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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송성자목사 "누가 뭐래도 북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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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7-11-22 14:14 조회50,941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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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은 시카고 방문중 여성목회자 송성자목사(73)와 대담을 갖고 그의 목회철학과 민족철학에 대해 질문하는 중에 송목사는 북부조국 돕기를 위해 지금까지 40여차례 이북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이북을 돕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며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본적인 역할이라고 지적하면서 특히 기독교 중심사회를 이루고 있는 재미동포사회가 조국반도의 화해와 평화, 우리민족끼리 손잡은 통일을 위해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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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송성자목사:"누가 뭐래도 북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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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사람마다 통일운동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저마다 다르다.시카고에는 통일운동 진영에 두분의 여성목회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한분이 오하이주로 이사를 가고 송성자목사(73) 한분만 시카고 근교에 거주하면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송목사가 <통일>에 대한 관심을 갖게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는 1989년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바드 대학을 나온 웨인 그루돔 교수가 너 때문에 질문들이 너무 많아서 강의 진도가 안나간다.”고 하면서 "동베르린에 유명한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을 여행하면 궁금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라고 진지하게 권유를 해 주어 송성자목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 안고 그곳에 가게 되었다.


그 때 동생이 독일의 후랑크푸프트에서 미국군대 의무관으로 일하고 있어 동생도 볼겸 그곳을 가서 동서독 장벽이 가로 놓인 상황에서 동독을 넘어 갔다가 두 대학생을 만난게 된 계기가 통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회고해 준다. 

 

송목사는 그 때 동베를린에 들어갔다가 그 박물관 입구에서 한 독일학생이 모금통을 들고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궁금하여 무슨 모금이냐고 묻자 그 동독학생은 니콜라스 교회에 매주 월요일에 모여 기도하면서 독일통일을 위해 통일선교 운동에 나오게 되었다고 설명하여 그 학생이 아주 기특하게 보였다. 그래서 송목사는 그가 갖고 있던 2백달러 중 1백달러를 헌금했다.(당시 1백달러라면 지금의 1천달라 정도로 많은 액수가 된것 같다.) 

 

그리고 그 독일학생과 헤어져서 나오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남조선에서 왔시요?”하고 묻는 청년이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그 청년은 조선에서 유학생인데 4년 공부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도 호기심이 있었는지 송목사에게 다가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묻고 함께 이곳을 방문중인 송목사의 친정어머니에게 다가가서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며 말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할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 그리고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요!”라고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는 그 모습을 보고서 너무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은 그때까지 북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통일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때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는 눈시울을 적시며 그 유학생에게 다가가 송목사 지갑에 남아있던 1백달러를 주며 이북에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위해 쓰라며 주었는데 그 학생은 계속 안받는다고 하다가 "나의 마음이며 성의"라고 하자 그 유학생은 마지못해 받는 표정이었다


송성자목사는 그때 그 두학생들의 자세와 그 충격이 그의 가슴과 머리를 쳤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는 갈라져 사는 북부조국의 동포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조국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학생의 이름이나 주소를 받아놓지 못한게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그 때의 그 인연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냐고 묻자 송성자목사는 알다시피 우리 남측 젊은이들이나 해외동포 젊은이들이 그들처럼 통일을 갈망하고 염원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고, 그 유학생처럼 예절이 바른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송목사는 그들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자신을 자책하면서 동족인 조선을 그리워하고 조선을 돕는 일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송성자목사 고향과 성장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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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자목사는 부산 광복동에서 194412월 태어나 초등학교를 부산에서 나오고, 중고등학교도 부산여중고를 다녔는데 고등학교 중반때 대전의 할아버지댁으로 이사를 가게되어 고등학교 후반부는  대전 서여고(지금의 충남고등학교)에서 졸업하고 1969년 도미했다고 한다.

 

그는 1974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인연이 되어 결혼하여 12녀를 두고 있는데 남편과의 인연은 그가 트랜스미션 생산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중 그 공장의 기업주와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남편은 몇년전에 소천했다.

 

송성자목사의 고등교육 학벌은 40대 중반에 이뤄졌다. 1988년 트리니트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후에 트리니티 신학대학원과 메코믹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시기인 1992년 순복음교회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그러니까 그의 목회자 생활은 금년으로 25년째가 되는 셈이다.  


그 전에는 몇군데 미국직장 생활도 하였고, 한때는 시카고 지역의 레드카페트 부동산회사에서 세일즈워먼으로 일했는데 동포여성으로서는 최초의 부동산 중계인으로 일하면서 6개월만에 백만달러회원이 될 정도로 이 분야 사업에도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목회자 생활도 이제 4반세기 되어 온다고 회고하는 송성자목사는 몇일전 빌리그래함 센터에서 4년만에 열린 <한인기독교 세계선교사 대회>에서 의장으로 뽑혀 그 책임이 막중한 심정이라고 밝힌다. 이 대회 조직은 대단히 큰것 같다. 2725명의 선교사들과 44백여개의 교회들이 중심이 된 조직인데 여성이 이 대회조직의 대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이 조직에서 그 동안 여성분과위원장 등 많은 직책들을 맡아 열심히 일해 왔지만 요즈음은 그 전보다 더 바빠진것 같다. 지금 추수감사절 시기인데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고 1123일 큐바 선교여행을 떠난다며 몹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송성자목사는 지난 시기에도 시카고지역의 동포교역자협의회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회장에 선출되어 봉사한적이 있었다.   

