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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양은식 박사의 "40년만의 서울"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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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5-10-06 00:00 조회10,5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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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과 통일공화국 선포를 기대한다


지난 8월 민족대축전에 미국 동포 대표로 참가했던 양은식 박사가 5일 서울 방문기를 보내왔다. <분단을 뛰어넘어> 저자로 잘 알려진 양 박사는 미국에서 평생을 조국통일 운동에 헌신해 왔고, 현재 6.15 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해외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원고는 <참말로>에도 기고했다.(민족통신/평화통신 편집실)

<##IMAGE##>8.15에 서울을 다녀왔다. 40년 만의 방문이었다. 내게 있어서 서울은 제2의 고향이다. 평양에서 나서 자라 16년을 살다 6.25때 서울로 피난 내려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고 3년의 교편 생활도 한곳이 서울이고 보면 40년 동안 찾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 무정하지 않은가.

그러나 자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으니 무정하고 비애국적인 사람으로 단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방문을 못한 것은 한국 정부에서 비자를 안 주기 때문이었다.

한번도 비자 안주는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 지난 30년 동안에 네 번 거절당했다. 해외동포로 조국을 찾고 싶다는데 안 된다니 처참하게 느껴지군 했다. 한번도 대화도 해보지 않고 무조건 자기네 동포를 죄인 취급하다니...

내 짐작으로는 76년 어머니를 찾아 평양 방문한 것이 남한 정부에 밉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통일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이 역시 남에서는 반란군쯤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었다.

해외동포로서 "조국 통일이 살길"이라 믿고 그 길을 전파하는데 노력한 것이 왜 반국가 반민족 행위인가. 그 이래로 남의 정부는 마치 내가 반란을 기도했거나 살인을 저질은 죄수같이 다루며 고국방문을 막아왔다.

개명 천지에 이런 비인도적인 정부가 있단 말인가. 사회문화는 포스트 모던 시대를 가고 있다 자부하면서.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조국은 냉전과 남북대결의 장이 현실이었던 것을...

금년은 광복 60주년이다. 너무도 긴 세월이다. 나는 결코 광복절 기념하려 서울 가는 것이 아니다. 분단이 아무리 주변 대국에 의해 들쒸워저 유지되었다 한들 남북이 하나로 되어 분단을 깨지 못한 현실은 국치에 해당되지 않는가.

나는 8.15에 60년간 못한 어떤 실마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인천공항에 내리자 범민련에서 주는 꽃다발을 받았다. ‘죄수의 고향방문’이 아니다.
서울방송(SBS) 텔레비전과 기자들이 소감을 묻는다. "공항이 훌륭합니다. 광복 60년을 맞는 오늘 8.15를 서울서 지내게 된 것이 기쁩니다. 담담한 심경입니다."

기자들이 연속 질문을 던졌다. "40년 동안 못 들어 온 이유는? 지금의 심정은?..." 못 들어 온 이유는 정부에 물어 보는 것이 좋겠다. 개인적인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은 민족의 화해 시대다. 거치른 감정은 화해의 큰 흐름에 흘려 보내겠다... 행사에 참가하고 나서 더 이야기하자. 그 동안 서울의 모습도 좀 보고..."

인천공항을 떠나 서울 시내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밤하늘에 어두움이 짙게 깔린 뒤였다. 버스는 올림픽대로를 거쳐 북상하고 있는 사이 내 시선은 차창 밖에 꽂혀 있다. 한강변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파리의 세느 강변을 연상하게 한다. 많이 변했구나. 그후 서울에서 체류하면서 느낀 감정은 천지개벽 수준이구나 였다.

나의 10일간 서울 체류의 중요 일정은 물론 8.15 통일대축전 참가이었다. 지난 6.15 평양축전부터 통일운동은 질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통일운동 대열에 대폭적 민간 단체의 참가, 그리고 남북 정부당국이 합류,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정부의 대미 외교자주노선 출현 등 금년 통일 행사는 변화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통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민족적 대각성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파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각성이 이번 8.15통일축전에서 "우리민족끼리" "민족공조"로 푼다는 무언의 합의가 우리 민족의 마음 마음에 퍼져나가는 흐름을 나는 보았다.

북 대표단 서울도착과 함께 충격적인 서울의 국립현충원 방문, 남측 당국 대표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개막식 연설 등은 진정한 남북화해와 민족공조의 선언으로 평가된다.

북의 고위대표가 "현충원 방문 결정은 어려운 일이였다."는 말에서 북의 결단을, 이에 대하여 정 장관의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직접 개척해서 영구평화, 공동번영의 토대를 만들자."는 발언은 남의 화답이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해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자는 선언은 60년 걸려 얻은 해답이다. 2005년은 민족 통일운동사에서 기념비적 해이다.

9월 19일 6자 회담이 공동성명서를 만들어 냈다. 한반도 자주와 평화의 로드맵이 나왔다. "북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을 침공하지 않으며 북과 미국, 북과 일본은 관계정상화하며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한다. 더 나아가 동북아 안보체제도 구축한다..." 앞으로 구체적 협의에서 난관이 없지는 않겠지만 공동성명서는 한반도 문제의 포괄적 해법의 기본 문서이다.

6자 회담에서 발휘한 남북의 역량도 돋보인다. 남이 전과 달리 미국노선 추수에서 벗어나 독자적 내지 균형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한국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6자 회담 공동성명서에서 얻어진 성과는 북이 이끌어낸 성과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핵이 마치 한반도를 위기에 몰아넣은 원인으로 성토하지만 북의 핵무기 보유가 없었다면 한반도 문제의 포괄적 해답이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노무현 대통령의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는 선언적 입장이 미국의 군사행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도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북의 핵 문제가 주변강국으로 하여금 한반도 문제를 공조해 평화적 협상으로 풀 수밖에 없는 조건을 조성하였다고 나는 본다.

