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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세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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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10-14 18:52 조회2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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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3

그무렵 지리산에서는 남부군과 각 도당휘하의 유격대들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통솔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론의가 있었다. 김진서가 군정대학문제에 대한 보고를 가지고 가기 이전 8월에 있은 일이였다. 리현상사령관과 남부군이 남하하는 도중 중앙당파견장을 가지고와서 정치위원이 된 여운철이 먼저 지리산에 도착하자 남부지역의 각 도당위원장들이 남원군 부윤리 뱀사골의 전라북도당 거점에 모였었다. 남부지역 당 및 유격대활동방침이 토론된 최대의 군정당간부회의로서 남부군의 간부들과 각 도당위원장들인 박영발(전남), 방준표(전북), 리영성(경북), 남경우(경남), 박우현(충남)과 충북의 부위원장 그리고 각 도당조직부장들까지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각 도간의 협력문제, 유격활동에 대한 통일적지휘문제로 론의가 분분했다. 리현상은 하나의 지휘체계로 유격투쟁을 벌릴것을 주장했고 도당위원장들은 종전처럼 자기 도의 총사, 지구사들을 자기들이 지휘할것을 바랐다.

만약 그때 최고사령부와 련계를 가질수 있었다면 남부군과 각 도유격대들의 활동방식 및 그후의 운명은 달리 되였을런지도 모른다.

이에 대하여 제일 심각하게 생각하고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군정간부들, 당일군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진서의 기억에 의하면 여러 통로로 련락원을 북에 파했지만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닿은 사람이 없었는지 종무소식이였다.

이러한 사정이 김진서를 남부군의 제1부정치위원 리재명과 인연을맺어주었다. 리재명이 사령관 리현상과 토론하고 최고사령부와 련계될수 있는 극비의 사업을 추진하고 그 보장을 위해 하정례와 아라를 선발했는데 거기에 김진서도 참여하게 된것이였다.

돌이켜보면 실로 중대한 사업이 조직되고있었다. 그것이 성공했더라면, 만약 그렇게만 되였더라면! 하고 진서는 그때 일을 회상할 때마다 아쉬움과 변절자에 대한 치솟는 분격을 금치 못하군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얼마후에 있게 될 일이다. 그무렵 남부군과 전라남도유격대의 일부는 마천과 운봉지서 습격전투에 들어갔다.

마천에서는 순식간에 전투를 끝내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지만 운봉면에서는 적아간에 많은 사상자들이 났다. 운봉면이 지리산의 관문이며 남원에서 함양으로 통하는 기동로가 있어 적들은 그곳에 경찰 203부대와 207부대를 주둔시키고있었으므로 치렬한 화력전이 벌어진것이다.

이때부터 전체 유격대들의 통일적인 지휘체계수립을 주장한 리현상과 도당유격대들을 종전대로 활동하게 하자는 의견간의 대립이 차츰 커지게 되였다.

누가 옳았는가, 어느 의견이 더 합리적인것이였던가?… 최고사령부의 결론은 없었다. 가능한껏 빨리 련락을 가져야 했는데 전선너머로 사람들을 파견하는것은 무리였다. 도중에 잘못되는것은 물론 너무도 오랜 시일이 걸렸던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엄중한 장애가 있었다. 김진서는 그 엄중한 내막을 몇해후 감옥에서야 알게 되였다.

그러나 분명히 알고있은것도 있다. 그 시기 사람들속에서는 여운철의 신임장이 리승엽개인의 명의로 발급된것일뿐 당중앙위원회가 보증한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말들이 떠돌았다. 더우기 그와 같이 파견된 차일평은 리승엽이 《이 동무를 정치부에 배속시킬것.》라고 쓰고 수표를 갈긴 쪽지만을 가지고 나타났었다.

의심스러운 점들에 대하여 수군거리긴 했으나 그것을 해명할 아무런 방도도 없었다. 그때 리재명은 어떻게 생각하고있었을가?… 하고 김진서는 지금도 자주 생각해보군 한다. 처음 남부군으로 명칭을 달고 남하하던 때엔 정치위원이였던 리재명, 다는 알수 없으나 그가 필사적으로 최고사령부와 련계를 취하려고 애쓴 사실은 많은것을 시사해준다. 사실 그때엔 그 누구도 2년후에 있게 될 박헌영, 리승엽일당의 반혁명적죄행과 간첩활동에 대한 심판을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엄혹한 51년의 겨울이 닥쳐오고있었다. 사람들은 매일 수십, 수백리씩 행군을 하고 전투를 벌리기에 극도로 지쳐 생각하는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래도 생각하는 사람은 있었다. 최고사령부와 직접 련계를 가져보려는 필사의 노력이 거의 성공을 앞두고있었다.

