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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9]세계관 토대를 만들어 준 육문중학교 시절(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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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9-16 18:15 조회4,3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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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지역은 오늘날 조선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김일성주석이 청년시절 세계관이 형성되었던 곳이고 그 인근 지역 카륜은 조선혁명의 진로가 선포된 곳으로 조선혁명의 사상적 기틀의 토대가 마련된 지역이기도 하다. <민족통신 취재진>은 항일투쟁의 현장, 연길에서 길림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김일성주석께서 청소년 시절인 1927년부터 1930년 활동하던 곳으로 김일성주석이 다니던 (1)육문중학교가 있고, (2)혁명활동을 위해 이용하던 북산공원 산정에 있는 절간안에 <김일성주석혁명활동지하실>자리가 있고, 김일성 청년이 길림감옥에 갇혀 옥살이를 하던 <길림감옥>자리가 있었던 곳이고, 그리고 그를 감옥에서 구출해 줄 뿐만 아니라 혁명활동을 측면에서 지워해 준 손정도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자리가 있던 곳이다. 이곳들을 길림에 거주해 온 박영모 선생(50)과 통화에서 살아온 김룡하 선생(68)이 안내해 주었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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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통신 취재진 길림역전에 도착하여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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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통신 취재진 길림 북산공원 사적지에 도착하여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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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통신 취재진 길림 북산공원 뒤에 있는 항일혁명열사릉에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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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길림 북산공원 산정에 있는 <김일성주석혁명활동공작실>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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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통신 취재진 길림<육문중학교>교정 김일성주석 동상앞서 기념촬영
 
 
 

 


[기획9]세계관 토대를 만들어 육문중학교

김일성주석의 청년시절에 형성된 철학관

 

 

 

(1)   김일성소년의 세계관 토대가 이뤄진 -육문중학교

 

(2)   길림 북산공원의 <김일성 지하공작실>

 

(3)   길림감옥과 손정도 목사 시무하던 교회 탐방

 

 

 

 

[통화=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김백호 편집위원] 연길에서 길림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김일성주석께서 청소년 시절인 1927년부터 1930년 활동하던 곳으로 김일성주석이 다니던 (1)육문중학교가 있고, (2)혁명활동을 위해 이용하던 북산공원 산정에 있는 절간안에 <김일성주석혁명활동지하실>자리가 있고, 김일성 청년이 혁명활동중 감옥생활을 하던 <길림감옥>과 그를 감옥에서 구출해 줄 뿐만 아니라 혁명활동을 측변에서 지워해 준 손정도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자리가 있다. 이곳들을 길림에 거주해 온 박영모 선생(50)과 통화에서 살아온 김룡하 선생(68)이 안내해 주었다.

 

(1)김일성 청소년시기에 세계관 토대가 이뤄진 육문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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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육문중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김일성주석 기념관 입구에서 취재진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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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일성주석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김주석 동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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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육문중학교 교정안에 세워진 김일성주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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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념관 안에 김일성주석이 사용했던 교실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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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육문중학교 김일성주석 기념관안에 전시된 관련 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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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통신 취재진은 김일성주석 기념관 앞에서 참관 소감을 말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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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취재진 일행 왼쪽부터: 박영모, 손세영, 노길남, 김백호, 김룡호

 

 

김일성주석의 청년시절은 일제하에서 나라 잃은 설움과 아픔도 많았지만 동족내부의 분열과 갈등도 극심했다. 민족주의자 계열 내부도 분열과 갈등이 극심했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좌익 계열도 엠엘파, 화요파 등 분파들이 많았다. 한편 중국도 일제의 침략을 받았으며 중국내부의 장개석 국민당 세력과 새로 부상하는 사회주의 혁명세력인 모택동 세력과의 갈등과 마찰도 극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 청소년은 부친 김형직선생과 인연이 많은 민족주의자 계열에서 운영하던 군사학교,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잠시 재학하였으나 학교에서는 맑스주의 철학서적도 마음대로 읽지 못하는 분위기였고, 제 갈길을 제대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극복하고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기 위한 방도를 찿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길림으로 가서 <육문중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서 만난 진보적 선생들이 김일성 청소년에게 일정한 범위내에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상월 선생과 박소심 선생이다. 박소심 선생은 이론가이며 독서가로서 <자본론>을 해설할 정도고 그 당시 맑스-레닌 철학에 대해 대가라고 할 정도로 박식했고, 상월선생은 베이징대학 영문학부를 나와 학교 선생을 하던 진보적 교사로서 김일성 청소년과 많은 대화를 주고 받은 인물로 알려져 왔다.

