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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지진사태> 외세의 변심은 손바닥 뒤집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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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1-30 22:21 조회4,0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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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아이티로 지구촌의 온정이 쏟아지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와 의료진이 속속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하고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피해 주민들에게 직접 구호물품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걸음에 현장으로 달려갔고,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신혼여행의 애틋한 추억을 떠올리며 포르토프랭스를 찾았다.


» ‘신이여, 이 비극의 땅에…’.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거리에선 가난한 주민들이 무너진 상점에서 쓸 만한 물건을 주워가기 바빴다. 한 여성이 물건을 받기 위해 애원이라도 하듯 두 손을 머리 위로 뻗고 있다. REUTERS/ CARLOS BARRIA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잰걸음을 놀리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미국에 머물고 있는 아이티인들에게 ‘임시보호지위’(TPS)를 부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불법체류자거나, 입국사증(비자)이 만료된 아이티인들도 최장 18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며 일까지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현금에 목마른 아이티에 남은 이들에겐 이들의 송금이 단비가 될 게다. 프랑스 정부도 자국 내 아이티 출신 불법체류자 추방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1월25일 캐나다에서 ‘아이티 재건·개발회의’를 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미국과 프랑스의 조처, 고맙긴 한데…


국제사회가 아이티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거의 매년 크고 작은 자연재해와 인도적 재난으로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해온 터다. 당장 지난해 4월14일에도 미주개발은행(IDB) 주최로 28개국 대표단이 워싱턴에 모여 아이티 지원을 위한 국제회의를 열어, 모두 3억240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앞서 2008년 여름 ‘페이-구스타프-한나-아이크’로 이어진 네 차례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아이티에선 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300명이 실종됐다. 또 아이티 경작 가능 토지의 70%가 파괴되는 등 재산피해만도 8억9700만달러에 이르렀다. 아이티 국내총생산(GDP)의 15%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캐나다 한 나라가 그해에만 2억3천만달러 상당의 식량을 원조했지만, 아이티는 식량난에 허덕여야 했다. 막대한 국제원조에도 아이티인들의 신산스런 삶은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해마다 예산의 30~40%를 해외 원조에 의지하고 있는 아이티의 실업률은 75%에 이른다. 지난 2008년 유엔 ‘인간개발지수’(HDI) 보고서를 보면, 아이티의 1인당 연평균 수입은 240달러다. 하루 벌이가 66센트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초등학교를 마칠 수 있는 어린이는 고작 27%에 그치고, 전기와 물을 공급받는 이들도 각각 전체의 10%와 50%에 그친다. 극단의 빈곤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폐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때다.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18세기 말 지구촌은 격동에 휩싸였다. 신대륙 아메리카에선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쟁취했다. 바다 건너 구대륙 유럽에선 프랑스가 1789년부터 10년 세월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미국 독립선언서와 프랑스 인권선언에 고무된 흑인노예들도 1792년 카리브에서 12년 혁명의 봉홧불을 올렸다. 미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1월19일 인터넷판에서 이를 두고 “18세기를 뒤흔든 혁명 3부작”이라고 표현했다.


프랑스 식민지이던 시절, 아이티는 ‘앤틸리스의 진주’로 불렸다. 80만에 이르는 흑인 노예의 삶은 가혹하기만 했지만, 아이티는 서인도 제도 일대 프랑스 식민지 가운데 가장 번창했다. 178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티는 유럽에서 소비하는 커피의 60%, 설탕의 40%를 수출했다. 무엇보다 한 해 4만여 명에 이르는 노예가 유입됐다. 18세기 말까지 아이티는 대서양 노예무역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흑인 노예의 평균수명은 21살에 불과했단다.


그 무렵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미국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미 루이지애나 일대 광활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터다. 정예병력으로 급습한다면, 신생 독립국을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며 주판알을 튀기고 있었다. 이를 위해 아이티는 중요한 교두보였다. 노예들의 반란이 거세지면서 나폴레옹이 2만 병력을 추가로 파병해 무자비하게 짓밟으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노예 해방 투쟁의 결과, 1억5천만프랑의 빚


밀리던 노예들을 결정적으로 도운 것은 전염병이었다. 황열병이 이국땅에서 악전고투하는 프랑스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자유와 독립을 향한 노예들의 열정도 되살아났다. 결국 5만여 병력을 잃은 뒤에야 나폴레옹은 ‘야욕’을 접었다. 1803년 11월 프랑스군을 격파한 아이티는 1804년 1월1일 독립을 선언했다.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 일대 거대한 땅덩어리를 6천만프랑을 받고 미국에 넘겨야 했다. 아이티에 고마워할 법도 한데, 미국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아이티 땅에서 쫓겨난 프랑스는 해상 봉쇄에 나섰다. 당시 토머스 제퍼슨 미 행정부도 이에 적극 가담했다. 미국의 모든 항구에 아이티 선박이 정박할 수 없도록 ‘금족령’을 내렸다. 노예들의 ‘해방’ 투쟁이 자칫 미국으로 ‘전염’될 수도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꽁꽁 묶인 사상 최초의 흑인 공화국은 결국 무릎을 꿇어야 했다. 1825년 프랑스는 봉쇄를 푸는 대가로 노예를 포함한 프랑스인의 ‘재산’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요구했다. 1억5천만프랑, 현재의 환율로 따져 210억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이제 막 독립한 나라에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아이티 신생 정부는 프랑스와 미국, 독일 등지의 은행에서 자금을 끌어왔다. 아이티의 비극, 대외채무의 서막이었다. 스스로를 해방시킨 노예는 그렇게 다시 옛 주인들에게 옭아매이기 시작했다. 1838년 프랑스와 합의해 배상금을 원금의 60%인 9천만프랑으로 낮추긴 했지만, 아이티가 이를 다 갚은 것은 1947년의 일이다. 보상에 합의한 뒤 무려 122년 동안 빚을 갚아나간 게다. 역사학자 엘렉스 폰 툰젤만은 1월14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이미 1900년에 이르면 전체 예산의 80%를 외채 탕감에 쏟아부어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유엔군이 아이티 최대 성장산업