10월초였다. 리현상휘하의 지리산유격대들이 달궁골에 집결되였다. 중동지서습격과 대규모의 곡성해방전투(종전의 남부군과 전남도내 지구사부대들이 합동하여 공격)가 있은 직후였다.

김진서는 아라를 데리고 사령부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맡은 일은 보조강사에게 넘기고 즉시 도착할것.》라고 급히 갈겨쓴 쪽지였는데 그것을 가져온 련락원은 구두로 《아라도 같이…》하고 은밀히 말하였다. 련락원은 그 길로 백운산에 가야 했으므로 몹시 서둘렀으나 이렇게 묻는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라란게 무엇인디…. 물론 암호겠지로?》

빨찌산은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대해선 절대 묻지 않기로 되여있는데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련락원이고 보면 정말 괴상한 암호라고 여긴것 같았다. 진서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이였다.

아라를 데리고 떠날 때 정대천이 달려와 진서의 권총을 검사해보더니 자기의것과 바꾸어주었다.

《수류탄도 서너발 차고가게. 경찰놈들과 맞다들면 그것 이상 없지.》

그는 아라가 듣지 못하게 이런 말도 했다.

《저애 아버지가 부르는걸세. 이제야 곁에 두려는가보군.》

그럴수도 있을것이다.

맑게 개인 날씨였으나 그들이 걷는 골안은 침침했다. 인적없는 계곡에서는 물소리만이 소란했다. 물황철나무와 오리나무들이 꽉 들어찬 골안을 빠지자 산릉선에 붙었다. 이곳 지형에 익숙되지 못했으므로 큰 길과 마을들을 내려다보며 가야 했다.

힘들어하는 아라를 업었다. 귀여운 딸 화순이도 인제는 퍼그나 컸으리라. 정순이는 《아빠》, 《엄마》말을 배울것이고…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딸애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말할것이다.

《자, 아버지한테 노래나 불러주렴. 정말 너희들 노래하는걸 보고싶었단다.》

머리우에서 노래소리가 울렸다. 아라가 노래부르는것이였다. 아버지등에 업혀가는 귀여운 딸애가 그의 귀전에 따뜻한 입김을 날리고있었다.

앞강의 배는 낚시질배여

뒤강의 배는 님실은 배여

돌연 아라는 노래를 끊고 캐드득거렸다.

《노래 어때요, 재미나지요?》

《응, 그래. 참 좋은 노래구나. 누구한테서 배웠지?》

《우리 엄마, 울 엄만 제주도해녀였대요. 해녀란게 뭔지 아세요?… 나도 알아요. 또 하라요?》

《응, 어서 들어보자꾸나.》

아라는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꼭 그러쥐며 또 노래했다.

앞강의 배는 낚시질배여

뒤강의 배는 님실은 배여

눈물을 지난 한강수되고

한숨을 쉬난 동남풍된다

눈물 지으면 한강수되고 한숨지으면 동남풍된다는 구절에서 울린 애끓는 곡조는 어린이의 의미없는 노래라기보다 떠나간 님을 그리는 녀인의 쓸쓸한 애달픔이 한숨소리로 흘러나온듯 했다. 불현듯 눈에 눈물이 어리고 심장은 사무치는 애정에 콕콕 쏘는것을 느꼈다.

《엄만 어데 있지?》 그가 물었다.

《죽었어요.》

《?!…》

진서는 무춤 멎어서기까지 했다. 지금껏 아라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있었다. 작은 입을 뾰조롬히 내밀고 묻는 사람을 빤히, 말끄러미 올려다보는것이 한마디만 더 물으면 아예 울어버리겠다고 위협하는듯 했었다.

《그럼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도 빨찌산이지?》

《몰라요.》

《정말?!… 정말 아버지가 어데 있는지 모른단말이니?》

《엄마도 몰랐는데뭐. 가만 있으면 꼭 찾아온다구 했어요.》

머리뒤의 숨소리가 이상해졌다. 아라가 울고싶어진것일가?… 진서는 본의아니게 어린것의 마음을 아프게 한것이였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 했다.

