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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종환 6.15서부위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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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6-09-07 00:00 조회10,8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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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차종환 6.15서부위 공동위원장
30년 동안 맺힌 한(恨), 이제야 풀려-해직교수 차종환 박사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 차종환 6.15서부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72)은 로스엔젤레스에서는 유지 중 유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학 박사, 농학 박사, 교육학 박사 등 학위들도 다양하고 각종 저서 170여편을 펴내 저자로서도 평판이 높다.

차박사는 또 미주이민사회 동포들과의 교분도 그 폭이 아주 넓다. 그는 중도에 해당되는 인물이지만 보수우파들은 물론 진보좌파들과도 폭넓게 사귀어 온 인물이다. 그는 1935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으로 1965년부터 도미하기 1970년까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던 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한국서 "해직 교수였다."는 사실은 최근 코리아나 뉴스가 보도(아래 별첨 참조)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차 박사의 약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IMAGE##> 서울대 사범대학 생물학과 졸업(1958), 동대학원 졸업(1960). 동국대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사(1959-1961). 동국대학교 대학원(박사과정1962-1966).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교사(1962-1967).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사(1965-1968). 이학박사(1966, 도목 생육에 미치는 초생부초의 영향). BYU초빙교수(1970). Bateson 원예대학원장. UCLA 연구교수(농학박사). 한미농생물협회장(1984). 한미 교육연합회장(교육학박사). 농학박사(1976, 사막식물의 생리 생태학적 연구). 남가주 한인회부회장(1979-1980). 교육공로상(제1회 한인회 주최)수상. 한미교육연합회장(1983). 평통자문위원(2기) 위촉(1983). 한미 농생물협회장(1984). 교육학박사(1986, 한미교육제도 비교). 남가주 서울대학교 총동창회장. 남가주장학재단 이사장. 한인공제회 이사장 등 미국 교포사회 단체장을 두루 맡아 임무수행. UCLA에서 17년동안 근무하면서 교포 학부보들을 위한 교육 세미나, 기사투고, 교육저서의 활동 등으로 교육계에 공헌한 바가 커서 나성 한인회 주최 각 분야별 제1회 공로자 표창식에서 교육계 대표로 봉사상 수상. 나성시 인간관계위원회에서도 시만들을 위한 공로로 수상.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성백화점 문지기"라는 일화로 유명. 24시간 풀가동하는 인간 굴착기와 같으면서 겸허한 자세로 항상 남의 말을 경청하며 언제나 메모하는 습관, 미국이라는 땅에서 세 마리의 토끼를 사로잡는 경이적인 신화를 낳음. 농학, 이학, 교육학 세 가지 박사학위를 소유한 연구 정진으로 유명하다.

차 박사는 또 캘리포니아주의 저명 인사록 1986, 1987년도 판에 거듭 수록되었다. 일반동포들에게 알려진 저서들: "미국유학". "미국의 교육제도". "올바른 자녀교육" "차돌이 교육방랑기" 외 국내도서 26권 영문 5권 이상. 논문 "Desert in Plant Ecology"외 170여편이 출판되었다.

2006년 9월6일 주간지 코리아나뉴스는 차종환 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문하는 자에게는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정열(leidenschaft)이 중요한 덕목이라고 밝혔다. 베버가 말한 정열은 바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이미 LA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차종환 박사의 수많은 저서들은 베버가 개념화한 진리에 대한 정열이 없다면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종환 박사가 30년 동안 해직 교수로 지내왔다는 사실을 아는 동포들은 그리 많지 않다. 차종환 박사 스스로 말하듯이 “그건 너무나 개인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고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지난 1976년 박정희 독재가 극으로 치닫던 시절 동국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차종환 박사는 환경 오염에 대한 논문 등을 발표하고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의 몇몇 오류를 지적하였을 뿐인데 독재정권은 이를 “정권에 반하는 교수”라고 지목하고 해직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학문 영역조차도 자신의 의지에 부합하지 않으면 탄압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독재 정권의 정신분열증적인 증상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해직 결정 이후 차종환 박사는 미국으로 건너왔고 그 동안 남가주 한인회 부회장, 남가주 장학재단 이사장 등 여러 단체장으로 일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에 봉사하여왔다.

차종환 박사는 자신이 받은 인세 전액을 한미교육연구원 꿈나무 장학 사업에 기증하기도 했으며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여 현재 장남 차윤호는 의사로, 차남 차윤성은 LA시 차장 검사로 재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차종환 박사의 미국 생활은 왕성한 집필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늘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마음 속 한가운데는 해직을 당한 한과 서러움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05년 6월 23일 한국의 국회 본회의에서 ‘대학교원 기간임용탈락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차종환 박사는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교육부 산하 ‘교원소청심사특별위원회’(이하 특위)에 1976년 2월 28일자 재임용 거부처분의 이에 대해 특위(위원장 직무대행 정동훈)는 “재임용에서 탈락할만한 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구인을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은 부당하다”(특위, <재임용 재심사 청구사건 결정통지>, p. 7)고 결정을 내림으로써 차종환 박사 해직 결정의 부당함을 증명하였다.

차종환 박사의 하루 일과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료 조사와 집필 계획으로 꽉 차있다. 책상 앞에는 마지막 교정 중인 「한미관계 170년사」라는 책이 놓여 있었고 지금도 「현대사의 어두운 면과 미주 동포의 민주화 및 통일 운동」(가제)이라는 연구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왕성한 집필 활동의 원천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술, 담배를 일절 안 하고 골프 대신 매일 아침 30분 씩 산보를 한다”고 밝힌 차종환 박사는 자신의 책이 한 권 한 권 나올 때마다 마치 아들을 얻는 느낌이라고 말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찬행 기자>

[출처 : 민족통신 종합 200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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