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학원박사의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중- 교포 인권 운동의 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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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12-22 13:58 조회97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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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 인권 운동의 난점
70년대 미주교포사회의 구조를 본다면 미국 이민 와서 10년 정도는 생활안정을 위해서 내외가 12시간 노동해야 하는 정착시기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미국보다도 한국에 접근하는 정신상태와 사고방식으로 박정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고국과의 관계가 너무 밀접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 반 박 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를 권해도 관심을 갖는 교포가 별로 없었다. 김대중 구출운동에 참가한 소수 교포는 미국생활을 장기간 지냈거나 교수, 목사 등 직업의 위치가 정착된 소수였다. 그 당시 박정권을 비판하고 김대중 구출운동에 참가한 교포들은 ⌜빨갱이⌟ 아니면 한국정계에서 소외된 불평분자라고 보았다. 미국정책이 박정권을 지지하는데 교포들이 왜 ⌜우리정부⌟를 반대할 것인가 하면서 비난했었다.
극소수의 교포인권운동가들 중에도 가지각색의 인사들이 모여 정책적 으로 합의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도 김대중씨가 1972년 미국을 방문 했을 때 조직한 ⌜한민통⌟그룹은 입장이 뚜렷했다. 나는 세인트루이스 에서 ⌜한민통⌟조직을 의논할 때 참가하지 않았다. 미주교포사회 속의 정당 운동이란 데 대해서 관심도 없었고 나는 이미⌜한국문화협회⌟의 이사장으로 한국내에서 정치운동보다는 문화운동을 하려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기 때문 이다. 나 자신이 김대중씨를 미국 학계에 제일 먼저 소개하면서도 그의 정당 운동에는 불참했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납치사건이 발생했고 납치사건 뉴스를 듣고 교포사회에서 제일 먼저 김대중 구출운동을 시작한 것도 임창영 박사를 비롯한 뉴욕의 민주인사들이었다. 그 후 미국서부에서 김상돈, 차상달, 홍동근, 김운하, 김정순, 명재휘, 이용운, 노의선씨가 민주화 운동조직을 하게 됐다. 73년 가을에 ⌜민주한민통⌟ 대회를 워싱턴 메이프라워 호텔에서 가지기로 결정하고 전국적으로 참석자를 모집하던 중 달라스에서 동원모 박사가 뉴욕을 방문하고 나를 찾았다. 동 박사는 워싱턴대회에 뉴욕 민주인사 들이 참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많지 않은 민주인사그룹을 통일하는 의미에서 뉴욕의 김대중 구출위원회 인사들이 동참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믿고 참가키로 합의했다. 단, 참가하는 조건으로 금번대회에서 임원선거 시에 임창영 박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할 것을 제의했다. 내가 임박사를 내세우게 된 까닭은 앞으로 김대중 구출운동에 집중해야겠는데 무엇보다도 미국의회에 로비활동을 해야할 것 같아 미국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임박사가 가장 적임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원모 박사는 나의 제의를 받아드렸다. 뉴욕에서 민주인사 일행이 워싱턴에 찾아갔다. 도착한 순간부터 들리는 소리가 김상돈씨를 비롯해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분들이 위원장에 김재준 목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박사가 뉴욕에서 약속한 것을 배신하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다. 임순만 교수와 함께 나는 김재준 목사를 만났다.
“목사님 한민통 위원장을 하지 마세요. 목사님은 고문으로 계시고 이번 에는 임창영 박사를 위원장으로 해야 한민통 활동이 활성화되고 전국적인 조직체로 발전합니다. 목사님은 선거에서 빠지십시오.”하고 권고했다. 김재준 목사는 자기는 뜻밖의 소리라는 듯이
“내가 왜 그런 감투싸움을 해. 나는 그런 생각 없어.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어.”하시고 굳은 약속을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했다.
이런 약속이 있은 후 뉴욕 민주인사들은 다시 의논하면서 김재준 목사가 위원장에 출마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다음날 아침 임순만 교수와 나는 또 한번 김재준 목사를 식사시간에 만나서 되풀이했다. 김목사의 태도는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안심했다.