《우리 또 노래할가?》

《…》

대답이 없다.

《내 옛말을 하나 해줄가?》

《…》

여전히 가느다란 숨소리뿐… 멀리 곡점으로 흐르는 내물이 은빛댕기처럼 번쩍이고있었다. 6. 25전에 벌써 민둥산으로 되여버린 웅석봉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어느새 날이 저무는것이였다.

《아저씨.》 불현듯 아라가 조용히 속삭이였다.《나 아저씨가 좋아요.》

《?…》

또다시 심장이 쿡 쏘고 눈시울이 떨렸다. 따스한 입김이 그의 귀언저리를 간지르며 순결한 어린이의 속삭임을 울려주었다.

《첨 만났을 때 난 우리 아버지인가 했지요뭐.》

《아라.》 진서는 목멘소리를 짜냈다. 《내가 네 아버지가 돼주마.》

《아- 뇨, 아버진 꼭 와요. 그렇지만… 아저씬 정말 좋은 사람… 정대천아저씨, 최동환아저씨도 나를 고와해요.》

그것은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라를 고와한다. 왜 그렇게 고와하는지 어린 아라가 다 알수만 있다면!…

절벽밑으로 넓지 않은 내물이 흐르고있었다. 맑고 줄기찬 흐름, 진서는 아라를 내려놓고 바위우에 걸터앉아 잠시 쉬여가기로 했다. 내물에 발을 잠그고 주머니에서 엽초를 꺼내여말았다. 아라도 발을 잠그고 찰싹거리며 물장난을 했다.

불현듯 진서는 고향의 수정천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밭김을 매던 안해가 군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던 강기슭, 날은 이미 어두웠으므로 그날따라 안해는 강가의 바위턱에 앉아 물속에 발을 잠그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남편이 나타나자 안해는 벗어놓았던 고무신짝을 손에 들고 달려왔다.

《이제 오세요?》

진서는 놀랐다.

《왜 무슨 일이 있었소?》

《아- 아니, 그저…》

조용하고 순박하기만 한 안해 정인화였다. 남편이 보고싶어 기다렸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것 같았다.

어두웠지만 진서는 안해의 가무스레한 얼굴에 피여난 홍조를 눈으로 보는듯 했다.

《오늘은 뭘했소?》

《서림골 조밭김을…》

《미안하오. 나때문에 고생이 많구려.》

《아니, 아녜요. 오히려 전…》

《됐소, 갑시다. 늦어졌는데.》

진서가 앞에 서서 물에 들어섰다. 다리목까지 가려면 어지간히 멀었으므로 늘 여울목을 건너다녔던것이다.

《저…》 뒤따르던 안해가 말했다. 《이럴 때 물을 건느면 물고기꿈을 꾼다고 했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뱀꿈을 꾸면… 더 좋지 않아요?》

안해가 말하고싶었던 화제였다. 아이를 뱄을 때 꿈에 뱀이 보이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을 꺼내고싶었던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길 없는 진서는 킁킁 코를 울리며 화를 냈다.

《난데없는 뱀꿈은 또 뭐라는거요. 스산하게!…》

사실 진서는 뱀을 제일 무서워했으므로 꿈에서 뱀을 본다는것조차 으시시했던것이다.

안해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손엔 두짝의 고무신을, 다른 손엔 치마자락을 들고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진서가 소리쳤다.

《도대체 오늘은 왜 이래?》

성을 낼 리유는 없었지만 안해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우정 큰소릴 친것이였다.

《저…》 안해가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벌써 석달이 지났어요. 그… 뭐랄가… 애기를… 그래서 물에 들어서는게… 어쩐지…》

그때에야 비로소 진서는 모든것을 깨달았다. 물을 절벅거리며 되돌아섰다.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있는 안해앞에 이르자 다짜고짜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렇단말이지, 응? 아들을 가졌단말이지. 그렇지?!》

안해가 기겁한 소리를 질렀다.

《어마나! 이걸… 놓으세요, 놔요!》

《석달이 지났다? 아들이라구?!》

《아이, 몰라요, 아직은…》

《좋아, 좋아, 뱀꿈을 꾸라구, 응? 내가 안아 건네줄게.》

그는 버둥거리는 안해를 안고 여울을 건너갔다. 비로소 안해가 자기와 한몸이 되였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했다. 지금까지 그와 나눈것은 사랑의 약속이였을뿐 비로소 뗄수없는 한몸, 가장 소중한 피의 연줄이 맺어진것이라고 생각했다. 첫날 신방에서 부끄럼타는 안해의 저고리고름을 풀 때에도 이렇듯 사랑스럽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것은 그저 꿈이였을뿐이였다. 그러나 인제는 영영 가를수없는 하나가 되였다.

