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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4권 20. 목단강 사람들속에서 - 오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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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3-16 12:03 조회1,9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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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단강 사람들속에서

오  재  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15성상에 걸치는 항일무장투쟁의 전 과정을 통해서 우리 유격대원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인민의 뜨거운 사랑과 지성어린 성원을 받으면서 싸워왔다. 그들은 진정 우리를 자기의 아들딸들로 간주하고 자기들의 념원과 지향을 실현해주기 위하여 직접 무장을 든 군대라는것을 확신하고있었기때문에 가장 어렵고 곤난한 때에도 목숨을 걸고 도와나섰다.

1944년 여름에 있은 일이였다.

나는 지휘부로부터 목단강시내의 적병력배치와 그의 무장상태를 정찰해올 임무를 받았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그 임무수행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일제는 이 시기 자기의 침략적본성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쏘만국경에 백만의 관동군을 집결하였다. 그리고는 도처에 화점과 비밀기지들을 설치했으며 특히는 목단강지역까지 포함한 국경지대를 특별구역으로 설정한 다음 삼엄한 경계를 하고있었다. 더우기 목단강시는 당시 적본거지의 하나로서 인민들이 숨조차 크게 쉴수 없을만큼 단속이 심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목단강시내로 들어가본적이 없었다. 다만 한두번 시주변정찰을 진행하는 과정에 지도를 통해서 시내정형을 짐작하고있을뿐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시내정찰을 위한 방도는 오직 그곳 인민들과 련계를 맺고 그들을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는 지난 목단강시주변정찰시에 최모라는 사람을 알게 되였다. 나는 그를 목단강북쪽 10여리 떨어진 산림속에서 만났었다. 그는 나무살 돈이 없어 시내에서 그곳으로 나무하러 왔던것이였다. 나는 우연히 그와 만나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과정에 원래 토목로동자였던 그가 한때 놈들의 비밀기지설치에 동원되였다가 공사가 끝나는 차제로 로동자들을 죽여버리는 놈들의 마수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나왔다는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 한번은 일제《토벌대》의 짐을 지고 산길을 가다가 힘이 진하여 쓰러지자 《비적과 내통한자》라는 구실하에 놈들에게 총가목으로 죽도록 얻어맞아 다리까지 상했다는 이야기며 그래서 지금은 로동판에도 못나가고 집에서 남새장사로 나날을 이어가고있다는 사정을 알게 되였다. 그런만큼 그는 일제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고 내가 준 초보적인 임무도 서슴없이 그리고 훌륭히 수행하군 했다.

나는 바로 이 동무를 찾아가서 그의 협조를 받으며 사업하려고 결심하였던것이다.

지휘부를 떠나 목단강부근의 어느 산고지에 이른것은 며칠후 이른아침이였다. 거기서 나는 한낮을 보내고 저녁녘에 철도로동자의 차림으로 큰길에 나섰다.

시내에 들어서는 길어귀에서 나는 경관에게 단속되였다. 가슴이 뜨끔했으나 당황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경관앞으로 갔다. 그놈은 나에게 까다롭게 이것저것 물으면서 어디를 갔다오는 길이냐고 따지고들었다. 내가 6촌동생의 결혼잔치를 보러 갔다오는 길이라고 《공손히》 대답한즉 그놈은 나를 아래우로 훑어보다가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목단강시내로 들어서게 되였다.

거리에는 일제헌병, 군대 그리고 위만경찰들이 욱실거리고있었다. 제집처림 네활개를 펴고 돌아다니는 놈들의 꼬락서니와 놈들의 갖은 학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인민들의 헐벗고 여윈 모습을 볼 때 나의 가슴은 답답하고 이가 갈리는것이였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위로해주고싶었다.

(여러분, 좀 더 참아주십시오. 오래지 않아 우리가 반드시 이 원쑤놈들을 쳐부시고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날을 가져다드리리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자기 사명의 중요성을 느꼈으며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매사에 높은 긴장성과 경각성을 가지고 대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최동무의 집주소는 내가 이미 들어서 알고있었지만 막상 찾자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을수도 없었다. 겨우 그의 집을 찾았을 때는 해가 꼬박 지고 어둠이 깃들었을 때였다. 주인은 마침 집에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자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의 손을 덥석 잡고 아주 능란한 어조로 소리쳤다.

