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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핵실험의 돌풍을 넘어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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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6-12-25 00:00 조회12,3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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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3세 청년의 눈에 비친 북조선. 그곳을 처음 방문한 청년작가의 마음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방문기에 이어 "핵실험의 돌풍을 넘어서서..."글을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했다. 글 중에는..."우리가 북쪽에 있는 동안 거듭해서 “우리는 또다른 이라크가 되지 않겠다”는 엄숙한 선언을 많이 들어야했다. 그럴 것이다. 이미 그들은 전쟁을 경험했으니까. 역사가들이 부르는 “미국의 잊혀진 전쟁”은 북과 남을 합쳐서 삼백만, 중국인 백만, 그리고 미군 약 오만명의 영혼을 앗아가고 생명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천만명의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진 채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북조선: 핵실험의 돌풍을 넘어서서


미리엄 칭 윤 루이(윤미란) 씀
이 주연 번역


<##IMAGE##> 조선의 핵실험이 이라크로 정신없는 군사관계자들의 허점을 찔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조선은 정권교체의 초읽기에 들어간 부시행정부를 좌절시키겠다는 의사표명을 일관성있게 해왔다.

이 핵실험은 말그대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식의 약소국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해나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한 킬로톤의 폭발은그 엄청난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약자가 새로운 세계의 질서안에서 여전히 움직일 공간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폭발이 있기 직전에 나는 이주동안 다른 여덟명의 미주한인 청년들과 함께 내 분단된 심장의 좌심실이 묻혀있는 북조선을 다녀왔다. 그 여행은 뉴욕에 있는 이민공동체 평화단체인 노둣돌이라는 단체의 배려로 이루어 진것이다. 북조선에서는 우리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같은 배에서 났다는 뜻의 “동포”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조상의 땅을 떠나 살고 있는 6백5십만 해외 동포들의 존재를 또다른 형태의 식민지주의, 조국의 분단과 전쟁의 아픈 산물로 보고, 우리를 젖은 눈과 벌린 팔로 맞아 주었다.

우리가 북쪽에 있는 동안 거듭해서 “우리는 또다른 이라크가 되지 않겠다”는 엄숙한 선언을 많이 들어야했다. 그럴 것이다. 이미 그들은 전쟁을 경험했으니까. 역사가들이 부르는 “미국의 잊혀진 전쟁”은 북과 남을 합쳐서 삼백만, 중국인 백만, 그리고 미군 약 오만명의 영혼을 앗아가고 생명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천만명의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진 채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IMAGE##> 참으로, 나는 내가 들은 한국인들의 숨겨진 가족사 –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입산한 삼촌이며, 월북한 이모 등 아무도 생사를 모르는 가족의 이야기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토지개혁의 초기에 월남한 사람들, 미국의 융단 폭격을 피해서 아이나 어머니와 떨어져 남으로 피해온 가족들의 이야기가 있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분단을 입증한다. 이번 방문에서 나는 잊혀진 이모, 사라져버린 형제, 그리고, 내 외할머니의 어릴 적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작은 기회를 가졌다.

지금부터 내가 만났던 사람들 – 학살 생존자, 군인, 해외동포들과 일하는 여성, 보건성의 간부, 그리고, 교수 – 과 나누었던 대화를 요약 인용한 내용을 소개한다. 우리 방문단은 우리들 각각의 전공과 흥미에 따라서 그 특정 부문의 전문가들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그 만남 전에는질문 내용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질문 내용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북조선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에 맞게, 사소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미국에서 흔히 쓰는 “내가/나의”를 북남에서 흔히 쓰는 우리 할머니, 우리 나라 식으로 “우리가/우리의”로 바꾸어 번역해놓았다. 어떤 경우엔 그들의 직장에서, 어떤 경우엔 우리의 숙소인 노동신문 빌딩 옆에 있는 해방산 호텔에서 이런 만남들이 있었다. 그들의 의견들을 세계무역센터의 폐허속에서 “그들은 왜 우리를 증오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호기심많은 미국인의 정신으로 여기에 소개한다.

신천 학살 생존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 미군이 불을 지른 무너져가는 거무튀튀한 벽의 화약창고에 서있었다. 공기마저도 침체되고 억압적으로 느껴졌다.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미군과 남한군은 우리 할머니의 고향인 황해남도의 신천군에서35,383 명을 학살했다. 당시 인구와 대비하면 4명 중의 한명인 셈이다. 화형, 수형, 매장. 철조맘을 코에 끼워서 끌고 다녔고, 온몸에 그림을 그리우고, 사지가 찢겼다.