 

그 당시 이곳 길림지역은 장학량이가 장개석 지령을 받고 활개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중국 선생들 중에는 사회주의 지향인 진보적인 교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 청소년은 박소심 선생과도 토론시간을 많이 가졌다. 진보계 선생들은 맑스-레닌주의 고전적 도서들에 의존하여 노동계급의 계급적 해방이 선차이고, 민족적 해방이 후차라고 설명했지만 이에 대해 김일성 청소년은 조선의 경우나 중국의 경우도 다르다고 반문하여 교사들을 당혹하게 만들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받아물지 않고 조선이 처한 구체적 현실과 그 사회성격를 규정하고 이것에 기초하여 타도대상, 청산대상을 설정하는가 하면 그 대상들을 청산하기 위하여 동력을 설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각계각층의 연합전선, 통일전선을 통하여 타방을 청산하는 이론을 개발하여 그것을 주체사상, 주체철학의 기초로 만들어 조선을 건국하는데 밑거름으로 삼았다. 이 철학을 다듬고 세련화하는데 기여한 지도자가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김일성주석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14살때 <광복의 천리길>을 떠나 19266<화성의숙>에 입학하였으나 민족주의자들의 투쟁속에서는 빈말 공부밖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고, 독립군의 한숨소리밖에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혁명의 새길을 모색해나가기 시작했다. 19261017<ㅌㄷ제국주의 동맹>이라는 참다운 혁명조직을 결성하고 조직역량을 확대하여 나갔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은 조선혁명의 시원을 열어놓았다. 그 이후 19271월 길림으로 혁명기지를 옮겨 <육문중학교>에서 선진사상으로 무장하고 주변농촌에 비밀독서조직 등을 만들어 혁명역량을 확대해 나갔다. 1927410일 조선길림소년회 조직, 5월에 류길학우회 조직, 1929827일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재조직하여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을 결성하여 혁명의 기관차로 만들어 강철같이 다져 나갔다.

 

이러한 혁명의 길에서 청년지도자 김성주(김일성의 본명)는 차광수, 김혁, 최창걸 등 혁명동지들의 중심이 되어 투쟁하다가 중국 반동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길림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19305월에 출옥하였으나 혁명정세는 엄혹하였다. 일제는 드세게 공격하여 왔으나 이에 맞서 싸울 혁명역량은 민족주의 계열이나 좌파계열 모두가 약했다. 게다가 서로 힘을 합쳐 더 큰 힘으로 싸우지 못하고 31, 5인1파로 내부의 종파 분파가 극심하였다.

 

김일성 청년 지도자는 드디어 혁명의 깃발을 들기로 결심하고 돈화, 카륜지역으로 기지를 옮기고 193063일부터 72일까지 이곳 <진명학교> 교정에서 근 한달동안 역사적 카륜회의를 갖고, 630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했다. 이때 비로서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이 정립되었다. 그 이후 청년공산주의자들이 김성주(한별, 혹은 김일성)을 태양으로 받들고 고유수 무장투쟁을 비롯하여 카륜, 오가자 등에 일대 근거지들을 만들어 일제를 향해 투쟁의 깃발을 추켜들고 공격해 나갔다.

