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북에서 6개월 살면서 난 뭘보며 배웠는가? > 민족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4월 25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민족게시판

6. 북에서 6개월 살면서 난 뭘보며 배웠는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다물흙, 림원섭 작성일17-04-10 18:22 조회2,577회 댓글4건

본문

6. 북에서 6개월 살면서 난 뭘보며 배웠는가?

북조선 국제 태권도 사범 제2기생을 가르치면서 뭘 배웠는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 1982년1월3일 - 6월30일까지
 
아래와 같이 보테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본대로 느낀 그대로 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태권도는 1980년 9월15일에 소개 시범으로 시작되였다.
그것을 위해서 최홍희는 여기 서전(Sweden)을 자주 오고 가면서 극비에 평양도 갔다 오면서
그렇게 보고싶던 형도 동생들도 만나면서 준비를 척척하고 있었다.
그거야 나무랠 필요가 없다. 

때는 1981년12월28일경 ITF 태권도 총재 최홍희한테서 오밤중에 전화가 왔다. 
1기생을 가르치던 박정태는 배가 아파서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으니 림원섭 니가 1982년1월2일까지 평양에 도착하여 3일부터 교육을 시작하라했다.
박정태가 배가 아프다는 말을 믿지를 아니했지만 북동포들을 가르친다는 긍지로 이 북유럽에 매우 중요한 태권도를 뒤로 하고 급히갔다.

시작하는날 난 말했다.
자네들이 녹끈을 당겨서 못따라 오면 철끈으로 당기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네들이 국제 태권도 사범이 되여야 하므로 태권도을 통한 애국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08.00시에 시작 50분 운동을 하고 10분씩 쉬면서 하루에 8시간씩 열심히 가르쳤다. 

학생들도 또 열심히 따라했다.
일과 후에 또 4시간씩 따로 운동을 했다 한다.
매 토요일은 심사를 보았고 불합격자는 일요일에 제심사를 보기도 했다.
그래서 기왓장과 송판, 벽돌들이 큰 짐차(트럭)로 매주 금요일이면 수송되였다.
그래서 그들은 6개월 동안 태권도 기술로만 기계가 되였다.

약 40-48명으로 기억 된다. 그들이 지금은 9단짜리가 된 자들도 있다고한다.
그런데 고단자 7,  8,  9단 심사의 심사관들은 누구인가?
여기에서 무도와 태권도 전통과 규정을 지키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다 북조선식이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은 주로 체육대학 출신들로 축구, 배구, 농구, 육상, 씨름 등등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보위부 젊은 직원들도 있는 것으로 느끼였다.
그들은 잘따라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참으로 우수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2, 3일이 지났을 때 근육통으로 몹시 고생들을 했다.
어느 운동이나 발달 근육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만저주고 싶었다.
 
본인은 그때 당시 북녘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란!
오직 6.25를 침략한 자들이고 김일성은 가짜라고 군대에 있을때 교육 받은 것뿐이다.
그리고 평양은 가난하여  고무신도 신고 다니지 못한다는 했다,
그런데 평양에 가보니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갔다 와서 평양 시민들은 구두를 신고 다니고 또 가짜라는 김일성은 역사박물관에서 본대로 진짜라고 글을 써서
전 교포들에게 모두 다 띠웠다.
그리고 북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있다고 썼다,
그 이유는 산 중턱까지 옥수수을 심은 강냉이밭에 물을 주는 것을 보고 그렇게 난 표현을 했다.
그래서 교포사회가 확 뒤집혔었다

이 태권도가 생긴지가 얼마되지 않기 때문에 북녘에 태권도라는 무술은 없고 ’격술’이라는것 뿐이 없는데
그 ’격술’은 왜놈  ’당수도/가라데’를 한자들이 만들은 것으로 항일을 도왔다는 신분으로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이 격술인들과 대화를 해보니 힘의 원리도 몰랐다.

원래 태권도는 최홍희라는 사람이 1956년 6월경에 한국의 무술을 만들게된 동기는 북한 공산당을 때려부셔
미국의 용병다운 생각으로 진급을 노린 것과 동시에 북에서 사는 형을 만나는 것이 최홍희의 꿈이였다.

그런 최홍희는 1940년도경에 동경 와세대 법과 대학에 잠깐 다니면서 어깨넘어로 배운 왜놈들의 당수도/가라데 소또깐을 200%
그대로 모방/도용/표절하여 이름만 다르게 해서
우리나라 전통 무술인것처럼 조작으로 만들었다.