  

 

첫번 평양방문은 1995년 겨울

 

북에는 처음으로 언제갔으며 몇번이나 갔느냐고 묻자 송성자 목사는 22년전인 1995년의 한때를 떠올린다. 그때 초대 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 위원장이었던 강양욱목사의 아들 강영섭 목사를 비롯하여 이성숙 전도사 및 박철 선생(후에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참사로 활동)및 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 관계자와 공훈배우,인민배우 등 7명이 시카고에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때 이북 기독교인들과 만나는 첫 경험에 대해 회고해 준다. 


이북에서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처음으로 시카고에 왔는데 교회 목회자들이 그들을 반갑게 맞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 때 남측 공안원인 안기부 요원들이 쫙깔렸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인지 교역자들은 뭔가 모르게 두려워하는 자세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곳 동포교회 목회자들이 그들을 초대하고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같다. 


그래서 동포교회들이 시카고에 온 북측 기독교인들을 자기들 교회에 초청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송성자목사가 그들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그들을 초청하여 통일부흥회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주 고마워하는 일도 지난 추억중에 하나로 들려준다.

 

그 후 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에서 송목사를 초청하여 첫 방북을 결행했다는 것이다. 그때가 큰 물난리가 난 이후 시기로 기억된다고 한다.1995년 여름에 한세기만에 온 대홍수였으니깐 그해 겨울이면 고난의 해가 시작된 첫해가 된 시기라고 송성자목사는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난생 처음으로 평양에 방문하게 되어 봉수교회에서 북녘 신자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밀가루, ,옥수수 가루 등 무엇이든 생기면 북을 지원하고 싶어 이리뛰고 저리뛰며 돕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송목사가 하는 일에 그렇게 호의적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남편과 집 아이들도 송목사의 북돕기 운동에 부정적이었다고 돌이켜 본다. 


그러나 그의 북부조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은 중단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이들 저금통장까지 깨서 그 돈까지 모금에 보태어 이북을 돕기시작한 그의 모습을 보고서 그의 남편은 그 당시 당신 미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송성자목사는 자신의 모든 정성과 마음을 다바쳐 북녘 동포들을 돕고 싶었던 것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고생하는 북녘동포들을 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수수방관하며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는 간증이다.

 

 송성자목사는 또한 잊지 못할 추억도 들려준다. 그가 2004 12월에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생일인지도 몰랐는데 북녘동포들이 환갑잔치까지 베풀어 주어 너무 황송하고 감동적이어서 이북동포들과 서로 부등켜 안고 다같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 격려하여 준 그 순간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추억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북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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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자목사는 "돌이켜 보면 북은 신기한 곳"이었다고 말한다. 한번 다녀오면 그 몇일후 다시가고 싶은 곳이 이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방북할때 여러나라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아왔지만 특히 비행기 안에서 옆에 앉은 일본사람이 신발도 너덜너덜한 것을 신고, 옷도 허름하게 입었지만 자기 평생 벌은 돈을 조선에 지원하려고 간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비행기 안에서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다. 이 일본사람은 일본당국이 조선에 한 행동에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고 나 혼자라도 가서 사죄하고 돕고 싶어서 간다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송목사가 초기에 북을 도울때 김인식목사와 인연이 되어 함께 지원하던 시절도 떠 올리면서 그 당시 무엇이 생기면 무조건 이북에 갔다 주고 싶었더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고 밝힌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인데 기독교인이라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것이 기독교 정신인데 우리 미주동포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지적한다. 


북녘동포들은 결코 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조선이 우리민족의 절반이고 그곳에 사는 동포들이 우리의 형제자매들인데 어찌하여 그들이 큰물피해로 고생하며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다른 민족도 아니고 우리민족인데 우리가 그들을 미워할 수가 있느냐며 누가 뭐래도 나는 북녘동포들을 사랑하고 북을 사랑한다.”고 간증한다. 그는 이것이 곧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해외동포 기독교인들이 우리민족의 절반인 북녘 땅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을 우리의 핏줄이며 형제자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고 강조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그들과 하나되는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말한다.

 

 북부조국 돕기를 위해 지금까지 40여차례 이북을 방문한 송성자목사는 이북을 돕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며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본적인 역할이라고 지적하면서 특히 기독교 중심사회를 이루고 있는 재미동포사회가 조국반도의 화해와 평화, 우리민족끼리 손잡는 통일을 위해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다시말하면 6.15남북공동선언을 빠른 시일내에 부활시켜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응곤선생 대담]”남북관계 기본자세는 화해와 협력”


[이 게시물은 편집실님에 의해 2017-12-09 00:53:15 통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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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유럽동포님의 댓글

유럽동포 작성일

송성자목사님의 용기와 그 마음이 대단하십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목회자가 그토록 당당하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은 목사님의 형제자매 사랑을 아실겁니까.
주안에 평안을 기도합니다.

기독교신자님의 댓글

기독교신자 작성일

목사님, 맞아요 진정한 신앙인은 목사님처럼 초월하여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주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게 어디 신앙인이겠어요? 우리 주위에는 기독교신자들이 수두록한데 북한을 사탄처럼, 원수처럼 여기며 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건 신자들이 할일이 아니지요. 더우기 목사들이 할일이 아니지요.

신앙인님의 댓글

신앙인 작성일

고린도전서에 사랑장이 생각나요.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참고 견딘다고 하였잖아요
기독교 사랑은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잖아요.
근데???

반성할일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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