대회가 9시 30분쯤 시작됐다. 임원선거가 첫 번에 있었다. 위원장 선거가 제일 먼저 시작됐다. 임창영 박사와 김재준 목사가 후보자로 등록됐다. 투표의 결과는 21대 23표였다. 두 번, 세 번, 네 번 되풀이했으나 표는 변하지 않았다. 이 때 김재준 목사는 “나는 후보에서 빼주십시오.”하고 발언했다.
그건 안됩니다. 불법입니다.”라고 누가 소리를 질렀다. 대회는 위원장선거로 아침시간을 허비했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나는 ⌜휴식⌟을 제의했다. 30분간 휴식이 선언됐다. 대회참가자의 반이 김목사를, 반은 임박사를 지지하면서 한 명도 양보하지 않는 상태로 해결하는 방법은 두 분을 공동의장 으로 모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먼저 임박사에게 공동의장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허락했다. 김목사에게 물었다. 그도 좋다고 했다. 대회를 다시 소집했을 때 나는 두 분을 공동의장으로 모시기를 제의했다. 그것이 만장일치 로 가결됐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 사회자인 동원모 박사는⌜헌장에 위원장은 1인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선출한 것은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 법을 개정해서 공동의장제로 바꾸자고 제의했다. 그 역시 거절됐다. 이유는 헌법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한달 전에 교정안을 회원들에게 배부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위원장을 선택하지 못했다. 저녁식사 시간에 위원장 문제가 다시 토론됐다. 이 때 임박사는⌜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선이 돼도 나는 사양하겠소⌟ 라고 선언하고 임박사는 회의석상에서 퇴장했다. 임박사를 옹호하는 뉴욕 민주인사들도 따라서 퇴장했다. 나는 퇴장할 수 없었다. 개인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김재준 목사가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누가 김대중씨를 위원장으로 말했으나 감옥에 있는 분이라서 취소했다. 김 목사는 또 한 번 위원장을 사양하면서⌜나는 하고 싶지 않소. 다른 사람을 뽑으시오⌟했다.옆에 앉았던 김상돈씨는 일어서서 이야기하는 김목사를 잡아 앉히면서⌜선거는 끝났오. 다른 이야기 합시다⌟라고 소리쳤다. 누구도 거기에 이의가 없었다.
김목사는 위원장으로 두번째 재선되어 2년간 시무했다. 회의장에서 퇴장 한 뉴욕민주인사들은 그날 밤에⌜한인민주협회⌟란 새로운 것을 조직했다. 위원장에 임창영 박사, 부위원장에 선우박사를 선출했다. 그 후⌜한민통⌟ 과⌜민협⌟은 합해질 수 없어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이념과 사상 때문에 분열된 것이 아니고 김목사와 임박사 두 개인을 두고 그들을 따르는 민주인사들이 연합되지 못했다. 교포사회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역사에서 연합되지 못하고 분열상태가 계속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교포사회의 민주인사들의 대부분이 교수, 언론인, 종교인 등 중산계급의 출신이고 미국의 개인주의 이념을 믿고 집단적 생활의 경험이 없는 페티 불조아지 그룹이었던 관계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있어서 언제나 개인중심의 탈을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전국 민주인사와 단체를 하나로 연합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임창영 박사를 준비회의에 초대한 적이 있다. 장시간 전화로 우리의 의도를 설명한 후 임박사는⌜그런 일에 대해서 왜 나하고 먼저 의논하지 않고 선우박사가 그런 자리에 나를 초대하는 거요. 나는 참석할 수 없소⌟하고 거절했다. 미주생활에서 수십 년간의 친교를 가지고, 나는 임박사를 선배로 모신 사람인데 그 정도 양보가 없이 어떻게 민중운동을 하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난점을 알면서도 그분과의 관계는 계속됐다.
