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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3권 26. 왕청현 조묘태전투 - 오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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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2-06 02:02 조회2,7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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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현 조묘태전투

오진우                    
 

1932년 말부터 왕청현 라자구에 주둔한 적들은 백초구로부터 군수기재와 식량을 보급받고있었다. 그들은 무기와 식량을 달구지에 싣고 영벽라자와 화피전자를 거쳐 라자구로 운반하고있었다. 이 길은 바로 왕청현 요영구근처를 통과하였다.

우리는 이 도로연선에서 수차에 걸쳐 적들을 습격하여 수많은 무기, 탄약과 식량을 로획하였다. 그때문에 적들은 많은 호송병들을 붙여가지고 군수품들을 수송했다. 그러나 놈들의 어떠한 삼엄한 호송조직도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1934년 여름에 있은 일이다.
수백명에 달하는 일제《토벌대》가 군수품을 가득실은 200여대의 달구지를 호송하여 라자구로 향하고있다는 정보가 요영구유격구로 들어왔다. 적들이 백초구를 떠나 라자구로 가자면 영벽라자에서 하루밤 쉬고 다시 화피전자에서 또 하루밤을 자야했다.

이 정보는 도로근방에 사는 조직군중으로부터 들어왔다. 인민들은 어느때나 우리 유격대를 도왔고 유격대와 혼연일체가 되여 싸웠었다.

정보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벽라자와 화피전자 중간지점인 조묘태(소동구)에서 적들을 소멸할것을 결심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전투를 통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시위하는 동시에 부대의 강화발전에서 중요한 고리의 하나로 되는 무기를 로획하며 식량을 빼앗으실 계획이였다.

조묘태는 지형상으로 매복하기에 아주 유리한 지점이였다. 도로는 계관라자에서 북쪽으로 뻗어들어왔고 조묘태에서 동쪽으로 꺾어져가다가 다시 동북간으로 뻗어 화피전자로 통해있었는데 도로 량켠에는 낮은 산발이 련달아있었다. 도로의 북쪽산들은 비교적 가파른 바위벼랑으로 되여있는데 이 벼랑을 끼고 도로가 지나갔다.

도로의 좌측에 개울이 흐르고 개울건너에도 역시 산들이 솟아있었다. 도로는 조묘태에서 화피전자로 올라감에 따라 점차 경사가 심했다.

그러므로 이 골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적들은 마치 독안에 든 쥐와 같이 아무데로도 빠질 구멍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부대를 은밀히 매복시키셨다가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주려고 결심하셨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리 전투계획을 세우시고 출발에 앞서 당회의와 공청회의를 소집하여 전체 대원들에게 전투의 목적과 의의를 천명하시고 대원들의 전투사기를 고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4중대와 청년의용군, 구국군부대인 사려장부대를 친솔하시고 요영구를 출발하시여 날밝기전에 조묘태로 행군해가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묘태 북쪽고지정면 높은곳에 망원초를 세우시고 그밑에 도로를 따라 4중대를 배치하시였다. 그리고 4중대에 련이어 좀 높은 장대에 구국군부대를 배치하시고 나머지 일부 병력은 개울물건너 도로 동남쪽고지에 배치하시였다. 지휘처는 4중대와 구국군부대가 배치된 도로옆 약간 돌출한 바위곁에 정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의 행렬이 긴것을 고려하여 우리 부대의 매복거리를 약 2km로 잡으셨다.

적들은 이 도로에서 여러번 습격을 당하였기때문에 도로 량옆에 선 나무들을 모조리 찍어눕혀놓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기슭에 있는 바위들과 싸리나무와 가둑나무 등을 은페물로 리용하여 매복하였다.
나는 도로에서 불과 50~60m 떨어진곳에 매복하고있었다. 그 도로 바로 너머에는 크지 않은 개울물이 흐르고있었다.

한시간가량 기다리니 날이 훤히 밝았다.
우리는 매복한채 미시가루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이미 날이 밝은 다음이라 물을 뜨러나갈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코앞의 물을 바라보면서도 마른 미시가루를 먹어야 하였다.

어느덧 해가 머리우에 솟았으나 적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역시 마른 미시가루로 점심을 먹었다. 한자리에 꼼짝 안하고 여러 시간을 엎드려있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우리는 매복전에서는 은밀성을 보장하며 최대의 인내성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되새기며 인내성있게 기다렸다.

