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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빨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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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란 교수 작성일14-07-21 16:03 조회2,268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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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빨갱이였다> - 김정란 교수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순교자도 한 분 계시고, 어머니 쪽으로도 내 가족이 기독교와 가지는 관계는 그 연원이 깊고 특별하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 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요컨대 나는 기독교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후,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들이 전생애를 투입해 넣은 교회를 떠나지 못하셨다. 정치 문제로 이따금 당회장 목사님과 충돌하곤 하시던 내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복음주의에 소극적으로 안주하셨다. 당신이 당회를 그만두시는 정도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딸은 당신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당신의 정신 안에 설정하신 울타리 너머로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종교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딸은 아버지의 울타리 너머로 아주 넓은 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택에 딸의 기독교적 이상은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같다. 딸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셨던 것 같다. 종교문제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충돌은 늘 거칠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사도 바오로의 성경구절을 적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울고 있는 내 책상 위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고 나가시고는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적 이상은 결코 지금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예수 대신 미국을 섬기는 크리스찬이라니, 수많은 죄없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되던 악법을 폐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극우단체와 한 몸이 되어 시청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법석을 떠는 크리스찬이라니.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자가 크리스찬이라니. 그들은 나에게 이미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들은 사제계급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쳐댔던 어리석은 유태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사제계급과 정치가들이 그어준 존재의 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을 조롱했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상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를 분양해주는 자는 세속의 제일인자인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왕, 우주인 바로 그분, 존재의 무한 허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일년에 수십억씩 긁어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 딸들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찬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것은 네 말이다.”

출처 : http://www.dailyseop.com/data/article/10000/0000009356.htm
강도리
<예수는 빨갱이였다> - 김정란 교수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순교자도 한 분 계시고, 어머니 쪽으로도 내 가족이 기독교와 가지는 관계는 그 연원이 깊고 특별하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 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요컨대 나는 기독교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후,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들이 전생애를 투입해 넣은 교회를 떠나지 못하셨다. 정치 문제로 이따금 당회장 목사님과 충돌하곤 하시던 내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복음주의에 소극적으로 안주하셨다. 당신이 당회를 그만두시는 정도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딸은 당신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당신의 정신 안에 설정하신 울타리 너머로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종교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딸은 아버지의 울타리 너머로 아주 넓은 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택에 딸의 기독교적 이상은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같다. 딸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셨던 것 같다. 종교문제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충돌은 늘 거칠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사도 바오로의 성경구절을 적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울고 있는 내 책상 위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고 나가시고는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적 이상은 결코 지금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예수 대신 미국을 섬기는 크리스찬이라니, 수많은 죄없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되던 악법을 폐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극우단체와 한 몸이 되어 시청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법석을 떠는 크리스찬이라니.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자가 크리스찬이라니. 그들은 나에게 이미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들은 사제계급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쳐댔던 어리석은 유태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사제계급과 정치가들이 그어준 존재의 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을 조롱했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상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를 분양해주는 자는 세속의 제일인자인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왕, 우주인 바로 그분, 존재의 무한 허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일년에 수십억씩 긁어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 딸들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찬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것은 네 말이다.”

출처 : http://www.dailyseop.com/data/article/10000/000000935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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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예수는 빨갱이었다는 완벽한 말씀을 주야로 적극지지합니다.
모세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색빨간 빨갱이었다고 본인은 말합니다.
천하디 천한 자본주의 사회들인 대한민국과 미국과 일본과 이스라엘에서는 옳은 말을 하면 다 빨갱이 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빨갱이들은 정의의 투사이고 절세의 애국자님들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님의 댓글

학생 작성일

김정란 교수님이 뉘신가요?

