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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역사적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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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하 작성일19-09-04 01:36 조회1,0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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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 선생께서 직접 만나본 라스베가스에서 살고 있는 한동상 씨의 증언입니다.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역사적 진실

한동상(재미동포)


함경남도 북단의 개마공원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중공군과 인민군에 포위공격 당하여 미공군의 격렬한 공중폭격 지원하에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후퇴하여 미군역사상 최대의 해상철수작전을 하였다.

지금 한국에서 이에 대한 영화 ‘국제시장’을 제작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상영하고 있는데 첫날에 17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개봉 20일에800만 관객을 돌파하여 대 성황을 이루고 있다, 국제시장은 6.25 한국전쟁 당시 험난했던 그 시절 굳세게 살아 온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독일에 간 광부들과 간호원들, 월남파병, 이산가족 상봉에 이르기까지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작품이었다. 영상에 보이는 장면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픽션의 한 장면일 수 있으나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는 그 장면들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팔자도 며칠전에 관람하였는데 이산가족들의 애환과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고통과 비참상을 눈물없이 볼수없었으며 한반도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아픈 상처를 느끼게 하였다. 사실 한국전쟁과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 한국군 월남파병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연출자는 관객의 흥미를 자아내기위한 영화픽션인것 같다. 문제는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철수작전이 유엔군이 공산군에 쪽겨 흥남항에서 해상철수작전 하는것 보다, 피난민 철수작전으로 오해하게 느껴지기 쉬웠다.

독자들을 위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진실대로 상세히 알려 드릴려고 한다.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 참모인 알몬드(Almond) 소장 휘하의 미 제10군단과 미제1해병사단은 함경남도 북부 산악지대인 장진호에서 한만국경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을때 그해에는 유난이도 눈이 많이 내리는 혹한의 겨을이었다.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 12만 병력의 제 9군단과, 인민군 2개군단이 합세하여 미군과 유엔군을 포위 공격하였다.“미 제1해병사단은 제2차대전때 태평양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우수한 미군 전투부대였다. 함경남도 북부 개마고원 내의 장진지방의 하가리와 고도리에서 미공군기들의 폭격지원을 받아 잘 싸웠으나, 숫적으로 우세한 중공군과 인민군에게 포위공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악전 고투끝에 겨우 빠져나와, 퇴각을 시작하여 미국 군사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며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고 미군사 역사가인 로이 애플맨 (Roy Appleman”이 말했다.

장진호 전투는 워커중장의 미8군이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제13병단과 격전을 버리고 고전하고 있을때 동부전선의 미 제1해병 사단과 미육군 7사단이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산속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구축한 장진호 계곡을 미군들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미공군의 지원하에 겨우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오기 위해 2주일 간에 걸쳐 치룬 철수작전이다.