행사 둘째 날 저녁 만찬이 밤 11시 지나서야 끝났다. 호텔로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다. 전화를 받자 즉시 옷 입고 다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어디 가는가 물으니 운동권의 밤 집회에 가자고 한다.

택시를 타고 자정이 가까워서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으로 갔다. 근처로 접어들자 주변이 인산인해였다. 고성능 스피커에서는 연사의 울부짖는 소리, 음악소리,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로 뜨거운 장내 열기를 느끼게 했다.

사람 사이를 뚫고 들어가니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다. 어느 대학 동아리의 춤과 합창으로 엮어진 공연이 한창이었다. 후에 들으니 참가인원이 3만명...

아, 여기가 90년대 한국경찰과 대치하면서 민족통일 대축전을 강행하던 운동권의 집회로구나. 화려한 상암 월드컵 축구경기장의 개막식에 비하면 "여기는 통일운동의 최전선이로구나"는 감회였다.

질서정연한 평양에서의 통일 집회와도 다른 세계였다. 미군철수를 부르짖는 연설, 미군의 만행을 엮은 공연들, 장내를 떠나갈 듯 화답의 박수소리, 환호와 합창... 몸은 고단하나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기에 경건한 감동이 나를 사로잡는다. 한총련, 범민련, 노동자, 농민, 민교련, 여성단체, 민가협 등 집회에 참석한 단체들은 운동권의 강성단체들이다. 이들은 미국대사관 앞에서 용산에서 평택에서 한국사회의 반미사조를 지키는 전사들이다.

호텔로 돌아오니 새벽 3시. 정식 8.15 행사가 끝난 후 두 차례 운동권행사에 초대받아 갔다. 하나는 범민련 주최였는데 단체 대표들이 모두 온 것 같았다. 어제 밤의 주역들이 대부분 모인,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였는데 소박한 분들 이였다.

그 다음날 밤에 초대되었던 자리는 좀더 소규모였으나. 운동권 기자들이 대부분인 대화의 자리였다. 진지한 분위기가 3시간이 길지 않아 보였다. 나는 여기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남북공조를 보다 공고히 하여 연말에 남북정상이 만나 통일공화국 연합을 선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이르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 발작 앞선 틀을 만들면 그만치 통일과정은 빨리 진행된다. 이미 사회경제 협력은 연합수준에 이르러 있다.

이번 여행에서 고마운 것은 옛 친구들이 만나러 와준 것이였다. 리영희 교수는 전순태씨가 연락해서 만났다. 인사동 소재 지리산이라는 식당에서 두 세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한 실정을 토로하는 중에 리 교수는 "지금 현정부는 시민들의 지지를 잃어 버렸다. 이대로 가면 다음 대선에서 보수세력에게 정권을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 되선 안되지요. 역사가 10년 후퇴합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리 교수는 물론 우리보다 더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었다.

그 다음날 이런 견해를 열린우리당 유재건 의원에게 물었다. "그것이 현재 실정입니다. 청와대의 인기도 계속 하락하고 열린우리당은 지리멸렬하고 무슨 대책이 없습니다."

"유 의원께서는 당 지도층인데 여당이 속수무책으로 있다니요." "현재로서는 아무 방안도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선 까지는 2년 이상 남아있습니다. 한국정치는 "바람정치"입니다. 선거 일년 전에 일어나는 바람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한 국내개혁도 남북관계도 제로로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걱정하더라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미 당국과 연계가 많은 유 의원에게 미국이 새로운 한반도 정책의 어떤 조짐을 느꼈는가 물어 보았다. 전혀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다.

통일운동은 제대로 들어섰는데 한국내정은 진보 보수의 극단적 양분 상태 인 듯하다. 통일운동은 이만치 진전되었는데 남한의 정치는 아직 이조시대에 머물러 있구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친구 교수 한 사람이 한국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면서 민심이 사나워졌다는 말을 떠나기 전에 들려주었는데 그래도 만난 동포들의 따뜻한 인정은 누구를 만나도 한결 같았다.

내가 40년 동안 한국 정부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며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갔다. 서울서 다니던 교회에 가고 모교에도 가보았는데 옛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간다.

한번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가 "어디 제일 가보고 싶으냐"고 묻기에 ‘금호동’으로 가자고 했다. 젊은 시절의 한고비 - 금호동에서의 6개월은 내 생애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 현장을 보고 싶었다.

대학에 다니게 되자 고아원 청소원 일을 잃어버리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고향친구의 호의로 금호동 소재 <상이군인 정양원>에서 살면서 전차 값도 없어 금호동에서 대학으로 걸어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고 싶어서였다.

어느 날인가 신고 다니던 운동화가 바닥이 떨어져 나가 새끼줄로 부뜰어 매고 학교로 간 일이 있었다. "여기서 저서는 안 된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금호동도 옛길을 찾아 볼 수 없게 빽빽한 서민들의 거주지로 변해 있었다. 살던 곳을 찾지는 못했으나 과거 회상은 필름처럼 펼쳐 졌다.

서울 방문은 감동과 희망을 본 시간이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땅에서 살아 남은 것, 미국 유학 가서 어서 가난을 벗어버리자고 자신에게 다짐하며 열심히 사회의 사다리를 뛰어 오르려 하던 시절을 접고, 누구도 나서지 않으려는 통일운동 세계에 뛰어들었다.

이제 70을 넘겼으니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비록 통일은 못 보더라도 기빨은 내리지 않으리라.


<2005/9/27 로스앤젤레스에서>

양은식(6.15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 범민련재미본부 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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