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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8] <9.18역사박물관> 탐방후 작별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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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7-10-16 06:23 조회26,7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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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취재진(노길남,손세영, 김백호,김중산,유창환)은 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에 위치한 주요 항일투쟁 유적지들을 참관하고 심양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9.18역사박물관>을 참관하고 재중조선인총연합회 간부들과 마지막 작별만찬을 갖고 미국으로 돌아왔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8] <9.18역사박물관> 탐방후 작별만찬

 

 

 

[심양=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김백호, 김중산,유창환 공동취재]우리 일행은 동북3성 항일투쟁 전적지들을 돌아보고 단동으로 갔다가 압록강변 건너편 조선땅을 바라보는 여정을 마치고 다시 료녕성 심양으로 돌아와 심양의 <9.18역사박물관>을 참관하고 재중조선인총연합회 일부 간부들과 10.4선언 10주년을 맞는 기념으로 통일문제 좌담회를 가지면서 마지막 작별만찬을 나누고 미국으로 돌아왔다.한편 5명의 일행중 1명은 미국시민권자가 아니라서 항일투쟁 전적지 상당부분을 참관하고 북부조국으로 들어가 일주일 기간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1015일 귀국했다.

 

심양 <9.18 역사박물관> 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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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일행은 <9.18 역사박물관>을 참관했다. 이 박물관은 심양(혹은 선양) 북쪽의 망화 입체 교차로의 서북쪽 다동구 왕화난가46(大望花南街46)에 자리 잡고 있으며 '류탸오후 사건'의 발생지와 200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다.일제가 강점했던 시대에는 선양을 봉천(중국말로 펑톈(奉天)이라고 불렀다.

 

 이 박물관을 참관하며 곳곳에 역사자료들이 설명되어 있다. 이른바 <9.18 사변>은 다른말로 만주 사변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1931 9 18일 류탸오후(柳條湖)사건, 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이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돌아보면, 일본은 만주의 창춘(長春) - 뤼순(旅順) 간 철도의 이권을 획득하고 관둥저우(關東州)를 조차한 이후 만주는 일본의 자본투자, 상품시장, 중공업원료 공급지로서 일본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후 펑톈(奉天)군벌을 원조하며 중국 동북지방을 노렸다.

 

그러나 장쭤린(張作霖)이 피살되고 <펑톈(奉天)사건> 장학량(장쉐량=張學良)이 장개석(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에 합류하게 되자 만주에서도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제국주의적 이권을 다시 회수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세계 대공황으로 만주철도 영업도 부진하게 되고 중국 국민정부에 의한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은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하게 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것을<만·몽((滿蒙)만주와 몽고)의 위기>라고 선전하고, 19317월의 완바오산(萬寶山)사건, 나카무라 대위 사건과 더불어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국권회복운동과 소련의 제1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의 상황으로 인해 일본은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위해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등이 앞장서 만주침략계획을 모의했다.

 

그리하여 만주 침략을 위해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를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모의되었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319 18일 밤 10 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군대의 소행으로 몰아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일본 관동군은 장쉐량의 군영인 북대영(北大營)과 펑톈성(奉天省)을 공격하였고 이튿날 펑톈시를 비롯하여 만주철도 근처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관동군은 대공황으로 구미열강들의 간섭이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고 장쉐량이 베이징에, 또한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長城線) 이남에 집결하고 있어 잔류 수비대가 분산되었던 기회를 포착해 1931 9 18일 만주 침략 작전을 시작하여 5일 만에 랴오둥(遼東), 지린성(吉林省)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9 21일 일본의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에 의한 독단 월경으로 전쟁은 남쪽 만주지방 전체에 확대되었다. 일본 정부는 군사행동의 정당성과 이후 전쟁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사건을 공인하였다. 그렇지만 뒤에 관동군의 행동을 추인함으로써 악폐(惡弊)의 소지를 만들었다. 1932년 초까지 만주의 점령을 끝낸 그들은 3 1일 톈진[天津]에 망명 중이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愛新覺羅溥儀]를 내세워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이후 만주국은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이후 사건 현장에 국제연맹의 리턴 조사단(Lytton Commission)이 파견되어 '리턴보고서'가 작성되었으며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러허성[熱河省]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침략으로 세력을 강화한 일본 군부와 우익은 정국을 장악하고 일본을 파시즘 체제로 전환시키는 한편 1937년에는 중일전쟁,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민족통신 일행은 9.18사변을 조작한 일본군이 어떻게 사건을 꾸며서 침략을 시도했는가를 알아보았다. 그것을 알려면 <류탸오후 사건>의 배경을 보면 알수 있다.

