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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보박사 가족상봉 추억 2006.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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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10-28 07:09 조회1,2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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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보박사가 2006년 가족 26명을 4월16일 평양에서 상봉하였는데 그 때 사진을 찿고 있어 구글에 들어가 발견하여 여기에 올려드립니다.

 

민족통신 편집실(민족통신은 창간이래 수없이 많이 해킹을 당해 사진들이 손상된 것이 많고 보도자료들도 파괴되어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래 기사에 나온 사진들-(민족통신이 촬영한 것임)을 올렫립니다.-민족통신 편집실

 

 

 

[주말화제] 북한 일가족 26명 상봉…'혈육의 한' 푼 원로 사회학자 지창보 박사

[LA중앙일보] 발행 2006/05/06 미주판 1면 기사입력 2006/05/05 21:51

처음 본 토카 재롱에 웃음꽃

지난 달 평양을 방문한 원로 사회학자 지창보 박사가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했다. 왼쪽부터 여동생 창옥(74), 지 박사, 막내 여동생 창도(71), 창옥씨 남편 김처일씨. <사진제공=민족통신>

지난 달 평양을 방문한 원로 사회학자 지창보 박사가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했다. 왼쪽부터 여동생 창옥(74), 지 박사, 막내 여동생 창도(71), 창옥씨 남편 김처일씨. <사진제공=민족통신>

지창보 박사와 자리를 함께 한 북한의 가족들. 여동생 부부, 조카, 조카사위·며느리, 손주 등 모두 26명이 참석했다. <사진제공=민족통신>

지창보 박사와 자리를 함께 한 북한의 가족들. 여동생 부부, 조카, 조카사위·며느리, 손주 등 모두 26명이 참석했다. <사진제공=민족통신>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북한의 가족들과 헤어졌던 80대 한인 원로 사회학자가 최근 평양에서 여동생 두명을 비롯한 26명의 혈육을 만나 평생의 한을 풀었다.

민족통신 보도에 따르면 주인공은 뉴욕에 거주하는 지창보(83) 박사로 지난 4월 16일 평양에서 여동생 창옥(74)씨 부부와 막내 여동생 창도(71)씨 조카 손주 등 3대에 걸친 일가족 26명을 재회하고 혈육의 정을 나눴다.

그는 지난 해에도 북한을 방문 여동생 등 일부 가족들과 만난 적은 있지만 조카들을 포함해 모든 가족을 상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평양대극장 구내식당 별관에서 열린 가족 모임에는 평남 평원과 순천 웅산 숙현 등지에서 모인 일가족이 모여 노래와 춤을 함께 하며 상봉을 자축했다.

지 박사 일가의 슬픈 가족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3년 5월생인 그는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중앙대 예과를 다니던 중 학도병에 징집되자 청년 지창보는 도주를 결심했고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쫓겨 다니게 된다.

1945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됐다. 

그해 11월 일본에서 진남호를 타고 부산에 내려 이미 38선이 갈린 상황에서 임진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

가까스로 평양에 도착한 지창보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가족들을 찾기 위해 매일 평양역전을 어슬렁 거렸다.

"하루는 뒤에서 '창보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고모였습니다. 그 뒤에 어머니가 계셨구요. 어머니도 해방이 되자 고모와 매일같이 이곳에 나와 저를 기다리셨던거죠."

극적으로 어머니와 재회한 지창보는 그러나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 열흘 만에 다시 서울로 내려갔다. 

연희전문 재학 중 국대안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주모자로 지목돼 퇴학을 당했고 한성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세브란스 병원서 선교사 일을 도와준 인연으로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가 일본-북한-남한-미국으로 인생유전을 겪는 동안 고향에 남았던 어머니와 남동생들은 1951년 전쟁통에 폭격을 받고 사망했다.다행히 여동생들인 창옥씨와 창도씨는 화를 면했다.

듀크대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창보 박사는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웨이크 포리스트대와 뉴저지주 드루대 교수를 거쳐 1966년부터 롱아일랜드대 사회학과 교수로 30년 넘게 재직했다.

70년대 초반 뉴욕에서 이미 고인이 된 서정균씨와 임창영씨, 시인 고은씨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시작한 지 박사는 이후 범민련 활동에 참여하는 등 줄곳 진보진영에 몸을 담아 왔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막내 여동생 창도씨는 내일이면 미국으로 다시떠날 오빠에게 바치는 애틋한 장시를 암송했다.

손주뻘인 중학생 진향이와 진애는 깜직한 노래와 춤으로 잠시 숙연해졌던 분위기를 띄웠다.

아쉬운 작별에 앞서 지 박사와 가족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며 애써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북한의 가족들을 모두 만난 이후 지창보 박사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듯 활기에 넘쳐 있다.

“평양에서 난생 처음 본 조카들은 다행히도 의사와 치과의사, 도서관 주임, 광산 연구사, 간호원 등 전문직종에 일하며 잘 지내고 있더군요. 건강이 허락할 때 어서 빨리 통일이 돼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어야 할텐데….”

팔순을 훌쩍 넘긴 지 박사의 목소리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 나왔다.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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