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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평양에서 6개월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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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림원섭 작성일17-03-24 17:54 조회1,92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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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평양에서 6개월 살았었다.

그런데 난 사진 한장도 없다.
난 내 가족끼리 찍은 사진까지 주지 아니했다.

그간 난 참 비겁했었다. 이제부터 난 더 이상 비겁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글을 쓰며 앞으로 많은 글들을 써야 할 듯하다. 앞으로 이 내 글에 엄청나게 헐뜯었던 한국에 국정원은 흥미가 있을 것이고 북조선 보위부 사람들이 얼마나 어떻게 나에게 공갈 협박과 또 헐뜯고 매도할지 모르겠지만 난 내 진실을 한점 부끄럼 없이 있었던 것 그대로 보테지도, 빼지도 않고 그대로 이실직고 할 것이다. 판단은 현명한  독자들이 할 것으로 본다.

때는 약 한달전 2017년2월28일날 보통 나는 늘 쓰는 글씨체 그대로 간단히 쓴  - 친일파가 만들은 태극기, 애국가, 태권도라는 글을 써서 민족통신 민족게시판에 올렸던 내 표현의 자유를 북조선의 공인 ’ 단군’이라는 자는 내가 말한 태권도에 대한 것이  ’반북’이라고 엄청난 모욕을 당하고부터 난 북조선에 데해서 정내미가 뚝 떨어지며 내 꼭지가 확 돌았다. 그간 감춰두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이 휘몰려왔다.

태권도는 올림픽 종목으로 한국것도 조선것도 아니다. 이 지구것이다. 그러나 종주국이라고 하는 남북 코리아땅에 식민사관으로 만들어진 부끄러운 태권도 무술을 이제 정직히 서서히 바꿔 가야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나 북조선의 공인 ’단군’이라는 자는 반북이라고 나를 무자비하게 인권 모욕을 했다.

그동안 거대한 우리의 꿈에도 소원인 민족통일 앞에 내가 북조선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억울하게 당했던 많은 것들을 침묵으로 덥어 두었었다. 영원히 덮어둬 침묵하려했었다. 왜 혹시 우리의 꿈에도 소원인 민족통일에 조금이나마 방해가 되여 흠이 될까봐 두러워서였다. 그런데 ’단군’이라는 자에게 엄청나게 인권 모욕과 매도를 당하고부터 나의 37년 북에 대한 짝사랑은 완전히 접어 끝냈다.

나는 그 동안 이래도 참고, 저래도 참으며, 참 많이 참았다. 그러면서 군사강국이 된 북이기 때문에 줄기차게 선전 찬양해왔다. 왜 이제 우리민족에게는 강자의 침략과 예속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인민들이 즐겨하는 한 나라의 무술에서 즉 태권도 분야에 대해선 단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제 바꾸자고 한 것일 뿐이다. 그게 반북인가?

이제까지 근 40년 동안 남쪽의 불의들 만을 줄기치게 소리쳐오면서 많은 공부도 겸해서 하게 되였다. 물론 계속 고함도 치겠지만 이제 북쪽에 불의들도 고함쳐야 되겠다는 것이다. 내가 본대로 느낀대로 들은대로 그리고 내 자신 스스로 체험한데로 주저없이 내 양심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이 쓸 것이다.

나는 그 동안 남쪽 국정원과 줄기차게 헐뜯음과 매도를 당해왔지만 이젠 북쪽 보위부와 줄기차게 헐뜯음과 매도 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 그 동안 남쪽 국정원은 해외 통일 인사들을 빨갱이로 만드는 일에 시간을 소모했고, 북쪽 보위부는 해외 통일인사들을 빨갱이가 아니라고 시간을 소모하는 것 갔다. 
-- @ --
절대로 가서는 않되는 땅 북조선 평양에서  1982년1-6월까지 6개월을 살면서 조선 태권도 국제 사범 제2기생을 가르치며  토, 일요일까지 심사로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일요일은 시간을 낼수도 있었지만 완전 통제를 당하고 살았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 사진들도 제대로 찍지를 못했고 겨우 사진을 찍는 곳은 태권도를 가르치던 평양 체육관 앞과  내가 기거하는 초대소 앞 마당뿐이다.

6월달에는 가족이 평양에 와서 금강산을 이동지라는 분과 같이 갔었고 또 묘향산 국제 박물관은 어떤 여성분이 안내를 해줬다.  파리에서 외교관 출신이였다는 이동지라는 친절한 이분은 우리 가족 사진들을 많이 찍어주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나에게 단 한장도 없다. 금강산과 묘향산에 가서 찍은 사진들은 오직 내 가족사진들 뿐이다. 그런데도 난 단 한장도 없다. 

나를 열심히 따라 다니는 김일성 대학 철학과 출신이라는 김지도원이라는 자가 사진을  빼준다고 필림을 거져가 놓고 다음주에 가져오겠다, 또 다음주에 가져오겠다. 또 또 이 저 변명으로 미뤄온 이자의 거짓말 은 사람을 완전히 질리게 했다. 나중에는 이자가 도깨비로 보였다.

