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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총탄의 상처 지금도 욱신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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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란꽃 작성일18-04-04 11:59 조회6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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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한복판에서 가장 잔인했던 대학살이 1949년 1월17일(음력 12월19일) 일어났다. 세화리에 주둔한 2연대 3대대 병력이 대대본부가 위치한 함덕으로 가다 무장대 습격을 받았다. 군인 2명이 숨졌다. 북촌리 마을 원로들은 시신을 대대본부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총구였다. 군인들은 경찰 가족 1명을 빼고 모두 사살했다.

이날 오전 11시 2연대 3대대 병력은 북촌리를 덮쳤다. 군부대는 마을을 포위한 뒤 할아버지부터 어린아이까지 10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전부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400여 호에 이르는 가옥에 모조리 불을 질렀다. 이어서 운동장에 모인 주민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십명 단위로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당팟(밭)’과 ‘너븐숭이(넓은 쉼터)’에서 집단 총살했다. 이튿날까지 자행된 광란의 북촌리 학살로 희생된 주민만 400여 명. 당시 일곱 살 소녀였던 윤옥화는 학살 현장에서 부모와 언니·동생 등 가족 4명을 잃었다. 본인은 총탄이 등에 박힌 채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아직도 북촌리 사건 현장 부근에 살고 있는 윤옥화 할머니(77)는 4·3이 단지 7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치유를 기다리는 국가적인 상처라는 점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북촌리를 찾아 윤옥화 할머니를 만났다.

ⓒ시사IN 이명익
북촌리 학살 사건 당시 일곱 살 소녀였던 윤옥화씨는 등에 총탄이 박힌 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해녀 일을 마치고 나면 등에 박힌 총알 자국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그날 일이 기억나는가?

기억난다. 눈도 허옇게 묻고, 신발도 못 신고 옷도 더 못 입고 그냥 입은 옷 그대로 총부리에 끌려 나갔다. 꽁꽁 언 날 양말도 안 신고 맨발로 끌려갔던 기억이 또렷하다. 나는 총상 말고도 그날 걸린 동상으로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 지금도 양말 두 개 안 신으면 너무 차가워서 못 다닌다. 군인들이 우리를 집안에서 끌어내고 집 다 불붙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내 위로 열여덟·열다섯 살 두 언니, 열두 살 오빠가 있었고 밑으로는 네 살짜리 여동생이 있었다. 집에 불 지른 군인들이 총으로 우리 식구를 밀어내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갔다. 그전에도 군대와 산사람들(무장대)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그날은 완전히 달랐다.

그전과 비교해 어떻게 달랐나?


우리 큰언니가 당시 열여덟 살로 북촌에서 언니만큼 예쁜 사람 없다고 할 때였다. 낮에는 군인들이 와서 언니를 막 데려가려 하고 밤에는 산사람들이 와서 데려가려고 했다. 그래서 언니는 항상 몸이 아픈 환자로 위장해 지냈다.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방 윗목에는 항상 약탕기를 두었다. 군인이 와서 문을 열어보고 약탕기에서 나는 한약 달이는 냄새를 맡고는 중병 환자가 있는 집으로 알고 돌아갔다. 그날은 마을 사람 다 죽이겠다고 맘먹고 쳐들어왔으니 그런 게 안 통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마자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딱딱 갈라서 이리저리 끌고 나갔다. 그 길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북촌리 학살로 가족이 입은 피해는?


일가족 7명 중 4명이 죽었다. 어머니·언니·오빠하고 저하고 여동생은 ‘당팟’이라고 부르는 나무 있는 자리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았다. 거기서 어머니랑 큰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따로 남자들만 불러내 총살하던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돌아가셨다. 둘째 언니는 큰어머니하고 같이 있다가 군인들 총격을 피해 살았고, 저는 등때기에 총 맞고 기절했다. 오빠는 어머니가 품에 안고 쓰러져 총도 하나도 안 맞고, 그냥 살아났다. 사람들이 3대 독자라서 조상님들이 도와줬다고 했다. 여동생은 온몸에 총알을 7발이나 맞았다. 발목과 어깨에 이리저리 총알이 뚫고 나갔지만 죽지 않고 살았다. 

ⓒ김흥구
북촌리 학살 당시 희생된 아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너븐숭이 애기 무덤 위에 장난감을 갖다 놓았다.

그 동생은 어떻게 됐나?

한창 뛰어놀던 네 살짜리 애가 7발이나 총을 맞았으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구덕(요람)에서 눈만 멀뚱히 뜨고 지냈다. 돌봐줄 부모가 다 없어졌고 살아남은 형제도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렵던 시절이라 병원 치료는 엄두도 못 냈다. 결국 3개월을 구덕 안에서 버티다가 영영 못 일어났다.

