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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원천무효 선언, 일본 언론은 왜 냉랭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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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6-08 23:04 조회4,0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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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집권 여당이 해온 일들이 국민의 마음에 투영되지 않았다."


일본의 하토야마 총리가 2일 총리직을 사임하며 남긴 말이다. 하토야마가 내세웠던 새로운 일본을 향한 꿈은 자민당의 장기집권에 막을 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이 시민들의 마음속에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한 그 순간, 도리어 자신을 잡아먹는 결과를 낳게 했다. 북한이 하토야마의 사임을 두고 "민심을 배반한 자의 비참한 운명"이라는 날선 논평을 내세운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국민의 마음에 투영되지 못했다는 하토야마의 반성과 "민심의 배반"이라는 논평은 궤를 같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토야마의 사임은 후텐마 기지를 이전하겠다는 공약에 실패했거나 오자와 간사장의 정치자금 문제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가 퇴임 연설에서 밝힌 미완의 장밋빛 꿈들은 한결 같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전력을 쏟아야 할 사안임을 그도 알고 일본 시민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가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하는 어려운 문제 등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준비없이 공언(公言)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공언이 빈말(空言)이 되는 것에 비례해서 정책의 진정성 또한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꿈의 실현이 아니라, 꿈을 실현해가는 "진정성"에 있었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하토야마 담화"


하토야마는 일본 시민들만 꿈꾸게 한 것이 아니다. 8개월 전, 하토야마 정부의 등장은 한국에게도 새로운 한일관계의 꿈을 꾸게 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자민당과 달리, 민주당 내에서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비교적 원만한 한일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원들이 많았다.


특히 하토야마 본인은 야당 시절부터 일본의 전쟁범죄 조사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죄 및 보상 등과 관련된 법안들을 여러 차례 제출해 왔고, 총선 승리 직후에는 권철현 주일 한국대사에게 "(차기 정권은) 역사 인식에서도 과거를 직시할 수 있는 정권이 될 수 있다"며 "그게 전 (자민당) 정권과의 차이"라고 과거사 청산 의지를 강하게 제시하기도 했다.


취임 후에는 재일동포의 지방선거 참정권 부여법안을 추진하거나, 위안부·징용피해자 등에 대한 사과와 보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전후보상 법안" 처리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기에 하토야마에게 거는 한국의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해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 보다 더욱 진전된 "하토야마 담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부푼 기대를 가지게 해 주었다.


하지만 지난 5월 29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하토야마 총리가 "일본은 과거를 정확히 직시하며 반성해야 할 것은 반성하겠다"면서 "다음 100년을 향해 미래지향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발언을 보도하는 한국 언론에서 하토야마 집권 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기대감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발언이 있기 두 달 전에 일본 문부성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한 초등교과서를 발행하기로 발표했으며, 하토야마 또한 지난 4월7일 일본 기자들에게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표기)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해 한국 측의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의 독도 관련 발언이 "한국이 다케시마를 불법점거하고 있다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보수층의 공격을 받은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외상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어정쩡한 태도에서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미래지향적인 진정성은 이미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일본 국내에서조차 하토야마의 발언을 20%만 신뢰하는 상황에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해서 무언가 기대하고 있는 한국을 향해 그가 던진 원론 수준의 립 서비스는 안하느니만 못한 진부한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설령 하토야마가 계속 총리직을 유지하고 8월 15일(광복절/패전일)이나 8월 29일(국치일)을 맞이해서 일정 수준의 담화를 발표했다손 하더라도, 담화의 내용이나 형식과 관계없이 그것은 일본 국내에서도, 한국에서도 진정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토야마 담화"의 가능성은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간 담화"의 가능성과 한계


하토야마 총리가 사임한 후, 간 나오토 부총리 겸 재무상이 신임 총리로 선출됐다. 간 신임 총리는 그 동안 관료 주도 일본 정치에 대한 뚜렷한 불신, 지방분권을 통한 권력 재분배, 국민생활에 초점을 맞춘 제도개혁, 국민주권 시대 창출, 동아시아 안전보장포럼 구축 등을 주장해 왔다.


그의 개혁안들이 하토야마와 함께 저술한 책에서 제시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간 정권의 기본 정책 방향은 하토야마가 제시한 비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한국 언론들은 간 총리를 비롯한 민주당 인사들이 대부분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고, 과거사 청산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기 내각의 대한(對韓) 정책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무산된 "하토야마 담화"의 가능성은 "간 담화"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간 담화"의 가능성은 "하토야마 담화"에 내포되어 있었던 한계마저도 그대로 계승할 확률이 높다. 지난 한일 외교사에서 등장했던 "고노 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의 가능성과 한계를 통해 "간 담화"의 방향과 일본 정치권의 반응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금 그 출신지의 여하를 묻지 않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 우리는 이런 역사의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해 가고 싶다. 우리는 역사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며,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명한다."


위의 글은 1993년 8월 4일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군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힌 "고노 담화(당시 관방장관인 고노 요헤이에 의해 발표됨)"의 일부 내용이다. 하지만 고노 담화가 발표된 이후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지속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자민당 내 우파운동 단체인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은 정부에 강제연행 여부 등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였다.


