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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음악인이며 통일운동가인 리준무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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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8-02 03:55 조회68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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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은 이번 미국 동부지역 방문을 통해 <통일음악인> 리준무 선생과도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밝히면서 리준무선생과 나의 관계는 전문분야에서 <음악인> <언론인>이란 점에서만 차이가 있지<통일운동가>라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번 여정에서는 마음 깊이 담아 놓은 이야기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고 밝힌다. [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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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준무 우륵교향악단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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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우륵교향악단의 <통일음악>연주를 지휘하는 리준무 선생

 

 

 

[수필]음악인이며 통일운동가인 리준무선생


 

*: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

 

 


이번 미국 동부지역 방문은 다른 때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여행이었다.그래서 이번글은 <대담>이라는 생각보다 <수필>로 정하고 필자의 마음들도 함께 삽입하는 글로 쓰기로 했다.

 

필자가 필자에 대한 수필을 쓴다면 그 제목도 <언론인이며 통일운동가인 노길남>이라고 붙이고 싶다. 내가 언론인으로서 글을 쓰는 것은 자주, 민주, 통일로 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글쟁이다. 궁극적인 것은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준무선생과 나의 관계는 전문분야에서 <음악인><언론인>이란 점에서만 차이가 있지 <통일운동가>라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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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는 10월6일 <통일음악회>를 준비하는 리준무 우륵교향악단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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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는 10월6일 <통일음악회>에서 프랑스 작곡가 비제이 교향곡을 연주할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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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는 10월6일 <통일음악회>를 준비하는 리준무 우륵교향악단 지휘자
 

 

지난 시기 뉴욕에 가게 되면 주로 리준무 선생댁에서 지냈다.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아는 것에는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통일운동가로서 서로 교제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잘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잘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최근에 뉴욕지역을 가면 주로 유태영박사 댁에서 지냈기 때문에 리준무 선생댁에서 이러저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번 방문에서 필자는 하루 이틀이라도 리준무 선생댁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와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저지를 떠나 로스엔젤레스로 오기 전 하루정도 그와 함께 지내고 싶어 귀가 하루전날 그의 집으로 갔다.


이때문에 그를 만난 첫날 밤 통일운동내부에 깔려있는 이야기들도 주고 받았다. 서로 격론까지 벌였다. 큰소리로 열변도 토했다.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빗나간것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태가 어떤 후과를 초래하는 가에 대한 분석의 차이도 달랐다. 그 뿐아니라 문제를 고치기 위한 실천방도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이것은 멀지 않은 날 시간이 말해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격론을 접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서로간의 대화는 끝났지만 이튿날 아침 리준무 선생은그의 3층 음악실에서 악보를 놓고 지휘연습을 하고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 보아도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지휘에 열중하는 모습만을 보였다. 그가 걸어온 음악의 길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지금 저렇게 열심히 지휘연습을 하는 곡과 그 내용들이 또 어떤것인가를 알고 싶었다.

 

106일 통일음악회 준비에 한창

 

필자는 이튿날 그의 집에서 뉴와크 공항으로 가는 길에 그의 음악발자취를 질문하면서 자동차 안에서 통일음악회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그날 아침 지휘를 연습했던 그 곡이 바로 앞으로 열리는 통일음악회에서 연주할 곡이었다. 그 작곡가는 37세에 요절하여 단명으로 살았던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이(Georges Bizet-1838.10.25~1875.6.3)의 교향곡 1번이었다. 비제이의 교향곡은 서너개 되지만 그 곡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그의 교향곡 1번을 제외하고 다른 것들은 악보를 불태워버렸거나 아니면 아예 연주를 위해 그 악보를 내놓지 않았다.