총알이 등에 박혔다는데?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등이 너무 아파 한참을 울었다. 그 소리를 듣고 살아남은 동네 어른이 와서 내 등에 박혀 있던 총알을 뽑아내 보여줬다. 어른 집게손가락만큼 큰 총알이었다. 반은 박히고 반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그날 돌아가셔서 큰어머니 집에 가서 얹혀 지냈다. 그 시절 약이라는 게 어디 있나.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소독만 대강 하고 지내다가 평생 후유장애로 고통스럽게 살아왔다(윤 할머니는 등을 돌려 지금도 선연한 총상 흉터를 보여주었다).

그 뒤 어떻게 살았나?


처음 얼마간은 큰어머니가 거둬주셨지만 큰어머니네도 먹고살기 바쁘니 오빠는 고아원으로 가고 나는 그냥 남의 집 일을 도우며 연명했다. 사건이 없었더라면 초등학교는 나왔을 텐데 부모 형제 잃었으니. 초등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못했다. 동네 어른 한 분이 한겨울 동안 살아남은 고아들을 한군데 모아서 한글과 일이삼사 숫자 몇 가지를 가르쳤다. 학살 사건 뒤 석 달 동안 그거 배운 게 교육의 전부다. 그 뒤 어린 나이에 밭일은 물론 해녀질까지 안 해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했다. 등에 박힌 총알 자국이 욱신거리고 아팠지만 그나마 해녀질을 할 때는 수압 때문에 좀 덜 아팠다. 그러다 뭍으로 나와 집에 돌아오면 통증으로 죽어난다. 그 고통이 평생 계속 갔다.

ⓒ시사IN 이명익
2월4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제주4·3 북촌리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끝난 후 생존자들이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북촌리 주민들이 대학살 표적이 된 이유는?

그날 대대장 차량 운전사가 경찰관 김병석씨였다. 그가 나중에 우리한테 증언한 게 나온다. 한 장교가 “군에 입대한 뒤에도 적을 죽여보지 못한 군인이 많으니까 이 기회에 각 부대마다 돌아가며 마을 주민 몇 명씩 끌고 나가 총살해서 처리하는 게 좋겠다”라고 대대장에게 건의하자 그게 채택되었다고 하더라. 사람을 상대로 사냥 연습을 한 거 아닌가.

북촌리 사건 피해자들 처지가 다 비슷한가?

우리 집은 그나마 오빠가 살아남아서 대가 끊기지는 않아 제사라도 모시지만 온 가족이 몰살당해 대 끊긴 집안도 많다. 그래서 사건 난 뒤 한동안 북촌리가 ‘무남촌’이라고 불렸을 정도다.

억울한 사연을 누구에게 말해본 일이 있나?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1954년 1월 북촌리에서 일어난 ‘아이고 사건’이 있다. 여기 총각 하나가 군대 갔다가 죽었는데 장례를 지내줬다. 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을 돌 때, 거기가 학살 현장이니까 설움에 북받쳐 ‘아이고’ ‘아이고’ 하며 울었다. 그게 경찰 귀에 들어갔다. 북촌리 사건 때 집단으로 총살당한 마을 사람들을 위령했다고 불순분자로 몰려 상여를 멘 마을 주민이 전부 경찰서에 끌려가서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나왔다. 그 뒤로는 누구도 대놓고 사건을 말할 수도 없었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제주4·3특별법이 만들어진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좀 나아졌다.

ⓒ시사IN 이명익
제주4·3평화공원의 행방불명인 표석.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를 위해 개인 표석을 설치했다.

50년 동안 한을 품고 살았나?

김대중 정부 때부터 사람들이 겨우 사건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잊고 싶은 그 사건을 말한 지 이제 한 3년 됐다. 3년 전 시민회관에서 북촌리 사건 생존자로 처음 기자들 앞에 섰다. 지금은 4·3사건 후유장애자로 인정받아 장애수당을 받고 있다.

올해 4·3사건 70주년인데 바람이 있다면?


두 가지다. 하나는 나라가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살아가는 동안 그냥 후회 없이 살다 가도록 나라가 평안해지고, 두 번 다시 우리 같은 억울함과 설움을 겪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바람은?


학살 현장에서 부모 잃고 살아남은 우리 3남매 중 나 혼자만 4·3사건 후유장애자로 인정받았다. 부모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학살당해 살아남은 우리 남매들은 큰아버지 밑으로 호적이 입적되었다. 큰아버지는 4·3 피해자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아 평생 고통을 받아온 언니와 오빠도 사실 그대로 4·3사건 피해 유족으로 정부가 인정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비록 혼인신고는 안 했어도 4·3평화공원에는 어머니·아버지 모두 4·3희생자 명단에 올라가 있다.

지난 2월4일(음력 12월19일) 북촌리 주민들은 합동위령제를 올렸다. 살아남은 이들은 매년 음력 12월18일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낸다. 지난 2월4일 합동위령제 때 만난 생존자들은 말했다. “70년 전 그날도 눈이 내렸는데….” 눈 덮인 늙은 팽나무는 70년 전 그날도 그 자리에서 죽어간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출처: 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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