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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드반대했던 조영삼씨가 분신자살,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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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청년 작성일17-09-21 02:07 조회3,5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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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반대'를 외치며 분신 사망한 조영삼(58, 밀양)씨는 어떤 사람일까? 조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사이 "성공한 대통령"을 바라고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며 분신했다.

조씨는 19일 오후 4시 10분경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18층 잔디마당에서 "사드 가고 평화 오라, 문재인정부는 성공해야 한다"고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20일 오전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95년 북송 비전향장기수 이인모(1917~2007)씨의 초대로 북한을 방문했다가 통일부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되었고, 그때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서 망명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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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012년 말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는 밀양에서 부인·아들과 함께 노모를 모시고 살아왔으며, 통일운동단체인 '겨레하나' 회원으로 활동했다.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글을 쓰기도 했다.

본적이 부산인 조영삼씨는 1959년 여수에서 출생했다. 어릴적부터 부산으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고인의 이력이다.

여기에다가 김영만 '적폐청산과 민주사회건설 경남운동본부' 상임의장이 알고 있는 조영삼씨를 소개한다. 김 의장은 그의 죽음에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사람들이 모르는 그의 삶을 알려줬다.

'재독 망명인' 조영삼(왼쪽 두번째, 뒤 사람)씨가 비정향장기수 이인모 선생(왼쪽 세번째)과 함께 1991년 무렵, 경남 김해 진영에 살다가 마산에 나들이 했을 때 부축하기도 했다.
▲  '재독 망명인' 조영삼(왼쪽 두번째, 뒤 사람)씨가 1991년 무렵 비정향장기수 이인모씨(왼쪽 세번째)가 경남 김해 진영에 살다가 마산에 나들이 했을 때 부축하던 모습.
ⓒ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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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진입사건'으로 구속

고인은 독일에서 망명해 있다가 2012년 귀국해 구속되었다. 이것은 그의 두 번째 구속으로, 첫 번째는 1992년 5월에 있었다.

당시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릴 때였다. 조영삼씨는 북송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와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이것이 이른바 '남북고위급회담 진입사건'이다.

조씨는 이인모씨의 북송을 요구하며, 당시 승합차량에 함께 타고 호텔로 들어가려고 했다. 조씨는 당시 거동이 불편한 이씨의 '손발'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모셨다. 이씨가 경남 김해 진영에 지낼 때 함께 살다시피했다.

김영만 의장은 "이인모 선생이 진영에 살면서 가끔 창원이나 마산에 나들이를 할 때가 있었다. 거동이 불편했기에 누가 옆에서 부축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며 "조영삼씨는 이인모 선생의 대소변을 다 받아낸 것으로 알고, 그야말로 손발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인모씨는 조씨가 '남북고위급회담 진입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을 때 북송되었다. 그 날이 김영삼정부 때인 1993년 3월 19일이다.

조씨는 출소한 뒤 친형이 사업을 하고 있었던 아르헨티나로 갔다. 이 대목에서 김영만 의장은 "아마도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북한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던 것 같고, 통일부에 신고하지 않고 방북해서 문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북한 방문 뒤 그는 곧바로 귀국할 수 없어 독일로 갔다. 독일에 가서 한동안 '독일 망명수용소'에서 지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서전 성격의 <기차타고 신의주 찍고 자갈치까지, 그리고 한라산 …>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조씨는 이 자서전을 김영만 의장한테 이메일로 보냈다. 당시 김 의장은 자서전을 출간하려고 했지만, 접촉했던 출판사들이 꺼려 아직까지 원고로만 남아 있다.

김영만 의장이 소유하고 있는 자서전 마지막 장에는 "20세기가 저물어가는 1999년 봄의 초입에, 독일 망명수용소에서 조영삼"이라고 적혀 있다.

'재독 망명인' 조영삼씨가 비전향가기수 이인모 선생을 모시고 다시면서 이용했던 차량으로, 이 사진은 1991년 무렵 김해 진영에 살다가 마산으로 나들이 나왔을 때 모습이다.
▲  '재독 망명인' 조영삼씨가 비전향가기수 이인모씨를 모시고 다시면서 이용했던 차량으로, 이 사진은 1991년 무렵 김해 진영에 살다가 마산으로 나들이 나왔을 때 모습이다.
ⓒ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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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라는 부제 달린 자서전

자서전은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자서전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은 어느 망명객의 긴 여정을 따라 아프도록 눈을 혹사해야만 할 것이다. 그 길을 따라 가면서 고뇌를 느끼든, 외로움을 느끼든, 비분을 느끼든 아니면 냉소를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의 자유다. 세상의 갈 곳 없는 주변인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난민수용소에서 조국의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여행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나는 지금 실타래처럼 꼬여서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지구촌의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수용소 마당에서 어른들의 암울한 세계와는 아랑곳없이 찢고 까불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처럼 몽상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앞서 간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제발…'을 되뇌이는 나를 발견하고 '픽'하고 공허한 쓴웃음을 지어 본다."