점심때가 지났을 때 망원초로부터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가 왔다. 신호는 수기로 전달되였는데 그것은 인차 각 구분대들에 알려졌다.

나는 긴장하여 적이 나타날 도로를 뚫어지게 지켜보고있었다.
한참후에 적의 선두부대가 나타났다. 맨앞에는 일제침략군 100여명이 2렬종대로 걸어오고있었다.

우리 부대들에 의하여 여러번 혼쌀을 먹은 적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올라오고있었다. 나는 총가목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그놈들을 쏘아보고있었다. 적들이 계속 우리앞을 지나갔으나 사격신호는 좀처럼 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놈들이 우리들의 매복구역내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놈들의 선두부대가 지나가자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달구지들이 따라섰다. 달구지군들은 흰옷을 입은 조선사람들이였다.

적들은 지방인민들을 강제로 동원시켰던것이다. 달구지들사이에도 일제침략군놈들이 끼여서 달구지군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걸어오고있었다. 당장 그놈들을 쏴눕히고싶은 충동에 온몸이 떨렸으나 나는 애써 참으면서 사격신호만 기다렸다. 우리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풀잎을 깨물어 기침나는것을 참았다.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가증스러운 원쑤놈들을 보기만 하면서 그냥 둔다는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였다.

적의 달구지행렬은 오래동안 계속 지나갔다. 반시간이나 참았는데도 그 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사격신호를 기다리는 나는 극도로 긴장되였다. 행렬의 맨뒤에도 일제침략군 70~80명이 따라왔다.

그렇게 지루하던 시간도 끝날 때가 왔다. 행렬 맨뒤켠에 선 일제침략군의 마지막놈이 바로 우리앞에 다달았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사격개시를 알리는 총성이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우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나팔소리가 힘차게 울려왔다.

총을 겨누고 참고참아오던 우리들은 일제히 복수탄을 퍼부었다. 삽시간에 수십명의 적들이 쓰러졌고 적행군대렬은 뒤범벅이 되였다. 넋을 잃은 적들은 달구지군들을 그러안고 맴돌아쳤다. 무고한 인민들을 제놈들의 총알받이로 삼으려는것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달구지군들을 피해 일제침략군놈들을 골라가면서 쏴눕혔다. 그 혼잡속에서 놈들을 골라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인민의 생명재산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우리 유격대원들이 어찌 한명의 달구지군인들 상하게 하겠는가. 나는 일제침략군놈에게 총을 겨누었다가도 달구지군들을 피하느라고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러는동안에 달구지군들은 우리가 소리쳐 알려주는대로 일제침략군들을 뿌리치고 개울을 건너서 맞은켠 산에 올랐다. 그러자 그쪽에 배치된 우리 대원들이 달구지군들을 한쪽으로 피하게 했다. 그제야 우리는 마음놓고 적들에게 총을 쏠수 있었다.

살아남은 적들은 물웅뎅이에 떨어져서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사격을 계속했다. 맞은켠 고지(남쪽고지)에 배치된 유격대원들도 적들의 배후에 대고 총탄을 퍼부었다. 놈들은 더 피할데가 없었다.
그러나 원래 악독한 침략자들이라 놈들은 필사적으로 대응사격을 계속하였다.

놈들은 막다른 골목에 들게되자 바위와 홈타기에 들어박혀 발악했다.
전투는 두시간이나 계속되였다. 적들은 발악적으로 대항하였고 우리의 무기는 적들에 비하여 렬등하였다. 더구나 전투가 시작된 처음 얼마동안은 달구지군들을 피하여 적을 한놈씩 골아잡아 쏘느라고 시간이 더욱 걸렸다.

그러나 우리의 강한 타격에 적들의 수는 점점 줄어갔다. 얼마안되는 적들이 마지막발악을 하고있을 때였다. 돌격나팔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왔다. 우리는 총창을 번쩍이며 골짜기가 터질듯한 우렁찬 만세소리와 함께 적들속으로 뛰여나갔다. 발악하는 적들을 여기저기서 총창으로 찌르고 붙안고 딩굴다가 숨통을 끊어버렸다.