정근성씨는 충격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기지도 않은 시기에 타는 불길속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아동중 한명이다. 여섯살박이로서의 그 큰 경험과 기억은 고아로서 홀로 남겨졌던 할아버지의 기억속에 떨리는 목소리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울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다른] 화약창고에서 우리를 부르며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엔 우리들은 너무 목이 말라서 더 이상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기들은 엄마를 찾으며 기어다니느라 무릎이 다까졌습니다. 미군이 창고 문을 열고, 휘발유를 우리 머리위로 끼얹었고 그 다음엔 불을 던졌습니다. 창고안은 불길로 거세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 곁에 있던 아이들의 신음소리와 또 엄마를 찾아서 울던 소리, 먹을 것을 달라고 울던 소리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살타는 냄새와 연기에 숨이 막혔습니다. 나는 그때 구석에 몰려있었는데, 그 위에 창문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마 그것이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죽지 않고 살았던 이유였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그 학살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과 싸워야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싸우고,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기를 당부합니다.

인민군 장교

<##IMAGE##>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북조선 군인들과 남한의 군인들이 마주 서있다. 방문단 중 몇명은 남쪽에서 판문점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북쪽으로 판문점을 방문해서 관광버스가 지나가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민군 중좌인 김 명환씨는 지도를 가르키며 우리에게 분단선을 보여주었고, 전쟁때 어떻게38도 분단선이 바뀌어졌는가를 설명해주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그는 군복이 헐렁하게 보이도록 깡말랐고, 시원하게 웃음을 지으며, 우리가 같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자신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휴전 회담을 가졌다는 장소에서는 우리를 두편으로 나누어 한편은 북조선편에, 한편은 남한 편에 앉혀놓고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분단선을 지적해주었다. 그것은 너무 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게끔 만드는 경험이었는데, 우리 방문단은 이 스스럼없는, 우리만큼이나 우리와의 대화를 즐기는 듯한 김 중좌를 매우 좋아했다. 한편, 우리들 중 몇명은 이 휴전선 반대 편에서 강제징집을 당해 군대 복무를 마친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IMAGE##> 우리가 김중좌에게 개인적인 역사에 대한 질문을 했을때, 그의 대답은 역사와 가족사의 교차점에 있었다.

전쟁당시 우리 할아버지가 살해당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목이 잘리워서 본보기로서 기둥에 달려있었습니다. 우리아버지가 여섯살때였는데, 그렇게 고아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되었을때, 우리아버지는 인민군에 입대를 했고 평생 군인으로 복무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오형제에게 인민군에 입대해서 조국을 방어하는 것은 가장 성스러운 의무라고 말해주었고, 우리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8년째 복무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요구당하자, 그는 웃으며, 두 아이들이 있는데, 아주 말썽꾸러기들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군인들이 경례를 붙이는 김 중좌에게, 김중좌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나를 웃음짓게 만들었고, 나로 하여금 삼 세대째 내려오는 전통을 따라 그 아이들도 군인이 될까하는 궁금증과 이 휴전선의 철조망은 얼마나 오래동안 우리의 미래를 지배할까 하는 질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열사의 손녀딸

리 화일씨는 우리들에게서 “리어머니/빨리빨리 어머니”라는 애칭을 얻었는데, 1984년부터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영접국에서 일하고 있다. 리어머니는 “꼭두새벽부터 한밤까지” 눈코뜰 새없이 분주히 왔다갔다 하셨는데, 모임을 주선하고 우리를 준비시키랴, 우리가 요구한 한복때문에 옷감 가게부터 재단사 준비까지, 우리가 틀리게 부르는 노래들 교정시키랴, 틀린 율동 교정시키랴, 틈틈히 역사 공부시켜주랴 정말 분주하셨다. 이 분주하고 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겸손한 리어머니를 인터뷰하고 그 개인사를 듣기까진 정말 북쪽에서 표현하는 조선인의 고집으로 내 기자 정신을 발휘해야 했었다. 리어머니는 계속 “나는 아무도 아니라니깐. 정말 더 훌륭한 사람을 인터뷰하라구,”라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결국 리어머니가 포기하고 인터뷰에 응했을때에, 나는 그녀의 개인사를 통해 강박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사업 방식에 대해서 조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우리어머니가 한살이었을때, 그 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가 일본놈들한테 불태워져 죽었지. 우리 어머니가 일곱살이었을때, 결국 외할머니 마저 일본놈들의 고문에 못이기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셨고 우리 어머니는 고아가 되었어. 어머니는 세명의 오빠가 있었는데, 모두 다 항일 전사들이었다구. 두명은 그 당시 일본놈들 손에 죽고, 한명은 조국해방전쟁에서 전사하셨구. 모두 사후에 공화국 영웅훈장을 받았어.

