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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4권 10. 우리는 굴하지 않았다 -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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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2-27 10:02 조회2,2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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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굴하지 않았다

김 명 숙


1935년 가을 처창즈유격근거지는 요영구회의에서 제시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전략적방침에 근거하여 해산되였다.

이때 처창즈유격근거지인민들은 앞날의 승리를 기약하면서 일부는 적통치구역으로 내려가고 일부는 심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나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의 승리를 믿고 자위대를 조직했으며 소대별로 나뉘여 깊은 수림속으로 들어갔던것이다.

당시 내가 속한 소대는 김기선동무의 인솔하에 안도현 이합호부근의 밀림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앞에는 새로운 난관과 어려운 시련이 닥쳐왔다. 온 산이 흰눈으로 뒤덮였으나 우리는 아직 홑옷을 입고 지내야 했으며 거기에다가 《토벌대》놈들이 욱실거려서 불마저 마음대로 피울수 없는 형편이였다. 밤이면 몸이 얼어들어 잠을 이룰수 없었다.

우리는 언땅을 파고 앞으로 살아갈 귀틀집들을 지었다.

일부 동무들은 식량을 구하러 민가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 지방도 집단부락이 된 조건하에서 식량을 해결한다는 문제는 여간 어려운것이 아니였다. 며칠씩 돌아다니다가도 빈손으로 돌아올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우리는 할수 없어 송기를 벗겨다가 눈녹인 물에 우려먹으며 끼니를 에우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몇동무와 같이 식량공작을 떠났다. 이틀동안 이곳저곳 찾아헤매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리는 벌써 몇끼를 굶었으며 한걸음을 옮겨디디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모두 이를 악물고 눈을 헤치며 이합호에서 한총구쪽으로 걸아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 타버린 빈집터부근에서 감자굴을 발견하였다. 뜻밖에도 굴안에는 적지 않은 감자가 있었다. 우리는 그 감자를 온밤 운반하여 밀영 가까운 주변에다 파묻었다. 이 감자야말로 우리들의 유일한 식량이였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구수한 감자를 맛볼수 있었다. 세상에 그처럼 맛있는 음식이 또 어디에 있으랴 싶었다. 회상컨대 아마 오늘의 진수성찬도 그때의 그 감자맛보다는 사람들의 구미를 돋구지 못하였으리라.

그런데 며칠동안 그것만 먹다나니 감자는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이 감자를 다 먹는 날엔…)나는 소대장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이곳에 하루이틀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5년후에 떠날지 10년후에 떠날지 그것을 누가 알랴.

그런것만큼 이제 봄이 다가오면 우리는 부대기를 일구어 농사를 지어야 할것인데 그 종자는 어떻게 구하겠는가. 차라리 오늘 우리가 이 감자를 못먹더라도 참고 남겨두었다가 종자로 하는것이 좋지 않겠는가. 소대장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우리에게는 또 끼니를 이을것이 없어지고말았다. 이 사정은 1936년 새해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곤난하게 되였다. 소대장 김기선동무는 대원 3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한 날자가 훨씬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우리는 그들을 찾아 며칠동안이나 산속을 헤매였는데 그것도 허사였다. (후에 우리는 그들이 적《토벌대》를 만나 최후까지 용감히 싸우다가 모두 희생되였다는것을 알았다.)

이제는 병중에 있는 기준동무외 7명(그중 3명은 고아들이였다.)의 녀성들만이 남았다. 더우기 곤난하게 된것은 동무들이 희생됨으로써 유격대며 자위대중대부와의 련락이 끊어진것이였다.

우리들앞에는 또다시 준엄한 시련의 시기가 닥쳐왔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조직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조직과 련계를 가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을수는 없었다.

우리는 우선 회의를 열고 적들의 《토벌》이 심한 조건하에서 보초근무를 더욱 강화할것과 영농준비를 잘할것을 결정했다.

눈이 녹고 봄이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모두 지친 몸들이였으나 이를 악물고 부대기를 일구었고 감자를 심었다. 농쟁기마저 변변치 못하여 우리의 농사는 퍽 힘들었다.

《어머니, 배고파요.》하고 만금이는 때로 정 참기어려워서 이렇게 애원하듯 말하였다. 그애의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가슴은 그지없이 아팠다.

그래서 나는 《글쎄 먹을게 어디 있니.》하고 언성을 높인적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이제 멀지 않아 감자를 먹게 된다. 조금만 더 참자.》하고 타일러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일하다가도 쉴참이면 밭머리에 모두 가지런히 누워서 푸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다가올 앞날에 대하여 그려보기를 좋아하였다.

