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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한 역사쿠데타-권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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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12-13 12:41 조회17,76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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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 선생(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최근의 아시아 정세를 진단하면서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한 역사쿠테타'라는 제목의 논단을 발표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람일보 2015년 12월12일자에 올라온 그의 논단을 여기에 전재해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한 역사쿠데타

우리 국민이 만들어나가는 역사를

가로막을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기사입력: 2015/12/12 [17:30] ㅣ 최종편집:


*글:권오창(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권오창.jpg

필자인 권오창 선생은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생활속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해 온 국내 원로이다. 그는 언제나 젊은이들의 애국운동을 격려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언제나 겸손한 실천가이다. 국내 시위 어느 장소에 가나 그는 조용히 자주민주통일 구호를 들고 한 자리를 지켜 왔다. 그의 실천운동 철학은 "자기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운명을 이끌어 나가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지런히 학습하고 투쟁 속에서 단련되는 선구자가 됩시다. 사람은 죽어서 정신을 남기고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80평생 살아온 인생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민중이 힘을 합쳐 싸우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외치면서  이 땅의 자주통일과 민주화를 향해 이 땅의 청년들이 앞장서 싸워나갑시다라고 청년들을 향해 호소해 왔다. 그의 귀한 논단(사람일보 2015.12.12)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1. 역사를 말하다 

역사를 뜻하는 한자 ‘사(史)’자는 사람 인(人)자에 입 구(口)자를 합해 만든 글자다. 사람의 입이란 말을 하고 음식을 먹는 기관으로 ‘삶’ 그 자체를 상징하는 기관이다. 다시 말하자면 입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라에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할 때 인구(人口)조사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역사(歷史)란 사람들이 먹고, 입고, 말하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역사는 흔히 백성, 민중, 국민, 인민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그 자체를 숨김과 보탬없이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런 관점의 역사를 민중사관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어느 날 독재자가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건을 재단하는 것을 두고 역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계급사회에서 소수 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권력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자의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사관에 따른 서술일 뿐 과학적인 역사서술은 아니다. 사회의 주인인 대다수 민중들이 노동을 통해 그 사회의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 즉 민중 주체적인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만이 과학적 역사관이라는 것은 점점 진리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 박근혜 정권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자의적으로 기록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 우리 민중의 생생한 삶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를 이제 와서 한사람의 권력유지를 위해 입맛에 맞게 고쳐 마음대로 재단해 버린다면 이것이야 말로 역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라나는 세대들의 밝은 미래를 암흑으로 뒤집어 씌우는 행위로써, 역사 앞에 천인공노할 대죄를 저지르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걸출한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일갈한 바 있다. 오늘 박근혜 정권의 이 가공할 만한 역사 도살행위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의 미래를 짓밟아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적 죄행을 헌법에 명시된 3.1운동과 4.19의 정신으로 단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미래 세대 앞에 못난 조상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우리의 역사를 지켜내고 민족사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현대사는 일본의 식민통치 36년, 미국의 제국주의적 수탈 70년, 통틀어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제국주의의 상처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수탈당하고 학살당한 민중들의 목숨이 부지기수다. 또한 우리의 역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독재자들의 권위주의 치하에서 권력의 입맛에 맞게 미화되고, 마음대로 재단되어 왔다. 겨우 바로잡히려던 역사가 다시 일인 독재자의 영구집권 음모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이 땅의 역사는 존재의 가치가 잊혀 버릴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정신세계를 점령당하면서 동조동근(同祖同根)이요, 내선일체(內鮮一體)요 하는 동화(同化)의 논리를 강요당해 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과 일본 민족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민족들이 각각 외지(外地)와 내지(內地)에 나뉘어 살게 된 것으로 본래 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허울 좋은 동화의 논리였을 뿐, 실상은 우리의 역사를 뿌리 채 뽑아 없애려던 것이었다. 일본은 더 나아가 아예 조선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의무적으로 일본말과 글을 쓰도록 강제했다. 

8.15 이후에는 미국이 들어와서 한반도를 반토막내고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가지도 오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되었다. 분단으로 인해 천만 이산가족이 피눈물을 흘리고 우리의 5천 년 역사는 반신불수 신세가 되고 말았으며, 미국식 황금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 물질 만능주의 등 서구 문화의 찌꺼기들이 한국사회의 정신을 지배하고 말았다.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제대로 서술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역사서술이 될 수 없다. 