 

 그는 비제이의 대표작 칼멘, 바다(나마르), 에그먼트(서곡) 등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서 이 곡을 오는 106일 통일음악회에서 우륵교향악단이 연주할 계획이라고 설명해 준다. 이밖에도 3대 바이올린 협주곡들(베토벤,멘델스죤, 차이코프스키)도 계획하고 있고, 개량가야금 21현에 기초하여 작곡한 가야금 협주곡(작곡 한철)도 소개할 생각도 하고, 또한 북부조국에서 불러온 계몽기 가요 <타향살이>를 편곡한 곡 등을 선 보일 계획이라고 귀띔해 준다.   

 

 리준무선생은 29살되던 1972년 도미했다. 그 이전의 한국에서의 음악인으로서의 전문직은 어느 분야였을까. 그가 걸어온 한국에서의 29년 동안의 주요 활동에 대해 질문했고, 이어서 미국에 살기 시작한 1972년부터 지금까지의 46년의 이민생활에 관한 발자취도 듣고 싶었다.  

 

한국서는 학교선생및 KBS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

 

그는 1943년 호남지역의 정읍출생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선생을 하다가 뒤늦은 시기인 1965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1969년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그해부터 급료를 받으면서 KBS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고, 그리고 서울 심포니 에타(지휘자:이화여대 음악대 학장 김몽필교수)에서 음악애호가들과 함께 무보수 음악취미활동도 겸했다.그 당시 서울심포니에서 윤이상선생이 작곡한 <아악,재래악>을 연주한 기억도 난다고 그는 돌이켜 보면서 그 당시 윤이상선생이 감옥에서 풀려난 시기여서 서울심포니가 그의 음악을 연습할때 윤이상 선생이 직접 와서 <좋은 연주>라고 단원들을 격려했던 기억도 남아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한 바이올린 입문생이 대학교를 졸업한 그 해부터 KBS교향악단에 입단하여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한다는 것은 시골출신 연주자로서는 그야말로 하늘에 별을 따는 것 만큼 어려웠던 시대였다.

 

안용구교수와 리준무선생의 한국에서의 인연

 

리준무 선생이 재미동포 통일음악계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안용구선생과 한국에서의 인연도 흥미있는 이야기로 들었다. 서울대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인 19638월 시골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선생을 하느라고 대학입학이 늦어진 시기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들어가고 싶어 당시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안용구교수를 무턱대고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가 안용구 선생을 찿아간 때는 안교수가 결혼한 초기였다.약속도 없이 집을 찿아갔으나 안교수 부부는 부재중이어서 무작정 기다리다가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 온 안교수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안교수는 집을 새로 사서 <안용구>라고 쓴 문패를 주문해 놓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온 심부름 하는 청년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리준무 청년은 선생님을 뵙기 위해 시골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자초지정 사연을 말하자 의아해 하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집안으로 안내해서 사연을 들어주었다.  

 

안용구교수는 당시 서울대 음대 교수지만 리준무 청년이 갖고 있는 바이올린 연주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를 추천해 주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안용구 교수는 이틀후 다시 만나 그의 연주를 듣고 싶다고 말하고 헤어졌다.

 

리준무 청년은 이틀후 약속한대로 안교수 앞에서 연주를 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안용구교수는생각한 것 보다 괜찮은데…”하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때 리준무 청년은 지도해 주시겠다고 대답하신다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하여 그의 지도를 받고 1965년 서울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입학해서도 지도를 받았는데 그때에는  장학생으로 취급하여 개인강사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지도해 주셨다고 한다.

 

리준무선생 이민생활 46년동안의 직업들

                               

리준무선생은 1972년 미국에 와서 음악공부를 계속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그래서 미국에 오자말자 <맨하탄 음악학교>에 들어가 음악공부를 했지만 학교시험도 칠 수 없는 환경이었고,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다가 직업전선으로 뛰어 들었다.

