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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건30돌 기념강연-2]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홍정자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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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3-16 00:00 조회2,4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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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자
(재미동포연합서부연합회 예술분과 위원장)

이북의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상대로 대담한 숫자만 해도 1백50여명이나 될 것 같다. 그 대상의 분야들도 다양한 인물들로 회고된다. 저는 그 대상들과의 깊은 대담을 통해 이북 동포들의 생활과 마음 깊숙한 부분까지 들여다 볼수 있었다. 북녘 동포들은 하나같이 순수했고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서로가 가슴으로 만났기 때문에 저는 이들을 탐방취재 하면서 많은 눈물을 보았다.

minkun30-16.jpg나는 1988년 첫 방문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30여 차례나 방문하면서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해.내외동포들중 아무도 가보지 못한 "아오지 탄광"까지도 돌아보며 이북의 구석구석을 다녀 보려고 애썼다. 한때 명배우이며 월북인물인 문예봉, 심포지 지휘자 김일진, 몽양 여운형의 딸 여연구, 이북 무용계의 최승희 인척들, 천재 소녀화가 오은별, 원로 체육인 신금단, 역도산의 딸 김영숙, 한용운 시인의 자손들 및 허정숙 등 정치계, 음악계, 미술계, 체육계, 종교계, 연예계, 학술계, 문학계, 항일혁명가들과 가족들, 보건의료계, 영예군인 가족들, 교육계, 광부들과 일반 노동자들, 인민군인들, 농촌 인민들 등이 탐방 대상들이었다. 이들에 대해 추억하는 이야기를을 유럽동포들과 나누고 싶다.

이 번에 출판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책은 신발수리공의 가족들을 만나 대담한 내용을 비롯하여 바둑신동 최은아, 평양교예단, 처녀엄마들, 지리산의 호랑이 이현상의 딸 이상진, 평양 외국어대학, 아오지 탄광, 계관시인 김시권, 칠골교회, 노동자는 왕-정춘실 이야기, 안과의사 백형기, 4월 봄축전, 동지의 딸은 나의 딸-선원 문정섭 이야기, 사랑의 교사들, 북조선의 프리마돈나 <총련의 딸> 조청미, 용서하시라 아내여-영화문학인 오혜영, 북조선 무용예술-최승희, 마지막에 이 책의 제목으로 택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재일동포 강제북송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알고 보니 강제북송이 아니라 당시 제일 동포들이 서로 가지 못해서 가는 동포들을 부러워했던 사실을 발견하며 남한보도가 정 반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총련 동포들을 만나고 그들을 알면 알수록 가슴이 메어진다.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서 모진 차별을 받아가면서도 피눈물로 지켜 낸 그들의 애국심에 대해 고개가 숙여진다.

이북동포들은 또 눈물이 많다. 왜 그럴까. 북녘 동포들은 너무나 어려운 세월을 보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깔고 살 듯이 이북 동포들은 일제와 맞서 투쟁하던 항일역사를 깔고 살고 있으며 8.15이후에는 가슴 아픈 분단역사를 깔고 우리 민족의 역사 위에 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역사는 가슴에 안고 있으며 또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그 역사를 안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북 동포들은 정이 많고 마음이 비단결 같았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많다는 사실들을 많이 목격했다. 김주석님을 비롯하여 김 위원장님 자신들이 워낙 열정적이신 분들이라 그곳 동포들이 모두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모든 인민들이 이렇게 뜨거운 애국심으로 가득 찬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일제시기와 더불어 분단시기 내내 고난의 행군으로 걸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북녘 동포들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신심에 넘쳐있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인간의 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확인해 보려면 이북에 가 보면 알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렵게 생활할 것이라고 걱정하고 그곳을 가보면 오히려 한층 더 활기에 찬 모습을 보게되었다. 역사상 이런 나라가 없는 것 같다 .

이북은 모든 분야가 인민을 위한 사업으로 집중되어 있다. 농업도, 음악도, 문학도, 정치도, 경제도, 보건도 마찬가지다. 김병화 국립교향단 지휘자가 곡 하나를 창작하기 위해 사전에 이 곡을 농민들에게 들려주어 이들이 정말 좋아하는가를 검토하는 작업등을 거치는 과정의 경우를 비롯하여 영화를 하나 제작하여도 인민들이 정말 이것을 좋아할까를 먼저 생각하며 제작하는 나라이다. 이들이 말하는 주체예술은 곧 인민을 위한 예술이다.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야 이곳에서는 인정을 받는다. 모든 사업들은 인민과 연결되어 있다.

