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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해외

[인물]국제태권도연맹 최홍희 총재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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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5-08-08 00:00 조회15,8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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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의 위인들의 숭고한 인덕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였던 최홍희선생의 생을
빛내여준 위대한 품에 대한 이야기



인생길에는 갈지자도 바를정자도 있다고 하였다.

사람은 인생길을 잘못 택했다가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옳은 길에 들어서 곧바로 걸어간다면 값높은 삶의 자욱을 새기고 한생을 빛나게 마무리할수 있는것이다.

물론 이렇게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비상한 용단과 함께 믿어주고 안아주고 이끌어주는 위대한 품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것이다.

한때 길을 잘못들어 남조선과 해외에서 곡절많은 운명의 파도에 부대끼다가 인생후반에 참된 삶의 품에 안겨 비로소 태권도로 민족의 기상을 떨치며 통일애국의 길에 뚜렷한 생의 흔적을 남겼고 죽어서도 영생의 높은 언덕에 서있는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였던 최홍희선생의 한생은 그러한 인생철리를 웅변으로 실증하고있다.






<##IMAGE##> 2002년 5월 어느날 평양비행장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한 고령의 로인이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승강대를 내리고있었다.

작달막한 체격, 움푹 패인 볼, 병색이 짙은 얼굴…

그가 바로 국제태권도련맹 총재 최홍희선생이였다.

불치의 병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안 그는 카나다에 있는 자기 집에서 태권도와 관련한 일체 문건자료들과 사품들을 말끔히 정리한 다음 가족들에게 내 조국에 가서 묻히고싶다는 결심을 이야기하고 조국으로 오는 길이였다.

1979년 5월 그가 처음으로 평양에 올 때에는 《범의 굴에 들어간다》느니 뭐니 하고 주변에서 발목을 잡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나면서도 위구심을 털어버릴수 없어 안해에게 《만약 일이 잘 안되여 내가 잘못되는 경우 관우에다 <태권도>라는 세글자를 놓아달라. 》는 비장한 《유언》까지 남겼었다.

어떻게 되여 최홍희선생이 23년전에는 죽을 각오까지 하고 이 땅을 찾아왔었다면 생을 마쳐야 할 고비에 이르러서는 조국의 품에 안겨 죽으려고 병약한 몸을 끌고 찾아온것인가.

여기에는 남달리 기복, 굴곡이 심한 그의 인생로정 그리고 인생전환후 그의 조국관과 인생관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와 더불어 이야기되여야 할 깊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1918년 11월 함경북도 화대군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직심스레 붓글씨를 배워 상당한 수준의 서예를 익히였다.

그러나 시골에 박혀 붓대나 놀리는것으로 만족할수 없었던 그는 신학문을 닦으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이 꿈은 대학을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강제징집되는바람에 깨여지고말았다.

평양주둔 일본군 제30사단에 배치된 청년 최홍희는 뜻이 통하는 동료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의 지도밑에 《반일학도병무장대》를 뭇고 그 지휘성원의 한 사람(보급참모)으로 되였다. 《목표 백두산, 김일성장군님부대에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거사준비를 다그치던 무장대는 밀정의 고발로 계획이 탄로되여 조직성원전원이 검거되고 최홍희에게도 7년 징역형이 내려졌다.

일제의 패망으로 감옥문을 나선 그는 광복열에 들떠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광복직후의 복잡하고 혼란된 정세속에서 그는 민족의 진로, 자기 삶의 길을 정확히 판별하지 못하여 엄청난 궤도탈선을 하게 되였다. 《공산당》의 탈을 쓴 사이비혁명가들의 과격한 언동에 환멸을 느꼈던 그는 고향에서 한 좌경적인 맑스주의자로부터 박해를 받은 사건이 동기가 되여 앞뒤를 가려 깊이 생각해봄이 없이 인생의 키를 남으로 돌리고 서울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그것이 1945년 10월 초였다.

