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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3권 23. 유격대에 입대하기까지 - 김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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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2-03 01:02 조회4,740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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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에 입대하기까지

김자린  
                 

내가 부모님을 따라 동북으로 건너간것은 6살때였다.

《일만 잘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날이 올거다.》
당시 나의 부모의 유일한 희망이였던 이 믿음은 어느정도 나에게 환상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주집 머슴살이를 지내면서도 이 환상을 믿으려고 애썼다. 일은 고되여 힘에 겨운 고역이 나의 온몸을 짓눌렀으나 나는 이를 악물고 소처럼 부지런히 일했다. 일에 곁따르는 천대와 구박도 내《죄》로 여기고 될수록 참았다.

(일만 잘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알아줄것이구 살림도 저절로 펴지겠지.)
그리하여 나는 내 육체적힘을 믿듯이 이것을 믿고 일하면서 그속에서 락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짓은 환상에 불과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리승준이란 지주놈의 집에서 머슬살이를 하던 13살때의 일이다.
어느 여름날 이른새벽에 나는 소와 하늘소들을 들판으로 내몰고나서 꼴 10단을 걸싸게 베여가지고 돌아왔다. 아직 해도 뜨기전이였다.

조반전에 해야 할일을 다 마친 나는 제법 흐뭇해서 방에 들어가자 피곤을 푸느라 잠시 누웠었다.

《아니, 이 녀석이 정신이 쑥빠졌나. 날밝은지가 언제라고 아직 활개를 펴고 자빠졌어.》
눈을 떠보니 주인마누라의 서슬푸른 얼굴이 나를 노리고있었다. 어이가 없을만큼 당토않은 떠벌임에 나는 밸이 불끈 하였으나 가까스로 참고 주인마누라가 내미는 밥상을 받았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밥상받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주제에 밥만은 제대루 처먹겠지.》
한소리 더하는 말이 떨어지자 나는 달아오르는 모욕감과 통분에 더는 참을수 없어 들었던 밥상을 왱가당 뜰안에 메쳤다.

(될대로 되여라, 네 아니면 밥굶을 내 아니다.)
그 순간의 솔직한 내심정은 그랬다. 당장 독기오른 지주놈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것을 기다리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은 뼈빠지게 일만해도 잘살순 없는가부다. 지주놈은 일안하고도 잘사는데 난 5년가까이나 뼈가 빠지도록 일해도 이 꼴이 아닌가.)
그러자 배불리 먹고 건들거리며 거드름피우는 년놈이 미워서 견딜수 없었다.

(에라, 지주놈이 달려들면 꼬나메치고 자릴 뜰테다.)
그런데 지주놈은 한참만에야 나를 찾아오긴 했는데 뜻밖에도 하는 말이 《너무 노여워말아, 내가 마누라를 쥐여박아놨으니 일없을거다. 일이나 잘하자꾸나 응?》하고 달래는것이였다.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이웃 동무에게 이 사연을 말했더니 그는 허허 웃으며 그 내막을 까밝혀주었다. 그는 지주놈의 마누라가 그에게 방정맞게 군탓으로 지주놈한테 죽도록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결국 삯은 어른 절반 주고 일은 어른싸게 부려먹을수 있는 네가 화김에 울뚝해서 달아날가봐 겁나하는짓이지 뭐야.》하고 덧붙이는것이였다. 듣고보니 지주놈의 흉측한 처사가 차차 깨달아졌다. 나는 메스껍도록 지주놈이 징그러워졌다. 그러나간에 지주집년놈을 혼쌀냈다는데 일종 통쾌감을 느꼈고 그 바람에 속이 후련해지기까지 했다.

(하긴 이놈의 세상에선 머저리처럼 비실거리며 살게 아니라 뒤엎을건 뒤엎으며 살아야 하는가봐.)
그때 마치 희귀한 발견이라도 한것처럼 혼자 희한하게 중얼거리던 생각이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것인가에 대하여는 아직껏 모르고있었다.

나는 16살(1928년)되는 해에 연길현 동성용이라는 작은 거리에서 철공로동을 하였다. 그리로 옮긴것은 거리에 가면 혹 야학이나마 다녀서 글이나 배울수 있지 않을가 하는 한가닥 희망에서였다.