그는 안해가 까무라칠 정도로 부끄럼타는데를 가리지 않고 두손으로 마구 움켜쥐며 걸어갔다. 건너편 기슭에 거의 이르렀을 때 그만에야 손맥도 풀리고 매끄러운 돌을 밟아 몸의 균형도 잡지 못하여 안해와 함께 물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때문이였는지 끝내 안해는 뱀꿈을 꾸지 못하고 딸을 낳았고… 그렇지만 두번째 역시 딸이였다. 그건 또 어떻게 풀이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회상이 진서로 하여금 버긋이 웃게 한것 같다. 아라가 물었다.

《재미나죠?》

그애는 자기가 물장구를 치는 모양에 웃고있는줄로 아는것 같았다.

《응, 재미난다. 좋은 때였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라, 아버지가 보구싶지?》

《예.》

《가자, 아버지한테로. 이제 꼭 아라한테 와서 〈아라야, 내 딸아!〉 하고 꽉 안아줄게다.》

그때 진서는 불현듯 보고싶은 두 딸을 꽉 안아주는 자신을 그려보았고 다음순간엔 어린 아라앞에서 자신의 기쁨에만 취해있었다는 생각에 담배불을 비벼끄고 일어섰다.

《자, 또 가볼가….》

…날이 저물어서야 달궁골에 도착했다. 치렬한 화력전이 벌어진 곡성해방전투후여서 부상병들이 많았다. 남부군의 녀걸로 알려진 양봉순도 부상당하여 환자트에 있었다. 죽령전투(남부군이 남하하며 치른 전투)때 미군땅크를 까부신 양봉순대대장과 얼마전에 입산했다는 인테리녀성(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왔다고 한다.) 조복애가 아라를 반갑게 맞아 자기네 처소로 안아들여갔다.

그때 최동환이 나타났다. 당장 아라를 또 데려가야 한다고 했다. 왼편볼을 파편이 찢어놓은탓에 가뜩이나 침울한 최동환은 험상궂고 무시무시해보였다.

조복애란 인테리녀성이 아라를 초막으로 껴안다싶이하고 들어간 뒤였으므로 진서는 래일 아침 데려가면 안되는가고 물었다.

《안됩니다.》

최동환은 거침없이 잘라버렸다. 그것이 진서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다.

《그애가 오늘 몇십리를 걸어왔는지 아오?》 하고 그는 자기가 업고온것을 까맣게 잊은듯 증을 내였다. 《그 어린게 견뎌내겠소? 한잠 재우고 보내면 되지 않소!》

《안됩니다.》

여전히 최동환의 어조는 몰풍스러웠다. 어두웠지만 그의 흉터가 실룩거리는것이 알렸다.

진서는 진저리를 쳤다. 이 최동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렇듯 메마르고 인정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인민군부소대장까지 할수 있었는가. 급한 일이면 사정을 말해줄수도 있지 않는가?…

진서는 가까스로 어조를 낮추며 또 물었다.

《어데로 데려간다는거요?》

《가보면 압니다.》

《그럼 나도 같이?》

《예.》

지리산의 밤은 급기야 닥쳐들군 한다. 어느새 숲우를 어둠이 뒤덮었다. 하늘전체가 무겁게 내려앉으며 싸늘하게 빛을 잃은 별들을 이슬처럼 내돋게 했다.

최동환이 초막으로 들어가 아라를 업어내왔다. 목에 걸고있는 미식소총이 혁띠고리와 탄띠에 부딪쳐 절그럭거렸다.

《어데 가나요?》

아라의 시진한 목소리에 최동환은 진서쪽을 흘낏 쳐다보며 목쉰듯 중얼거렸다.

《아버지한테.》

《정말?!》

《됐다. 입다물어.》

진서는 얼어붙은듯 움직이지 못하고있었다. 아버지한테?… 그러니 그때문에 아라를 불렀단말인가. 정대천의 예언이 꼭 들어맞았단말인가?…

최동환은 아라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알고있다. 혹시 최동환 그 자신은 아닌가?… 믿을수 없는 일이였다. 적어도 성문같이 입이 무겁고 괴벽스러운 흉터사나이 최동환만은 그애의 아버지가 아니기를 바랐다.

