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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3권 24. 단결의 힘 - 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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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2-03 23:02 조회3,47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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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의 힘

김철호      


내가 연길현 8도구 룡수평에서 살던 때(1929~1931년)의 일이다. 이때 나는 늙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보가라는 지주놈의 집곁에 있는 단칸 오막살이에서 살았다.

본시 가난한 가정인데다가 나어린 내가 늙으신 홀어머니를 도와 지주놈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자니 참으로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였다. 게다가 불과 얼마안되는 농사지은 곡식마저 가을에 가서는 지주놈에게 몽땅 털어바쳐야 하였다. 그래도 지주놈의 빚은 빚대로 남아있게 되니 가난은 더욱 심하여갔다.

마침내 나는 17살 되던 해에 지주 보가놈의 종살이를 하게 되였다.
지금도 그때의 억울하던 일이 골수에 배여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하루종일 뼈가 휘도록 소처럼 일을 했다. 그래도 일은 끝이 없어서 새벽이 가까와서야 잠시 집으로 오군 하였다. 그러나 집에 와보면 늙으신 어머니는 시래기국 한그릇도 없어서 굶어누워계신때가 많았다.

고된 로동에 시달렸건만 나는 잠들수 없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너 배고파서 잠을 못드는구나. 어린것이 하루종일 꽁꽁 얼며 일을 하고도 그대로 자야 하다니, 가난이 원쑤로구나.》하면서 푹 꺼진 나의 배를 쓸어보며 안아주었다.

나는 더는 참을수 없어서 《어머니!》하고 여윈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군 했다. 그러나 이런 잠자리조차 늘 있는것은 아니였다. 지척에 어머니와 집을 두고도 제집에 와서 자지 못하고 지주집 부엌이나 방아간에서 졸다 쓰러지거나 또한 그대로 밤을 새우는 때가 많았다.

겨울이 차차 깊어갈수록 고통은 더했다. 무릎우까지 올라오는 몽당치마에 가지각색으로 기운 저고리를 입고 버선도 없어 맨발로 겨울을 나야 했다.

이렇게 3년을 헐벗고 굶주리며 뼈가 휘도록 일해주었으나 지주놈은 묵은 빚을 채물지 못했다고 마침내 우리 집에 달려와서 솥을 뽑아놓고 노기등등하여 호통을 치는것이였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어머니는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젊은 지주놈에게 손을 모아쥐고 사정을 하였으나 그럴수록 그놈은 점점 더 지팽이로 삿대질을 하였다. 이 광경을 보는 나의 가슴은 막 찢어지는것만 같았다.

(아, 무슨 놈의 세상이 이러냐. 뼈빠지게 일을 하여도 우리는 왜 헐벗고 굶주리며 천대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나의 온몸은 부들부들 떨려 그놈을 당장 쳐눕히고싶은 충동이 불같았다.

이런 일이 있은후부터 나는 밤늦게까지 지주놈의 집에서 일을 하고나면 당장 쓰러질것 같았으나 빚을 갚기 위해 광산으로 가서 새벽까지 무거운 금돌을 이고 험한 비탈길을 오르내리였다. 당장 쓰러져도 그놈의 꼴을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러나 불과 며칠을 못가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였다.

이렇게 우리 모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을 했다. 부지런히 일만 하면 그래도 살길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것이 허사였다.

끝내 지주놈은 빚을 다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아끼고 아끼던 무명옷 한벌과 늙으신 어머니가 치마삼아, 이불삼아 입고지내는 토목두루마기마저 빼앗아갔다.

이렇게 지주의 착취와 학대를 받으며 일제놈들의 탄압을 받는것이 어찌 우리 모녀뿐이였겠는가. 당시 동만각지에서의 빈고농의 처지는 다 우리와 다름없었다.

일제와 지주놈들의 착취는 참으로 악랄했다. 농민들은 우선 7할이나 되는 소작료를 물어야 했으며 수십가지나 되는 가렴잡세를 물어야 했고 그리고 묵은 빚과 리자를 물어야 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간단 말인가. 입기는 무엇을 입고. 참으로 살아가자니 숨막히는 세상이였다.

점차 마을에서는 닭소리와 개짖는 소리마저 들을수 없었고 먹을것이 말끔히 떨어져서 굶는 사람은 점점 늘어만 갔다. 이제 더는 참을수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혁명조직은 인민들의 혁명적기운을 투쟁에로 조직동원했다. 그때가 바로 1931년 초가을이였다.

당시 우리 부락에서도 다른 부락에서와 같이 공작원들이 밤마다 부락농민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더는 이렇게 살수 없다. 일제의 침략과 악질적인 지주,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을 반대하자. 〈4,6제〉, 〈3,7제〉를 쟁취하기 위하여 일어나자. 투쟁의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다.》등의 내용으로 대중을 투쟁에로 고무하였다.

혁명조직의 영향하에 우리는 점차 계급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자기의 나아갈 길을 알게 되였다.