그에 자료들은 첫 책인 1966년에 발행한 책부터 그 기록들은 많고 많다.
그리고도 부끄러움도 챙피도 모르고 마모된 양심으로 계속 정당화시켰다.
그것도 또 평양에서는 한술 더 뜨고 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최홍희는 8.15후 함경도에서 탈북한 자로 1946년도에 국방 경비대에 입대하여
미국 용병인 최홍희는 미상전에 충성으로 육군 소장까지 달면서 정보 참모부장도 하면서
출세한 친미, 숭미, 종미자의 한 사람이다. 
한국군 고급장교가 미고문관팀 하사관에까지 먼저 경레를 하며 충성한 자중의 한 사람이다.

앞으로 최홍희는 도대체 누구며 태권도 3글자를 만든자가 과연 누구고 태권도 24개 ’틀’ 명칭들은 어느 누구가 지였는지도 밝힐까한다.
이것은 200% 조작된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북녘을 배웠다.

1. 평양 체육관을 아침, 점심 뒷문으로 다닐때 화단 언덕을 받히고 있는 돌멩이들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런데 몇일이 되여도 태권도를 배우는 학생들은 매일 몇 차레씩 보면서 허물어진 그 돌멩이들을 제 위치에 올려 놓는자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난 말했다. 너희들 어느 한사람 화단 돌멩이가 허물어진 것을 보았지 않는가! 제 위치로 올려 놓은 자가 없는데
그래야 되겠냐고 말을 했었다.

그때 한 학생은 말을 했다. 저희들이 그 돌멩이를 제위치에 놓으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대답에 난 말을 잊지를 못했다.
그러면서 난 속으로 생각했다.

여긴 완전히 조직화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면서 문을 열어주는 사람, 닫는 사람도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래서 결국 본인이 화단 언덕 돌멩이를 내가 정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러니까 화단사의 일을 내가 간섭을 한 격이 되였다.

2.  나는 평양에서 무엇에 놀랐는가!
ㄱ. 평양 국제 공항에 도착하여 밖을 본 나는 놀랬다.
왜, ’조선은 하나’라는 간판이 크게 걸여있었기 때문이다,
난 이 간판 글자에 흡족했다.
그려 우리민족은 하나다라고 자문 자답을 하였다.
 
ㄴ. 날 따라 다니는 김지도원이라는 자는 김일성 대학 철학과 출신으로 거짓말이 아주 능수 능란했다 거짓말을 하면서 얼굴색이 변하는 자가 아니였다.
내 사진을 빼주겠다고 가져간 필림들과 사진들을 돌여주지 아니했고 그 자는 내가 평양을 떠날때까지 필립은 고사하고 내 가족사진 한장도 주지 아니한
그의 도깨비 거짓말들에 나는 질여버린 자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말했다. 쏘련, 중국놈들 사이에 끼여서 거짓말을 이 두나라놈들보다 더 잘해야 살수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ㄷ. 또 어디에 갈때는 어디에 간다고 말을 하지않고 무조건 간다. 그러면 어디에 가는가보다 하고 따라만 간다.
식사도 만찬가지다 무엇을 먹을 싶냐고 말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는다 주는데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엔 인권이 완전히 무시된다.
35년이 지난 요즈음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어느 일요일 날 가끔 구경을 갈때마다.
이동지라는 사람과 같이 행동을 했다.
어느날 평양 변두리에 위치 해 있는 큰 저수지에 구경가면서 들린곳이 평양 바로 변두리 판자촌이였다.
아주 낙후된 판자촌이였다. 난 놀래서 저건 뭐야 했다 그러나 내 물음을 답를 하지 아니했다.
그 이동지라는 자도 운전 기사도 침묵을 했다.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여러곳 중 하나가 그 판자촌이였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사회 주의는 모두 평등하게 잘 산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평양시에 판자촌이 있고
가끔 허리가 심하게 굽어있는 할머니는뗄깜을 질머지고 평양 체육관 앞마당을 지나는 것에 놀랍게도 여러차레 보았다.
그런데 왜 그 이동지라는 자는 나에게 그런 판자촌을 보여 주었을까?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을 해보지만 나의 자문 자답은 내 행동을 실험해보기 위해서였으랴!

ㄹ. 어느날 난 이동지라는 자를 졸아댔다. 머리를 여자들처럼 파마를 해야겠다고 근 한 일주일을 졸아댓다.
그런 어느날 창광거리 당 간부 부인들만 간다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을 여자들처럼 파마를 했다,
그래서 학생들의 웃음바다를 만든 적도 있다.

ㅁ. 평양 큰거리 복판에 차선이 한개 외에 양쪽에 또 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김일성 수령님만 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이에 난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인민들과 같이 사신다는 분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다는데에 놀라지 않할 수다 없었다.
모스코바 길과 같다.