전쟁후 1955년에 태어난 리어머니는 자신이 작은 몸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을때 너무 고생을 하셨는데, 그게 다 일제 하에서 감금당하고 고문당하고 그렇게 몸이 상했었기 때문이지. 내가 태어난 후 병원에서 오랫동안 입원해계셨는데, 그때 젖이 나오지 않아서 우리 아버지가 나를 안고 다른 병실에서 젖동냥을 다니면서 나를 먹였다구.

리어머니가 성장했을때, 그녀는 다른 전쟁고아와 결혼했는데, 이것은 아들을 바랬던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녀가 “나는 어머니의 경험때문에 고아들에게 연민을 느꼈고, 내 나름대로 돕고 싶었기때문”이었다. 북쪽에서 표현하는 고난의 행군, 1990년 후반의 홍수와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위기 시절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녀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그때 “내가 일본 식민지시대,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시절을 다 경험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들은 지금처럼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구. 시골에서야 조그마한 땅에 야채라도 기를 수 가 있었겠지만, 우리처럼 콘크리트 바닥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뭘 기를수나 있었겠어? 그때는 십오일치 배급량이 지금의 삼일치 배급량 만큼이었다구, 그걸 가지구 십오일동안 버텨야했어. 일하고 집에 올때마다, 저녁엔 뭘해서 먹어야하나, 쌀은 어떻게 하나, 반찬은 어떻게 하나, 나중에는 소금까지 모든 걸 걱정해야했다구. 자라나는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먹여야하나, 아니<##IMAGE##> 면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하는 어른들이 조금 더 먹어야하나.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지. 우리집에선 나한테 제일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은 나하나 밖에 없었으니까. 남편하고 아이들 점심을 싸줬는데, 내 점심쌀게 어디있어? 점심때가 되면 내가 안먹고 있으면 직장동료들이 자기들 그 얼마안되는 점심을 나랑 나눠먹자고 할까봐 회의에 간다고 말하고 밖에 나갔지. 자기들이라고 뭐가 충분히 있었겠어? 그래서, 밖에 나가서 있다가 돌아와서 회의에서 뭐 먹었다고 말하곤 했지. 어떻게하든지 아이들은 충분히 먹일려구 최선을 다했는데, 그 왜 강냉이랑 밀을 쌀과 바꿔서 조금이라도 배부르게 하려구 하는 것 있잖아? 시골에 있던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뜯어서 음식에 섞어먹었다고들 해. 그렇지만, 그때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국경을 넘어서 다른 나라로, 아니면 중국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좀 있다구.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자기들만을 생각해서 어려움을 피해간 것이겠지만, 그 자체가 자신들의 양심을 배반하고 조국을 배반한 것이 된다고 생각해. 아마 나중에 되돌아보고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할 날이 올꺼야.

리어머니는 해외동포들을 대하는 자신의 직업에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해외동포들은 일본에서 오고, 그다음엔, 중국, 그다음으로 미국에서 온다구. 나는 이산가족들이 재회하는 것에 대한 감동스러운 기억들이 많이 있다구. 해외 동포들이 찾아와서 사십년 오십년만에 처음으로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것을 보면 우리도 울음바다가 되지. 북남공동선언이후에 해외동포들 사이의 관계도 많이 좋아진 것 같구. 어쩌면 해외동포들과 우리들 사이에 있는 벽들이 많이 허물어진 듯도 한데, 미국 정부가 우리를 여전히 억누르고 고립시키려고 한다구. 그래서 미국에서 오는 동포들,노둣돌이 조직해서 오는 이 방문단처럼, 미국에서 오는 동포들의 역할이 북남공동선언[2000년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구. 만약 모든 조선인들, 그러니까 북, 남, 해외가 한마음으로 단결해서 통일을 원하고 열심히 일한다면 나는 우리가 아주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봐. 그럼 통일은 당연히 되지.