또 글 속에는 '이인모 선생 송황 문제' 등의 단락도 나온다. '남북고위급회담 진입사건'이 있기 전인, 1991년 북한 여성대표들의 서울 방문 당시를 회상해 놓았다.

"북한의 여성 대표들이 남한의 대표들과 회담하기 위해 판문점을 통해 서울에 왔다. 북측 여성대표는 여운형 선생의 큰 따님인 여연구씨였다. 여연구씨는 기자회견장에서 서울 방문 일정 중에 김해 진영에 머물고 있는 이인모 선생을 만나는 것도 들어 있다고 표명했다.

그러나 이인모 선생 송환문제가 확대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당국의 불허로 결국 포기하고, 북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북측 대표단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기간 동안, (진영) 농장 주변은 초비상이 걸려 있어서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릴 수 없었다. 가끔씩 동태를 파악하러 들르던 기관원들도 숫제 농장 주변에 밤낮으로 상주를 했다.

외부인은 철저히 검문검색을 당했다. 공안 당국은 농장의 전화마저도 끊어버렸다. 따라서 농장 운영에 막대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안기부 어느 간부에게 격렬한 항의를 했다. 거래처와 수시로 연락을 해야 하는데,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법이 어느 있느냐고. 그는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 북측 대표단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한은 전화선이 정상으로 연결되기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여연구씨는 결국 이인모 선생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북측 대표단이 판문점을 넘어갔다는 뉴스가 있은 지 서너 시간 후 영원히 불통일 것 같던 전화가 거짓말처럼 원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북측 대표단이 머물고 있는 기간 동안에 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반도 끝 자그마한 시골의 한 부분이 분단 비극의 최일선에 위치하고 있음을 절실히 실감할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20일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김영만 '적폐청산과 민주사회건설 경남운동본부' 상임의장이 '사드 반대'를 외치며 분신 사망했던 조영삼씨가 남긴 자서전 원고를 살펴보고 있다.
▲  20일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김영만 '적폐청산과 민주사회건설 경남운동본부' 상임의장이 '사드 반대'를 외치며 분신 사망했던 조영삼씨가 남긴 자서전 원고를 살펴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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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종북 아니라 통일운동가였다"

조영삼씨는 부인과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 그가 결혼을 하는 데는 김영만 의장의 도움이 컸다. 김 의장이 부인을 소개했고, 부인은 독일에 가서 남편을 만났다.

김 의장은 "당시 독일에서 조영삼씨를 아는 지인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는데, 그가 너무 외로워한다며 결혼을 시켜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였다"며 "부인은 마산자유무역지역 안에 있던 공장에 다니면서 노동활동가였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는 부인이 우연히 집에 놀러왔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조영삼씨 이야기를 했다. 그 뒤에 부인이 독일에 가서 조씨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가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귀국을 해야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김영만 의장은 "저를 포함해서 많은 주변 사람들이 귀국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귀국했던 것은 부모를 엄청나게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김영만 의장은 조영삼씨가 귀국 이후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 나가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재판은 이덕우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했다.

김 의장은 "사람들이 조영삼씨를 빨갱이, 종북으로 몰았지만, 내가 볼 때는 사고의 균형이 잡혀 있었고, 맹목적인 종북이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운동가였다"며 "그런 내용으로 법정 증언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조씨는 '겨레하나' 활동도 했다. 김정광 경남겨레하나 공동대표는 "조영삼씨는 평소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품을 보였다"며 "지역 통일운동단체들도 죽음에 안타까워한다"고 말했다.

이덕우 변호사는 "조영삼씨는 굉장히 단순하고 순수하며 그야말로 열혈남아다.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재고하는 거 없이 옳다면 흔들리지 않고, 쉽게 변절하지 않으며, 거짓말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변론 당시를 회상하면서는 "당시 국정원 조사관들도 북한 언론 보도나 여러 경로를 통해 조영삼씨의 행적에 대해 알고 있었고, 조사관들이 물으면 숨긴다거나 거짓진술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북한 언론에는 조영삼씨가 방북한 지 1주일 정도 지난 뒤부터 보도가 잠잠했다. 하루는 조영삼씨가 자신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난 신문을 보고, 안내원한테 날조라며 책임지라 하면서 싸웠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이인모 노인이 죽기 전에 친자식 같았던 조영삼씨라는 청년을 보고 싶어 하니까 목숨을 걸고 갔는데,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을 보고는 나가겠다고 했다"며 "북한에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안내원과 대놓고 싸운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조영삼씨는 그렇게 했던 것이고, 국정원 조사관들도 진짜 거짓말 하지 않고 꾸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지금 남북 관계가 엄중하고, 특히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벌이는 상황도 그렇다. 이런 속에 조영삼씨가 남긴 유서를 보면, 하루 아침에 충동적으로 쓴 게 아니고 정말 고민을 해서 결심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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