《일제놈들을 몰아내고 사랑하는 우리 조선땅에서 부모자식 거느리고 마음놓고 살아볼 그날이 언제 올것인가.》이런것을 머리속에 그려보느라면 시간가는줄 몰랐으며 배고픈 생각도 죄다 사라져버리군 했다.

그리고 어느덧 가슴이 후더워지면서 저도 모르게 나의 양딸인 만금이를 꼭 그러안아보군 하였다.

만금이의 부모는 원쑤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였다. 그리하여 고아로 된 만금이를 내가 맡아기르게 되였을 때 그애는 나의 품에 안기면서 《어머니…》하고 부르며 목이 메여 울었다. (그때 만금이는 겨우 12살이였다.) 그후 그애는 정말 나를 친어머니처럼 따르며 어떤 힘든 일에도 어른들에 못지 않게 나섰다.

이제 조국이 광복되면 이애에게는 또 얼마나 광활한 길이 열려질것인가! 나는 그것을 위해서 더욱더 만금이를 내 자식같이 정성들여 키워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가을이 오자 우리는 감자를 캐내고 그것을 재너머 비밀장소에 가져다 묻었다. 그런데 이무렵에 적의 《토벌》은 더욱 우심해갔다. 따라서 우리의 곤난도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하루는 밖에 나갔던 만금이가 다급히 뛰여들어오며 웨쳤다. 《엄마, 총멘 사람들이 와요.》방에 있던 우리는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급히 총과 배낭을 쥐고 산에 올랐다. 이곳에 무장한 사람들이 올라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적《토벌대》일것이다.

그런데 골짜기에서 뭐라고 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벌대》놈들이 우리더러 항복하라고 웨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풀숲에 엎드려서 살펴보니 두사람이 우리쪽으로 총을 흔들며 막 달려오고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유격대요. 난 경세요.》

나는 제 귀를 의심했다. 들을수록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점점 다가오는 그들을 보니 틀림없이 우리 동무들이였다. 그는 정말 통신원 경세동무였던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서면서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이렇게 소리쳤다.

《유격대면 총을 버리라.》

그들은 인차 총을 땅에 내려놓았다.

아, 이것이 몇년만에 보는 유격대인가. 순간 나는 설레이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쏜살같이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너무 기뻐서 그들을 얼싸안고 마구 울었다.

다른 동무들도 달려왔다.

그날은 그야말로 명절이였다. 우리는 파묻었던 감자를 꺼내서 삶았고 메돼지고기(그날 마침 우리는 범이 잡아놓은 메돼지를 끌어왔었다.)도 내놓았다.

모두가 소금없이도 맛나게만 먹었다. 나는 그들이 그처럼 맛있게 먹는것을 가만히 보는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아무것도 먹고싶지 않았다. 그들의 통쾌한 웃음소리와 즐거운 이야기를 들으니 그동안의 신고도 한꺼번에 사라지는것만 같았다.

우리는 유격대동무들을 통해서 뜻밖에도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군부며 후방재봉대들이 와있다는것을 알았다.

자위대본부와 다시 련락이 맺어졌다. 우리는 군부며 재봉대밀영으로 감자를 날라다주었다. 그때 그들이 기뻐하던 얼굴들이 나는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때부터 유격대동무들이며 재봉대동무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들을 가리켜 《형님네들》이라 존경해서 불렀다.

1937년 봄이 오자 우리는 다시 감자를 심었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많은 동무들이 모여와서 밭을 더 늘구고 감자도 더 많이 심을수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활기띠고 즐거웠다. 아무리 일이 힘겹고 고달파도 그것이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고생하며 지내온 지난날의 그 모든것이 오늘은 보람있게 꽃피여 혁명에 도움을 주고있다는 자각이 마치 봄날의 꽃밭처럼 가슴속에서 활짝 피여나는것이였다.

그후 우리는 적들의 거듭되는 《토벌》로 하여 로파구로 밀영을 옮겼고 1939년 2월에는 다시금 미혼진부근 산림속으로 이동해갔다. 일부 대원들은 적통치구역에 내려가서 선전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계속 식량공작을 하였다.

이 시기 적들의 《토벌》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서 우리는 여러번 전투를 진행하였는데 그때마다 놈들은 격퇴되고말았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도 희생자가 생기고 총탄이 부족되여갔다. 그러던중 우리에게 가장 쓰라리고 원한사무치는 날(1939년 9월 28일)이 왔다.

