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대 미국 대학가에 ‘죽음함 Thantology’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큐버로스가 대표적인 학자였다. 대학가에서 학문으로 인정받자면 경험가능한 과학적이어야 하는 것이 금과옥조인데 경험도 할 수 없는‘죽음’이 어떻게 학문적이 될 수 있느냐 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담 같은 것이 강의의 주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느 경험한 사람의 주관적인 것으로 검증 불가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보편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워 결국 죽음학에서 이런 내용들은 제거 될 수밖에 없었다.
[시평]북의 셀프 처형과 남의 셀프 처형
*글:김상일(전한신대학교 교수)
80년 대 미국 대학가에 ‘죽음함 Thantology’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큐버로스가 대표적인 학자였다. 대학가에서 학문으로 인정받자면 경험가능한 과학적이어야 하는 것이 금과옥조인데 경험도 할 수 없는‘죽음’이 어떻게 학문적이 될 수 있느냐 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담 같은 것이 강의의 주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느 경험한 사람의 주관적인 것으로 검증 불가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보편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워 결국 죽음학에서 이런 내용들은 제거 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키로는 ‘북한학’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죽음학의 초기 단계의 그것과 하나 다를게 없어 보인다. 여기서는‘북한학’이란 말을 북에 대하여 거론하는 전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국정원과 언론이 지어내어 퍼트리면 그대로 사람들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학이 대학가에서 수명을 오래 유지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학이란 게 한국 대학원 수준에서 버젓이 개설되고 있지만 지금 봐서는 초기의 죽음학 이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죽음학과 달리 북한학은 왜 이다지도 수명이 긴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국정원 발표와 어용 언론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신변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죽음학의 허구에서 벗어나듯 남한의 허구적 북한학에서 몇몇 벗어나 제 정신 가지고 북을 바로 알고 싶어 하는 날 ‘종북’이란 딱지가 붙게 되고 일신상의 패가망신은 불을 보듯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면 지금 죽음학이 강단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가. 그렇지 않다. 죽음학을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교과 내용은 오직 임종을 앞 둔 환자가 ‘죽음의 침상 death bed’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먼저 말한 사후 경험담 같은 것은 죽은 다음의 것이지만, 후자의 것은 죽음 직전의 인간이 갖는 반응인 것이다.이것만은 경험 가능하고 관찰 가능하기 때문에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어 지금도 죽음학이 흥미로운 강좌로 개설되고 있다.
이에 비견한다면 북을 바로 아는 바로 된 과학적인 북한학은 과연 무엇인가. 언론과 법으로 완전 통제된 상태에서 어떻게 북을 과학적으로 아는 북한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있다. 즉, 죽음의 침상에서 경험 가능한 한도 내에서 북에 대하여 말하는 것만이 남에서 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 방법론이란 말이다. 그럼 이 번 장성택 사건(가급적 보편화 시켜서 사건이라 함)을 에둘러라 서도 최소한의 이 것 만은 받아 인정하자 하는 극소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죽음학이 죽음의 침상으로 축소 하듯이.
필자는 남의 국정원이 장성택 사건을 발표하자 말자 여전히 예나 다름없이 의심의 의심을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해방 후 지금까지 있었던 발표 건 가운데 국정원이 이 번 만큼 정확하게 적중한 것도 없다. 심지어는 북 연구 진보 전문가들과 매체들마저도 국정원 초기 발표를 의심하고 상투적인 국정원 대선 개임 물 타기 하는 정도로 치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 번 만은 진보가 북을 잘 못 알았고, 국정원이 미리 먼저 적확하게 알아맞혔다. 심지어는 장성택의 측근 가운데 누구누구가 중국에 미리 망명했다는 것 까지 미리 알아 보도 하였고 이것이 시간이 갈수록 입증되고 있다.
다음에 다시 말해야 하겠지만 일단 여기에 이 사안을 바로 보기 위한 초점을 겨냥해야 한다.
다음으로 필자가 가장 이 번 일에 처음부터 이 순간 까지 하나 놓치지 않고 보아온 관점이 하나 있다. 다시 말해서 북이 장성택을 ‘셀프 처형’을 했겠느냐 이다. (외래어를 안 써야 하겠지만 박근혜가 하도 써 ‘셀프’란 용어를 써야 실감이 나기 때문에 부득이 사용하기로 한다.)
필자는 북이 장을 처형(혹은 처벌)한 이유로 든 ‘양봉음위’란 죄목 마저도 2차적인 관점이라 보고 지속적으로 셀프 처형이 가능했겠느냐 안 했느냐 만 관심을 집중했었다.