《야, 동생이 아닌가. 어서 들어오게.》

그리고는 얼른 주위를 살펴보고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뜰안에는 팔리지 않은상 싶은 배추가 시들시들 쌓여있었다. 집안의 형편은 구차한 살림살이라는것을 여실히 보여주고있었다. 나는 그의 안해와 아이들을 소개받았다. 최동무는 가족들에게 오래전부터 말해오던 동생이 오늘에야 왔다고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안해만은 이미 내가 남편의 동생이 아니라는것을 알고있는 모양으로 인차 밖으로 나가 문밖에 서서 아이를 안고 망을 보고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았으며 필요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미 내가 오기전에 시내에 있는 적의 기계화부대며 병력 등을 비교적 상세히 조사해가지고있었다. 그러나 병영배치를 알기 위해서는 어쨌든 병영안에 들어가야 했다. 이것은 가장 어렵고 위험한 공작이였다. 이때 최동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자기는 채소광주리를 메고 자주 일본군병영에도 출입하니 래일은 자기와 함께 채소를 나누어메고 병영안에 들어가자는것이였다. 나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그날 밤 나는 늦게 자리에 누웠으나 래일의 공작을 생각하면서 흥분된 나머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이웃방에서는 최동무의 코고는 소리가 드렁드렁 들려왔다.

나는 그를 생각하고 빙그레 웃었다.

나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가 이 삼엄한 적의 소굴에서 그토록 열성적으로 공작에 나서주며 방조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를 통해서 인민들이 얼마나 일제침략자들을 증오하고있으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항일유격대를 돕는것을 더없는 영광과 의무로 생각하고있는가를 다시한번 깨달았다.

나는 한없이 마음든든함을 느꼈다.

이튿날 아침 최동무는 어느새 일어나서 새 광주리를 마련해다 솜씨있게 배추를 쌓아놓고있었다. 채소광주리를 메고 거리에 나왔을 때는 겨우 동이 터올무렵이였다.

우리는 한참만에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일본군병영뒤문에 와닿았다. 보초놈이 서라고 고함질렀다. 그러자 최동무가 앞으로 먼저 다가가며 연신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약조해두었던 배추를 가져왔노라고 설명했다. 그놈은 이미 최동무의 낯을 알고있는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이였으나 우리가 정작 통과하려니까 낯선 나를 보고 별안간 눈알을 부라리며 《이건 웬놈이냐.》라고 걸고들었다. 최동무는 또 굽실거리고 이 사람은 제 동생인데 막벌이를 하며 타곳을 돌아다니다가 요새부터 나와 같이 장사하게 되였다고 그럴듯하게 꾸며댔다.

병영내에 들어서자 조금이라도 놈들의 주의를 오래 끌기 위해 남새매매를 둘러싸고 우정 옥신각신하고있는 최동무와 떨어져서 나는 슬쩍 집모퉁이에 비켜서서 지휘부, 병실, 무기고, 탄약고, 창고 등 병영배치를 장악하였다. 이윽고 기상나팔소리가 울리더니 훈련장에 일제의 병정들이 뛰쳐나와 정렬했다. 그것은 한개 련대성원이라는것을 인차 알수 있었다.

그날 저녁녘에 나는 혼자서 시내의 병력배치정형을 알아보기로 결심하였다. 집을 나선 나는 거리도 익힐 겸 천천히 구경군처럼 걷고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나는 경관 두놈에게 맞다들렸다. 놈들은 처음부터 까다롭게 캐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침착히 철도로동자로 꾸며대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라는것을 선명했다. 그리나 놈들은 나의 말을 못들은듯 아래우로 훑어보더니 그중 한놈이 《거짓말 말라. 이 자식 너 유격대가 아니야. 철도로동자라는게 왜 완장은 안두르고 다녀.》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아차 실수했구나.) 이 순간 나의 가슴은 선뜩해졌다. 나는 그런것까지는 미처 몰랐다. 그러나 여기서 그대로 굽어들수 없어서 천연스럽게 완장은 깜박 잊어먹고 집에 두고 왔노라고 했다. 그러자 놈들은 두말않고 경찰서로 가자고 나의 등을 떠밀었다.