1976년 3∙1애국운동 57주년을 맞으면서 역사적인 ⌜3∙1민주구국 선언문⌟이 서울에서 발표됐다. 여기 동참한 인사는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김대중 등등 교회계통에서 김관석, 서남동, 안병무, 이우정, 백기완, 은명기, 이문영, 윤반웅, 그리고 김지하 등이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김대중씨가 합류한 것이 고마웠다. 그 선언서는 현시점에서 필요했던 투쟁방침을 지시했었다.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성인, 종교인들이 여기에 호응하면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의 폭압적 탄압 속에서 학원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두 에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시켰다. 각 지역에서 각종의 설명서가 줄지어 발표 되고 수많은 집회가 있었고 가두시위가 계속됐다. ⌜유신헌법 폐지하라!⌟ ⌜독재정치 반대한다!⌟⌜대통령 긴급조치 9호 철폐하라!⌟ ⌜미국정계의 매수사건의 진상을 밝혀라!⌟등등의 구호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국내운동에 호응하여 미주교포사회의 운동도 활기를 띠게 됐다. 1976년 4월에 나는⌜재미교포 기독 학자회⌟회장으로, 김동수 교수는 총무로 피선 됐다. 우리 두 사람의 팀은 많은 능률을 발휘하게 됐다. 우선 기독 학자회에서는 처음으로 선언문을 채택케 됐다. 그 내용은
1. 한국의⌜정치범⌟들을 즉각 석방하라.
2. 4백수십 명의 교수를 추방한 처사에 분개하며 즉시 복직케 할 것을 주장한다.
3. 미∙일 정부는 박정권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4. 미국교회는 한국에서의 민주화 투쟁을 지원해야 한다.
5. 박정권의 전쟁위협정책을 반대하며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을 무조건 반대 한다.
이 선언문이 교포신문에 발표됐다. 처음 시도한 선언문인 관계로 온건한 내용에 주력했으나 교포사회에 큰 자극이 됐다. 교포사회에서 박정권은 물러나라고 지면에 발표된 것이 처음이었다. 또 한국땅에 핵무기가 배치된 것을 지적했고 그 위험성을 말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런 점을 봐서 기독학자회는 과거와 같이 온건한 학자그룹이라기보다⌜빨갱이⌟회장이 설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총무 김동수 교수에게⌜빨갱이⌟회장하고 일할 수 없으니 사임하라는 경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김교수는 그런 경고에 동요될 지성인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비난을 각오하고 2년간 사업을 정리했다. 단행본을 출판할 것도 이때부터였다. ⌜미국의 한인⌟과⌜한국부녀들⌟을 영문으로 출판했다. 우리의 사업경비는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주로 얻게 됐다.
우리 사업이 확장되고 회원이 증가됨에 따라서 회의 위신도가 높아졌다. 기독 학자회에서 북한 기독교인사와 주체사상 연구자인 박승덕 교수를 초빙하여 인기를 모았다. 안중식 목사와 윤길상 목사의 노력이 컸다. 10년 전에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교포사회 민주호화단체들의 분열상태는 계속됐다. 어떤 형식으로나 연합전선을 수립하는 생각에서 1976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서 연합 준비공작을 시작했었다. 각처에서 반응이 적극적이었다. 1977년 1월 중순에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 모텔에서 회집키로 하고 초청장을 발송했다. 올림픽 모텔은 이용운 제독의 것인데 우리 모임을 위해서 무료 제공키로 했었다. 이처럼 한때는 그 분도 민주화운동에 열심히 참가했었다. 초청장의 내용은 ⌜근래의 국내외의 정세는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동시에 이에 대비할 새로운 전략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습 니다⌟라고 시작했다. ⌜박정희 독재정권도 설혹 국내외의 강경한 민주세력 의 저항이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모순에 의한 멸망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멸망은 될지언정 결코 민주세력의 승리는 못 되는 것입니다⌟라고 계속했다. ⌜우리는 감히 전 미주 에 산재하여 있는 민주단체와 인사들을 총 규합하기 위한 가칭 북미 한국민주 회복 연합 국민회를 창설하기 위하여 귀하를 초대하오니 절차에 있어서 미비 한 점이 많이 있음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국가와 민족의 복된 장래를 위하여 꼭 참석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 초대장은 김상돈, 김성락, 김재준, 선우학원, 송정률, 이용운, 전규홍, 차상달, 한승인의 명의로 발송했다. 모임은 예정대로 가졌으나 임창영 박사측 동부 민주인사들은 불참했었다. 그 당시 김재준 목사는 캐나다에 거주했고 회의에는 김목사와 문재린 목사도 참가했덨다. 전 참가자 수가 24명이었다.