오늘도 난 인도라는 나라 생각이 떠 올랐다.
난 언젠가 ’봄바이(Bombay)’ 윗 도시 ’암다바드(Ahmadabad)’ 라는 도시에 위치한 ’모하트마 깐디(Mahatma Gandi 1869-1948)’ 박물관을 갔었을때
그곳 도시에는 차선이 없다.
사람, 차, 개, 염소, 소들이 모두 같이 오고 가는데도 사고가 없다는 것을 기억케했다.

ㅂ. 또 5월 화창한 어느봄날 우린 야외로 나가 운동을 했다.
그 장소는 릉라도섬 잔디밭에서 운동을 하고 점심을 했는데 아주 푸짐하게 잘 차렸다.
나야 그런가 보다 하며 어서 먹자고 학생들에게 말을 해도 먹지를 않고 주저 주저만 했다.
어서 먹자고 독촉을 해서 먹게 되었다.
그런데 지도원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한 학생이 가깝게 와서 귀속말로 이 음식은 당간부들이 먹는 음식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음쯕 놀란 나의 말은 오늘부터 너희들은 다 당간부다라고 해주었다. 
그러면서 난 속으로 놀랬다.
왜 당 간부는 잘먹고 서민들은 그렇게 못먹는가고 말이다.

이것에 난 기분이 매우 나뻤다.
그러던 중 한 두번쯤 될 것이다.
당 간부급쯤 되는듯한 자들의 연회장에 초청받아 갔었다.
대단히 품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으면서도 내 속은 편하지 않았다,
언제 하루는 술이 조금 취해서 김지도원이라자에게 말했다.
당신이 뭔데 뭘 날 지도할게 있다고 졸졸따라다니는가고 불평을 했다.

ㅅ. 1단 심사를 보기 위해서 ’화랑(화랑도)틀’을 가르쳐야했고 3단 심사를 보기 위해서 ’유신 (김유신) 틀’을 가르쳐야 했다.
한 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화랑’과 ’유신’은 나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나쁜 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 있어 비교가 되는 것이라고 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였다.
지금까지도 그 학생에제 정직한 답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을 한다.
그 학생은 나보다 역사 의식이 높았다.
그래서 1985년부터 난 주장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ITF 태권도를 가르치고있는 최홍희 아들 최중화에게도 말했다.
니가 최홍희 아들이라면 ’ITF 태권도 24 틀’들의 명칭들을 모두 다 바꿔야한다고 왜,
모두 식민사관이고 동작들은 모두 왜놈들의 가라데 동작들과 200% 같기 때문이다라고 해주었지만
그는 답을 할만히 역사 의식이 있는 자는 아니였다.

3. ’고당틀’을 ’주체틀’로 바꿨다.
졸업 시범을 최홍희 총재와 김일 부주석과 허정숙 서기국장을 모시고 평양 체육관에서 했다.
이때 모두 시범을 했다.
북녘 태권도 시범에서 유명한  종합격파는 양쪽 손, 발, 앞주먹, 등주먹, 손날, 등손날, 손끝과 팔굽으로 차기 등등
여러가지 동작들로 벽돌과 기왓장을 송판을 한사람이 시원 시원하게 깨는 동작들이다.

바로 이 동작들이 나의 주특기 시범 종목이다.
이것을 가르친 덕으로 북 태권도 시범들은 어디에 가서나 인기를 독찾지한다. 
그러면서 본인도 한 ’틀’을 했는데 ’고당틀’이라는 것을 했다.

기독교 장로  ’조만식 선생’의 호 ’고당틀’ 시범을 보인다고 말을 한 것을 허정숙 여사는 듣고 최홍희에게 ’ 고당’이 뭐요?
반동분자인데 어떻게 ’ 고당이 다 있오 했다.
분노한 허정숙 여사의 말이 들릴 정도로 다구쳤다.
태권도는 궁금한것이 참 많다고하셨다.
그 말 뚯은 받아주는데 여러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당틀’이 ’주체틀’로 바꿔 졌다.
이런 태권도를 받어준것은 국제(International) 기구가 필요했고
경제적인 이익도 있기 때문이였을 것으로 합리적으로 추산해본다.

그 ’주체틀’이 발표된것이 1984-5년경이다. 바꾼것은 참 훌륭했다,
그러나 ’주체틀’을 만들여면 ’주체 사상’에 대한 지식과 ’세기와 더불어라’는  북녘의 경전을 여러차레 읽고
그에 대한 철학을 충분히 이해 하고 동작들을 하나 하나 정중하게 만들어서
’주체틀’을 만들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왜놈들의 정서인 당수도 /가라데 동작들을 그대로 이 저 형/型들의 동작들은 도용/표절하여 만들었다는 것은 
다시 북녘의 ’주체’ 를 왜놈 정서에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중근(안중근)틀, 3.1틀, 충무(이순신)틀 등등도 마찮가지다.
부끄러움과 창피를 알때부터 발전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본인은 부끄러운 ’태권도’를 ’주체도’로 서서히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가 ’반북’이라고
베이찡에 위치한 ’북 보위부 단군’이라는 직원에게 엄청나게 인격 모욕과 매도를 당했다.
그 인권 모욕은 그동안 국정원에서 당했던 것은 비교 할 수가 없었다.