미 국제정책센터(CIP)가 2008년 펴낸 자료를 보면, 지난 2003년 아이티 정부는 대외채무를 갚는 데 모두 5740만달러를 썼다. 같은 해 국제사회는 해외원조금으로 아이티에 3912만달러를 지원했다. 받은 것보다 갖다바치는 게 많은 형편이었다. 2009년 말 아이티의 대외채무 총액은 8억9100만달러에 이른단다. 12억달러를 탕감받고도 남은 금액이다.

한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아이티에선 독일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아이티를 교두보로 독일이 파나마 운하를 장악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미국인 내정불안을 핑계 삼아 1915년 아이티를 침공했다. 1934년 점령은 막을 내렸지만, 이후에도 미국은 아이티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냉전 시절 뒤발리에 부자의 세습독재 30년이 가능했던 것도, 카리브에서 쿠바와 맞설 교두보가 필요했던 미국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1986년 뒤발리에 정권 붕괴를 전후로 한 혼란 속에 국제사회는 다시 한번 아이티에 치명타를 가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중심으로 아이티의 수입쌀 관세 인하 압력이 비등했다. 1986년 아이티 정부는 수입쌀에 부과해온 35%의 관세를 단 3%로 낮췄다. 결과는 쉽게 예상이 가능했다. 제3세계 대외채무 탕감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 시민단체 ‘주빌리 USA’는 지난 2008년 내놓은 보고서에서 “아이티는 한때 쌀 수출국이었지만, 2005년 현재 아이티인들의 주식인 쌀은 75%가 미국산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민주주의’를 내세워 아이티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것도 외세다. 1990년 대선에서 빈민층의 압도적 지지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당선되자, 전체 인구의 5%도 안 되는 백인과 물라토(흑백혼혈) 기득권층은 ‘반격’에 골몰했다. 취임 7개월여 만에 쿠데타로 그가 쫓겨나자,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국가기구(OAS)는 아이티 군부를 겨냥한 무역제재에 나섰다. 결과는 다시 치명적이었다. 국제문제 전문 칼럼니스트 조지 앤 게이어는 1월18일 인터넷매체 <유익스프레스>에 올린 칼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OAS의 무역제재로 당장 아이티 중소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한때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야구공의 80%를 생산했던 아이티 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아야 했다. 의류 등 여타 산업에 끼친 영향도 지대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아이티 중소기업에 고용됐던 8만여 노동자 가운데 7만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에게 딸린 가족을 감안하면, 아이티 인구의 약 5분의 1이 무역제재로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1994년 아리스티드를 대통령궁으로 복귀시킨 것은 미 해병이었다. 지금은 유엔 아이티 특사로 참사 현장을 누비고 있는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은 이 무렵 막대한 외채에 허덕이던 아리스티드 정부에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을 강력히 주문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부의 역할마저 내팽개치라는 말이었다. 2000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아리스티드는 국영기업 민영화 등 미국과 IMF의 요구를 거부했다. 또 쿠바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원조 중단’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파국이 다가왔다. 2003년 들어 아이티의 정정은 더욱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와중에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경제재건의 종잣돈으로 삼을 요량으로 식민모국인 프랑스에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210억달러를 배상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해방된 노예들이 옛 노예주들에게 122년 동안 갚아나갔던 바로 그 액수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2004년 2월 아리스티드는 프랑스와 미국의 압력과 무장반란이란 악재까지 겹치면서 미군에 이끌려 두 번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우연일까?

아리스티드 축출 이후 아이티의 치안은 브라질군을 주축으로 42개국에서 파병한 9천여 명의 유엔 아이티안정화군(MINUSTAH)이 떠맡고 있다. 아이티 주재 유엔군은 한 해 예산만 5억~6억달러에 이른다. 유엔군이 아이티 최대 성장산업이란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엔 쪽에선 아이티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하고 있지만,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민간인에게 총질을 하거나,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는 등 아이티에서 보이는 유엔군의 행태는 ‘점령군’을 떠올리게 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이번 지진 발생 직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군병력 2천 명과 경찰병력 1500명을 증강 배치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군 병력 전개 위해 공항 이착륙 통제


그리고 1994년과 2004년에 이어 미 해병도 어김없이 아이티에 상륙했다. 〈AP통신〉은 1월20일 “프르토프랭스 일대에 배치돼 유엔군과 함께 치안 유지와 구호품 전달에 나서고 있는 미군은 모두 미군 1만2천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지진 피해 발생 직후 포르토프랭스 공항을 ‘접수’한 미군은 대규모 병력의 빠른 전개를 위해 항공기 이착륙을 통제해 인도지원 단체들의 빈축을 산 바 있다.

“미군이 군용기 이착륙을 우선시하면서 (지진 발생 직후 긴요한) 응급의료 지원이 사나흘이나 지체됐다. 이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친 부상자들이 감염에 따른 패혈증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국경 없는 의사회(MSF)는 1월20일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비판했다. 실제 <로이터통신>은 이날 포르토프랭스발 기사에서 “상처 부위의 감염이 심해져 신체 일부를 절단해낼 수밖에 없는 부상자들이 부지기수”라며 “하루에도 절단 수술이 몇백 건씩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사회는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아이티의 비극이 너무 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아이티 강진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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