이때 대원 한 동무는 칼을 빼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졸병들을 내모는 일제장교놈을 발견하고 그놈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겁에 질린 장교놈은 허둥지둥 바위뒤에 숨어버렸다. 대원이 바위로 다가들어 장교놈을 잡아내려고 하는 순간 그놈은 칼을 쳐들고 대원을 내리치려고 하였다. 위험한 순간이였다. 대원은 번개같이 뛰여들어 장교놈을 그러안았다. 그놈이 쳐들었던 칼은 대원의 어깨를 스치고 떨어졌다.

격투가 벌어졌다. 대원은 적장교놈을 그러안고 땅바닥에서 딩굴었다. 그놈은 두눈을 흡뜨고 닥치는대로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미친 승냥이와도 같았다. 엎치락뒤치락 싸움은 격렬하게 계속되였다.
그러나 대원은 끝내 그 장교놈을 요정내고야말았다.

우리가 골짜기에서 한창 전투를 하고있을 때 장대우에 배치되였던 구국군의 사려장부대는 북쪽으로 우회해온 일제침략군놈들과 치렬한 전투를 진행하고있었다. 매복권을 그냥 통과시킨 적의 선두부대놈들이 그쪽으로 우회해왔던것이다.

구국군들은 일제침략군을 대항하여 힘에 겨운 싸움을 하고있었다. 전투가 가렬하게 되자 일부 구국군들은 사려장에게 퇴각하자고 제기하였다. 그러나 사려장은 자기 부대를 이동시키면 적들이 유격대 4중대의 후면을 찌르리라는것을 생각하고 머리를 옆으로 저었다.

(나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을 곤경에 빠뜨릴수는 없다. 끝까지 그이의 명령대로 싸워야 한다.)
사려장은 바로 한해전에 있은 동녕현성전투때의 일을 다시금 회상하며 이렇게 결심하였던것이다. 만약 동녕현성전투때 적진속에서 부상당하여 쓰러진 그를 위험을 무릅쓰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구출하지 않으셨더라면 그는 일제에게 포로되여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을것이였다.

실로 위대한 수령님은 탁월한 령장이실뿐만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시였다.
그러기에 그는 전투가 제아무리 어렵다고 하여도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이 없이는 일보도 부대를 퇴각시키지 않을 결심이였다.
사려장은 동요하는 부하들을 고무격려하면서 전투를 계속 지휘하였다.

사려장부대가 이렇게 싸우고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4중대에서 응원대를 보내셨다. 그리하여 불리하였던 장대우의 전투는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변되여갔다. 한때 사기를 잃었던 구국군병사들도 용기백배하여 싸웠다. 우리는 곧 반격으로 넘어갔다. 기진맥진한 적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다른 한켠에서는 피해있던 달구지군들이 유격대원들과 함께 달구지들을 조묘태 서쪽골짜기로 끌어가고있었다.
그러자 골짜기에 대기하고있던 혁명군중들이 로획한 식량과 군수품들을 모두 산속에 분산시켜 감추고 달구지만을 돌려보냈다.

날은 어두워져갔다. 우리 부대는 승리의 기세드높이 근거지로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우리는 적 80여명을 살상하고 무기 50여정, 식량과 전투물자 200여달구지를 로획했다.

이 전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지휘에 의하여 우리가 승리한 의의깊은 전투의 하나였다.
당시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전술적방침에 따라 유격근거지에 의거하여 비단 방어나 성시공격만을 한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적에 대하여 이와 같이 섬멸적인 타격을 주고있었다.

조묘태전투를 통하여 우리는 놈들이 소위 《무적황군》이라고 떠들어대던 그 일제침략군도 때려부실수 있다는 확신을 더욱 새롭게 가지게 되였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로획한 무기로 부대의 무장을 더욱 강화하였을뿐만아니라 유격근거지내의 우수한 청년들을 유격대에 입대시켜 무장시킴으로써 우리의 무장대오를 일층 확대강화할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로획한 막대한 량의 식량은 유격대는 물론이고 유격근거지내 인민들의 식량해결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뿐만아니라 이 전투는 구국군부대와의 협동작전을 훌륭히 실현한 그 점에 있어서도 의의가 크다.

이 전투후 사려장부대는 우리 유격대들과의 협동작전을 일층 강화하게 되였으며 마침내는 조선인민혁명군에 합류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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