불의들과 타협이 없는 철저한 반미자에게
61년 도복을 입고 산 자에게
태권도 9단 짜리가
태권도 4개국을 개척 큰 사범이요.
전all 무도 윤리 학회를 창립했고
물흙길을 창시한 자요.
북조선의 국제 사범 2기생을 가르킨 스승에게 
또 오지리 비엔나에 ITF 본부를 차려준자다.

그런 나에겐 감사는 고사하고 엄청난 인권 모욕을 했다. 
그 모욕자는 누구고, 왜, 그 이유를 난 또 쓸 것이다.
그 모욕은 오늘도 용서가 않된다.

4. 나는 무엇을 절절히 느끼였는가?

나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내말을 잘 듣지 아니했다. 그런데 김지도원 말은 잘 들었다.
가끔 똘똘하게 생긴 젊은 사람들이 내 숙소로 찾아와 혹은 다른 장소에서 여러가지로 질문들을 했다.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고,
서울과 평양의 차이 등등 –

지금 생각을 해보면 나를 실험해보기 위해서 이들은 모두 보위부 직원이였으랴!
그래서 김지도원이라는 자가 나를 남쪽 첩자로 의심하며 모랐지면 크게 협의가 없어서
무사히 나는 평양을 6개월 후에 떠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결국 최홍희와 그 김지도원의 조작 으로 본인은 ITF 태권도에서 제1의 공로자는 희생되였다.
그랬어도 그 몇년후 순해빠진 본인은 새로운 이기영 사무총장의 절절한 부탁으로 내 이름으로된 ITF 본부의 경리 등등의 이름을 아무런 보상도 받지도 않고
밀닌 내 봉급도 받지않고 군소리 한마디도 없이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왜 우리의 꿈에도 소원인 민족통일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동 유럽 나라들에 나와 있는 나에게 태권도를 배운 그 제자들은 엽서한장은 고사하고 전화 한 통화도 없다.
스웨덴 ITF 태권도 대표를 만나면 나에게 안부를 물어오기만 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 국은 자기 조직에 예속이 되어있는자와 조선을 찬양하는 자야만 한다.
여기에 인간의 주체와 자주가 전혀없다.

이들은 누구든 의심부터하는 아르레기성을 보이는 자들이다.
우리의 꿈에도 소원인 민족 통일에 어떤 종류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난 질문이 많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자다.
오직 수령과 장군님만 찾으면 만사가 형통하다고 말하며
또 주체라는 이름으로 모든 뻥들을 다 – 덮어져 버렸다고 말한 탈북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그렇게 해서 똘똘 뭉쳐지게 한 것이 왜놈 왕을 신으로 만들어 뭉친것과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앞세워 뭉친것보다
더 강해졌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인가?
다시는 외세에 침략당해서 종이되는 것보다야 훨씬 우수하다고 봐야할 것이여!

1985년에 늦게 깨였지만 그동안  뭘하고 이제샤 그 진실을 말하는것인가!
때가 없었다.
그래서 늦게 말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이렇게 늦게라도 말하지 아니하면 옳그(무도)인의 양심이 견딜 수가 없이 괴롭기 때문에 이제라도 이실직고하는 것이다.
이 엉털리 태권도가 조선의 정통 무술이라고 거짓으로 사기 치지 말고 정직히 발전되길 바란다.
지금 보이지 않는 후손들을 더 부끄럽게 하지 말자고!

4350(2017)년-4월10일.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인간이 살면서 100%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사람이 권세를 지녔을 적에 그것을 남을 위해쓰면 겸손해지고
자기를 위해 쓰면 교만해진다.
남쪽에 정치인들과 국정원 요원들과
북쪽에 정치인들과 보위부 요원들은 진지하게 세겨 들어야 할 것이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한국이라는 나라 정치는 자주가 없고
백성들은 자주를 고함친다.
조선은 나라 정치가 자주국이지만
인민들은 자주가 없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한가지 빠진게 있다.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기름 한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벤스차를 타고 다니니 매일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였다.

그래서 자전거를 한대를 달아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루는 그 차를 따 돌리고 걸어서 숙소까지 왔었다.
그뒤 발이 불어터 고생한 적도 있었다.

그때 유경 호텔을 처음 기초를 시작할 때였다.
웅장한 묘향산 국제 박물관에서 선물들을 구경하며 놀았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