이 지방에서는 당시 자주 삐라사건이 벌어지군 하였다. 나는 그때 야장간에서 쇠마치로 단 쇠덩이를 두드리면서 동무들이 이야기하는 삐라내용을 신기하게 듣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잘살고 사람대우를 받으려면 우선 일제를 조선에서 내쫓고 그놈들의 앞잡이인 지주, 자본가들을 모조리 때려없애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모두가 단결하여야 한다.…

이런 내용은 나에게 새로운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걸어오며 체험한 생활감정이 그 뜻을 대번에 받아들였던것이다.

(정말 지주, 자본가들을 때려부신다면야 오죽이나 좋겠는가. 주먹으로 때려부신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맨 앞장에 나설테다. 그러나 혁명이라는게 그런 주먹다짐놀음일가? 아니야, 그건 내가 아직 모르는 어떤 힘들고 어려운것으로서 글도 많이 알고 총도 가진 그런 혁명가들이나 할 일이겠지. 어디 나 같은 머슴군이나 야장쟁이들이야 꿈엔들 나설수 있을라구, 어림도 없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그릇되였다는것은 그 이듬해에 내가 연길현 화전자 대명당묘라는 곳으로 옮겨서 지주 김홍령의 집머습으로 다시 일하게 되였을 때 백군칠이라는 농민청년과 가까와지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군칠이는 자주 밭에서 일하고있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와 나란히 밭고랑을 타고 김을 매주면서 여러가지 세상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 보라구. 우리 마을에서도 몇놈 안되는 지주들이 숱한 농민들을 부려먹고있거든. 하긴 지금은 이놈들의 세력이 큰것 같지만 사실 우리 농민들이 로동자들과 함께 굳게 단결하여 투쟁만 한다면 놈들을 때려부실수 있지. 우리가 잘살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어.》

그는 자주 《우리》라고 했는데 나는 처음 퍽 미심쩍게 대했다. 그러나 차차 듣고보니 정말 우리가 단결만 하면 몇놈 안되는 지주, 자본가쯤은 문제가 안될것 같기도 했다. 수가 많은 우리 무산계급들이 놈들을 하나씩 가로맡아 해치우면 될수 있지 않는가.

백군칠은 어느날 저녁 나보고 마실을 가자고 하였다. 따라가니 어느집 뒤골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농군차림을 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나는 여기서 비로소 내가 평소에 우러러보던 혁명가들이란 어떤 남달리 태여난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가난한 로동자나 농민의 자식임을 알았다. 나는 여기서 또한 농민들의 단결을 위한 조직체들인 《반제동맹》, 《농민협회》, 《혁명가후원회》들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더우기 백군칠동무가 그 조직중 하나의 책임자였다는데 대해서는 놀라움을 가지고 대했다. 나는 이런 모임에 여러번 참가하는동안 앞으로 내가 제나라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누가 싸워줘서 새 세상을 가져다주는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나도 그들과 함께 지주나 자본가들의 세상을 뒤엎기 위해 팔걷고나서야 하리라는것을 믿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어느날 저녁이였다. 우리마을 리만길이란 사람의 집마당에서 오락회가 있었다. 나도 여기에 참가했는데 가만히 보니 지주의 아들인 한초시란 녀석이 제법 좌지우지하고있었다.

(아니 오락회에서까지 저런 자식이…)
나는 저으기 심사가 뒤틀려 아니꼬와 마뜩지 않게 건너다보고있는데 그놈이 호락호락하며 바로 내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하는 말이 《창가한마디 못부를 머저리야 아니겠지? 어디 쇠소리라도 내봐.》하는 건방진 수작이였다.

《이 자식이…》
심사가 꼬였던판에 놈에게서 모욕까지 받고나니 더 참을수가 없었다. 나는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와락 잡아당기여 허궁 들어 궁둥배지기로 땅바닥에 멨다꽂았다.