(우리가 앉아서 죽을수는 없다. 일어나 싸워야 한다. 인민대중이 단결만 하면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다. 더우기 전체 인민이 뭉치면 악질 지주, 자본가는 물론이고 일제의 총칼이나 대포도 두려울게 없다.)
이때 우리는 모두 이런 심정이였다.

지하공작원들의 활동은 날로 맹렬하여갔다.
우리 룡수평마을에서만 해도 혁명조직의 활동은 아주 활기를 띠였으며 군중은 날로 혁명화되여갔다.

드디여 1931년 가을 동만 각현의 혁명적인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일제의 만주강점과 지주놈들의 가혹한 략탈을 반대하여 추수투쟁에로 떨쳐나섰다.

이와 같이 동만 각현에서 일어난 추수투쟁의 거센 불길속에서 우리 룡수평인민들도 투쟁에 나섰다. 우리는 조직의 지시로 지주놈과 담판하기 위하여 날밝기전에 밥을 해먹고 부락어구에 모이기 시작했다.
어느집 할것없이 늙은이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전부 떨쳐나섰다.

우리 룡수평 시위군중들이 부락어구에 나섰을 때 이웃 부락에서도 련이어 시위대렬이 들어오고있었다.
우리 부락에서 20리 혹은 30리 떨어져사는 농민들까지 모여왔다. 이렇게 이 부락 저 부락에서 모여온 사람들로 우리의 시위행렬은 점점 늘어갔다.

우리가 지주놈의 집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먼저 도착한 군중들이 지주집 토담을 30여줄로 겹겹이 둘러싸고있었다.
그때 이 지주놈은 10여명에 달하는 무장한 가병을 가지고있었는데 이놈들은 인민들의 단결된 힘에 겁을 먹고 얼씬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비겁한 지주놈도 큰 대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군중들은 《4,6제를 실시하라!》, 《방공을 없애라!》(《방공》이란 지주에게 소작료를 무는 외에 지주의 땅을 무료로 갈아주고 농사를 지어줄뿐만아니라 닭을 치거나 꿀벌을 쳐도 그중에서 2할 내지 4할씩 바치는것 등을 의미한다.)는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지주놈을 나오라고 을러댔다.
그러나 지주놈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군중들의 함성소리는 더욱 높아만 갔다.

나는 군중들속에서 《우리는 더 참을수 없다. 당장 문을 열라!》고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추켜들었다.
날이 저물어져도 시위군중들은 헤쳐지지 않았다. 저마다 자기들의 고난에 찬 생활처지를 생각하며 《4,6제》를 쟁취하지 않고서는 발길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그날밤 지주집을 포위한채 그대로 밖에서 새웠다. 이미 서리가 내린뒤라 늦가을밤은 추웠으나 시위군중들은 어느 한사람도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들과 같이 밤을 새우는 나의 머리에는 고된 머슴살이에서 시달리던 지난날이 선히 떠올랐다.

늙으신 홀어머니에게 따뜻한 밥한그릇 떳떳이 못대접하고 찬 구들에서 지내게 하던 일이며 내가 밤중에 광산에 나가 금돌을 이고나르다가 쓰러지던 일이며 지주놈이 몇번씩 달려와서 행패를 하며 몇푼 안되는 윤두소삯을 채물지 못했다 하여 내가 아끼고 아끼던 단벌 무명옷이며 어머니의 두루마기까지 빼앗아가던것을 생각하며 나는 주먹을 부르쥐고 이틀이든 사흘이든 투쟁에서 승리하기전에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 다음날 아침해가 뜰무렵 지주집 토담우로 한 가병이 얼굴을 내밀고 지주가 없다고 소리쳤다. 지주놈은 비겁하게도 밤사이에 녀자로 변장하고 하수도구멍으로 빠져나갔다는것이다.
지주놈은 빠져나간 걸음으로 8도구경찰서에 뛰여가서 고발하였다.

얼마후에 8도구경찰놈들이 몽땅 동원되여왔다. 놈들은 말을 타고와서 우리 시위군중들을 포위하고 무조건 해산하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정도의 위협에 휘여들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은 《우리는 우리 문제를 지주와 해결하려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 있어 간섭하느냐?》, 《이 개같은 놈들아! 너희들은 물러가라!》라고 웨치면서 밀물마냥 경찰놈들 앞으로 몰려들었다. 군중들의 기세에 당황한 경찰놈들은 군중을 위협하기 위해서 헛총질을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팔들을 서로 튼튼히 끼고 앞으로 밀고나아갔다.

이들에게서 나는 더욱 새로운 힘을 얻었다. 경찰의 총도 무서울것이 없었고 다만 싸워서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생각뿐이였다.

여기서 8도구경찰놈들과 더 싱갱이질해도 해결되지 못하리라는것을 깨닫게 된 시위군중들은 현정부가 있는 연길을 향해 떠났다.
그 길이가 근 4km나 되는 신작로에 늘어선 군중들은 계속 구호를 부르며 전진했다.

《4,6제를 실시하라!》
《민회를 타도하자!》
《방공을 없애라!》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이러한 구호를 한사람이 웨치면 군중들은 거기에 맞추어 주먹을 내들고 호응했다.