사람의 인생행로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풍랑을 헤치며 목적한 대안으로 건너가는것이라면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항로를 바로잡는것이다. 라침판이 없어 항로를 잘못 잡으면 아무리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딴 방향으로 배를 몰아가게 되듯이 그의 궤도탈선은 주관적으로 애국을 하자던 의도와는 반대로 매국의 흑점으로 인생을 얼룩지게 하는 시발로 되였다.

남조선에 나가 륙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군》에 들어간 그는 전쟁시기에는 《국군》사단장으로 38°선을 넘어섰고 그후에는 군단장까지 하였다.

최홍희선생이 잘못 택한 인생항로를 두고 자책하게 된것은 5. 16군사쿠데타세력이 민족의 리익에 배치되게 일본과의 굴욕적인 《국교정상화회담》을 강행추진하는것을 보면서부터였다.

그가 저들이 요구하는대로 예비역장성들의 회담지지성명에 서명하기를 거절하자 독재정권은 사사건건 그를 괴롭히고 모해하다 못해 암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생사운명의 갈림길에 놓인 그는 해외에 망명하기로 작정하고 은밀한 준비끝에 1972년 1월 대양건너 카나다에 이주하였다.

망명한 후에도 독재정권의 검은 마수는 선생의 신변을 위협하며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더우기 그가 《카나다조국통일회》, 《배달민족회》, 《해외민주예비역장병회》 등을 뭇고 교포신문 《배달신보》 발행인으로서 남조선독재정권을 폭로하며 통일운동을 벌려나가자 독재정권은 그를 제거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최홍희선생은 갈수록 가로막아나서는 험산절벽앞에서 출로를 찾지 못해 몸부림치며 뜬눈으로 밤을 새기도 하면서 깊은 고뇌속에 허덕이였다. 바로 이러한 때 막다른 삶의 기로에 서있는 선생의 처지를 아시게 된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에게 조국방문의 길을 열어주시였다. 선생은 뜻밖에 와닿은 구원의 손길이 더없이 고마왔고 그 손길을 놓치고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 공화국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이 남아있던데다 한번 등을 돌려대고 떠나갔던 땅을 그것도 남조선군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반북일선에서 활약했던 불미스러운 행적을 가지고있는 몸으로 찾아가자니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결심을 굳히고 용단을 내려 평양으로 떠나면서 비장한 《유언》까지 남겼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에 도착하는 첫 순간부터 자기의 위구가 공연한것이였음을 가슴뭉클해지는 격정속에 깨달았다. 한갖 망명객에 지나지 않는 자기에 대한 의외의 따뜻하고도 과분한 환대, 위대한 수령님께서 직승기를 보내여 마련해주신 꿈속에서도 그리던 고향방문… 거기에서 그는 가식없는 진정한 혈육의 정, 동포애의 정을 피줄이 당기도록 뜨거이 느끼고 확인하였다.

1979년 5월 12일은 최홍희선생에게 있어서 지나온 생을 구획짓고 새로운 인간으로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일이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조국을 처음 방문하고있던 최홍희선생을 만나주시고 그와 여러시간 자리를 같이해주시였다. 이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면서도 감히 기대할수 없다고 생각하고있던 최대의 영광이였다.

몸소 현관에까지 나와 기다리고계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선생이 멀리 해외에서 조국을 찾아온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시면서 인사를 올리는 그의 두손을 꼭 잡아주시고 뜨겁게 포옹하시였다. 순간 그는 가슴이 쩌릿해오며 눈뿌리가 저려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집을 뛰쳐나가 객지에서 헤매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고달픈 몸을 끌고 다시 찾아온 자식을 자애에 넘친 혈육의 정으로 따뜻이 맞아주는 부모님을 뵙는 심정이라 할지, 하물며 한때 민족을 반대하는 역류에 몸을 싣고 북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자기를 그토록 너그러이 친절하게 안아 품어주시니 그가 어찌 감격에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수 있었으랴.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다정히 옆에 끼고 기념사진을 찍으신 다음 응접실로 이끄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선생을 정겨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우리의 이와 같은 상봉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 같이 손잡고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는데서 대단히 큰 의의를 가진다고, 조국에 오기를 참 잘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가 남조선군사독재정권과 결별하고 해외에 나가 태권도로 민족의 얼을 빛내이며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려는 애국심을 간직하고있는데 대하여 그리고 해외에서 통일운동을 벌려온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과거는 전혀 묻지 않고 새 출발을 하려는 오늘의 마음만을 알아주시는 그이이시였다.