숲속의 오솔길로 가고있던 최동환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구 있습니까?》

그제서야 진서는 자기도 같이 가야 한다던 말이 생각났다. 뜨직뜨직 발걸음을 떼였다. 정말이지 아라만 아니였다면 이 무서운 최동환과 같이 시커먼 숲속으로 들어가는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을것이다.

최동환을 따라가면서 묻고싶은것이 많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라도 《입다물어.》 하고 최동환이 욱박아놓은 다음부터 꼼짝않고 등에 업혀있었다. 그들은 달궁골에서 우쪽으로 뻗은 릉선을 타고 계속 올라갔다. 그 릉선너머는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뱀사골이다. 그러나 최동환은 무성한 산죽밭, 새초밭을 헤치고 소나무숲이 울창한 릉선우의 절벽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부엉이처럼 밤눈이 밝은듯 한번 무춤거리지도 않고 로송을 에돌고 바위츠렁을 넘으며 끊임없이 걷고있는데 그가 총멘 지리산빨찌산이라는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귀신에라도 홀리워가는듯 했으리라.

돌연 츠렁바위밑에서 멎어서며 최동환이 숨찬 소리로 말했다.

《들어갑시다.》

그는 마치 자기집에라도 들어가자는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끼오른 바위벼랑과 칡넝쿨, 별빛에 번들거리는 잡관목들뿐… 최동환이 바위틈새를 눈짓하며 말했다.

《리재명정치위원동지가 기다립니다.》

비로소 진서는 바위틈새로 새여나오는 불빛을 발견했다. 산죽으로 엮은 문이 눈앞에 있었고 바위벽 꼭대기로 높이 세운 참대장대가 눈에 띄였다.

리재명정치위원은 그 바위굴아지트에 있었다. 우묵하게 패워들어간 작은 굴간을 절반 막고서 한쪽에 통나무를 잘라 눕힌것이 리재명의 아지트였다. 더더욱 기이한것은 저쪽 방에서 녀자들의 목소리가 울리고 전기불이 환한것이였다. 아라는 그쪽으로 들어갔다. 벽을 따라 전기줄들이 늘여진 그 방은 바로 무선실이였다. 후에 알게 된것이지만 리재명은 어떻게하나 최고사령부와 련계를 맺으려고 경남도당에서 가지고있던 무선기(주파수대역이 큰것)와 무선수를 소환해왔다. 수신은 하나 발신을 못하는 무선기수리를 위해 통신병출신들을 죄다 훑었다고 한다. 전원으로 자동차의 바떼리를 리용했으나 출력이 약해 발전기까지 구해들였다. 지리산의 골마다에 풍부한 수력자원을 리용하려는것이였다. 비밀리에 공사를 벌려 한달만에 수력발전시운전이 성공했다. 그리하여 먼저 무선으로 조선중앙통신사를 찾기 시작했다. 진서가 아라와 함께 도착한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위벽을 뚫고 밖에는 참대발과 산죽을 엮어 위장한 무선실에서 진서는 리재명을 만났다. 무선수도 내보내고 최동환만이 문곁에 서있었다. 리재명이 최동환을 절대적으로 신임한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리재명은 아라에 대하여 묻기 시작했다.

그애에게 무엇을 가르쳤으며 서울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가지고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것, 붙임성, 겁쟁이가 아닌가 등 아는것 모두를 말하라고했다. 진서가 의아해하자 그는 말했다.

《한때 나와 같이 일하던 변신원을 찾아야겠소. 당장!… 그래서 서울에서 살던 녀자와 아라를 보내여 선을 잇자고 하오. 애가 무척 똑똑하다는데 진서동무 보기엔 어떻소? 서울에서 살다가 피난을 갔던 처녀애의 역을 잘할수 있을것 같소?… 물론 놈들에게 붙잡히는 경우에 말이요.》

그러니 아버지가 찾는다고 한 최동환의 말은 거짓이였는가?… 그때 진서의 머리에 피뜩 떠오른 생각이였다. 그러나 최동환과 같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죽어도 입을 봉하고있거나 사실대로 말해버리는편이 그 침울하고 작두같은 성격에 걸맞는것이다.