시인동아리님의 댓글

시인동아리 작성일

[한국 초대석] 상지대 김정란 교수

우리사회를 향해 서습없이 칼을 들이댄 열혈지성


결국, 최신작에서부터 그에게 접근해 들어 가기로 한다. 그에게로 가는 길을 찾는 데는 그 편이 가장 수월해 보이므로. 교수, 칼럼니스트, 행동주의자 등 그가 우리 사회를 향해 펼쳐 온 풍경의 한 컷, 한 컷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싶으면서도 서로 외떨어진 편린이다. 요컨대 그녀는 다층적이다. 그렇다면 명징한 이미지로 고착돼 있는 시어들 속에, 그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닦아 두지 않았을까? 미상불 그녀는 시인이기도 하므로.
‘나는 딴전을 피운다 그녀를 따라 갔다간 살아 남지 못 할 것 같은 불안을 이겨 내지 못 한다 나는 딴전을 피운다 늘 그렇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매혹되어 있다’(말, 길).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듯, 쉼표 하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대목은 어떤가. ‘그러나 이성(理性)인 눈물을 진실로 믿게 될 때까지 나는 세상의 거지가 되어 세상의 처마 아래에서 떨면서 밤을 세웠었다. 비명이 나지막한 노래가 될 때까지…’(어린 왕들의 말). 시인들이 만드는 문화 웹진 ‘이스끄라’(www.iskraweb.net)의 2월호에 발표한 최신작이다.
김정란(52ㆍ상지대 교양학부) 교수. 잘 들어 맞는 헌 옷처럼, 그에게 가장 편안한 호칭은 아마도 저 ‘교수’일 지 모른다. 어느 한 편에서 보자면 대단히 골치 아픈 교수이겠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어느덧 50줄로 접어 들었으니, 타협을 모르던 자신의 언행을 두고 저렇듯 매혹의 결과라며 눙쳐보려 하는 걸까?
천만의 말씀. 그에게는 열혈의 도가 조금도 눅지 않았다. 세상과 불화케 한 그의 뜨거움이란 이를 테면 이런 것들(최신작들이 실린 웹진의 이름이 러시아 혁명기에 볼셰비키가 펴낸 잡지의 제호를 그대로 따 왔다).
빨갱이가 된 행동주의자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가 한창 격론을 불러 일으켰을 당시, 서울 시청 앞에서 폐지 반대 시위를 벌인 국내의 보수 교회에 대해 퍼부은 일갈을 보자. ‘예수는 당대의 빨갱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 포털사이트 데일리서프라이즈에 게재됐던 글이다. 사회 현실을 외면하는 대형 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 보다 직접적으로는 예수대신 미국을 섬기는 교회를 공격화기 위해 예수의 본질을 격한 어조로 상기시킨 것. “평소 문제가 많다고 느껴 온 한국 교회가 마침내 그 같은 집단 행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밤에 1시간만에 썼죠. 통곡처럼 터져 나온 글이었어요.” 현직 목사를 포함, 100여통의 격려 메일을 받은 그 글은 개신교 인터넷 뉴스 도메인 뉴스 앤 조이로 옮겨져 더욱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 같은 해 12월.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에 대해 한나라당이 간첩 시비를 걸자, 같은 면을 빌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예광탄 하나를 쏘아 올렸던 것. “박근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자 박정희 씨에게 묻는다. 당신 아버지가 그토록 숱하게 조작해서 고문하고 찢어 죽였던 수 많은 가짜 간첩들의 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21세기 벽두에 또 다시 간첩 타령을 하고 있는가?”라며.

“야, 이 빨갱이 년아. 아직도 안 죽었냐?”역시 보수는 강인했고, 그 레토릭은 강렬했다. 1991년 대학 재단 비리를 보다 못 해 행동을 개시한 교수들의 진두에서 활약하던 그를 겨냥해 재단측이 뱉었던 그 말을 다시 듣게 되다니. 우편향의 논조를 펴 오는 어느 신문에 맞서 전개돼던 ‘안티 조선’ 운동의 선두에 선 그를 두고 보수 세력이 내뱉은 언사라며 당시를 돌이킨다. “강준만 씨의 영향이 가장 컸죠. 강 교수의 ‘김대중 죽이기’를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같은 주장을 받쳐주는 움직임이 문단에는 없다는 말을 듣고 결행했던 거죠.”
공교롭게도 자신의 문학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싹트던 때였다. 데뷔 25년만에 처음으로 번듯한 문학상, 소월문학상을 막 수여 받은 때였다. 거대 언론의 횡포, 침묵하는 다수에 분노한 그는 조굼瞿맡坪?인터뷰를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개마고원에서 발행하는 ‘인물과 사상’ 등의 지면을 빌어 그 ‘아픔’을 논리화시켜 갔다. “저의 대(對)사회 발언은 그 즈음 본격 시작했어요.”
‘불온한 반항인’으로 ‘빨갱이’를 규정 지을 수 있다면, 그 내력은 상지대 재단 비리를 둘러 싸고 교수들의 행동이 시작된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보따리 장사(시간 강사)로 새벽 기차에 몸을 싣고 상지대에 출근하던 당시, 사학 재단의 비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시험 답안지 채점에 일일이 관여하던 때였다. “집권당 소속 의원이던 재단 이사장이 새벽 서너시에 교수급 직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그런 짓 말라’며 협박하던 시절이었어요.”집요한 공작에 지쳐 자신도 지쳐 교수협의회 탈퇴서를 써 주리라 마음먹던 그 때, 통근 버스에서 졸고 있는데 선친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졸고 있는 딸에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모습이었다. 그는 ‘니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책망의 뜻으로 읽었다. 이후 그는 소위 불온 교수의 대열에 기꺼이 동참했다. 70명의 철야 농성자가 15명으로 줄어 들었지만, 그는 재단 비리를 고발하는 유인물을 돌렸다. ‘닭장차(시위대 연행 차량)’에 실려 구치소 신세도 졌다. 비리 재단과 4년을 싸운 결과 그는 승리했고, 정치와 사회에 비로소 눈 떴다. 그를 추인한 것이 강준만 씨의 글이었다.
안티조선운동 후유증 여전
그러나 안티 조선의 후유증은 지금까지 이어 온다. “이후 6년 내내 주요 잡지로부터 원고 청탁은 받지 못 했어요. 2월 중순에 한 문예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은 것은 해빙의 조짐일까. “개인적으로 친한 시인한테 들은 얘긴데, 일부 문예지는 아예 ‘그 여자와 놀지 마라’라는 말까지 했다는군요.” 어찌 그런 일이? 그는 “문학이 갖는 상징의 권력성이 공고한 때문”이라 했다. “저더러 ‘문학 평론 쓰지 마라. 다칠까봐 그런다’며 조언해 주는 사람도 있었죠.” 문학 평론을 두고 상징의 거래, 곧 정치 행위라고 하는 연유다.
그가 자신의 사회 평론집 제목을 ‘분노의 역류’라고 붙인 데는 그 같은 ‘정치’ 행위가 버젓이 행세하는 한국땅에 대한 공분에 가까울 것이다. 이번에는 대통령 탄핵 국면 당시 국회의원들이 보인 모습이 그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그의 뜨거운 언어를 접한 사람들은 “안으로 와서 정치 하라”며 제의도 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일도양단. “내가 정치를 못 한다는 건 내 스스로 알아요. 용기가 없어요.”