 

간고한 투쟁속에서도 <꽃파는 처녀>같은 불후이 명작이 김일성지도자에 의해 창작되어 오가자 느티나무 밑에서 193017일 첫 공연을 하여 동포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김일성지도자는 또한 <3인1당>이라는 작품도 만들어 종파,분파에 제갈길을 모르고 서로 시기하고 싸우던 파벌들에게 교훈을 주는 작품을 공연하여 그들에게 깨우침을 주기주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 청년지도자는 19271월부터 1930년 여름까지의 기간에서 대부분 길림과 그 주변에서 혁명활동을 하면서 주로 혁명노선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그 노선에 의거하여 조직을 확대하고 재생산시켜 나가는데 힘을 넣었다. 이것이 그후 국내로 진격할 때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2)혁명활동을 위해 이용하던

북산공원 산정에 있는 <김일성주석혁명활동지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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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길림 북산공원 안에 들어가 산정에 보이는 청조 시대에 지은 사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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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민족통신 취재진 일행이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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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항일혁명 사적지들을 관람하기 위해 길게 만들어 놓은 층층대를 오르는 취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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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일성주석이 청년시절 이용했던 <혁명활동 지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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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일성주석 혁명활동 지하실>앞서 민족통신 취재진 일행이 기념촬영


 

<민족통신> 취재진은 길림 북산공원으로 이동했다. 북산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대 그 분위기는 입구주변에 호수도 있고, 공원도 있고, 뒷쪽 산정에는 대형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취재진은 산쪽으로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 산정에 닿자, 그 절 입구근처에 김일성주석이 청년시절 혁명활동을 펼치던 지하실이 자리잡고 있다.

 

취재진 일행이 입장권을 내고 <김일성주석혁명활동지하실>을 찿았다. 경비직원은 그 장소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 안쪽에 있는 붉그스레한 건물위에는 한자로 <김일성주석혁명활동지하실>이라고 쓴 팻말이 보이고 그 문들의 유리창 속을 들여다 보면 바닥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지하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바로 여기에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김일성 청년지도자가 활동하던 장소들 중 하나였다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1920~30년대 길림(중국말로 지린=吉林) 지역에서 항일혁명가들이 모여 독립운동 관련 회의를 개최했던 곳이다. 북산공원 내 약왕묘(藥王廟)에 김일성(金日成)의 활동과 관련하여 <김일성주석혁명활동지하실>이라고 하는 안내표지판도 보인다. 그리고 북산공원(北山公園) 뒤쪽에는 '길림혁명열사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 안에는 조중련군 열사들의 사진들이 있고, 그 중에는 조선족 열사들의 이름들이 보였다. 중국혁명군 부사령관이었던 위승민(1909~1941)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고, 조중련군 항일열사 기념관에는 이동광(1904~1937)열사가 33세에 세상을 떠났고, 이홍강열사(1910~1935)25세에 세상을 떠났고, 이송파열사(1904~1934)31세에 세상을 떠난 기록이 보였다.

 

길림감옥과 손정도목사 운영하던 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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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일성주석 청년시절 그를 극진하게 도왔던 손정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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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소와 말을 파고사는 시장이었던 <뉴마항> 지역의 중심지였던 곳에 손정도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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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소와 말을 팔고사는 <뉴마항>이라는 이름의 상호가 보이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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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소와 말을 팔고사는 <뉴마항>이라는 이름의 상호가 보이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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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손정도 목사 아들 손원태박사(의사) 부부가 60년만에 방북해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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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른쪽에 평양 애국열사릉에 2004년 안장된 손원태박사 묘

 


<민족통신>취재진은 길림감옥 자리와 손정도 목사가 운영하던 교회당을 찿고 또 찿았으나 그 자리에는 이미 상가들과 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지역의 옛 상황을 진술해줄 토박이 노인들을 수소문해보았으나 찿을 수 없었다.

 

길림감옥은 공할루 거리와 훈춘지에 거리 사이에 있었다고 해 그 지역을 돌아보았다. 이 감옥자리는 그 흔적이 전혀 없고 이미 상가들과 주택가로 변했다. 단지 이 감옥자리에서 김일성 청년지도자가 옥살이를 하다가 19305월 출옥하였다는 역사만 떠 올려보았다. 그 역사속에는 손정도 목사가 출옥을 위하여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손정도 목사는 1882년 평남 오흥리의 뿌리깊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그는 23세 때 과거 시험을 보러 평양을 가던 중 한 마을에서 조목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하여 회심하게 되었고, 상투를 자르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집안에서 미친 자식 취급을 받게 되었고 결국 집을 떠나 고학을 하며, 1908년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한다. 후에 그는 1910년 협성신학당(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진남포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감리교 최초 교회인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 담임으로 목회를 하였는데, 그 당시 교회를 2,300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로 부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당시 남녀 교인석을 구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휘장을 없애고, 교회 안에 의자를 놓아 장안의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손목사는 일제하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그에 의해서 큰 감화와 감동을 받은 인물이 두 명이 일제하 독립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모태신앙이었던 유관순은 이화학당시절 손정도 목사가 담임하던 정동교회를 2년간 다니면서,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유관순이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손정도 목사가 뿌린 말씀의 씨앗이 자란 열매라고 한다. 삼일절만 되면 우리들의 가슴에 떠오르는 유관순 열사의 간절한 나라 사랑의 기도가 그녀의 기념비에도 새겨져 있다고 알려져 왔다.

