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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잔인한 독재자인가 러시아 영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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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하 작성일19-09-15 13:25 조회2,15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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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교 선생의 글과 그림에 해금강 선생의 답글입니다.

정설교 

스탈린은 잔인한 독재자인가 러시아 영웅인가?

마르크스 레닌은 사회주의 사상을 창시자며 행동가지만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은 사회주의를 안정시키고 확대하며 사회주의 훌륭하게 이끈 지도자였다. 스탈린은 농업전문가였다. 그는 무엇보다 낙후된 소련의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며 국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왔고 후에 전쟁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항구를 봉쇄하며 군수물자를 통제한 나치의 침공을 소련이 견딜 수 있었던 건 바로 농업생산력에 의한 비축된 식량이었으며 스탈린그라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며 승전국이 되었다.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 연합군과의 관계를 능숙하게 다루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뿐만 아니라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기로 소문난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로부터도 존경을 얻어냈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하자 러시아는 눈물바다였다.

스탈린을 격하시킨 건 그의 후계자인 흐루시초프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죽은지 3년이 되면서 스탈린 치하는 잔인하고 가혹했다며 그의 비밀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동구는 물론이고 미 국무부를 비롯한 서방세계에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잔인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결국 중소 이념분쟁으로 번지고 소련이 서방세계와 친밀해지자 소련은 동구는 물론이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지도력을 상실하면서 각자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고 흐루시초프 실각의 첫 번째 원인이 되었다.

특히 흐루시초프 시대는 농업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미국으로부터 밀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소련의 농민들은 “소련의 과학이 참으로 발전했구나. 우리가 러시아 땅에 심은 밀 씨가 미국에서 자라나 수확하게 되었구나! 농담을 하며 흐루시초프의 반감이 켜지며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치적을 상실했다.

스탈린은 세계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러시아 역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영웅이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를 살인마며 잔인한 독재자로 몰아붙이며 비난의 대상이 되어있다. 어설프게 아는 자들은 제가 무슨 지식인이나 된다며 “스탈린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과거의 지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분들입니다”라며 제법 남을 가르치려 드는 한국 자본주의가 양산한 진보라는 풋내기들 부작용도 흐루시초프 못지않은 역사발전에 장해물은 아닐는지? 글을 쓰다가 보면 제 자랑꾼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한국에서 진보는 아직 멀었다.

이 글은 누구에게나 공개된 글입니다


아래는 해금강 선생의 답글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로서 선대수령에게 충신이었고 레닌주의의 실천가, 위대한 지도자었다. 특히 그는 레닌주의를 부정하고 수정하려드는 자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낙후한 농업국인 러시아를 강력한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전변시키고 소비에트연방을 창설하었으며 히틀러독일파시스트들을 격멸한 그의 업적은 절대로 외곡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스탈린에게 인간적인 면에서 부족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대국주의적인 결점이 있다고 해도 그가 전 세계와 러시아의 현대역사에 남긴 공적은 위대한 것이다.

그의 가장 큰 오류는 후계자를 제대로 선정하지 못한 것이다.


스탈린에 대하어 아는데서 그의 전처 아들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역사에 유명한 "장군과 병사는 절대로 교환할 수 없다"라는 말은 바로 스탈린의 아들에 대한 일화로서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한 스탈린이 지닌 철의 신념과 강한 원칙성, 민중을 우선시하는 인간성을 잘 보어 준다.


그런데 스탈린의 후처와 후처 딸이 문제이다. 스탈린의 후처가 자살하고 후처 딸이 서방으로 도주한 것을 두고 서방에서 독재자로 비아냥한다. 전처와 전처 아들과는 확연하게 대비되는 행보인데 이에 대해서는 후처인 안나가 어떤 여자인자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안나는 흐루시초프와 대학동창으로서 흐루시초프를 등용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었고 서방의 자유민주주의신봉자로서 공산주의독재와 공산당의 권력집중을 가장 반대한 멤버의 일인이었다. 그러다보니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레닌주의자인 남편과 사상적으로 일치될 수 없었기에 가정에서 고립감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남편이 당과 국가사업에서 엄중한 오류를 범하지 않게 공산주의적 원칙에서 진실하게 방조할 대신 남편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남편의 사업을 부정하다보니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유지될 수 없었다.

사상적으로 일치되지 않고 성격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고 심적으로 나약한 안나가 자살하는 것은 너무도 응당하며 그런 엄마의 교양속에서 자라난 딸이 공산주의 신념을 저 버리고 서방으로 도주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스탈린이 그런 아내를 두고도 바람피지 않은 것이 참으로 기적이라고 할 정도이다.


소독전쟁시기 1941년과 1942년에 그처럼 잘 준비되었던 소련의 서남전선군이 어이없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유명한 스탈린그라드격전을 벌인 근본이유의 하나는 서남전선군 군사위원인 흐루시초프가 아무런 타산이 없이 군사지휘관들을 내 몰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독일군의 포위속에서 수십만의 부하들을 남겨 놓고 혼자 도주한 자이다. 그때 스탈린의 오류는 흐루시초프를 총살하지 않은 것인데 이로 하어 훗날 흐루시초프는 자기를 용서한 스탈린을 모독한다.


흐루시초프의 아들은 전쟁초기에 독일군에 스스로 투항한 공군비행사이다. 투항한 것도 모자라 반소프로파간다의 일선에서 활약하었고 지어는 직접 반소작전에 참가한다. 그의 반역적인 행위에 격분한 소련군이 특공대를 투입하어 그를 체포해 왔는데 흐루시초프는 반역자인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스탈린에게 빌었다. 전쟁초기에 국경방위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포로되고 수년간 전향하지 않은 아들도 찾아 오지 않은 스탈린이 반역자인 흐루시초프의 아들을 용서할리는 없었다.

이로하어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에 대한 반감을 품었으며 훗날 극악무도하게 복수한다. 특히 흐루시초프는 반역자로 처형당한 자기 아들을 소련영웅으로 둔갑시키는 어이없는 놀음까지 벌인다.

이것만 보아도 흐루시초프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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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꼭 일독할만한 글입니다.

다물흙, 림원섭님의 댓글

다물흙, 림원섭 작성일

기독교 학교를 나온 스탈린은 대 살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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