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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웅 선생 옥중수기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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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5-05-20 00:00 조회11,0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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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어린 시절–미운 7살의 상처

내 어린 시절, 내 과거에 기억나는 얘기 한번 해 볼까요.
사실 나는 내 어린시절, 지난날의 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랑할 것도 추억으로 내세울만한 얘기 거리가 없기도 했지만 아픈 과거를 끄집어 내 내 스스로 위축 될 것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혼 30년이 넘은 내 처에게도 말을 안 했으니 내 어린 시절을 알리가 없지요.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과거 얘기를 잘 안하는데 그 침묵을 내가 먼저 파괴해 보려고 합니다.

<##IMAGE##> 나에게도 어린시절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속에 아픔과 기쁨의 추억이 없을리 없지요. 우리 민족의 아픔이 절정에 달했던 해방 전후사에 나도 시대의 아픔속에 같이 아픔을 체험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영상을 해방전으로 돌려 놓으면....
나는 1943년 11월 22일 (음력)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의흥 예씨로, 어머님은 밀양 박씨로 예용규, 박정례의 5남4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박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보면 어머니 쪽은 대단한 가문의 후예들이였나봅니다. 이조 중엽 연산군을 내쫒는데 앞장선 박원종이 어머니쪽 먼 증조부가 되니 양반 세력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어머님은 조선여성들이 겪은 가부장적 권위에 짖눌려 살림이나 하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참으로 밝고 고운 어머님이였지요 사실 조선시대 조선여성처럼 고생한 사람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팔자에 애들은 그렇게 퍼 질러 낳았는지... 살림고생과 애들 키우는 고생만 하다가 어머니는 내가 7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따져보세요. 제가 7살이면 그때 언제인가를 우리 어머니의 묘지는 김구선생님이 묻혀있는 호창동에 있었습니다.

몇년후에 어머니 묘를 찾아갔더니 묘지는 온데간데 없고 효창운동장으로 변했더군요.

다시 해방전을 기억해 낸다면...
몰락한 양반집에 남는 것이라고는 빚과 사람들의 밥숟갈 뿐 이라더니 우리는 고나철동 낮은 처마의 기와집을 팔고 대식구가 살 수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간 곳이 효창동과 봉래동 경계선, 일본식 양철지붕의 집이 였습니다. 그 집앞이 양정중학교 였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6.25 전쟁나기 직전까지 가마나 인력거를 타고 비원과 창덕궁을 드나들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머니와 궁중의 여러 상궁들, 왕실인척들과 찍은 사진들, 궁녀들이 어린 나를 데리고 놀아주던 기억들이 살아 남아 있군요. 할머니가 그때까지 궁전을 들락했을때는 이조왕실은 몰락한 후였을텐데 무엇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종친이 왕실에 아직 남아있었는지...

나는 순 서울내기입니다. 30년동안 서울을 떠나 1년이상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군대도 수색에서 보냈으니 진짜 서울촌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서울에 사는 인구중 순종 서울내기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외지에서 와 터를 잡고 서울서 사시는 분들은 순종 서울내기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남자나 여자중에 순 서울내기를 찾는데도 몇가지 특징만 알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남자, 여자의 피부가 희고 깨끗하다.
· 남자는 허약한 지식인 냄새가 난다.
· 여자는 순종적이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이마가 넓다.
· 사리가 밝고 따지기 잘하며 대신 큰 소리는 치지 않는다.
· 남녀 공히 웃을때 덧니가 애교있게 보인다.


나는 인종우월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순종 서울내기 운운할 수 있겠느냐고 비난 받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생존해 있는 누님들, 이미 세상을 떠난 형님들의 그런 형상이 떠올라 그려본 것입니다. 둥글고 하얀 얼굴의 우리 누님들이 웃을때는 얇은 보조개에 살짝 앞으로 나온 덧니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여운형 선생님과 건준운동을 같이했던 예종호는 우리 형님이 되십니다. 해방후 혼탁했던 남한사회에서 미군정이나 반공우익편에 서지않고 자주적 독립국가를 세우는데 앞장서 뛰어다녔던 형님들... 그들의 말소리 웃음띤 모습이 서울내기의 모습으로 내앞에 종종 나타나 나를 아프게 합니다. 그때 형은 서울사대 2학년이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전란후의 필림을 공개하면...
이글은 공개하지 않았으며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쓰고 있습니다. 공개된다고 해도 유감은 없지만 내 인생에서 너무도 가엽고 처절한 한토막이기에 공개하기가 꺼려집니다. 그러나 침묵의 미덕을 파괴하기로 한 이상 기억을 더듬어 써내려갑니다.