(아, 어쩌면 그리도 도량이 넓으시고 리해력이 깊고 관대하실가. )

지난날 잘못 산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민족적량심과 애국심이 있다면 흔연히 손잡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고무하고 이끌어주는 광폭의 품, 재생의 위대한 품에 안긴 무한한 행복감으로 하여 선생의 마음은 무엇이라 형언할수 없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홍희선생에게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데 대해 강조하시면서 해외의 민주인사들이 조국통일3대원칙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선생은 그 가르치심을 자자구구 생의 라침판으로 새겨안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선생을 위하여 오찬을 마련하시였다.

갖가지 조선특산료리를 손수 권하시며 따뜻한 정을 부어주시는 그이의 격의없는 소탈한 인품에 그는 고마움과 감격에 목이 메여 가슴을 옥죄였던 긴장감과 곡절많은 인생의 상처가 말끔히 가셔지고 그대신 끝없는 신뢰의 정과 삶의 희열이 가슴가득 차오름을 체험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조국을 방문하는 최홍희선생과 그의 부인을 거듭 만나주시고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어찌 그뿐이랴.

박애와 자비를 설교하는 종교에서도 선과 악, 죄와 벌을 엄격히 계산하게 되여있지만 희세의 성인들이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애국과 매국이 뒤엉킨 그의 인생행로에서 부정적측면은 백지화해주시면서도 긍정적측면은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조국을 방문한 기회에 광복직전 평양주둔 일본군사단안에 조직되였던 《반일학도병무장대》 옛 성원들과의 감격적인 상봉을 마련해주신 수령님과 장군님께서는 선생에게 《애국지사》라는 고귀한 칭호와 함께 공화국의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조국통일상》까지 수여해주시였다. 또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를 원형으로 하여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차홍기편을 대걸작으로 만들어 그의 인생전환이 조국과 더불어 길이 빛나도록 하여주시였다.

(아, 한 인간의 운명과 처지가 이렇게 달라질수 있단 말인가. )

생각할수록 꿈만 같았다.

크나큰 은총속에 《불우한 사나이》가 《복받은 행운아》로 다시 태여나는 나날 최홍희선생은 자신을 위해 그토록 마음쓰시는 절세의 위인들의 그 비길데없이 숭고한 인덕에 눈굽을 적시며 두분 위인들이시야말로 민족의 어버이이시고 조국이시라는것을 온 넋으로 절감하였다. 그는 다시는 조국과 떨어지지 않고 조국과 끝까지 운명을 같이하리라 굳게 속다짐하였다.

한없이 은혜로운 품에 안겨 이런 조국관, 인생관을 신념으로 굳혔기에 최홍희선생은 오랜 기간의 정신적방황을 끝장내고 곧바른 애국의 항로를 따라 청춘을 되찾은듯 한 활력을 안고 꿋꿋이 인생의 노를 저어나갈수 있었다.







최홍희선생은 생전에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이렇게 대답하군 하였다.

《하나는 부모가 지어준 최홍희요 또 다른 하나는 태권도이다. 》

그는 《태권도를 위해 태여난 사람》, 《태권도에 미친 사람》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몸이 하도 체소하고 약골이여서 부모의 걱정거리로 되였었다. 그래서 담임선생은 그에게 서예와 함께 우리 민족의 고전무술인 태껸의 초보적인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후날 그로 하여금 민족무술 태권도를 만들수 있게 한 기초로 되였다.