1924년 상해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의 결론에서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 국문, 국사는 혼(魂)에 속하고 전곡(錢穀), 졸승(卒乘),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는 백(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혼이 있는 자는 백에 따라서 죽고 살지 않으므로 나라에서 국사를 가르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8.15 이후에 서양사는 힘써 가르쳤어도, 우리 국사는 선택과목으로 취급하는 등 소홀히 대해 왔다. 이것은 다 외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한 것으로, 우리 것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정책의 결과물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혼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참다운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다. 

2. 미·일은 현대사에서 우리민족을 침탈한 공동정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19세기 말 이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은 모두 제국주의에 침탈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대사는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로 얼룩지고 식민지 민중들은 가혹한 친일·친미 독재의 억압과 수탈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했고 특히 그중에서 우리 민족은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가장 장기간에 걸친 가혹한 피해를 입은 민족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미국은 이미 1866년에 평양 대동강을 침략한 셔먼호 사건을 저지르고, 1871년에 신미양요를 일으켜 이듬해 조미통상조약을 이끌어 냈다. 미국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조선은 쇄국정책이 강해서 도저히 침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먼저 침투시켜 길을 들인 다음에 자기들이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계획을 짰다. 미국은 1905년 7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일본을 앞세운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은 태프트-가쓰라 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기독교 선교의 자유를 허락받음으로써,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에도 선교사를 통해 조선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미국인 신부와 목사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에 드나들며 교회를 건설하고 선교활동을 하며 기독교 정신을 전파함으로써 조선과 미국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기독교인들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마자 미국이 조선에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구축해 놓았던 것이다. 

일본이 항복했을 때, 미국 태평양 사령부의 핵심 전력은 한반도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필리핀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과의 협의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도 남한에 도착할 시간이 지연되자, 미국은 일본군대와 경찰에게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할 때까지 치안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은 미국의 제안을 수락했고,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치안권을 담당하고 있는 일본 경찰과 한국 민중들 사이에는 많은 충돌이 벌어졌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일본 군경이 치안임무 수행의 일환으로 미군을 환영하러 모여든 인파에게 발포를 해 2명의 한국인이 죽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미군의 행적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일본으로 철수했을 때, 미군이 후지산 오지에 들어가 전쟁훈련을 벌였다는 이야기나, 6.25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이 군수기지화되고, 일본 각지의 비행장이 미군 전투기의 발진기지로 신속히 전환된 것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일본이 직접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소문도 있다. 일본군 소해정(掃海艇)이 동해 부근에서 경계와 소해전을 도맡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군의 전쟁범죄인 세균전 의혹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731부대라는 이름으로 세균전 부대를 운영했는데, 세균전을 총괄하던 731부대장 이시이란 자는 미국에 세균전과 관련된 기밀 정보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시이와 731부대의 세균무기가 6.25전쟁에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주한미군 기지에 세균무기인 탄저균이 불법으로 반입되어 한국 국민들이 공포에 떨었던 일도 있었다. 

1951년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접어들고 휴전회담 이야기가 막 나올 무렵, 미국은 일본을 활용하기 위하여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맺는다. 미국은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공식적으로 청산하게 되었다. 또한 이 조약의 영토반환 조항에서 독도 문제를 모호하게 남겨둠으로써 이후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영토분쟁을 초래하게 된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군산복합체 산업을 더욱 비대하게 만들 수 있었으며, 일본은 전후 복구건설 시기 한국전쟁 특수로 큰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300만의 민족 구성원들이 희생당하고, 국토는 황폐화 되었다. 미국과 일본은 1954년 3월 8일 미일상호방위원조협정을 맺고 1960년에는 워싱턴에서 미일방위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의 기획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동북아에서 냉전체제를 확고히 구축했다. 미국은 1965년 2월 ‘삼시작전(三矢作戰을 기획했다. 삼시작전이란 일본이라는 화살에 대한민국이라는 화살을 꽂아서 북한을 향해 쏜다는 것인데 이 게획에 의해서 1965년 10월 29일 ’비룡작전‘이 계획되었다. 이 작전은 한미일 공동작전을 상정한 대 북한 전쟁연습으로 실행되었다. 