진서는 리재명에게 자기의 생각을 숨김없이 말했다. 그애가 더없이 총명하고 놀라울 정도로 참을성이 있고 고집스럽다는 등 친딸처럼 사랑을 담아 자랑하고 보증하였다.

《좋소. 그 말을 믿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리재명도 만족했는지 다정하게 등을 쳐주며 동굴밖에까지 나와 바래주었다.

이번에도 최동환이 그를 안내해주었다. 야밤의 산속을 함께 걷는것이 아까 생각했던것처럼 무섭지는 않았지만 몹시 불편하고 괴로왔다. 말이라도 주고받았으면!… 허나 최동환은 묻는 말마다 《모릅니다.》라는 외마디답뿐이였다.

달궁골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야 진서는 처음부터 묻고싶었던 말을 꺼냈다.

《최동무, 한가지 물읍시다.》

《예.》

《아라의 아버지가 누구요?》

《모릅니다.》

진서도 얌전하거나 참을성많은 교사는 아니였다. 격한 성미그대로 성을 내며 쏘아붙였다.

《그런데 아까는 말하지 않았소. 아버지한테 간다구.》

이번에는 상대방이, 바위같은 최동환이 꿈쩍 놀란듯 했다. 걸음을 멈추고 진서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외마디가 아닌 긴 설명을 하였다.

《그건 알아서 뭣합니까. 난 시키는대로 말했는데…》

《누가? 누가 그렇게 시켰소?》

《리재명정치위원동지가요. 정치위원동지야 알고있겠지요.》

그는 손을 올려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곧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김진서가 그를 다시 만난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뒤 대구교도소에서였다. 생각만 해도 치떨리는 무서운 상봉이였다.…

다음날 진서는 학교로 돌아갔다. 그가 업어다준 아라는 하정례의 양딸이 되여 서울로 떠날 준비를 다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산을 내리지 못하였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변이 일어나 지리산의 운명을 건 리재명의 특별계획을 깨뜨려버렸다. 지리산빨찌산의 괴멸의 전주곡으로 된 그 사건은 이렇게 벌어졌다.

리재명은 조선중앙통신사에서 지방지사들에 오후 6시마다 정상적으로 통신을 보내는 시간을 리용하기로 했다. 매일 그 시간마다 《여기는 지리산이다.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받으라!》고 쳤다. 4일만에 대답이 왔다.

《틀림없는가. 지리산이 확실한가?》

《그렇다. 지리산이다. 최고사령부를 부탁한다.》

《지리산이 틀림없다면 리현상의 경력을 보내라!》

단순하면서도 정확히 타산된 질문이였다. 리현상의 경력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던것이다.

그때 리현상은 하동군방면에서 지방당조직들과 사업중이였다. 유격부대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휘체계가 절박했기때문이였다.

리재명은 즉시 리현상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차일평을 파견하였다. 모처럼 꾸린 무선통신대를 지키기 위해 선발했던 전투원들 3명을 최동환이 데리고가게 하였다. 리재명자신은 이 중요한 초소에서 자리를 뜰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차일평일행이 리현상에게 달려가 보고하자 그는 즉석에서 자기의 경력을 써주었다.

리현상 1905년생

본적지 전라북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간단한 경력

1926년 중앙고보 5년졸. 6. 10만세투쟁 참가. 지하활동시작.

1928. 3~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위원(5인중의 1인)

1938년 최성녀와 결혼.

1939년 서울시 삼청동 이사, 지하공산주의단체인 경성콤그룹조직(리관술, 김삼룡, 정태식, 리현상, 리인동, 서중석, 권오직, 김태준, 장순명, 리순금 등.)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위원(후에 박헌영 콤그룹참가)