일본에서 고학을 하게 된것은 그가 태권도에 몸을 담그게 한 또 하나의 계기로 되였다. 일본땅 어디를 가나 참을수 없는 민족적멸시와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맞다드는자는 힘으로 제압하리라는 결심을 품고 자기보신을 위하여 열심히 무술훈련을 하였다. 그는 일본군대에 끌려가서도, 지어 감옥안에서도 무술을 끊임없이 련마하였다.

남조선에 나가 외세가 득세하고 불의가 판치는 사회현실을 착잡한 심정으로 목격하면서 그에게는 제나름대로 사람들이 강한 정신, 육체적힘을 키워 정의의 편에 설수 있는 자신력을 가지는데 이바지하는 새로운 무술을 만들어보고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군직에 있으면서도 우리 민족의 얼이 스며있고 그 어느 나라 무술보다도 힘있는 새로운 무술을 연구완성하는데 온 정력을 쏟았다.

드디여 1955년 4월 11일 서울에서는 여러 언론인, 체육애호가들이 모인 가운데 최홍희선생이 10년동안 고심어린 탐구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민족무술의 명칭제정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그는 사람들앞에서 자기가 명명한 《태권도》라는 이름의 글자풀이부터 하였다. 《태》자는 발로 뛴다, 찬다 또는 밟는다를 의미하며 《권》자는 《주먹이다》, 그러나 단순히 손을 쥐였다 폈다 하는 《주먹》이 아니라 찌르고 뚫고 혹은 때리는 무도행위를 뜻하는 《주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동작들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여 태권도가 세상에 태여났다.

태권도가 그 우수성으로 하여 어느덧 국제적무도의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최홍희선생은 태권도보급을 위한 국제기구로서 1966년 3월 국제태권도련맹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태권도로 민족의 얼을 지키고 빛내이려는 선생의 뜻과는 달리 남조선군사정권은 태권도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그것을 독재권력의 지탱을 위한 폭압도구로 써먹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행위에 선생이 수긍할리 만무했다.

선생이 카나다로 망명하자 독재정권은 남조선에 남아있던 그의 아들과 딸을 인질로 붙잡아놓고 귀향을 강요했다. 선생이 끝내 저들에게 굽어들지 않자 독재정권은 남조선태권도협회를 모체로 《세계태권도련맹》이란 단체를 따로 만들어내고 거액의 자금을 뿌리면서 국제태권도련맹을 와해말살하려고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그것은 선생에게 참을수 없는 정신적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그 어려운 때에 민족의 태양의 품을 찾아 평양으로 온것은 자신의 운명을 구원하는 길이였을뿐아니라 태권도를 살리고 태권도에 대한 평생의 꿈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1980년 9월 최홍희선생은 태권도시범단 성원들을 이끌고 두번째로 조국을 방문하였다.

평양과 원산에서 세차례에 걸쳐 성황리에 시범출연을 한 후 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의 접견을 받았다.

수령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지금 조국인민들은 선생의 지도하에 태권도시범단 성원들이 출연한 훌륭한 시범동작을 보고 매우 감동되여 조선사람들이 재능이 있다, 태권도가 유명하다고 하면서 칭찬하고있는데 나 역시 같은 심정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 선생이 총재로 있으면서 국제태권도련맹을 세계적의의가 있는 조직으로 발전시킨것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자랑이라고, 우리는 선생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있다고 하시였다.

바로 그것이였다.

태권도이자 우리 민족의 슬기와 기상이고 거기에 깃들어있는 최홍희선생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재능, 태권도로 우리 민족의 존엄을 떨치고 나라의 통일에 기여하려는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귀중히 여기시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선생의 공로를 그토록 값높이 일러주시였고 경애하는 장군님과 함께 태권도사업을 적극 뒤받침해주고 떠밀어주신것이였다.

선생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여 태권도무술의 종합본인 《태권도백과사전》집필을 끝냈다. 하지만 그 출판에 드는 비용이 너무 아름차 자기 당대에 이 책이 빛을 보기 힘들것으로 생각하고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헤아리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 15권에 달하는 《태권도백과사전》출판을 조국에서 잘 뒤받침해주어 그의 평생소원을 풀어주도록 하시였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필요한 온갖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다.