뉴욕에서 한승인, 이승만, 손명걸, 구준희, 김상호, 워싱턴에서 전규홍, 고세곤, 문명자, 아틀란타에서 박상중, 미국중부에서 이재현, 선우학원 그 외는 로스앤젤레스의 김상돈, 차상달, 홍동근, 김신찬, 이용운, 심성락, 김운하, 홍윤호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정률 몬트레이에서 이하련 등이 참석했다.
차상달씨의 제의로 사회는 한승인 김정순 손명걸 세분이 돌아가면서 책임지기로 결의 했다. 홍윤호씨가 회의 기록 서기로 임명됐다.
금번 회의의 목적은 연합체를 구성키 위한 제1차 준비 회의한 것을 모두 인식케 됐다. 새 단체결성이 아니라고 차상달씨는 강조했다.
⌜중요한 취지는 우리 민주화 운동의 단체들이 힘을 합하여 보다 더 큰 힘으로 뭉쳐 소리를 내어보자는데 있다. 연합운동의 목표로 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단체를 만들거나 명령계통을 조직하자는 것이 아니라⌟하고 선언 했었다.
이 모임 전에 동부에서⌜재미민주한국연합⌟이란 이름으로 임창영 박사를 중심으로 조직됐었다. 서부에서 시작된 연합조직체에 대한 경쟁심에서 발기됐다고 해석했다. 뉴욕에서 참가한 한승인씨는⌜관대한 생각으로 그곳에서 시작된 연합운동이 좋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크게 키워줄 수는 없을까? 동부에서 연합체가 생겼으니 서부에서 같은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등도 생각해 봅시다⌟라고 타협적인 제의를 했다. 여기 대해서 김상돈씨는 근본적으로 반대였다. 그 분은 임창영 박사의 그룹과는 연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 분의 반공자세는 서울시장의 위치에서나 나성에 이민 온 후에나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의 고집은 모임에서 통하지 못했다. 홍동근 목사는 ⌜동부에서의 연합운동에 적극 동조하여 연합함이 우리의 임무로 알고 동부의 기구에 서부 및 기타 지역에서의 단체를 연합하는 기구를 탄생시키는 준비 작업으로 대표자 모임을 가짐이 어떨까 생각합니다⌟라고 새로운 제의를 하여 참가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홍목사의 제의를 보충하기 위해서 나는 발언을 청했다. 한승인씨가 사회자였다. 나는 상부명령계통의 연합체제가 아니고 기능적 연합체제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이번 모임의 초청인 9명을 봐도 벌써 연합은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연합을 위해서는 융통성을 가지고 문을 넓게 열고 개방식 정책을 수립하는 것을 권고했다. 나의 발언을 동조하는 의미에서 문재린 목사와 차상달씨가 발언했다. 그들도 동부에서 시작된 연합체 조직을 긍정적으로 보고자했다. 차상달씨는 나성의 조국민주회복 남가주 국민회는 동부연합체에 가입할 외세가 있다고 발언했다. 문목사는⌜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을 외부에 알려 더욱 발전시켜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합체조직이 토의되면서 어떻게 기술적으로 성사시키는가의 방법문제가 토론됐다. 나는 방법의 하나로 이번 모임에 참석한 분들이 자기가 속한 단체에 돌아가서 설득하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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