 

<류탸오후 사건>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군이 용의주도하게 꾸민 첫 번째 음모였다. 일본은 만주를 장악한 후, 중국 본토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오래전부터 꾸며왔다. 장쉐량의 동북군이 주둔하고 있던 펑톈(현재의 선양)은 만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장악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류탸오후는 선양 부근이고 동북군의 본부와 가까웠기 때문에, 일본군이 중국 측에 이 사건을 전가하여 진공하는 것이 용이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사건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 사건을 꾸민 총책은 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이시와라 간지와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였다. 이것은 내각에도 비밀로 하고 그들끼리 꾸민 음모였다. 이시와라와 아타가키는 거사 장소로 류탸오후를 선정하고, 펑톈에 있던 특무기관에서 근무하던 하나다니 다다시 소좌, 이마다 신다로 대위, 그리고 펑톈 헌병대장 미다니 기요시 중좌와 구체적인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현지에서는 폭파전문가인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거사를 담당했다.

 

 류탸오후 철도 폭파는1931 9 18일 밤22 20분 경, 일본 관동군 후스타이(虎石台) 독립수비대 제2대대, 3중대가 실행하였다.

 

 류탸오후 분견대 대대장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는 1개 분대를 펑톈 북쪽 약 7.5 Km의 류탸오후 남만주철도 노선에 파견하여 소형폭약을 장치한 후 폭파시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철도의 작은 부분이 폭파되었다. 또한 중국 동북군 군복을 입은 중국인 시체 3구를 현장에 방치하여, 이를 철도 폭파가 중국인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삼으려고 의도했다.

 

 폭파 후, 가와모토는 즉각 동북군 북부 사령부를 향해 사격하였고, 일본군 독립수비대에"동북군의 중국군이 철로를 폭파하고 수비대를 공격했다"고 보고했다. 독립수비대는 이를 즉각 관동군 사령부에 보고했고,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중국군을 향해 대응발포하고, 동북군 사령부와 펑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동북군을 기습했으나,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 제7여단은 무방비 상태였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북군 사령관이었던 장쉐량은 휘하 부대에게 일본군의 확전 의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서 사령부 주둔부대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7여단의 3개 연대 중, 2개는 지시대로 철수했고, 왕티에한의 620연대는 철수명령을 받지 못해 대응사격을 했으나, 최후에는 포위망을 뚫고 철수했다. 무대응 명령 때문에, 동북군 북부 사령부는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500여 명의 일본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펑톈과 동부사령부에서도 역시 대응 없이 철수하였고, 이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위 설명의 내용들은 9.18역사박물관의 자료와 함께 자료문헌으로 신채식,『동양사개론』, 삼양사, 1993, 그리고 김영진 편저,『중국오천년사』, 도서출판 대광서림, 1989을 참고했음)

 

민족통신 일행은 이곳을 참관하면서 그리고 항일투쟁 전적지들을 참관하면서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일본제국주의 세력에게 당했고, 미국 제국주의 세력과 미제와 결탁했던 장개석 국민당 세력에게 당했지만 어려움을 당할때마다 조선인민유격대의 도움을 받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중국은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세력, 즉 김일성주석이 이끄는 조선의 인민유격대가 이끄는 항일혁명 세력에 크게 힘을 얻은바 있었다. 중국 공산당 세력이 조선인민혁명 세력에 의해 도움을 받은 것은 비단 1930년대, 1940년대 뿐만 아니라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미제국주의 세력은 중국을 아시아의 중요한 반쏘, 반공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일본이 패망하기 전부터 장개석에게 60억달러의 군사적 원조를 주며 장개석 국민당 군대를 반공의 돌격대로 준비시켰다. 미제의 방조밑에 일본의 패망을 전후한 시기 국민당군대는 현대적무기로 무장한 106개 사단에 200만여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미국의 군사고문들까지 들어와 이들을 훈련시키느라고 열을 올렸다. 장개석군대는 보병만이 아니라 공군, 해군도 다 갗추었다. 여기에 <중쏘우호동맹조약>까지 체결되여 장개석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중국공산당과 평화담판을 제기하고 19458월말부터 중경에서 담판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장개석군사역량과 중국공산당 군사역량은 중국 전 인구가운데 70% 30%로 나타났다. 당시 장개석 국민당 군대가 무려 43만여대군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조선혁명 세력, 중국혁명에 적극지원