당시 서부전선은 워커중장의 미8군과 동부전선은 알몬드소장의 10군단이 서로 작전상의 협조와 연계없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갖고 작전하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자기의 보좌관인 알몬드 소장을 10군단장으로 인명하고 그에게 독자적인 작전권을 부여하고 작전지휘와 보고도 워커중장의 8군사령관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이때 워커 8군사령관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인천상륙작전이 끝나면 10군단이 당연히 자기휘하의 미8군 소속이 될것으로 생각했었다. 얼마 넓지도 않은 한국전선에 미군 최고 지휘관이 두명이 있어서는 작전에 문제가 있다고 워커 사령관은 맥아더사령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맥아더사령관은 워커중장의 건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전선간에 서로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작전 협조가 전혀 없었다. 그 결과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사이에 크고 넓은 간격이 벌어졌으며, 중공군은 그 텅빈 산 지형을 이용하여 자유로히 침투할 수 있었다. 당시 중공군은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이 서로 연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특히 장진호로의 방향에 공격의 중점을 두었으며, 이 작전을 위하여 북한 인민군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진출하고 있는 한국군과 미군을 혜산진과 청진 방향으로 공격하게 하여 이들을 압박하였으며, 주력을 장진호 지구에 투입하여 이 지역의 미 제10군단을 압박하여 국군과 미군을 지역내로 한데 몰아 넣고 모조리 선멸하고자 하였던 대 포위작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였다. 미해병대 대령 출신의 군사 역사가인‘애플맨’(Appleman)은“미 제8군과 제10군단 사령부 지휘권의 분리는 중공군의 공격에 대처하는 합동작전에 큰 지장을 초래했고 작전상 실패했다.”라고 분석하였다. 맥아더는 당시 워커중장을 그렇게 좋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장진전투에서 미제1해병사단은 혹한을 무릅쓰고 유담리로 부터 진흥리까지 40Km가 넘는 죽음의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7개 사단규모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겨우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유엔공군의 항공 근접지원 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겨우 빠져나와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미제1해병사단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이때 철수하는것이냐고 묻는 종군 기자에게 “철수는 무슨 철수, 우리는 다만 다른 방향으로 공격 하고 있는것이다.”라고 역설적으로 재치있게 대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 됨으로서 동북지방으로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부대들이 흥남으로 후퇴하여 집결할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어 흥남 철수작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기간중 미 제1해병사단은 1만2천명중 전상자 7000여명, 후송 후 사망98명, 실종 182명, 부상자 2,872명의 전투손실과 6,200여명의 민간인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장진 지방에 진출한 미제 10군단은 포위작전으로 덤벼드는 중공군보다 개마고원 혹한의 강추위가 더 무서웠다. 미군의 가장 무서운 적은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개마고원 장진호의 강추위 였다. 영하 30도 이상의 장진호의 겨을 혹한은 미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더욱 무서운 적이었다. 그들의 일부는 전에는 대만 침공을 위해 대만과 마주한 따뜻한 중국 남부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우수한 부대였는데 한국전에 참전하여 겨을 동복의 허술함과 겨을 추위 대책미비로 많은 군인들이 추위로 동사하였다.

미제5연대 의무대장이었던 체스터 레슨덴 해군소령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무서운 추위때문에 수혈관이 얼어 어름 조각때문에 부상자에게 수혈햘할수도 없었고, 붕대도 갈지 못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동상을 입었고, 부상자의 상처 부위를 살펴보기 위해 부상자의 옷을 자를수도 없었다. 바로 몸이 얼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긍정적인 점은 추위때문에 지혈이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무기가 추위때문에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수류탄은 잘 터지지 않았고, 중기관총 총열의 냉각통에는 부동액을 채워넣어야 했으며 또 경기관총은 얼어붙는것을 막기 위해 목표물이 있건 없건 무조건 아무데나 몇분식 계속 발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추위는 미군뿐만 아니라 공산군에게도 똑같이 무서운 적이었다. 중국군의 동상자와 희생자는 더욱 많았을것이다.”라고 진술했다.