《아가릴 좀 옳게 못놀려?》
그놈은 큰 대자로 뻗어 그대로 까무라치고말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놈은 쥐새끼처럼 비실비실 도망쳐버렸다. 만장이 웃음판이 되였다.
그러나 후에 나는 백군칠동무에게서 충고를 받았다.

《그런짓은 그 녀석에겐 약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도움도 못주네. 우리 농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투쟁이 그런 주먹놀음으로 얻어질것 같은가. 천만이네, 아무 소용이 없어. 한초시놈을 때렸다고 이 세상에 지주, 자본가가 없는 사회가 오는것은 아닐세. 놈들은 군대도 가지고있고 경찰도 제마음대로 움직일수 있거든. 그러니 우리도 그들과 맞서 싸우려면 조직에 들어 단합된 력량으로 조직의 엄격한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해. 괜히 자네가 앞으로 다시 이런짓을 저질렀다간 놈들도 가만 안있을거구 우리도 그냥 두질 않겠네.》

나는 처음엔 이 말이 잘 리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한초시의 아들놈이 죽게 되고 놈들이 경찰서에 알린다 야단치는 바람에 더는 이곳에 박혀있는것이 재미없게 돼서 결국 그전에 일하던 철공소로 뺑소니치지 않으면 안되여서야 그 말의 참뜻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제동맹》, 《농민협회》등 혁명단체에 참가하였으며 적위대에도 입대하였다.

1930년에 나는 연길현 화전자 신흥동에 있는 홍응산이라는 지주놈의 머슴으로 들어가라는 조직의 지시를 받았다. 당시 신흥동에는 국민당군대인 호로병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접을 잘해주는 악질지주인 홍응산네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런 기미를 안 신흥동당지부 책임자 김인준동지는 내가 그 지주집에 들어간지 얼마안되여 나를 불렀다. 그는 나에게 홍응산네 집에 드나드는 호로병들의 무기를 로획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김인준동지가 나에게 작탄을 내여줄 때는 새삼스럽게 책임의 중요성을 느꼈다. 여태까지 보초나 통신련락을 한 경험은 있지만 이런 중대한 과업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조직이 나를 믿고 맡기는 과업인만큼 내 또한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 과업을 반드시 실행하리라 굳게 결의하였다.

지주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자나깨나 무기탈취를 위한 그 생각에 골몰하였다.

가을비가 부슬거리는 음산한 어느날 낮이였다. 소여물을 끓이느라고 아궁이에 가둑나무를 지피고있는데 개짖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하고 밖을 내다보던 나는 순간 흠칫 하고 놀랐다. 마당으로 비에 홈빡 젖어 괴죄죄해진 호로병 6놈이 들어오고있지 않는가. 놈들의 어깨너머로 삐죽이 내민 총신이 나의 시선을 끌고 놓지 않았다.

놈들은 나에게로 와서 더운물을 좀 달라고 하며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때마침 지주놈은 안방에서 낮잠을 자는 짬이여서 나는 우선 그들을 내가 자는 방으로 들어가게 하고 더운물을 떠다주었다. 물을 마시고난 놈들은 모두 제멋대로 누워서 아편을 빨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수 없다고 결심했다. 신경이 바늘끝처럼 긴장되였다.

(어떻게 하면 여섯자루의 무기를 감쪽같이 빼앗을수 있을가.)
이윽고 나는 태연한 빛을 보이려고 애쓰면서 방에 들어가서 청동화로를 가지고 부엌으로 나왔다. 그리고 감춰두었던 작탄을 가져다가 화로에 파묻고 그우에 시뻘건 가둑나무불을 담아가지고 다시 방에다 들여놓았다. 누워있던 놈들은 불담은 화로를 보자 마치 불을 본 하루살이처럼 화로주변에 다가들었다.