1964년 8월 4일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은 1964년 1월 18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조속히 타결하라고 한국측에 주문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을 베트남 전쟁에 활용하기 위해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 시킬 필요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케네디에 이어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 번디 국무부 차관 등이 연달아 한국에 방문하며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주문한 사실은 미국의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는 행위였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국의 협력 체계가 필요했다. 1965년 6월 22일 미국의 의도대로 한일협정 기본조약이 도쿄에서 타결되었다. 한일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권은 곧 베트남에 주월야전사령부를 설치하고 연인원 30만 명의 대병력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대한민국군은 5천 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4만 명 이상의 베트남 민중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미군의 고엽제 살포로 인해 참전자들 중 다수가 고엽제 피해자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다. 

한일협정은 일본 국회에서도 졸속으로 처리되었다. 일본의 기시 수상은 1965년 11월 12일 새벽 0시 18분 한일협정 조인을 밀어 붙였다. 일본 사회당 등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의원 후나다 의장이 개회선언 3초 만에 비준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3. 전후 미일의 한반도 책동 

제국주의 초기단계에서는 개별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개척을 단독으로 수행해왔으나, 2차 대전이 끝나고부터는 제3세계에서의 투쟁이 강화됨에 따라 그 양상이 복잡해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미국을 최상위로 하고 일본을 차상위 그리고 한국을 최하위로 하는 수탈구조가 정착되었다. 최상위의 제국주의 국가는 차상위, 최하위 국가를 동원해 전쟁을 수행하고 초국가적 이윤을 창출했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의 기획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동북아에서 냉전체제를 확고히 구축했다. 미국은 1965년 2월 ‘삼시작전(三矢作戰)’을 기획했다. 삼시작전이란 일본이라는 활에 대한민국이라는 화살을 꽂아서 북한을 향해 쏜다는 것인데 이 계획에 의해서 1965년 10월 29일 ’비룡작전‘이 계획되었다. 이 작전은 한미일 공동작전을 상정한 대 북한 전쟁연습으로 실행되었다. 

1964년 8월 4일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은 1964년 1월 18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조속히 타결하라고 한국측에 주문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을 베트남 전쟁에 활용하기 위해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필요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케네디에 이어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 번디 국무부 차관 등이 연달아 한국에 방문하며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주문한 사실은 미국의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는 행위였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국의 협력 체계가 필요했다. 1965년 6월 22일 미국의 의도대로 한일협정 기본조약이 도쿄에서 타결되었다. 한일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권은 곧 베트남에 주월야전사령부를 설치하고 연인원 30만 명의 대병력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대한민국군은 5천 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4만 명 이상의 베트남 민중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미군의 고엽제 살포로 인해 참전자들 중 다수가 고엽제 피해자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다. 

한일협정은 일본 국회에서도 졸속으로 처리되었다. 일본의 기시 수상은 1965년 11월 12일 새벽 0시 18분 한일협정 조인을 밀어 붙였다. 일본 사회당 등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의원 후나다 의장이 개회선언 3초 만에 비준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4. 작전계획 5015와 한미일 삼각동맹 

1990년 초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박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작전계획 5027을 입안하며 체제붕괴를 시도했으나, 북한은 고립 속에서도 붕괴되지 않고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강화시켜 왔다. 최근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향상으로 상황이 변화되자 이제 미국은 새로이 작전계획 5015를 도입하고 있다. 이 계획은 한·미·일 삼각동맹에 기반해서 탐지(Detect), 방어(Defense), 교란(Disrupt), 파괴(Destroy)의 4D 계획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설정했다. 

1. 맞춤형 억지전략에 의해 북한 지도부의 참수(斬首)계획을 시도한다. 
2. 작전계획 5029의 목표인 급변사태시 한반도 개입작전을 내포한다. 
3. 북한의 38선 도발시 한·미·일 연합사령부를 운영하며, 전시증원군을 신속하게 침투시켜 섬멸작전에 돌입한다. 

작전계획 5015에 의하면 앞으로 한·미·일 삼각동맹에 의해 일본 자위대의 군홧발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한국군이 지상전을 담당하고, 일본과 미군은 주로 후방지원을 담당하는 취지로 입안된 이 작전계획은 올해 2015년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 때 상정되었다. 그러자 북한은 잠수함탄도미사일(SLBM) 발사시험과 공기부양정을 공개하며 대응한 바 있다.  
 
이 작전계획은 한미 양군이 먼저 북한군의 동태를 감지해서 선제공격을 가하겠다는 것인데, 쌍방이 모두 핵과 미사일을 가진 조건에서는 상호공멸할 위험을 안고 있는 위험천만한 작전이라고 하겠다.