이렇게 해주시고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홍희선생이 삼가 선물로 올린 《태권도백과사전》을 받아보시고 대단히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그의 저술공로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축전참가차로 평양에 도착한 최홍희선생은 전례없는 규모로 준비되고있는 축전개막식의 집단체조에 혹시 태권도종목을 넣을수 없을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시일이 너무 박두하여 그렇게 할수 없을것 같아 선뜻 의향을 내비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의 속마음을 헤아리신 어버이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상조치를 취하여 태권도종목출연준비를 불과 3일동안에 끝내게 하시였다.

축전개막식날 최홍희선생을 몸가까이 부르시여 그와 함께 집단체조를 관람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태권도종목이 펼쳐지자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시고 매 동작이 바뀔 때마다 그의 손을 잡고 높이 흔들어주시였으며 축전에 참가한 다른 나라 국가수반을 비롯한 고위급손님들에게 선생을 《태권도대장》이라고 소개하시며 자랑스럽게 내세워주시였다.

《태권도대장》,

이 호칭은 태권도에 운명을 걸고 동분서주하면서 그것으로 민족을 위해 공헌해온 선생에 대한 최상의 믿음과 사랑, 뜨거운 격려가 응결되여있는 참으로 값높은 부름이였다.

태권도에 대한 선생의 꿈을 실현시켜주고 우리 나라를 태권도모국으로 영예떨치도록 해주시려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보살피심은 끝이 없었다.

평양의 청춘거리에 웅장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며 솟아있는 태권도전당, 여기에도 최홍희선생의 소원을 풀어주시려 바치신 위인의 크나큰 심혈이 깃들어있다.

1990년 1월 어느날 한 일군을 부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제인가 최홍희선생이 조국에서 태권도관을 지어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제기한데 대하여 상기시키시면서 우리가 아빠트 한두채를 짓지 못하더라도 태권도관을 꼭 지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태권도관을 가장 좋은 자리에 규모도 크고 웅장하게 또 형식도 독특하게 짓도록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건물형성도안을 보아주시면서 건물을 설계보다 더 크게 세계에서 으뜸가는 태권도관으로 지어야 한다고 이르시였으며 태권도인들의 한결같은 소망을 받아들이시여 《태권도전당》이라는 현판글까지 써주신 경애하는 장군님, 그이의 이렇듯 깊은 관심속에 태권도전당은 2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기념비적창조물로 일떠설수 있었던것이다.

태권도에 평생의 뜻을 두었던 최홍희선생은 위인들의 은혜로운 손길아래 그전에는 감히 바랄수 없었던 모든것을 성취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석상에서 태권도를 만든 당사자조차 생각지 못했던 태권도를 대중화, 생활화하기 위한 방도들과 관련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거듭 받아안으면서 선생의 가슴은 감격과 경탄으로 마냥 부풀어올랐다.

태권도의 강화발전을 위한 현명한 조치들에 의해 우리 나라에서는 정연한 태권도보급체계가 세워지고 온 나라 학생들과 근로자들속에서 태권도운동을 일상적으로 하는 기풍이 펼쳐지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태권도의 세계적보급을 위한 최홍희선생의 사업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돌리고 아낌없는 후원을 주시였다.

그리하여 오늘 태권도는 5대륙의 140여개 나라 5천만의 태권도인을 망라하여 전세계 무술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강력한 무도로 되였고 우리 나라는 태권도의 중심지로 되였다.

세계무도력사에 태권도와 같이 짧은 기간에 대륙과 나라들에 널리 파급되여 세계적인 무도로 위력떨치고있는 무술이 또 언제 있었던가.

최홍희선생은 생전에 태권도인들앞에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바 있다.