1941. 2 서울서대문형무소

1943. 3 불기소로 출옥

그런데 이 경력자료를 가지고오던 차일평일행이 한개 중대의 괴뢰군병력과 조우했다. 전투에 문외한인 차일평은 바위뒤에 숨고 다른 전투원들은 그를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적들을 견제하려고했다. 그런데 전투를 지휘해야 할 최동환이 적탄에 맞았다. 탄알이 입을 뚫고들어가 이틀과 혀를 자르고 볼따귀로 빠져나갔다. 온통 피범벅이 된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안에 가득 들어찬 피거품이 꾸룩꾸룩 쏟아져나오군 했다. 그러나 그를 돌볼새도 없었다. 적들의 집중사격에 먼저 두사람이 벌둥지가 되여버리고 얼마후엔 마지막전사마저도 여러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면서 본것은 적들편을 향하여 무어라고 소리치며 뛰여내리는 차일평과 피범벅이 된 최동환의 모습이였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숨져버렸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리재명이 얼마나 놀라고 기막혔으랴. 적들과 조우했다는 백소령까지 나가서 현장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그새 미국폭격기가 날아들어 무선통신대에 정확히 1t짜리 폭탄을 투하하였다. 애써 준비한 통신대가 삽시에 박살나버렸다. 최고사령부와 련계를 맺을수 있었고 그리하여 남부지도부의 모든 유격대들과 당기관들을 통일적으로 지휘할수 있었던 유일한, 최후의 실머리가 끊어졌다.

피해는 그뿐만이 아니였다. 미군직승기가 지리산상공을 날며 차일평의 선무방송을 귀가 아프게 불어대였다.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그자는 지휘관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정규군의 대《토벌》이 시작되니 빨리 투항하라고 고아댔다. 입안에 총알이 박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있는 최동환을 대신하여 인민군출신의 빨찌산들도 투항하면 희망대로 직업을 주고 새 살림을 펼수있게 해준다고 꼬드겼다. 삽시에 차일평과 최동환의 이름은 저주와 치욕의 대명사로 되였다. 그자들이 알고있는 모든 아지트들을 옮겨야 했다. 그러나 이쪽에서 손쓰기전에 수많은 지휘처, 환자트들이 적의 공격을 받고 하나하나 죽탕이 되였다.

리현상이 긴급회의를 열고 적들의 대공세가 예견되는 실정에서 분산투쟁을 하기로 결정했다.

된추위가 시작되였다. 삭풍이 몰아치며 진눈까비를 쥐여뿌리자 어느새 지리산의 로고단, 천왕봉들은 은발을 번뜩이며 폭풍전야의 군과 면, 고을들을 음울하게 내려다보았다.

미친듯 몰아치는 삭풍과 더불어 괴뢰군 수도사단과 제5사단, 제8사단 등 악명을 떨친 부대들과 각 지방전투경찰이 총 동원되여 지리산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역시 악명높은 백선엽, 정일권이 남원에 서남지구전투사령부를 정하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5개군에 철의 포위환을 펴놓았다. 일체 보급로들을 차단하고 인민들과의 련계를 끊어놓았다. 이제 지리산빨찌산의 괴멸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정일권이 일명 《수도사단공세》라고 불리운 이 작전이 한달이면 깨끗이 결속되여 리현상의 《공비》들은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을것이라고 호기있게 장담한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참빗전술》, 《초토화작전》을 폈어도 지리산빨찌산은 쉽게 죽지 않았다.

지리산의 수많은 릉선과 골들이 불타고 짓이겨지고 하얀 눈더미들이 피로 물들어갔다.

1951년 11월말의 어느날 김진서는 정대천과 함께 살아남은 학생들(3기생들. 군정대학은 대공세의 첫 시기에 박살이 났다.)을 이끌고 백운산쪽으로 가다가 무서운 참변을 목격하였다. 백운산과 장안산사이의 큰 협곡에서 수천명의 유격대들이 적의 포위에 들어 몰살당했던것이다. 후에 알게 된것이지만 이날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가 전술적인 기동을 위해 자기 도의 유격부대들을 덕유산으로 이끌고가다가 수도사단의 매복에 걸려 협곡에서 거의 전멸된것이였다.

검은 구름이 낮추, 무겁게 드리운 저녁무렵이였다. 손톱눈같은 눈송이들이 푸실푸실 떨어져내리고있었다. 아직도 그을음내가 역하게 진동하는 피의 격전장에, 불타던 소나무숲언저리에, 목메인듯 주절대는 개울물과 도처에 널려진 시체들우에 차디찬 눈송이들이 서북풍에 날려 비스듬히 휘뿌려지고있었다.

력사는 이 모든 싸움터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싸움터들에서 《김일성장군 만세!》, 《인민공화국 만세!》를 웨치며 적의 기관총구를 향하여 결사적으로 내닫다가 쓰러진 사람들의 꿈과 희망과 신념에 대하여 낱낱이 기록해야만 한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지만 적의 대공세는 아직도 두번, 세번을 거듭하며 2년여에 걸친 격전을 치르어야 했다.

김진서와 정대천은 방향을 바꾸어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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