보건성 의학교류사업 담당자

오후를 평양 산모 병원에서 볼이 통통한 아기들을 바라보며 또 신생아학자들 및 의사들과 간담회를 가지면서 보낸후 우리는 정봉주 조선의학인협회 부의장이자, 보건성 의학교류사업 담당자와 면담을 가졌다. 바지에 넥타이를 생략한 반팔 셔츠 차림으로 온 그는 학자다운 품위가 흐르고 차분하고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조국의 경제문제로 인해서 보건제도가 겪고 있는 전체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설명했다. 또한 그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보건제도망이 도, 시, 군, 리에 걸쳐서 병원 및 진료소 등으로 나눠져있고130 가족 당 한명의 의사꼴로 잘 형성되어 있으나, 의약품의 부족과 의료 설비의 부족을 메꾸기에는 역부족임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그리고, 현재 고려의약으로 그 대안을 마련하여 북조선의 80%를 덮고 있는 산간지역에서 고려의약 – 남한에서는 한약이라고 부른다 – 을 재배하고 개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IMAGE##> 왜 몇몇 식량보조 및 의약 보조 비정부기구들이 북쪽에서 쫒겨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자, 이 친절한 의사의 표정이 굳어지며, 환자의 생명이 위험한 듯, 분노가 차오르는 듯한 어조로 그는, 조선사람들은 어려울때 이웃을 돕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도우러왔다는 그들 비정부기구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잃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일에 간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은 양의 아스피린을 가지고 와서1000불을 달라고 하고,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을 가지고 와서 선심을 쓰는 척 내줍니다. 우리는 약을 만드는 시설이 다 되어있고,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은 그 약을 우리가 만들수 있는 원료고, 에너지이지, 그 약 자체가 아닙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가 요구하는 약품은 주지 않고 필요없는 다른 약품을 가져옵니다. 그래놓고 전국을 조사할 권리를 달라고 우깁니다. 이 일은 우리를 정말 나쁜 처지로 몰아넣었어요. 우리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려하지 않고 우리를 탐색하고 상황을 악화시키려고 했어요. 그들은 쫒겨나야 했습니다.

정치학 교수

<##IMAGE##> 줄담배를 피우는 김일성 종합 대학 정치학과 강사장인 정기풍교수를 만났다. 짧게 깍은 머리와 매서운 눈매는우리에게 예리하다는 인상을 남겼는데, 남한에 주둔한 30,000 미군들이 주는 영향을 설명할 때의 도전적인 말투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 말에,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너무 오래 지체하면 싫어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국은 친구도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을 싫어합니다. 미국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해서 우리 사람들을 마구 죽였고, 우리 조국의 통일을 훼방놓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미국사람들을 싫어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미국에도 많은 수의 좋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욕하는 것은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선을 적으로 삼는 그 정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제발 우리일에 방해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겁니다.

우리가 정교수에게 “선군 정치”에 대해서 그리고 2006년 7월의 미사일시험에 대해서 질문했을때 들은 대답은 아마 그 이후의 핵실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해야만 했지요. 지금 우리가 무기에 많은 돈을 쓰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미국은 힘이 센나라이고 우리는 작은 나라인데, 우리도 이라크처럼 될 수 있겠지요. 바로 몇주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레바논은 이스라엘을 막을 수 없었지요. [무기를] 수출하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지 다른 나라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닙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무기를 제일 많이 수출하는 넘버 원 나라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권리가 있는 국가입니다. 국제미사일통제조약이 있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조약국이 아니며 우리가 그 조약을 따라야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공격하지 않겠지만, 만약 누군가 우리를 공격한다면 적절히 대응할 겁니다.

우리가 미사일을 쏘았을때, 우리도 이것이 미국에게서 또 강경대응과 무역 제재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라크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으려면 다른 대안들이 있어야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지 않는다면, 한반도엔 또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겠지요.