《태권도때문에 나의 인생은 싸워야 할 파란과 무릅써야 할 모험도 많았고 누구도 상상키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적이 생겼을뿐아니라 살벌한 이역땅에서 망명생활을 하게까지 된 기구한 운명에 있지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 계시기에 영세속에 발자욱을 남기려던 나의 꿈은 실현되였다. 종교, 사상,국경,인종을 초월하여 전세계에 보급하겠다던 목적도 달성하였으니 한 인간으로서 이 이상 흐뭇함과 즐거움을 다 표현할수 없는것이 유감이다. 참으로 주석님과 장군님이 계시여 오늘의 최홍희가 있고 태권도가 있는것이다. 》







여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높이 추대되시였을 때 최홍희선생이 보내온 축하편지의 한 구절이 있다.

《장군님께서 계시기에,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내 나라가 강하기에 몸은 비록 이국땅에 있지만 조선민족의 당당한 존엄과 영예를 지닐수 있게 되였으며 어디에 가도 작은 소리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웨치면서 다니고있습니다. 》

<##IMAGE##>소나무의 억셈은 눈서리에 알고 애국자는 조국이 위험할 때 알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 공화국이 미제를 우두머리로 한 제국주의련합세력과 단독으로 맞서 겹쌓인 난관과 시련을 뚫고나가던 그 엄혹한 시기 매일과 같이 신문과 방송에서 보고듣는 《북붕괴설》에 접하면서 해외동포사회도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그러나 최홍희선생은 그 어떤 잡소리나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이 위대한 장군님께서만 계시면 우리 공화국은 설사 하늘이 무너진대도 끄떡없다는 든든한 배심을 지니고 큰소리로 웨치며 다니였다.

그의 이 드팀없는 신념과 도고한 민족적자부심은 세계의 《제왕》으로 행세하는 오만한 제국주의강적도 굽어들지 않을수 없게 만드시는 천출명장의 무비의 담력과 강철의 의지, 천변만화의 지략, 천하제일위인을 모신 우리 조국의 필승불패의 위력에 대한 굳은 확신에서 우러나온것이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서만이 아니였다.

힘에 부친 력사의 중하를 한몸에 맡아안고 험로역경을 앞장에서 헤쳐나가시면서도 장군님께서 평범한 망명객인 자기에게 베풀어주시는 뜨거운 은정과 사랑은 그를 보답의 의리로 더욱 가슴 불타게 하였다.

조국에 올 때마다 체류일정을 세심히 보살펴주시고 관계부문 책임일군을 보내여 태권도시범훈련도 같이 보게 하시였으며 1998년 11월에는 그의 80돐 생일상과 부인의 70돐 생일상을 함께 잘 차려주고 자신의 인사도 전해주도록 각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2000년 10월 조선로동당창건 55돐 경축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조국에 온 최홍희선생은 위대한 장군님을 여러차례 몸가까이 뵙는 최상의 영광을 지녔다.

김일성광장에서 거행된 성대한 열병식과 군중시위때 주석단에 나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많은 주석단성원들가운데서 최홍희선생을 알아보시고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면서 먼길에 오시느라고 수고했다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조국에 온데 대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였다.

10월 20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몸가까이 부르시여 여러시간 접견해주시고 오찬까지 베풀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는 선생이 조국에 올 때마다 개별적으로 조용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는데 오늘에야 만나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선생이 고령이지만 왕성한 투지와 패기를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분투하고있는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고 그를 다정히 바라보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에 체격은 비록 작아도 고추알같고 의지가 강하면 장군이다, 최홍희선생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최홍희선생이 작달막하지만 보통이 아니라고 여러번 하시였던 말씀을 회억하시였다.

언젠가는 자기에 대해 배짱이 있고 립장이 있는 사람이라고, 씨원씨원하고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하는 결단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치하하시더니 오늘은 또 어버이수령님의 생전의 말씀을 상기하시며 과분한 평가를 주시니 그는 몸둘바를 몰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생이 그렇게 고생스럽게 태권도를 발전시켰는데 빨리 북과 남의 태권도를 합쳐야 한다고 하시며 6. 15공동선언이 발표된 환경에 맞게 태권도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방도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였다. 선생은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태권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한몸을 깡그리 바칠 결심을 말씀드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생의 태권도가 강해야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수 있듯이 외교도 자체의 힘이 안받침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선군정치의 정당성과 생활력에 대해서도 통속적으로 설명해주시였다.