왜 ‘셀프 처형’에 관점을 맞추느냐 하면 남에서는 해방 이후 김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사들이 암살도 당하고 처형도 당했지만, 그럴 때 마다 우리는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셀프 ’가 아니라는 것을 아고 있기 문이다. 거듭 말해 다른 인물이면 몰라도 장성택 정도라면 남의 경우로 보아 셀프 처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에서 셀프 처형 불가능한 예는 여기서 구태여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김대중 납치 때만 해도 박정희는 그를 셀프 처형하려 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김대중을 오사까 앞 바다에서 수장시키기 직전에 헬리콥터가 소리가 나더니 그 순간 구제 되었다고 한다. 그 잠자리비행기가 누구의 것인지도 여기서 말 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한 가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박정희가 김대중 마저도 셀프 죽일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슬러 올라 갈 때에 김구도 여운형도 모두 이승만이 셀프 한 것이 아니란 것은 역사가 속속 입증하고 있다.이승만이 면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셀프할 수 없는 현실을 더 슬퍼한다는 말이다. 자존심 있는 국민들이라면 이런 현실을 서글프게 생각해야 한단 말이다. 이 말을 김구나 김대중을 셀프를 해서라고 죽였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장성택 사건을 두고 지금 나타난 여러 가지 결과를 통해 최소한의 경험적 그리고 과학적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은 북이 장성택을 셀프 처형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드디어 필자는 큰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그럼 됐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12월 20일자 한국일보에 의하면 “중 지도부 격노...북중관계 균열 심각해지나”에 부제로 “북 장성택 숙청하면서 중에 통보 안 한 것은 김정일-후진타오 합의 위반” 등이 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가장 속시원한 보도이다. 장성택을 처형했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은 '극악무도한 extreme brutality'이라 표현을 사용했고 진보인사들 마저도 고모부를 처형하다니 하면서 평소 친북적인 언사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럴 진데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인사들 가운데 고개를 우측으로 돌릴 기회만 노리다가 북이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고 좋아하고 있다.
장석준같은 진보 논객들도 프레시안에서 박헌영과 갑산파 숙청 까지 연관시키면서 북이 정권에 반대하는 인산들에 대한 숙청과 처형의 역사를 새끼줄을 꼬듯 엮어 가면서 자기들의 변신의 변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박헌영이든 갑산파든 장성택이든 아무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따위 모두가 북에대하여 제대로 알 수 없는 정보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셀프냐 아니냐만 보아야 한다. 김구의 암살이든 김대중의 납치이든 어느 국가의 정권이라면 자주적으로 그런 일들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이것이 안 된 나라는 그 다음 모든 일들을 자주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성택의 양봉음위란 죄과 가운데는 나진 지역을 개발하면서 중국에 헐값으로 이권을 넘겨주고 자기 이익을 챙겼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남에서 FTA를 하면서 미국의 국익에 맞추어 우리의 이권을 팔아넘긴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자들을 처형이나 처벌하는 것이 가능이라도 하단 말인가. 장성택이 그런 자란 것이다. 만약에 장성택이 남에 살았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의 이익을 팔아 넘겼다고 한국 정부가 이 자를 처형하려고 할 때에 미국이 그냥 두겠느냐.
역대 대통령 가운데 그런 짓 안 한 자 있느냐. 이승만은 작전권 마저 미국에 넘기고 말았다.
만약 이런 죄목을 양봉음위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앞에서는 애국자인 냥 하면서 국익을 송두리째 팔아먹는 행위를 하는 죄과를 저지른다면 그건 셀프 처형 대상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런 셀프가 없다.
이 번 장성택 사건을 조카와 고모부 간의 가족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처형도 실각도 북에는 없다. 오직 있는 것은 초기의 ‘혁명화’만 있을 뿐이다. 조선 광복회 10대 강령에 담긴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혁명화이며 이를 겉으로는 하는 척 하면서 자기 이권만 챙긴 자들이 양봉음위하는 자들이다.
남에서는 왜 그럼 셀프 처형이 없고 불가능할 뿐 만 아니라 이런 양봉음위하는 자들이 더 잘 살고 출세하는가.아니 이렇게 이들이 잘 되고 잘 사는 이유란 외세 앞에 양봉음위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친일 매국노들, 광주에서 양민을 학살한 전두환, 4대강을 자기 이속을 위해 망쳐 놓은 이명박을 과연 우리가 셀프 처형할 수 있느냐이다.
못 할 것이다. 그들을 죽이려 할 때에 미국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장성택이 나진 지역 개발하면서 중국에 이권을 넘겨준 행위가 적시한 대로 사실이라면 우린 북의 셀프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하나의 나라다운 나라라면 그래야 한다. 이 번 장성택 사건은 실로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중국과도 상의 안 하고 눈 치 볼 것 없다는 젊은 지도자의 대담한 선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셀프 못하다 자기 부하한테 죽은 것도 과연 셀프이었겠는가. 과연 언젠가 남에도 셀프 처형이 가능할 날이 올 것인가? 장성택이 중국의 이권에 편승한 자였다면 과연 중국에게 장성택 처형을 미리 알렸을 때에 처형이 가능했겠는가. 중국에 미리 안 알린 이유는 자주와 주체 때문이다. 생선을 훔친 고양이한테 너 잡� 쨈鳴�어느 바보가 알리겠는가.
장성택과 그 주변이 중국과의 내통 그리고 그것이 남한 국정원에 샅샅이 알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남한 국정원은 땅 짚고 헤엄치듯 정보를 입수해 개가를 올렸을 것이다. 결국 남한에 알려 졌다는 것은 미국 정보 당국도 미리 알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이 죽음학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연구하 듯 북한학을 연구 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아닌가 한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3-12-23 17:44:27 사회, 문화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