그래도 현정권에 고언을 하고픈 모양이다. “(노무현 정권은)대국민 설득 작업을 너무 등한시해요. 수구 세력의 에너지는 많이 떨어진 만큼, 자신감을 갖고 초심대로 진행해 달라는 거죠.” 단, 현 정권이 내세우는 합리주의가 도를 지나쳐 몰가치적ㆍ기능적으로 변해가는 점은 경계해야 할 것이란 충고다. 이기준 파동을 돌이켜 보라는 거다.
그의 ‘분노’는 헛되지 않았다. 자신을 모독하는 시를 문예지에 발표한 기성 시인과 잡지의 편집자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 훼손 등의 재판 1심에서 승소, 각각 2,000만원씩의 배상금 판결을 최근 받은 것이다. 송사 사건을 알게 된 네티즌들이 재판 비용으로 쓰라며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 300만원이 거둔 승리여서 더욱 값지다.
예수쟁이 집안 딸의 기독교 비판
기성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그는 자신의 표현을 빌면, “대단한 예수쟁이” 집의 딸이다. 아버지는 영락교회를 세운 장로였으며, 어머니는 전도사. 부모는 어린 딸에게 “무엇이든 네가 납득하지 못 하는 건 아니다 라고 할 것”을 가르쳤다 한다. 성심여고 2학년 “이미지의 습격을 받은” 그는 시인이 되어야 함을 운명적으로 느끼고 고전을 엄청나게 탐독했다. 외국어대학교 불문학과(72학번)에서 시의 아름다움보다는 인식 기능에 눈 떴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서울대 불문학과 김현 교수의 애제자로, 훗날 남편이 되는 동갑의 서정기 씨를 만난 것이 그 무렵.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너는 이미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남편의 공부 뒷바라지 등 생활에 쫓겨 1978년 에어 프랑스 서울 지점에서 근무했다. 1982년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따낸 남편을 따라 그르노블에서 5년을 살았으나, 사는 게 아니었다. “교포들 덕에 여기서 빌리고, 저기서 꿔다 살았죠. 차도 없이 끼니는 절반만 채웠어요.”빈한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보니, 둘 다 시간 강사. 잠재적 실업자 부부였던 셈이다. 남편의 친구인 황지우 시인이 지하에 세榕?사는 부부한테 한 말. “쌍(雙) 박사, 잘 살아라. (그러더니 그에게는)나무 뿌리보다 낮은 곳에 살 때, 좋은 시 많이 쓰십시오.”지금의 몸매는 당시 허기를 초콜렛으로 속이다 보니 간염에 걸려 비대해진 탓이라고.
역시 어머니는 어머니다. 두 아들 이야기 할 때 톤이 약간 올라가는 걸 보면. “큰 놈 범석(26)은 서울대 생물학과 나와 군대 갔고, 둘 째 재석(21)이는 일본 공연도 하고 음반도 낸 펑크 록 밴드 ‘스파이키 브래츠(Spiky Brats)’의 베이시스트죠.”
구할 수 있다면, 1997년 펴낸 시집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 돌아 보네’를 읽어 볼 것을 당부했다. 말마따나 고요한 분노의 시선으로 가만히 돌아 보는 자, 바로 시인 김정란이다. 그의 자기 규정. “약간 좌편향한 중도죠.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라고나 할까요?”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5-03-0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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