시간이 갈수록 선생은 위대한 선군령장, 자주정치의 거장이신 장군님의 탁월한 정치적식견과 예지, 령도력에 탄복하였으며 또한 위대한 인간이신 그이의 인정미에 매혹되였다.

장군님께서 선생이 카나다로 망명할 때 겪은 고생과 그가 살고있는 나라의 형편, 태권도의 보급정형 등에 대해 헤아려주실 때 그리고 조국의 특산인 송이버섯료리를 손수 권하시며 사양하지 말고 술도 들라고 정담아 이르실 때 선생은 그 후덕하고 다심한 사랑에 뜨거운것이 그들먹이 가슴에 차올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헤여질 때에는 문앞에까지 나와 그를 친절히 바래워주시였다.

조국을 떠나면서 살아도 죽어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만을 끝까지 믿고 따를 일념을 담은 편지를 장군님께 올린 선생은 그 맹세를 지켜 한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였다.

그러던 선생은 2002년 초에 불치의 병진단을 받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생의 신상에 닥친 불행을 몹시 가슴아파하시며 그의 의향대로 그를 하루속히 조국에 데려오게 하시였다.

그가 조국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병상태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 그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최선의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필요한 귀한 약들과 산삼까지 친히 보내주시였다.

선생의 부인이 특별에 특별을 더한것이라고 한 그 은정과 지성으로 하여 선생은 한두달을 넘기지 못하리라던 의학계의 판결을 무시하고 생명을 더 연장할수 있었다.

생을 마치기 전에 최홍희선생은 국제태권도련맹의 핵심성원들을 모두 평양에 불러 기력이 진한 몸임에도 45분동안이나 앞으로의 태권도활동방향과 관련한 유언을 남기였다.

그의 마지막부탁은 태권도는 어디까지나 조선의것이 되여야 한다는것, 북남태권도를 통합하여 나라의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는것 등이였다. 그것은 자기가 다 받들지 못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태권도인들이 끝까지 실천해달라는 당부였다.

사람들의 참모습은 생의 마지막순간에 비낀다고 하였는데 선생은 생을 마치면서도 애국충신, 애국적무도인으로서의 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최홍희선생이 6월 15일에 운명했다는 비보에 접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누구보다 비통해하시며 친히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그의 령전에 보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비감을 누르지 못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최홍희총재는 우리 수령님께와 당에 태권도를 가지고 조국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고 수십년동안 해외에서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태권도활동을 열정적으로 해오다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고는 조국의 품에 안겨 생을 마쳤습니다. 최홍희총재는 결국 인생의 마무리를 잘한셈입니다. … 아까운 사람인데 사망하였습니다. … 최홍희총재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는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일입니다.

이것은 최홍희선생의 한생에 대한 가장 값높은 평가였으며 고인에게 뿌려주는 영생의 찬란한 해발이였다.

파란곡절이 많았지만 영광과 보람도 남달리 컸으며 오늘도 애국지사,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무도인으로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생하고있는 최홍희선생의 한생은 하나의 인생교범처럼 똑똑히 일깨워주고있다.

그가 어떤 인생길을 걸어왔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모든 사람의 운명은 오직 민족이라는 운명공동체에서 생명의 중심인 수령의 품속에서만 옳바른 길을 따라 개척될수 있고 바로 그 길에서 인생은 참다운 애국의 삶으로 민족사에 빛나게 아로새겨진다는것이다.

주의주장이 같지 않고 생활경위가 복잡할지라도 민족적량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따뜻이 품어안아 애국의 길로 이끌어주는 위대하고 은혜로운 태양의 품이 있기에 애국애족의 대하, 민족대단결의 대하는 더 도도히 굽이치려니, 그것은 반드시 분렬과 대결의 역류를 밀어내고 통일강성대국의 미래를 앞당겨올것이다.

정현숙, 조동익

주체94(2005)년 8월 8일 《로동신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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