이날 나는 오전중에 중대부에서 있은 당회의에 참가했다가 집으로 돌아왔었다.

만금이는 3살 나는 나의 딸 순애를 업고 5리길이 넘는 중대부로 놀러나가고 집에는 환자인 기준동무와 나만이 남아있었다. 이때 갑자기 멀리에서 콩볶듯한 총소리가 울렸다.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면서 총과 배낭을 재빨리 둘쳐메고 앓는 기준동무를 부축하여 밖으로 뛰여나왔다. 사방을 살펴보니 어느새 놈들은 우리 집을 포위하고 총질하면서 기여올라오고있었다. 나는 기준동무를 격려하며 같이 산으로 피하였다.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줴치는 놈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 내여 산속깊이 들어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때 중대부는 제일먼저 놈들에게 포위되였었다. 중대부동무들은 미처 피할새도 없이 사방으로 달려드는 적들과 격전을 진행하였다. 여러 시간 계속된 전투과정에 놈들은 수많은 시체를 내였고 주위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이때 이미 우리 동무들에게는 총탄이 떨어졌다.

남은것은 오직 육박전뿐이였다. 적들은 자기들의 수적우세를 믿고 사방으로 몰려들면서 《항복하라.》고 떠들어댔다.

그때 우리 동무들은 《조선독립 만세!》, 《원쑤에게 죽음을 주라!》고 웨치면서 성난 사자마냥 놈들에게로 육박하였다. 가렬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놈들은 혼란에 빠져 갈팡질팡하였다. 동무들은 닥치는대로 놈들을 찌르고 족쳐버렸다.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웨치는 만세소리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중대부에 있던 우리 동무들은 용감하게 싸우다가 빛나는 최후를 마치였다.

그날 저녁 살아남은 우리 6명의 성원들은 이미 타버린 중대부자리에 모였다.

싸우다 희생된 동지들이 놈들의 산더미같은 시체속에 섞여있었다. 우리는 원한에 사무친 울분과 고통을 참으면서 동지들을 가지런히 눕히였다. 그리고 나무잎으로 얼굴들을 가리워주었다.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오직 원쑤를 갚아주겠다는 그 일념에 불타오를뿐이였다. 이제는 나의 만금이도, 순애도 행방불명이 되였으며 사랑하는 전우들도 없어졌다.

더는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도 더는 지체말고 유격대에 들어가서 직접 총을 메고 일제놈들과 싸우자.》

그날 밤 우리는 타오르는 우등불가에 둘러앉아 온밤을 새우면서 이렇게 서로 다짐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이였다. 우리가 떠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최현동지가 부대를 거느리고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나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어울려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것을 참을수가 없었다.

《동무들 수고했소.》하고 최현동지는 우리의 심정을 헤아려 나직이 말하였다. 그때였다.

《엄마.》하는 귀익은 소리에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죽은줄만 알았던 만금이가 순애를 둘러업고 방글거리며 막 달려오는것이 아닌가.

《저 애가 어제밤에 우리에게로 와서 여기 사정을 알려주었소.》하고 최현동지가 비로소 사연을 말해주었다. 만금이는 어제 중대부에 놀러 갔다가 《토벌》을 만나서 산으로 피한 후에 언제인가 한번밖에 가본 일이 없는 재봉대밀영으로 갔던것이다. 그래서 재봉대에서는 마침 최현동지부대가 그 근방에 온것을 알고있었으므로 급히 전말을 보고했다. 보고를 듣자 최현동지는 인차 부대를 거느리고 만금이의 안내를 받아가면서 이리로 달려왔던것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희생된 동지들을 위하여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희생된 이 동지들은 모두가 일제를 반대하여 열렬히 싸운 가장 훌륭한 조선의 아들딸들이요.

그들은 자기 평생을 바쳐 오직 조국의 자유와 광복을 위해 싸우다 일제야수들에게 희생되였소. 그들은 자기들이 하다 남은 사업을 우리들에게 넘겨주었으며 간곡히 부탁하고 갔소. 우리는 그들이 그처럼 갈망하던 조국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더욱 용감하게 싸웁시다.》

우리모두는 머리숙여 고이 잠든 혁명동지들에게 엄숙히 맹세를 다지였다.

부대가 다시 출발하게 되였을 때 최현동지는 우리에게 명령하였다.

《자, 동무들, 대렬에 들어서시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원들인 우리들은 떳떳한 부대성원으로 행군의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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