2007년에는 "고노 담화의 완전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의 모임"이라는 단체가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벌이면서 7000명 이상이 서명한 탄원서를 아베 총리에게 제출했다. 이에 당시 총리인 아베 신조는 종군위안부의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 없다느니 미국의회가 일본의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더라도 사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의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현재까지 일본 "사죄외교(총리가 아시아 각국을 순방하면서 일본이 과거에 행한 침략전쟁에 사과하는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채택되고 있는 "무라야마 담화(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에 의해 발표됨)" 역시, 발표 이후 일본 국내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나라는 머지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국가 국민들에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이 담화는 1995년 8월 15일에 열린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에 발표되었는데, 자민당 내 우익세력을 포함해서 사회당, 사키가케 등 3당 연립내각 각료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한 결정에 근거하고 있었다. 무라야마 담화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의식해서 식민지배와 침략의 부당성에 대한 많은 반성을 표시했지만,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사회가 요구했던 "한일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담화가 발표된 뒤 같은 해 10월5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요시오카 요시노리 의원(공산당)이 무라야마 담화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라면 "한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이 강제적으로 한국을 식민 지배하에 놓았다고 인정한 것이냐"고 질문했을 때, 무라야마 총리는 외무성 서류를 인용하면서 "병합조약은 당시의 국제관계 등 역사적 사정에 따라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적 인식과 식민 통치에 정치적·도의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그의 대답은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고통과 슬픔에 대해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명한다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기존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북한의 "로동신문"과 한국의 여야 정치권이 일제히 사죄를 요구하자, 무라야마 총리는 10월1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질의답변에서 "한·일병합조약은 형식적으로는 합의로 성립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조약 체결 당시 쌍방의 입장이 평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종전 입장에서 선회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자민당이 아닌 사회당 출신으로 한일 양국 관계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내의 반발과 남·북한의 항의 양쪽에서 상황에 따라 흔들렸던 것이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사 문제를 전향적인 방향에서 개선하고자 했던 담화 이후에는 일본 국내의 우익 세력, 비판적 지식인, 좌익 세력의 계속적인 비판이 제기되었고, 심지어는 일본 당국의 입장에서 담화의 수혜자가 되는 남·북한마저도 비판에 동참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간 담화"의 핵심은 담화의 내용이 아니라 일본 국내와 남·북한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치밀한 준비와 진정성에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진정성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한 2010년, 1995년 "무라야마 담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발전된 담화가 선보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지난 5월 10일, 한일 양국의 지식인 214명은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양국 지식인들은 첫째로 일본의 한국 병합과정이 불의부당하다는 점, 둘째로 일본이 병합의 근거로 삼은 병합조약 역시 불의부당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협정을 원천무효라고 선언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대한 해석은 이미 원천 무효(already null and void)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선언하였다. 한일 지식인들은 강제병합 100년의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정부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일지식인선언에 대해 한국의 언론들이 "한일 100년의 먹구름이 걷혔다" 등의 제목으로 대대적인 관심을 보인 반면, 일본의 언론들은 이 선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일지식인선언은 그동안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주류 시각인 "유효부당설", 즉 "조약은 유효하지만 도덕적으로 책임질 부분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조약 자체를 무효로 규정한 "한일병합 불성립론"을 수용한 최초의 양국 지식인 선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에 참여한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 지식사회의 비주류적인 위치(비판적 지식인 집단)에 있고, 일본 정부의 입장과도 일정한 차이가 있어 여론의 관심을 끌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지식인선언 다음날에 일본 언론들 중 <아사히신문>이 사회3면에 1단 기사로, <도쿄신문>이 3면에 1단 기사로 실었을 뿐, 니가타현의 방생 따오기를 소개하는 기사보다도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수준의 담화가 발표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일본 내부의 여론조성이 중요한데, 아직까지 그러한 분위기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다가오는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안정적인 의석 확보 또한 "간 담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변수가 되고 있다. 10%대까지 추락했던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는 간 총리 취임으로 60%대를 회복한 상태지만, 참의원 선거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에는 8월 15일에 발표될 것으로 추정되는 간 총리의 전향적인 과거사 관련 담화나 전후보상 관련 법안 처리 등에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설령 참의원 선거에서 의석확보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을 수 있는 수준의 담화가 진행될 지 의문스럽다. 민주당 지도부에는 자민당에 비해 분명히 과거사 문제에 관하여 전향적인 분위기가 우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강력하게 밀고 나갈 지도력을 가진 인물도 없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간 총리가 하토야마의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진정성 있게 추진해가는 것이다. 실제로 6월 4일 민주당 대표 경선 연설에서 그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거론하며 "내 목표로 삼고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의 지지율 하락이 정책의 방향이 아니라 정책을 실현가능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진정성의 전달에 있었듯이,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기존의 무라야마나 하토야마를 뛰어넘는 진심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동아시아 공동체"나 "한·일의 새로운 100년"은 하토야마의 립서비스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간 총리는 야당시절 고이즈미 총리의 정책에 비판하면서 "고이즈미 총리처럼 인기영합식 개혁만으로는 미래가 없다. 매니페스토(정책)로 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며 날을 세웠다. 이제 그 말은 간 총리 자신을 겨냥하는 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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