 

중국공산당이 어려운 처지에서 위기에 당면한 상황을 직시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 국내혁명의 정세가 바쁜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중국 동북지방에 조성된 긴장한 정세와 어려운 정황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는 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전체 조선인민의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무로 됩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중국사회주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선에도 좋고 국제주의적 숭고한 의무라고 천명했다.(도서 <중국동북 해방을 도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국문출판사, 20169, 길재준, 리상전 집필 참조)

 

김일성주석은 1946328일 중국의 주보중을 만나 이웃나라 중국혁명을 돕기 위한 문제를 논의하여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조선인민군은 림강보위작전(1946.12~1947.4)을 도왔고, 1차장춘해방전투(1946.4.14)를 포함하여 휘남현성전투(1946.10.19), 정풍운동 지원(1947.3), 사평해방전투(1947.7.2~1948.3)에서 2만살상하고 4만 포로잡았고,금주해방전투(1948.10.13), 2차 장춘해방전투(1948.4), 흑산,대호산전투(1948.10.23), 심양해방전투(1948.11.1~1948.11.2 오후5시에 완전해방),영구항해방전투(1948.6), 평진지역작전(1948.12.5~1949.1.31) 등을 지원했다. 또한 19492월 중국의 왕효명은 중국의 해방전쟁을 끝까지 도와줄것을 요청하기 위해 평양에 왔다.김일성주석은 그를 접견하고 중국측의 요구를 수락해 주었다.

 

그후에도 조선은 <장강도하작전:1949.4>, 해남도해방전투(1949.12~1950.4.30), 그리고 1945, 1946, 1947, 1948년 동북지역의 철도복구사업도 지원하여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101일 혁명의 승리로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오성기를 올렸다.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에서 지대한 공적을 쌓은 조선인부대들은 김일성주석의 부르심을 받고 조선으로 귀환했다


중국의 현대사에서 전환의 계기로 된 동북해방전쟁과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김일성항일유격대와 조선인민군이 이룩한 불멸의 업적은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된 이래 국제주의적 지원의 가장 빛나는 모범이었으며 조선의 인민들이 중국대지에 뿌린 선혈을 오성홍기의 색조를 더욱 빛나게 한것으로 아로새겼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당과 인민은 조선이 미제국주의자들과 판가리 싸움을 벌리던 코리아전쟁 시기에 주저없이 지원군을 보냈다.


 

작별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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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역사기행 탐방취재진 일행은 심양에서 재중동포들과 마지막 작별만찬을 나눴다. 미국에서 도착했을때 환영만찬을 대접받았기에 마지막 작별만찬은 민족통신 취재진 일행이 대접하는 조촐한 행사로 진행하였다.

 

1부에서는 민족통신 취재진 일행이 중국 동북지역 항일투쟁 전적지들을  탐방한 여정에 대해 지도를 놓고 수만리 길을 다녀온 약도를 그려가며 설명하여 주었고, 2부에서는 취재진과 재중동포들이 70여년 동안 분단을 종식하지 못한 그 근본원인과 그것을 청산하기 위한 방도들에 대해서 서로들 의견들을 나누는 좌담회를 가졌고, 참석자들은 마지막 3부에서는 간단한 여흥시간으로 작별의 정을 나눴다. 특히 재중조선인총연합회와 이 단체에서 파견해 준 유창환 선생의 노고에 대해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기획-8] <9.18역사박물관> 탐방후 작별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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