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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피해자 이창복 “가해자가 피해자 집을 압류한 기막힌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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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희복 작성일17-04-02 11:29 조회1,99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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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인혁당 사건 피해자 이창복 “누가 누구를 ‘법대로’라 말할 수 있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구속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범죄사실을 인정하거나 국민에게 솔직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 전에도 주변의 많은 건의에도 정수장학회·영남대·육영재단 등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집 센’ 박근혜가 그나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과한 ‘사건’이 있다. 1975년 4월 자신의 아버지가 자행한 인혁당 재건위(인혁당)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해 8명을 사형에 처하고 20여명을 장기간 투옥시켰다.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이날을 국제사법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했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 다음날인 4월 9일 전격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국제인권단체의 극렬한 항의와 더불어 ‘한국은 야만국’이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2012년 9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적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킨 결과를 가져왔다”면서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한 ‘악어의 눈물’이었다. 이는 그가 대통령이 되어 사과를 이행하기커녕 부친 못지 않은 ‘잔혹함’과 ‘추악함’을 벌인 사실에서 명백히 입증된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인 2013년 7월, 인혁당 사건 피해자 77명에게 지급된 보상금 일부를 반환하라는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 소장이 날아들었다. 소송 원고는 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고, 억울하게 사람을 죽인 국가정보원이었다. 졸지에 피고로 전락한 인혁당 피해자들은 탄원서도 내고 법정투쟁을 했지만 결국 모든 재판에서 졌다.

■박근혜 정권의 ‘보상금 일부 반환’ 소송

2017년 3월 3일 인혁당 피해자 이창복 선생(79)은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으로부터 한 통의 판결문을 받았다. ‘부동산 강제경매’ 사건 결정문에는 “별지 기재 부동산에 대하여 경매절차를 개시하고 채권자를 위하여 이를 압류한다”고 쓰여 있다. 박근혜가 ‘진심으로 사과한’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이창복은 왜 국가로부터 채무자 신분으로 전락해 살던 집을 압류당해야 했을까.

“(허~허~허, 그는 허탈한 웃음부터 지어 보였다) 살 만큼 살았지만, 죽을 수도 없고…. 모 종편 프로그램에 산속에 들어가 사는 프로그램이 있더군. 나와 집사람은 열심히 본다. 터무니없는 박근혜 정권과 싸우느니 ‘산속에 들어가 흙이나 파며 살자’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돈인가. 잡혀 가 사람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모진 고문과 사건조작을 겪고….”

그는 괴로운 과거를 회상하기 싫었다. 그가 살던 집이 압류되고 경매 부쳐진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오랜 법정투쟁 끝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2009년 민사 1심 판결로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액의 65%를 먼저 받았다. 위자료 산정 기준은 당연히 불법행위 발생 시점으로 이는 오랜 판례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위자료를 유죄가 확정된 1975년 4월 9일부터 지연손해금(늦게 지급한 이자)을 곱해 받았다.

그런데 이후인 2011년 대법원(박시환 대법관)은 과거사 사건의 위자료 산정 시점을 ‘최종 변론 종결시점’으로 바꾸었다. 이유는 상당한 통화가치의 변동으로 과잉배상이 된다는 것이다. 오래된 과거사 사건의 경우 위자료보다 지연손해금으로 인한 이자가 많은 경우가 있다. 뒤늦은 대법원 판례 변경으로 65%의 배상금을 받은 피해자 77명은 오히려 돈을 돌려줘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선생과 그 가족들은 10억원 정도의 배상금과 위자료를 받았다.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8년간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을 감안하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다. 피해자들은 받은 돈으로 그동안의 빚도 갚고, 자식들도 주고, 서로 돈을 출연해 ‘49평화통일재단’을 만들었다. 다시는 자신들과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나와 아이들에게 지급된 배상·위자료 10억원 중 5억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월급 차압을 통해 받은 배상금을 돌려줬다. 그런데 나는 빚 갚고, 자식들 나눠주고, 이 집 장만하다 보니 5억원이 어디 있나. 게다가 부당하다고 재판하는 동안 매년 20%의 가산이자를 물렸다. 그래서 돌려줘야 할 돈이 10억원 가까이 된다. 배상한 돈 모두를 회수하겠다는 것이다. 허~허~.”(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이창복씨 / 이상훈 선임기자
인혁당 사건 피해자 이창복씨 / 이상훈 선임기자
이 사건을 조작한 당사자로 처벌 받아야 할 국정원이 원고가 되고, 피해자들이 피고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노인들인 당사자들의 배상금은 좀 참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국정원은 냉정하게 ‘안 된다’며 거절했다. 끝까지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누가 법대로를 주장하는지….”
대법원 판례 변경은 전원합의부에서 해야 하는데, 2011년 소부(3명의 판사만 참여)에서 했다. 당시 대법원이 절차상 위법한 판결을 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렇다. 이는 명백한 법원조직법 위반이다. 우리도 그 문제를 재판에서 제기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판 분위기는 이명박 정권 때부터 꼬이더니 박근혜 정권 들어 완전히 달라졌다. 유신시대 사법부로 회귀했다. 손녀들이 탄원서도 내고, 청와대 앞에서 시위도 했지만 정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완전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멀쩡한 대낮에 이런 일이 ‘법의 이름’으로, 그것도 신성한 법정에서 벌어졌다. 49평화통일재단은 “사법살인을 통해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낸 이들이 지금에 이르러 이자 계산방식 운운하며 소송을 제기한 것은 참으로 황당하고 가혹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에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기관도, 언론도 별로 없었다.