양정중학교 강당 안팍을 꽉 메운 청중들은 수천명이 넘는 듯합니다. 여운형 선생 등 건준위 간부들이 줄지어 앉고 형님이 사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내 옆에는 형님의 애인인듯한 분이 내 손을 꼭 잡고 “종호씨는 애국자야”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충정로에 있는 동양극장으로 갔습니다. 형님이 구호를 외치면 관중들이 따라했는데 5살인 나는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형님은 거의 종적을 감추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형님의 애인이였던 여자분만 가끔 집에 왔다갔다 했습니다.

어느날 밤, 우리는 넓은 마루에서 잠을 잤습니다. 6월의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라 날씨가 더워서 식구들이 다 마루에서 잔 모양입니다. 쿵쿵하더니 새벽에 대포소리가 났습니다.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형님이 오래간 만에 집에 왔는데 후다닥 옷을 챙겨입더니 그냥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습니다. 우리집은 6.25전쟁 때 피난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7살 먹은 나는 전쟁의 처참함과 엄청난 파괴에 전쟁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록할 것이지만 나는 세번이상 죽었다 살아남은 생과사의 체험자입니다. 그것도 7살 때의 기억이니 얼마나 생생하겠습니까.

우리집은 서울역 뒤편에 있는 봉례동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파괴는 인민군이 아니라 미군이 저질렀던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인민군은 경복궁이나 종묘, 비원, 창덕궁, 경복궁 등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담긴 궁궐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아주 원상데로 보존하고 지켜냈습니다. 단 경무대나 중앙청에 있던 유물이나 역사보존을 일부는 압수해 갔다고 합니다.

서울만이 아니라 각도, 시, 군에 있었던 모든 유물, 고유한 우리것들은 (절, 사당 등) 하나도 건들지 않았고 파괴나 약탈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서울역, 서대문에 있던 전매청, 시청, 중앙청, 을지로에 있던 은행을 나는 그런 건물들이 어떻게 폭격을 받고 작살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철집이 였던 우리집도 미군의 폭격으로 날라가 버렸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어머니, 아버지도, 누님 형님도, 이웃도, 친척도 모두다 어디론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거리를 헤메어야 하는 거지였습니다. 깡통을 들고 구걸하러 다녔습니다. 잠자리는 부서진 집 장독대에 가마니와 거적데기를 엮어 움막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습니다. 나는 주변에 있던 내 또래의 거지들을 모아 내 움막에서 같이 지내게 했습니다. 다 부서진 서울, 사람들이 있어야 구걸을 할텐데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군인들 뿐이였습니다.

그후 언젠가부터 서울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미운 일곱살의 상처는 작지 않았습니다. 우리집에 두번의 위기가 닥쳤는데 첫번째는 부모님이 치안대에 끌려간 것입니다. 11월 추운때 였습니다. 누가 어머님을 업고 집으로 왔습니다. 어머니는 축느러져 눈만 맥없이 껌벅이고 있었습니다.

장롱을 가리키며 열어보라고 하십니다. 열어보니 몇개의 금반지와 노리개 같은게 나왔습니다. 또 큰 장독대 하나를 가리키며 그것 뚜껑을 열라고 하십니다. 뚜껑을 여니까 큰 부채만한 연초가 가득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팔아서 먹고 살라고 아버지 치료에 보태라고 말하고는 푹 쓰러졌습니다. 온몸에 피투성에 멍들은 자국, 머리가 빠져 피가 귀 뒤로 흘러내린 모습. 허리가 꺾여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던 어머니가 고통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시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치안대의 고문이 얼마나 잔인하였던가를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고문이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미운 7살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쟁통에 언제 관을 만들수 있으며 산소자리를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묘는 경기도 광능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죽는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수의> 옷도 못 입고 입관도 못하고 가마니에 말아서 지게지는 사람에게 얹혀 효창동 김구선생 무덤 조금 아래쪽에 묻혔습니다. 나와 같이 구걸하는 거지들이 거들어 주었습니다. 코가 시큰거리고 눈앞이 흐려 지금 나는 이글을 쓰면서 그 때의 처참한 광경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더 처참한 우리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하렵니다.