흥남 대철수 작전은 12월하순의 엄동설한에 흥남항에 후퇴한 미군과 한국군을 흥남부두에 1백32척의 미해군함정과 일본 민간선박으로 전쟁물자와 9만1천명의 피난민들을 실고 후퇴한 대 철수작전이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중공군에게 패하여 38도선으로 철수하고 있을때,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미 제3, 제7,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1군단 (수도,제3사단)이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12월 24일 마지막 철수부대가 승선할 때까지 20일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대 철수작전이었다. 이것이 저 유명했던 흥남 대철수작전이 었고 그것은 미군역사상 최대의 해상 철수작전이었다. 이 철수 작전에서 미제10군단의 병력 10만 5천명과 1만 4천여대의 차량, 연료 2만9천여드럼, 탄약 9천톤 등 3만5천톤의 화물과 군사장비까지 실고 황급히 철수하였다. 미군수물자를 만재한 후 빈자리에 피난민들을 실고 후송하였다. 한국의 역사가들은 미군들이 장진호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여 흥남해상철수가 아루어진 사실은 극민들에게 상세히 알리지 않고 미군의 흥남철수작전이 마치 피난민을 위한 철수작전인것 처럼 포장하였다.‘국제시장’한국영화도 장진호전투는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흥남항 미군 철수작전이 마치 피난민 철수작전인것 처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후퇴 하면서 약 59만톤의 폭약을 모든 흥남공장들과 시내건물에 장진하여 전부 폭파하였다. 아울러 약 9만 1천명의 함흥과 흥남지방의 피남민들을 부산과 거제도 지방에 미군함정과 일본 민간 선박으로 후송했다. 이 흥남 철수작전은 도일 (Doyle) 해군제독이 총지휘했다. 피난민들을 미군함정들과 민간선박에 실어 운반하는데 당시 통역관이었던 현봉학씨(필자의 중학선배) 의 역할이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봉학씨는 처음엔 해병대 대령인‘포니’에게 부탁했고 이를‘에드워드 로우니’장군에게 다시‘알몬드’사령관에게 보고하여 논의한 끝에 결국 그의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포니대령은 후송된 피난민의 숫자는 흥남부두에서 9만 1천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흥남 부두가에는 며칠식 줄울지어 기다리고 있던 피난민들의 대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해군 수송선마다 미군 및 한국군 병력과 군장비를 먼저 실고 남은 빈칸에 피난민들을 수용했기 때문에, 차례를 기다리다 배에 타지못한 가족끼리 서로 헤여져, 수송선이 차례로 떠날때마다 떨어진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은 발을 동동 굴렀으며 가족들끼리 서로 이산가족이 되는 찰라 흥남부두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부모형제가 서로 떨어져야 하는 이산가족들의 슬픈 현장이었다. 가까스로 배에 올라타긴 했으나, 부두에 남은 부모형제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짓는 어린 소년 소녀들도 많아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수가 없을 정도였다. 가수 현인씨가 부른 “굳세여라 금순아”는 이 눈물의 이별장면을 노래한것이다. 배를 타고 멀어저가는 부모형제들을 바라보며 울부짓는 아이들의 관경을 많이 볼수 있었다. 만선의 배 선창가에서 배를 탈려고 시도하다가 차가운 바닷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많이 볼수 있었다. 바닷물에는 많은 시신이 보였으며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수없는 이별의 참상이었다.

당시 그 수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여 잠시 동안만 남한에 피난갔다 오면 고향에 다시 돌아올수 있을것이라고 믿고 떠났다. 그리고 한국군인들이 말하기를 앞으로 미군기들이 후퇴후 대대적인 폭격을 할것이고 정세가 불리하면 원자탄을 쏜다. 그폭격을 피해 살기위해서는 잠시동안만 남한에 피난갔다 오라고 독촉하므로 사람들은 폭격을 피하여 필사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뜻밖의 이산가족이 되어 부모형제들의 생사, 안부 조차 모르고 지난 세월이 무정하게 73년이 흘러갔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일반 사람들이었고 무슨 정치적이고 사상적 이유에서보다, 첫째, 그동안 미군기들의 무차별 폭격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하여 북한 주민들은 폭격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고 미군들의 철수 후에 있을 미공군기들의 대대적인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 일시적 피난을 했다.

둘째, 미군들이 비행기로 피난갈것을 권장하는 삐라를 뿌렸고 또한 한국군 군인들이 피난갈것을 적극 권장했다. 그들은 말하가를 “미군들이 후퇴한 후에 대규모 폭격이 있을것이며, 그리고 미군의 전세가 불리하면 원자탄도 사용할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남한에 잠간 동안만 피난갔다 오면 된다, 살기를 원한다면 남으로 잠시 피난가라” 라고 강력 권유하므로 그말을 믿고 사람들은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을 집에 남겨 놓고 1~2달 후엔 집에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고향을 등지고 남한으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남겨두고 온 부모형제와 어린 자식들과 뜻밖에 이산가족이 되어 다시 만날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된것이다. 그 당시엔 가족과의 잠시동안의 헤여짐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고향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피난길이 영원한 이별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물론 일부 어떤 사람들은 국군이 들어 왔을때 국군에 협력하여 인민군이 다시 들어 오면 그 보복이 두려워 피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두려워 고향을 등지고 떠난 것이다. 그동안 북의 사람들은 미공군기들의 폭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리하여 폭격 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산가족이 되어 두고온 부모 형제들과 어린자식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지낸 지난 73년의 세월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아픔을 남겨 놓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던 한이 맺혀 그들의 가슴엔 멍이 들어 소주잔을 앞에 놓고 눈물의 노래로 상처를 달랬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질때……”지금은 그들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산의 한을 품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2006년 대한적십자사의 통계에 의하면 이산가족 면회 신청자 수가 처음엔 12만 9천명이 였는데 그동안 8~9만명 이상의 신청자들이 사망하여 고인이 되었으며 매년 더 많은 신청자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뒤에는 이제 이산가족이란 말과 단어조차 없어질 형편이다. 참으로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다. 남북한 당국자들은 인도적인 면에서 더 많은 이산가족들이 서로 상봉할수 있게 하기를 바라고 염원한다.