이는 1974년 이 사건을 조작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 바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상징성에서 쉽게 설명된다. 그는 “김기춘에게서 꼬이고, 박정희에게 내 젊음을 잃어버리고, 늙어서는 그 딸에게 당했다”면서 “두 번이나 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고 허탈해 했다. 이 선생은 아들 뻘인 기자에게 끝까지 존대말을 했다.


■“배상금 10억원 중 5억원을 다시 내놔라”

이창복 선생은 1938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적에 38년생으로 돼 있지만 실제는 더 먹어 80이 넘었다”고 말했다. 해방 후인 194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7년 북에서 인민학교를 다니다 아버지와 함께 월남했다. 그런데 월남한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 거의 고아로 온갖 고생을 했다. 그는 돈도 벌었지만 나이 스무 살이 돼서 ‘돈이 다가 아니다, 사람은 공부를 해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깨달았다.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야간고등학교에서 공부해 23세에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한학을 배우고 남한에서 정규교육을 배우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어학이 쉬웠다”면서 “독학한 영어·독일어는 대학 때도 가장 잘해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감옥에서 일어·불어·중국어도 공부했다.

대학 때 시위를 하는 소위 운동권이었나. 구속된 이유는 무엇인가.
“학생시절 시위에 나서거나 유인물 한 장 만들어 뿌린 적도 없다. 서울대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명지대·국민대에서 시간강사를 했다. 박사과정 준비를 했다. 내가 이북에서 월남해 북한체제에 대해서도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칸트 철학의 자유론에 대해 공부하면서 사회적 정의, 국가적 정의에 대한 의식을 갖고 학술적으로 토론했을 뿐이다. 6·3사태 시위, 3선 개헌에 반대하는 후배들을 ‘잘한다’고 격려하고 유인물을 돌려본 것이 전부였다.”
4월 9일 대법원 상고 기각 후 채 하루도 안돼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4월 10일 집사람이 면회 와 그 소식을 전해줬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한동안 그는 말을 잇지 못하다 결국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지난 3월 28일 경기 파주 낙원묘지에서 이창복 선생을 비롯한 사월혁명회 회원들이 인혁당 사건 희생자 우홍선·김용원 선생을 참배하고 있다. / 사월혁명회 제공
지난 3월 28일 경기 파주 낙원묘지에서 이창복 선생을 비롯한 사월혁명회 회원들이 인혁당 사건 희생자 우홍선·김용원 선생을 참배하고 있다. / 사월혁명회 제공
■“국가가 단 한푼까지 되찾으려 한다”

그가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때 그는 아이 셋을 둔 가장이었다. 그는 “끌려갈 때 막내가 갓 돌이 지났을 때였는데 감옥에서 나와보니 그 얘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더라”고 말했다. 아내가 혼자 3남매를 키운 것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1982년 가석방으로 모두 풀려났다. 하지만 그들에게 보호관찰 대상자라는 올가미가 계속 씌워져 있었다. 그는 “92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보호관찰 대상자로 매달 경찰이 찾아왔다”면서 “아이들 친구들이 ‘네 아버지는 간첩이라지?’라며 놀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하던 학원강사를 하기 위해 서류를 내고 합격했다. 학원에서 신원증명서를 떼어오라고 했는데 ‘긴급조치 1·4호 등 위반’이 명시돼 있었다. 학원에서는 질색을 하며 ‘안 된다’고 반려했다. 취직하기 틀렸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학원을 차려 영어·독일어를 가르쳤다. 다행히 학원은 잘됐다. 그러나 고문과 투옥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할 수 없어 계속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생각해 모두를 정리하고 산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니 가슴이 진정되더라. 그렇게 해서 겨우 살아났다”고 말했다.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는 정신적 후유증으로 ‘상이’ 판정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은 고문으로 인한 조작이라는 결론을 받았다. 2007년 드디어 인혁당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8명의 희생자들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인혁당 사건은 실제적·역사적으로 복권됐지만, 이미 8명의 희생자는 세상에 없었다.

이 선생은 “나는 바보같이 민주화보상심의위에 상이 보상 신청도 안하고, 8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최소한의 보상인 형사보상금도 신청하지 않았다”면서 “그렇지만 국가는 나에게 끝까지 단 한푼의 돈까지 되찾아가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국정원의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을 보면서 박정희 시대를 떠올렸다. 외교문서까지 조작한 것이 그때보다 진화됐을 뿐이다. 이에 그는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할 권력을 정권 유지를 위해 쓰는 그런 권력이 오래 가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을 보면서 ‘사필귀정’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20회나 이어진 이번 촛불시위에 단 한 번을 빼고 19번 참석했다. 그는 4월혁명회 회원으로 회원 중에서도 나이가 많지만 이 촛불시위만큼은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철 안에서 만나는 태극기 시위대(그 중에는 자신보다 어린 친구도 많았다)에게 ‘당신들 우리 근·현대사 공부를 했나’ ‘뭐가 정의인지 알고 처신하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대통령이 물러나고, 비서실장이 구속되는 등 세상은 바뀌었지만 그에게 닥친 현실은 그대로다. 그가 살던 집 경매는 8월쯤 개시될 것이라고 한다. 이 선생은 “요즘 집사람과 매일 산에 오르며 편안하게 생각하자, 이 집도 다 짐이다. 갈 데가 다 됐는데, 그 짐을 비워주는 것이 오히려 고마운 것 아니냐”고 위로한다. 그는 이렇게 허탈하게 말하며 가벼운 헛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헛미소는 아주 진했다. 그 속에 파란만장한 80년 현대사가 응축됐기 때문일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4011633001&code=940100#csidxb6e2a27b0f8d69aae733f2c0e98ec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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