이자는 김일성 대학에서 거짓말 철학만 배웠나 보다. 이 김지도원이라는 자는 내가 평양을 떠날 때까지 필림은 고사하고 사진을 단 한장도 주지를 아니했다.  나는 이 김지도원의 거짓말 때문에 북조선의 신의가 문어졌다. 하나를 알면 10과 100을 안다 했던가! 
 
지금까지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이 김지도원이라는 자는 왜 나를 열심히 남조선 첩자로 조작하여 만드는 일을 했는가다. 난 나의 잘못이 무엇이였는가를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딱 한가지가 있다. 이 김지도원이 나에게 추천한 것이 있다. 평양 어린이 공원장으로 추대한것이다. 그러나 난 단호히 거절했 다. 왜, 나는 그럴만한 자질이 되여 있는자가 아니고 오직 아는 것은 태권도 사범질 뿐이였기 때문이다.

그후 난 평양 체육관과 그 초대소만을 오고 가는 것으로 완벽히 통제되였다. 또 더 구체적으로 최홍희의 행동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김지도원과 최홍희 둘은 짝짝꿍 날 첩자로 매도하여 희생물로 만들어 자르는데까지 성공을 했다고 본다. 그덕으로 최홍희는 국제 태권도를 완전히 북에 심게되는 개기가 되였다고 판단되며 또 미국의 개였던,기회주의자, 희대의 사기꾼 최홍희는 북에서 영웅도되고 열사능에 까지 묻히게 되였다.

오지리 비엔나에서 내 이름 림원섭으로 국제 태권도 연맹을 창설할때  김지도원이라는 자는 나도 모르게 비엔나에까지 와서 뒤에서 내 동태를 감시  감독했다고 본다. 그이유는 내가 비엔나에서 쫓겨 날 때 갑짜기 나타나 밑도 끝도 없이 나에게 한마디 한 것을 ’평양을 비방하지 마세요’ 한마디를 하고 내 말도 나오기 전에 도망가듯 살아졌기 때문이다.

김지도원이라는 거짓말쟁이 뻔뻔스런 이 놈이 갑짜기 나타나 난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잊지 못하고 할 말을 머리에서 찾고 있을 때  이놈은 잽싸게 사라졌다.  지금도 내가 후회를 하는 것은 이 거짓말쟁이 이  개새끼야 내 사진 내놔라고 말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다.  내 가족끼리 금강산에서 묘향산에서 찍은 사진들까지 압수할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이 가족사진이 국가 안보에 무슨 영양이 있단 말인가 말이다.

오지리 비엔나에서 국제 태권도 연맹을 내 이름으로 창설할때 일어난 기간맥힌 거짓말들을 다음에 또 쓰리라!

지금까지 내가 평양에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이 딱 한가지가 있다.

1982년4월15일은 김일성 주석의 70돌 생일때 평양시 주체탑 완공식 대 축제가 있었다. 이때 내가 살던 초대소는 유명한 평양산원 뒤에서 차로 약 한 5-7분 정도 가면 있는 동내다. 이 초대소는 2층 건물로 좀 고급스런 단독 주택이다. 그런데 이 거창한 행사에 외국에서 손님들이 많이 오는 바람에 나는 다른 초대소로 잠시 옮겨야만 했다. 그 초대소는 평양 변두리 어느 야산 중턱 아담한 시골 단독 주택이였다.  이 초대소에 가끔 김일성주석께서 지난 항일 투쟁시 드셨던 옛날 음식을 자시고 싶으면 꼭 찾아오시는 초대소라고 자랑이 대단했다. 

여기에 요리사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내가 전주에서 왔다고 하니까 전주식 음식을 해주시는데 제 어머님 음식과 거이 같아 매우 맛이 좋았다. 그 중 한 아주머니가 내가 사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사진 한장을 찍어 빼줄 수가 있냐며 자기는 사진한장도 없는데 군대간 아들에게 주고 싶다한다. 그말에 꼭 빼서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며 사진을 여러장 그 초대소 앞마당 화단에서 찍었다.

그런데 빼준다고 약속했던 그 사진 한장도 드리지 못하고 나는 평양을 떠나야 했다.  지금은 기억조차 못하는 그 친절한 아주머니에게 참으로  죄송하다. 그 아주머니는 이 지면을 보질 못하겠지만 그 아주머니께 대단히 죄송하다고 이 지면을 통해서 사과라도 해야 나는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듯하다. 

그 착한 아주머니는  사진을 어쩌면 오늘까지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 한국인의 전주 사람은 그 아주머니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였다.  그것에 대한 내 자존심은 몹시 상했다. 나는 어떤 자라할지라도 거짓말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를 제일로 싫어하는 자다. 아주 저주하는 자기 때문이다.

북조선에  6개월 살면서 – 이 김지도원이라 자가 빼준다고 가저간 여러통의 필림도 사진 단 한장도 주지 않는 이 인간쓰레기를 기억조차 하기 실지만 이 딱 한가지 착한 아주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의식에 3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마음은 편하지 않다.

4350 (2017)년 0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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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이 제 글을 읽는 분들이여!
꼭 제발 부탁합니다.
죽어도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그 김지도원이라는 놈은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에까지 이간질을 한 놈이다.
그 인간쓰레기가 출세하여 지금은 계급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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