일은 심상치 않게 되였다. 나는 혼자서 나온것을 후회하였다. 경찰서로 간다면 무엇보다 나의 품속에 있는 권총이 문제였다. 나의 머리에는 번개처럼 뛰여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순순히 끌려가는척 하면서 곁눈질로 주위를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리 한복판에서 더우기 놈들이 량곁에 거마리처럼 딱 붙어있는 가운데서 뛴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기회만 엿보면서 거리낌없는 태도로 걸었다. 그러나 경찰서가 멀리에 마주 보이기 시작하자 나의 마음은 초조해져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차라리 이럴바에는 최후수단으로 놈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고 뛰자는 충동까지 받았다. 그러나 인차 나는 그 비상수단도 위험하다고 느끼였기때문에 좀더 기회를 찾으며 걸었다. 바로 그때였다. 100여m앞에서 수백명의 길가던 사람들이 몰켜서서 왁자지껄 떠들고있는것이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니 일본놈군대트럭이 2대씩이나 개울창에 빠져있는것이였다.

(옳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하고 나는 솟아오르는 흥분과 긴장을 가까스로 참으며 속으로 웨쳤다. 나는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쪽에서는 일본놈들이 군중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자동차를 밀어내기에 힘쓰고있었다. 그러나 모여선 사람들은 누구도 선뜻 놈들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는데 다만 트럭만이 애꿎게 부르릉거리고있었다. 《저놈들의 꼴을 보지, 꼭 3년석달만 처박혀있으면 좋겠다.》 이런 야유와 조소가 군중들속에서 들려나오며 거기에 따라 떠나갈듯한 웃음이 터지군 했다.

나는 길을 메우고있는 군중들앞에서 머물러섰다. 따라오던 경관놈들은 딴 길이 없을가싶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할수 없는지 군중들을 밀쳐대며 길을 비켜내라고 꿱꿱 소리쳤다,

나는 바로 이때를 노리고있었다. 놈들이 사람들의 담을 헤치느라고 정신이 팔렸을 때 나는 슬쩍 한두걸음 뒤걸음질 치고나서 감쪽같이 군중들속에 뛰여들고말았다.

별안간 호각소리가 울렸다.

《비적이다. 유격대가 뛰였다.》하고 놈들의 악에 받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군중들을 비집으며 트럭쪽으로 빠져나갔다.

유격대라는 말에 사람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보았으나 그들은 못본척하고들 있었다.

그바람에 트럭을 마지못해 꺼내던 사람들이 모두다 일손을 멈추었다.

일본군은 난데없이 나타나서 자기의 작업에 지장을 주는 경찰놈을 붙들고 분풀이를 시작하였다.

나는 바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트럭을 미는척 하면서 빠져나갈 장소를 살피고있었다.

그때 마침 나의 소매자락을 살며시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가슴이 철썩하면서 얼핏 뒤돌아보니 웬 중년 로동자차림을 한 사람이 속삭이듯 말했다.

《여보시오, 저 건너집을 돌아서면 빠지는 골목이 있으니 어서 피하시오.》

나는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표정을 느끼고 무언의 감사를 드리고 그가 가리켜주는쪽으로 놈들의 눈을 피하며 슬며시 빠져나갔다.

내가 겨우 시내를 빠져서 송화강기슭의 갈밭에 몸을 숨기였을 때는 벌써 경찰놈들이 총동원되여 산이며 그 주변을 개싸다니듯 날뛰고있는것이 보였다. 나는 산으로 피하지 않은것이 다행이였다고 생각하였다.

밤이 되자 나는 비로소 강에서 나와 산에 올랐다.

그 산에서는 목단강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캄캄하고 죽은듯한 그 거리를 굽어보면서 나는 그속에서 잊을수 없는 목단강사람들, 나의 지성어린 방조자인 최동무며 낯도 이름도 모르나 형제자매처럼 피가 통하는 목단강의 인민들의 모습이 가슴뜨겁게 떠오르는것이였다.

그때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전사된 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였으며 그이께서 령도하시는 혁명의 길에 나의 모든것을 다 바쳐나갈 결의를 굳게 다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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