 

그래서 1972년부터 6년동안은 7가지 일들을 했다. 첫 직업은 아이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개인지도하며 생활했고, 둘째 직업은 식당에서 버스보이 노릇하며 하루 20달러 정도 벌었고, 셋째 직업은 스폰지 제작하는 공장에서 기계조종 노동으로 생활했고, 넷째 직업은 친구의 권유로 청소기 판매원도 했고, 다섯째 직업은 또다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애들에게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었고, 여섯번째 직업은 아는 학부모의 권유로 <월드북><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판매하는 책장사도 해 보았고, 일곱번째 직업은 베이큠 판매를 하러 한 장소로 가서 일하다가 만난 뉴욕라이프 보험회사의 정병돈씨를 만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권유에 의해 1978년부터 지금까지 보험업 세일즈멘으로 40년째 일하고 있다.

 

그는 이민생활 첫 6년동안 일곱가지 일들을 하며 생활해 오다가 8번째 직업인 보험업계에 종사하여 일하게 된것이 가장 적성에 맞기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생활비를 위한 직업으로 그가 선택한 보험업계가 가장 좋았다고 회고한다.

 

이민생활중 보람은 통일음악 연주및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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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준무 선생은 이민생활 46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가 인생에 가장 보람은 통일음악을 연주하고 지휘하는 일인 것 같다. 이것은 그의 부인 전화심 여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생활을 위한 직업으로서는 보험업이 금년으로 40년이 되지만 우륵교향악단을 비롯하여 통일음악에 뛰어든것도 37년이 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는 언제나 그의 부인이 함께 했다. 우륵교향악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는 반민족세력이나 극우세력의 방해책동도 심했다.

 

그러나 <통일음악>에 심취되어 이제는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분단역사의 모순과 갈등이 그로 하여금 이길을 걷게 한 것으로 보인다.

 

리준무 선생이 지향하는 <통일음악>은 우리 민족의 분단역사의 배경에서 탄생되었다. 그의 의식구조에 <통일>이라는 두글자가 아로 새겨진 것의 결정적인 계기는 5.18민중항쟁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이어서 통일음악회에 참석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조국통일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북부조국의 음악과 예술에 심취되었고, 바이올린 연주자에서 통일음악 지휘자로 변신하여 이제는 명실공희 통일음악 지휘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는 이민생활을 해 오면서 북녘 예술인들의 미국방문을 통해서도 그리고 방북활동을 통해서 남과 북의 음악들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서울대학교 동문회 음악활동을 통해서도 남북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특히 <우륵교향악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여 오면서 북녘 음악들을 연주하는 기회들이 많아졌고, 통일음악 지휘자로 활약해 오면서 방북하여 북녘 교향악단의 연주를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날이 갈수록 통일음악지휘자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민족통신의 권유로 북부조국 음악들에 대하여 집필활동을 전개해 왔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리준무 선생은 1백여편의 주옥같은 북부조국의 음악이야기들을 연재로 발표해 왔고, 그것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평양출판사를 통해 발행하여 통일음악 이론가로서도 한몫을 해냈다. 이때문에 그는 남북을 포함한 해내외 동포사회에서 <통일음악 지휘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여기에 <통일운동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하면 한층 더 멋있는 통일음악인으로 빛을 발할 것이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리고 이같은 나의 마음을 진솔하게 전하기도 했다.()    


[이 게시물은 편집실님에 의해 2018-08-05 03:17:11 통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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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금강님의 댓글

해금강 작성일

선생님은 참으로 출중한 통일음악예술가이십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일에 앞장서겠습니까?
10월6일 음악회가 성공하기를 빕니다.
플로리다주 국악인 해금강

미주청년님의 댓글

미주청년 작성일

노길남기자와 리준무 지휘자의 두분 격론대화 내용이 궁금!!!
 
"""""이때문에 그를 만난 첫날 밤 통일운동내부에 깔려있는 이야기들도 주고 받았다. 서로 격론까지 벌였다. 큰소리로 열변도 토했다.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빗나간것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태가 어떤 후과를 초래하는 가에 대한 분석의 차이도 달랐다. 그 뿐아니라 문제를 고치기 위한 실천방도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이것은 멀지 않은 날 시간이 말해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격론을 접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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