서방에서 비난하는 인권문제나 종교문제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봉수 교회, 칠골교회, 그리고 사찰들, 천도교 등도 있지만 이 나라는 헌법으로 종교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단지 어떤 종교이든지 인민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인민중심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종교 얘기에 대해서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한국의 숭실대학교 총장을 하시던 김성락 박사가 미국에 이민 와 사시는 동안 북녘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김일성 주석님과 접견한 적이 있었는데 식사시간이 되자 김주석님은 김박사님에게 "목사님 기도하시지요"라고 권했던 일화는 이북을 방문한 종교인들은 모두가 아는 에피소드가 된다. 이북관리들은 북녘을 방문하는 기독교 동포들에게는 의례적으로 "식사하기전에 하는 거 있잖습니까?"라고 한마디 떠보는 경우들이 많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노인 목사님이 방문했을 때 이북 관리 한 분이 목사님과 가족들 여러분들이 식사를 하는 시간에 "기도 안하십니까"라고 말하자 이 목사는 그 순간 너무나 기뻐서 갑자기 일어서더니 양팔을 쭉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해 이 자리에 있던 이북 관리들이 당황한 일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라는 말이었는데 모두를 위한 공동기도로 착각했다는 것이 목사의 뒷 이야기였다.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1990년대 중반이었다. 해외 동포들 3백여 명과 함께 오찬연회에서 뵐 수 있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 김 주석님이 술잔을 들어 참석자들과 축배를 할 때 놀란만한 사실이 목격됐다. 그날 오찬에 참석한 3백여 해외동포들 한분 한분에게 모두 술잔을 들고 다니면서 축배를 권했다. 나이 드신 분이 첫 테이블에서 끝테이블까지 자리한 참석자들 모두에게 일일이 다가가 건배를 했다. 그러면서도 축배를 마친 참석자들에게는 자리에 앉으라고 계속 반복해 권유하면서 모두에게 다가갈 때 느꼈던 것은 일종의 충격이기도 했다.

고난의 땅으로 연상될 만큼 시련에 시련을 거듭해 온 나라, 북부조국,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라에서 뜻밖에 고상한 인간의 향기를 느껴보게 되면서―. 유례없는 뜨거운 인간애의 화원이 펼쳐지고 사랑의 서사시가 온 나라에 흘러 넘치고 있다고 묘사하고 싶다.

이러한 이북의 실상을 캐내기 위해 해산 중에 죽은 어머니,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때문에 고아가 된 13살 혜정이와 15살 학문이 그리고 이들을 자식으로 길러 준 평양서부철도국총국 비서의 이야기들을 포함하여 광복거리에 있는 대중식당 <청춘관>의 오춘옥의 가정사를 통해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을 모셔 효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인민군 사관 리수형이 다리를 잃고 두눈이 실명되었으나 그를 위대한 아내로 맞이하여 살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 황비봉 청년이 같이 근무하던 동료가 공사중 사고사로 세상을 떠나자 1남3녀의 외아들인 이 가정에서 자신이 죽은 아들 대신 빈자리를 메우며 이 가정의 아들이 된 이야기, 도서관 잡지에서 영예군인 노부부의 이야기를 읽고 이들을 모시기 위해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던 차성희 양이 시골로 가서 양딸로 모신 이야기 등 고상한 인간사랑의 화원을 추억한다.

나는 글도 쓸 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남한 동포들이나 해외동포들이 이북을 너무나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탐방 취재기는 무엇이었나에 대해 그는 <아오지 탄광>이었다. 남한에 있을 때 툭하면 아오지 탄광 이야기가 많이 나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런가하는 호기심과 그 실체를 알기 위하여 <아오지 탄광> 취재를 부탁하였는데 다른 취재보다 퍽 어려웠다. "평양 근처에도 탄광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아오지 탄광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으로 2차례의 개인전을 가져보았지만 글이라고는 한번도 써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백두밀림의 항일투사 김정숙 어머님을 추모하여』, 그리고 이번에 쓴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탐방기를 쓸 수 있었던 그 힘은 무엇때문일까" 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묻기도 했다.

(*필자는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 이산가족위원회 총무역임, 민족문화위원회 위원장 역임, 4월의 봄 친선예술축하단 단장(1989-2000), 미주통일여성회 부회장 역임, 현재 재미동포연합서부연합회 예술분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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