나는 얼른 방에서 나와 대문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렸다. (혹 작탄이 튀지 않으면 어쩔가? 혹은 작탄타는 이상한 냄새에 놈들이 사전에 작탄을 발견해내면 어떻게 한다?) 이러한 여러가지 얽히고맺히는 불안과 기대가 머리속에서 무섭게 맴돌아쳤다. 나는 그때처럼 초조한 시간을 보낸적이 일찌기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릴수록 마음속은 그냥 달아올라서 참을수가 없었다. 나는 앞내가에 뛰여가서 동네아이들이 고기잡이를 하고있는데 슬쩍 끼웠다. 나는 고함도 지르고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지주집에서 무슨 변동이 생기지 않나 하고 자주 그리로 눈길을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꽝!》
폭발소리가 지주집에서 천둥소리처럼 일어나자 이윽고 뭉게뭉게 중천으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뽀얗게 보였다. 나는 《터졌구나!》하고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번 하였다. 《무슨 큰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난 가봐야겠다.》하고 줄달음쳐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의 문짝이 넓은 뜨락 한복판에 튀여나와 떨어져있고 방안에선 아직 짙은 검은 연기가 그냥 무럭무럭 쏟아져나와 주위는 눈을 뜰수 없을 지경이였다.

《성공이다!》하고 나는 속으로 환성을 올리면서 문어구에 다가서서 들여다보니 정말 놈들이 한구들에 너저분히 나자빠져있었다. 나는 얼른 무기를 찾았다. 재빨리 건사해야 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벽에 걸려있던 무기는 마술을 피운듯 싹 없어지지 않았는가. 가슴이 섬찍했다. 나는 당황한 눈길로 여기저기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놈들의 총은 한자루도 안보였다. (이게 무슨 조화람?) 나는 어쩔바를 몰라 잠시 멍청히 서있었다. 그러는데 폭발소리에 놀란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나는 어쩔수없이 자리를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실망도 하였거니와 이 엄중한 사태를 두고 한없이 자신이 뉘우쳐졌다. 조직에 보고를 해야 했다. 나는 음울해서 면목없이 김인준동지앞에 섰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것이였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풀이 죽고 부끄러워서 몸둘바를 몰랐다.

《조직앞에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나는 자초지종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는 은근한 미소를 띠우며 말하는것이였다.

《동무는 대담하오. 나는 동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던참이였소. 수고했소.》하고 뜻밖에도 칭찬해주는것이였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알수 없어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는 무기의 행처를 알려주는것이였다.

호로병들이 지주집에 들어가는것을 알게 된 당지부에서는 곧 몇명의 조직원을 그 집주변에 파견하여 기회를 노리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어떤 계획을 꾸몄는지 알 까닭이 없어 자기들대로 기다리기만 했는데 좀 있으니 집안에서 별안간 요란한 폭발소리가 났다. 그들은 비로소 내 계획을 짐작하고 지체없이 방으로 뛰여들어가 감쪽같이 무기를 걷어가지고 돌아왔던것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긴 안도의 숨을 내뿜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나의 무기탈취계획이 얼마나 무계획적이였는가를 다시금 깊이 뉘우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비로소 혁명가들의 사업이란 대담성과 함께 철저한 계획과 조직력이 병행해야 한다는것을 절실히 느꼈다.

김인준동지는 내가 첫공작을 진행했던만큼 될수록 결함은 지적하지 않고 내 공로만을 강조했다. 그럴수록 나는 이번 일에서 조직과 미처 련계를 갖지 못한 자신을 꾸짖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조직과의 련계밑에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는것만이 투쟁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다는것과 그러기 위하여 조직의 지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우겠다고 나는 재삼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이것만이 진정한 삶의 보람을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나는 이듬해인 1931년 2월에 공청에 가맹하였고 그해 6월에는 지방돌격대에 입대하여 분대장공작을 맡게 되였다.

이와 같이 내가 조직에서 육성되던 그때는 동만일대에서 벌써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항일유격대가 조직되던 력사적시기였다. 1932년 봄에 드디여 항일유격대가 창건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영광스러운 이 대오의 한 성원으로 복무하게 되였다.

유격대오를 따라 집을 떠나는 날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하다, 떠난 길이면 끝까지 걸어라. 도중에서 물러앉지 말고.》
나는 아버지의 이 말을 들으면서 《일 잘하면 잘 살수 있다.》던 옛날의 아버지가 아님을 알고 저으기 기뻤다.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나는 이리하여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 대원으로서 일제를 반대하는 싸움의 첫발자국을 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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