다. 지금도 친부모 같은 김 주석을 만날 때면 김 주석은 여사를 앞에 놓고 이렇게 옛 혁명 동지를 그린다 했다.
《네 코 아래 부분이 가장 부친을 닮았다. 서울 우이동 (여운형 선생 묘소)에 한번 가돠야 하지 않겠느냐》
그럴 때마다 여사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해왔다.
《아닙니다. 어서 모든 이산 가족들이 갈 수 있어서 다 다녀온 후에 저는 맨마지막 가겠습니다. 그것이 제 선친의 뜻을 것이며 우리 당원의 도덕성이며 의리가 아니겠습니까. 조국 통일 없이 어찌 가겠습니까》라고.
마지막으로 여사께서 남한 동포를 그리고 투쟁 학생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들려달라 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듯 침묵이 흐른 뒤 혁명가의 딸은 이렇게 오열하듯 힘 있게 말한다.

《오직 통일 위해 나서자. 이 민족 살리는 길은 오직 통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반도는 일제 40년, 미제 40년 하에 살아왔다. 그러나 투쟁 학생들을 볼때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5천 년 역사와 그 피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우리의 젊은이들 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은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청년들이여, 좀더 자기들을 아껴 달라. 아껴 달라. 달려가 포옹해 주고 싶고 대신해 칼에 맞고 싶다. 남녘의 모든 청년들이여 건투하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신심을 안고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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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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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여운형선생님은 미남이신데다가 체구도 건장했고 수염도 멋지게 길러서인지 여자들뿐만이 아니라 공공의 적들조차도 인기짱이었다고 여운형선생님의 유족들이 증언을 하더군요? 그래서일까? 본처두명에 내연의 여자두명이었으니...! 짐작이 갈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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