시위군중의 전진을 가로막기 위하여 8도구경찰놈들은 계속 악랄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너무나 강한 시위군중의 기세에 압도된 놈들은 끝내 총을 쥔채 슬금슬금 뒤걸음을 치고말았다.

우리들은 혁명조직의 주위에 뭉쳐싸울 때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으며 못해낼것이란 있을수 없다는 확신을 더욱 굳게 가지였다.

군중속에서 한사람이 구호를 부르고나면 그 곁의 사람이 곧 자기들의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주고 모자도 바꾸어씌우고 안경도 걸어주어 그를 변장시켰다. 이것은 적들에게 그들의 얼굴이 탄로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구호를 사방에서 그칠사이없이 불렀으며 나와 몇몇 녀동무들도 그들을 민첩하게 변장시키면서 목청껏 구호를 불렀다. 이렇게 계속 구호를 부르며 기세높이 앞으로만 전진하는 군중들의 행렬에는 8도구 광산로동자들도 다수 포함되여있었는데 그들의 기세는 더욱 왕성했다.

하루밤을 밖에서 새웠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렬은 줄어들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늘어나 8도구 지방에서만 하여도 수천명에 달했다.(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8도구광산 로동자들도 300~400명이나 농민들의 투쟁을 지지하여나섰다.)

우리는 이렇게 투쟁이 오래 계속되자 련락원을 파견하여 각기 수십리씩 되는 자기 부락에 가서 밥을 해서 달구지에 싣고왔다. 우리는 도중에서 식사를 하고 계속 전진해갔다.

연길거리가 약 10리앞에 내다보일 때에 우리를 향해 현정부에 있는 놈들이 무장부대를 데리고올라왔다. 무장부대와 충돌이 일어날것을 예상한 우리는 당원, 공청원, 반일회원을 비롯한 조직군중이 테두리를 둘러싸고 비조직군중을 안에 넣고 팔을 끼고 견고한 행렬을 만들었다.

혁명조직성원들을 중심으로 굳게 뭉친 우리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리라, 공산당원들의 뒤를 따라 일제와 악질지주들을 때려부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싸우리라고 속다짐하며 더욱 힘있게 팔을 끼고나섰다.

무장대가 우리를 둘러싸자 현정부에 있는 놈들이 앞에 나서서 대표를 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우리가 모두 대표다, 우리하구 말하자.》하고 웨쳤다. 이것은 대표가 나가면 놈들이 곧 체포하거나 얼굴을 알아두었다가 후에 검거해서 죽인다는것을 모르는바가 아니였기때문이다. 군중들은 여기저기에서 한마디씩 대답하기때문에 놈들은 누가 말하는지 눈여겨볼새가 없었다. 군중들은 시종일관 《4,6제》, 《3,7제》를 실시할것을 주장했다.

놈들은 해산하면 해결하겠다고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으나 놈들의 간교한 기만술책에 너무나 속아온 인민들이였으므로 그런 달콤한 말에 속을리가 없었다. 이렇게 여러시간이 지나 저녁무렵이 되여도 군중들은 헤쳐질 생각을 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더 기세가 높아만지는것을 보고 놈들은 차차 겁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놈들은 마침내 우리 요구대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빈말만 가지고는 믿지못하겠다고 했다. 계속되는 투쟁에서 놈들은 포고문을 내주마고 약속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믿지 않고 《지주가 듣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시 들이대였다. 더 어찌할수 없게 되자 놈들은 돌아가서 농민들자체로 실시하라고 했다. 여기까지 승낙을 받은 다음 우리들은 부락별로 해산하여 돌아가는 길로 자기 부락의 지주집으로 헤여져갔다. 나도 소작인들과 함께 지주놈의 집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지주놈에게 우리의 요구조건을 내놓았다. 그러나 악질지주놈은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분노에 찬 우리는 더는 참을수 없어 우리들손으로 지주의 창고를 헤치고 그 즉석에서 쌀을 분배해갔다.
지주놈은 현정부에서 승낙했기때문에 반항하지도 못했다.

혁명조직성원들의 지도밑에 전개된 이 투쟁에서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는 이 투쟁을 통하여 단결만 하면 못할것이 없으며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다는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착취하며 억압하는 원쑤는 누구이며 우리의 진정한 벗은 누구인가를 알게 되였다.

추수투쟁이 있은후 인민들은 원쑤들을 때려부심으로써만이 자유행복도 있다는것을 깨닫고 더욱 단결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동만 각현의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그후 더욱 조직화되고 단결된 힘으로 원쑤들을 반대하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에로 나아갔다.

나는 그때의 일을 회상할 때마다 혁명군중의 힘의 원천은 조직에 있으며 단결에 있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군 한다.

오늘도 그러하다. 우리 혁명이 달성한 모든 승리는 바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조선로동당의 현명한 령도에 있으며 그 주위에 철석같이 뭉친 조선인민의 단결된 힘에 있다.

이 단결된 힘으로하여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민족의 숙망인 조국통일위업을 달성할것이며 사회주의건설을 더욱 앞당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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