무역제재에 대해서 다른 면으로 이야기를 해봅시다. 지난 육십년간 우리는 내내 미국에 경제 제재를 받아왔습니다. 이미 해보지 않은 경제 제재가 뭐가 남았겠습니까? 이때까지 미국이 지속적으로 저지른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우리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이때까지 육십년동안 제재속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이제 더 이상 제재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재가 없는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기때문에 뭘 어떻게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화국은 조선인들을 미국의 제재에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의 경제는 지금 힘듭니다. 외국과의 무역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는 석유와 고무가 생산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철강을 만들기 위해서 원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족이 우리가 식량과 의류 그리고 생필품의 생산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적들이 가족으로 보일때

함께 대화하고, 노래를 부르고, 미국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나는 북조선이 이라크와 레바논에서의 살육을 보고 자신들의 방어선을 더 튼튼히 구축하는 유일한 나라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지금 날아다니는 총칼과 가족들의 시신 사이에 웅크리고 숨어있는 아이들이 크면 어떻게 될까? 팔레스타인에서는? 또 다른 “적의 점령지”에서는? 내가 아는 것은 이번 팔루야와 남부 레바논에서 시민들을 태워죽인 황린 화학무기는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농민들을 학살한 네이팜 폭탄의 손자뻘쯤 된다는 것이다.

<##IMAGE##> 부시 행정부는 아직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옛적대국이었던 중국, 베트남, 러시아 등과 마찬가지로 양자회담을 시작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면 되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지미카터의 요구에 따라서 극적으로 1994년 북조선과 합의문을 채택하고 북조선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2개의 경수로 발전소를 약속하며 정상화로서의 길을 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시 정권이 들어서서 그 합의문을 무산시키고 다시 6자회담의 숨바꼭질을 시작하고는 제재조취만 강화하고 있다.

왜 단독으로 합의문에 명시된 조약을 지켜야 하겠는가라는 당연한 질문을 던지며 북조선은 핵확산저지조약에서 탈퇴하고, 국제 원자력 기구 감사원들을 쫓아냈으며, 8년동안의 휴지기 (1994-2002) 에서 벗어나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무기를 내던지고 다시 협상테이블로 돌아올것임을 계속 시사해왔다.

핵실험을 규탄하면서도, 북조선의 가장 큰 무역파트너인 중국과 남한은 계속 경제적관계를 유지하면서 – 중국은 아마 석유 공급을 줄이고 북조선의 국내 은행거래를 금지할 지도 모르지만 - 북조선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 폭발이전에, 남북한 사이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 대중 전대통령의 햇빛정책 및 2000년 6.15 선언의 정신에 따라 문화적, 학술적, 상업적, 정치적, 군사적인 교류가 거의 매주 있다시피 해왔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 공동선언은 외세의 간섭이 없는 한국인/조선인에 의한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주창하고 있다. 작년 약80,000 명의 남한사람들이 북조선을 방문했으며, 약 1백 25만명이 금강산의 봉우리를 누비고 다녔다. 이 거의 광적이다시피 보였던 교류는 단지 형식적인 기간동안만 그 속도가 늦추어 질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핵확산의 시계는 계속 가동중이다. 국제 원자력기구의 대표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이제 세계에서 약 삽십여개의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이제 아주 짧은 기간동안에 핵무기를 증가시키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국제적 협력 또는 다국적 시도 (핵 예방수단)을 계발해야한다.” 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면서 전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자체내에서도 지금 현재 두가지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조선이 중동지역을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다른 약소국들도 북조선이 미국과 펼치는 “공동으로 망하는 경주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 game)”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부시행정부가 북조선같은 적대국과 진지한 대화를 더 오래 거부할 수록, 미국은 더 많은 즉각적이고 긴급한 위험(Immediate Eminent Danger)의 증오에 맞부딪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적을 만났고 그들은 가족과 마찬가지 였다. 굶주린 배를 움켜쥔 꼿꼿한 기개와 부자의 눈에 비치는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을 아마 나는 어느 곳에서든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미리엄 칭 윤 루이(윤미란)은 미주중한인 3세이며 땀공장 전사들: 세계화 공장에서의 여성이민노동자들Sweatshop Warriors: Immigrant Women Workers Take on the Global Factory (South End Press), 세계 경제안의 여성 교육 Women’s Education in the Global Economy: A Workbook (with Linda Burnham, Women of Color Resource Center), and 다리: 이민/망명 지역사회를 위한 대중교육 자원 BRIDGE: A Popular Education Resource for Immigrant & Refugee Community Organizers (with Eunice Cho, Francisco Arguelles, and Sasha Khokha, National Network for Immigrant & Refugee Rights) 등등을 저술했다. 이주연은 미주 한인 1세이며 2006년 북부조국 방문체험단으로 윤미란과 함께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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