당시 그 일본 어선에 타고 남으로 피난하고 있었던 당년 17세의 한 젊은 여성은 (한증녀씨, 86세, 현재 미국 라스베가스에 거주) 다음과 같은 비참한 목격담을 필자에게 울면서 증언하였다. “배가 강원도 근처 동해바다를 지날때 난류와 한류가 부디치는 곳에서 파도가 격렬하게 높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배멀미에 시달려 심하게 구토하며 토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선원들은 더럽다고 일본말로 “조센진, 쿠사이, 쿠사이,”하며 그들을 산채로 바다속으로 던져 죽게하는 끔직한 현장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공포속에서 떨었다”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인가! 그들은 아무 죄없는 그 불상한 사람들을 바다에 쳐넣어 살인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과거 식민지 시대 조선사람들을 멸시하고 노예취급하며 살해하던 일본놈들의 야만성이 그대로 재현된것이다. 전쟁의 참화속에서 미공군기들의 폭격을 피해 살기위해 피난하는 피나민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무참히 죽이다니 참으로 분통하고 울분을 금할 수 없다. 한증녀씨는 그 잔인한 역사적사건의 산 증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처음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렇게 악독한 일본놈들과 군사협력을 맺어 외세와 야합하여 같은 동족을 공격하려는 한국의 국내친일파 왜구들이 지금까지 우리 땅에 있다면 그들은 우리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친일파의 두목 이완용과 같은 민족반역자들이며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될것이다.

미국 역사학자‘말카산’(MalKassan)은 그의‘한국전쟁’저서에서 “당시 미군과 한국정부 당국에서 될수 있는대로 많은 북한주민들을 남한에 피난 갈것을 권한것은 순수한 인도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편 북한주민의 많은 사람들이 고향땅을 등지고 남한에 넘어 오게 함므로서 북한정권에 인적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이념투쟁에서 서방 자본 민주주의가 공산 사회민주주의 체제보다 우월하다는것을 전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 또한 그 밑바닥에 깊이 깔려 있었던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될수있는대로 많은 북한사람들이 남한에 피난하기를 권장했다”라고솔직하게지적하고있다.

추가로 한선생님은 피난 오기전에 북에서 의과대학을 다니셨습니다. 그는 다음 이유로 이글을 올렸다고 쓰셨습니다. 
제 이메일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김니다.

첫째, 남한 친일, 친미 괴뢰정부가 남한국민들과 전세계에 '북한 피난민들이 북한공산치하에서
살기 싫어하고 남한사회를 동경하여 남한에 피난하여 나온것 처럼 왜곡하여 허위선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것이 아니고, 미국의 폭격과 원자탄이 무섭고, 또 한국군과 미군이 살기를 원하면
남조선에 잠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 는 감언이설에 속아 사람들이 늙은이와 아이들만 남기고
피난 나오게된 이 비극적인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했고,

둘째로는, 미군이 장진전투에서 크게 패전하여 흥남항에서 철수 하게 되었는데, 남조선 괴뢰정부는 국민들에게
미군의 대 패전이야기는 음보폐하고, 그 무슨 "인도적인 피난민들의 후송작전" 처럼 미화했기 때문이고,

셋째는, 악독한 일본놈들의 동해 해상에서의 피난민 학살사건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리고 일본놈들의 잔학상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된것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잔학상을 그 배 선상에서 직접
목겨한 유일한 산 증인 (한증녀 씨)가 지금 나와 함께 라스베가스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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