미운 7살짜리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어머님의 장례식을 거창하게 (?) 치러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반공우익단체 중에 서북청년단이 있습니다. 내가 7살때 서북청년단 얘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둘째 누님을 잡아갔습니다. 그때 누님의 나이가 16살이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춘기를 갓 넘어 젖무덤도 조금나왔을 것이며 궁뎅이도 좀 컷겠지요. 그러한 누님을, 고문을 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고문현장에는 없었지만 어떠한 고문이 가해질 것이라고는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빨갱이 오빠의 행방을 대라는 것입니다. 밤늦게 누님이 집으로 왔습니다. 미운 7살인 나는 그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이빨까지 빠지고 나는 그런것에 울음을 터트리기엔 눈물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눈물은 그 후 한참후에 쏟아지더군요. 누님이 약간의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때였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은 누님을 평생 괴롭혀왔습니다. 그 곱던 얼굴, 백옥같이 흰 피부를 가진 누님이 꽃다운 청춘에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결혼 한번 못해보고 아주 조용히 생을 마감할 것 같습니다. 누님은 지금도 서울게 살고 계십니다.

이제 60년대의 필림을 보겠습니다.
6.25 전쟁의 후유증은 국가나 사회나 각 가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전쟁시 죽지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다시 만난 것은 거의 10년만의 일이였습니다. 지난 그 10년 동안의 일들을 들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글을 읽는 당신들의 삶과 대동소이한 삶이였기에 접어두려고 합니다.

가족이 다시 만났다고 했지만, 부모님과 형님들은 다 죽었거나 행방을 알수가 없었습니다. 삶에 질긴 여자들만 만났습니다. 큰 누님은 결혼해 애 어머니가 되었고, 둘째 누님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살았어도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며, 셋째 누님은 고무신 공장 직공으로 일하고 있고 넷째 누님은 수도원에서 수녀생활로 속세를 떠나 살고 있었습니다. 이 한심한 파편화된 우리 가족들입니다.

남자는 다 죽었습니다. 미운 7살 짜리가 어느 새 청년이 된 것입니다. 나는 양정중학교에 입학한 적은 있지만 학교를 가본적이 없습니다. 학생으로 지낼만큼 내 환경이 되질 못했습니다. 누님들과 주변의 친인척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학교를 다닌 것은 1961년부터였습니다.

헤어졌던 누님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모이면 힘이 된다고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고 옛모습이 복원되는 기운이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돈암동 고개에 집을 마련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집 뒷산이 고명 중고등하교가 새로 개교를 했고 새로 설립된 학교에서 학생모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는 학교는 있으나 학생들이 태 부족해 교무과 직원들은 학생들 유치하는 일이 주되는 일과였습니다.
정원 채우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등록하면 그 자리에서 학급까지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명고 2학년에 편입돼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밤에는 잡일을 하면서 졸업을 했습니다. 고명고 1회졸업생입니다.

김영삼대통령이 서울대 철학과를 다닌 것을 대단한 경력으로 내세우지만 사실 전쟁중에 대학 다닐 수 있던 사람들은 돈이 넉넉했거나 군대 기피를 위한 피난처로 악용된 점이 있었다고 봅니다.

50년대 서울대는 정원 미달 사태로 무시험 합격이 태반이였습니다. 다른 대학들도 그러했습니다. 내가 경희대를 택한것은 형님의 친구분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형님 친구분은 그때 교수였습니다. 교수의 추천자, 교수의 자재분들은 학비면제가 주어졌습니다. 내가 대학다니면서 그 혜택을 좀 받았습니다. 1963년 3월 경희대 법대에 등록을 했습니다.

대학때 나는 평범한 학생중 하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 홍일이가 나와 동창관계입니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내 과거를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그 악몽의 세계로 퇴보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져갔습니다. 어떻게 다져가는 가를 다음글에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중단에 위치한 태프트 캠프에서 1년 남짓 남은 출옥 기일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 그는 "편지 받는 것이 가장 기쁘다"고 설명한다.

Joung W. Y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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