 

손정도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또한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담겨 있다. 김일성 청년지도자와 손정도목사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란 제목 아래 그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회고록은 손정도 목사를 가리켜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김일성 청년지도자가 부친 김형직 선생의 사별 후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처럼 지냈는데,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인 손원태박사(재미동포 의사)는 김일성과 두살 차이의 친구였다.

 

김일성 청년지도자는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유길학우회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혁명 세력화하였다. 하지만 국민당 집권시기였기 때문에 중국공안당국에 체포되어 7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때 손정도목사가 옥바라지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선물까지 사 주며 그를 석방시켰다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회고록을 통하여 “손정도는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하였다. 손목사의 아들 손원태는1991 5월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서 평양으로 가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았고, 철봉리 특각을 선물로 받았다. , 김일성주석의 약속대로 손원태의 80회 생일은 대상 중에서도 평양에서 치러졌다. 조선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 1,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손정도 목사에 대한 존경을 보였다.

 

 

손정도목사 아들 손원태박사는 1991년 부인 이유신여사와 함께 방북하여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있다. 손박사는 1994년 8월11일 조선 당국의 초청을 받아 8순잔치상을 받기도 했다. 손박사는 영문으로 <김일성주석과 조선의 투쟁-Kim Il Sung and Korea's Struggle>이라는 영문도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2004년 서거하자 북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민족통신 취재진>은 손정도 목사가 운영하던 교회자리를 찾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길림시에 있는 뉴마항(지난 시기인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이 자리가 소와 말을 팔고 사는 시장)이라는 곳은 <칭다오지에><통신후통>거리의 인근지역으로 알려져 왔는데 지금은 상가와 주택지로 바뀌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 다수에게 물어보아도 그 교회자리가 뉴마항이라는 동네라는 것만 알지 구체적으로 어느 자리인가를 말해주는 사람들은 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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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길림 북산공원 산정 뒤쪽에 세워진 <항일혁명령사릉> 정원에서 방송하는 민족통신 취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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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 항일혁명열사들의 사진도 북산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 안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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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 항일혁명열사들의 사진도 북산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 안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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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북산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 안에 중조련군 혁명활동 사진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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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길림 북산공원 산정에 있는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 안에 전시된 항일투쟁 그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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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북산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 앞에 위승민열사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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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산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중조항일련군 혁명활동 역사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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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산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중조항일련군 혁명열사탑앞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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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산 <항일혁명열사릉>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중조항일련군 혁명열사탑 정문 앞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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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산공원 입구로 나와 <북산>이라고 보이는 문앞에서 취재진 일행 기념촬영



 

[기획8]연변자치주 연길 사적지들 탐방(동영상):::

박물관,무명열사릉, 연길감옥등 항일혁명 사직지들 탐방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policy&wr_id=11560

 

[기획7]<반일인민유격대>결성한 대사하치기 전투현장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79

 

[기획6]무송지역의  항일투쟁 역사 현장들

<장울화열사 무덤>,<김일성소년 다니던 무송소학교 탐방>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77


[
기획5]-중련군의 항일투쟁 역사의 현장들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74

[기획4]  고구려 땅에서 바라본 북녘의 만포시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71

 

[기획3]중국 끊어진 다리서 바라본 북녘 신의주(동영상)/

/중국의 조선식당 냉면도 평양차럼 맛있다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67

 

[기획2]미당국의 부당한 방북금지 정책에 분노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65

 

*[기획-1]민족통신 취재진 동북3 탐방 93일도착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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