미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배치하려 하고, 일본 자위대로 하여금 신속하게 한반도 작전에 참여할 수 있는 전력을 보강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여기에 한일군사정보공유협정과 한일군수지원협정 체결을 지지함으로써 나아가 중국본토까지 작전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암암리에 계획되어 오던 작전계획 5015는 한일국방차관회의, 한일국방장관회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베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 간의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한·미·일 공조체계를 확인받음으로써 사실상 공식화되었다. 

미일신가이드라인에 의하면 일본은 남한 영토 진입에 한국의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는 규정이 없는 현실에서 언제든지 자위대를 이 땅에 상륙시킬 수 있다. 

또한 황교안 국무총리의 발언대로라면 자위대는 한국의 허락도 없이 북한을 임의대로 참략할 수도 있다. 아베는 이미 의회를 통하여 헌법9조 평화헌법과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하기 위한 법적 수순을 내부적으로 다 거쳤다. 

그러나 외세의존적인 박근혜 정부가 은밀하게 진행해온 작전계획 5015는 자기의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앞으로 꼭 실현시켜야 할 문제이다. 

1965년 박정희가 미국의 지원 하에 한일회담을 성사시켜 베트남 전쟁을 치르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겠다’고 단언했다. 

지금 박근혜를 위시한 신(新)을미5적이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2015년 10월 16일, 오바마와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에 갔을 때 미국 국방부를 제일 먼저 들렀다. 박근혜 정부가 한·미·일 삼각동맹을 성사시켜 작전계획 5015를 실현할 자신감을 갖도록 미국이 손수 배려한 일정일 수도 있다. 이제 박근혜 정부가 미국, 일본과 은밀하게 추진시켜 온 한·미·일 삼각동맹에 의한 작전계획 5015를 어떻게 국민에게 인식시키는가하는 수순만이 남아있다. 

5.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미·일 삼각동맹에 의한 작전계획 5015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입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지금 한일관계에서 과거사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인데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입 허용은 박근혜 정부에게 심대한 장애가 되고 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는 두 가지 꼼수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첫째는 단기적인 안목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본의 성실한 사죄 및 반성과 책임있는 배상을 요구하는 국민여론을 어떻게 무마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36년간 일제가 이 땅에서 저지른 200만명의 학살과 강제연행 840만명, 온갖 생체실험 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일간에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두번째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친일독재를 미화된 국정교과서로 현대사를 가르침으로써 대한민국을 앞으로 친일독재정권으로 영구집권하려는 음모를 추진할 수 있는 점이다. 지금의 청소년 세대가 친일 교과서로 세뇌되어 확고한 친일 독재사관을 가지고 향후 흡수통일을 위해 박근혜 정부가 집권초기 선언한 드레스덴 선언을 실현하는 데 발벗고 나서게 만들지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 이 두 가지 꼼수는 서로 연관된 문제이다.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거세찬 투쟁을 잠재우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독재로 나아갔던 아버지 박정희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다. 

박근혜는 벌써 청와대 공주시절부터 아버지의 유신독재에 깊은 감명을 가지고 새마을 운동과 조국근대화 사업에 앞장서 왔고, 지금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앞세워 세계무대에서 새마을 운동을 홍보, 보급하고 있다. 이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박정희 유신통치는 물론 일본 식민지 침략이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뉴라이트 교과서를 모델로 국정교과서를 만들려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에 입각해서 군위안부 문제가 합리화될 수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아베 역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문제는 이미 50년 전 한일회담에서 해결된 문제라며 어물쩍 넘어가려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앞으로 군위안부 문제와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서 국민들을 기만할 것인가 하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 동북아 정세를 감안할 때 우리민족의 통일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동북아 안보의 어떠한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미·일 삼각동맹에 기초한 전쟁정책에 의해서 대북대결국면으로 나간다면 이는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며 8천만 민족 구성원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친일독재사관으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순화시키려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음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총칼 쿠데타, 딸은 역사쿠데타. 이명박이 4대강을 역류시키더니, 박근혜는 역사를 역류시키려고 한다. 

박근혜 정권은 신유신독재로 외세의존적 반통일정책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자주와 평화 그리고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우리 민족의 소원인 통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강은 일시적으로 역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오늘 저 광화문거리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도 몸은 비록 누워있을지언정 그의 염원은 수많은 대중의 마음 속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만들어나가는 역사를 가로막을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이 게시물은 편집실님에 의해 2015-12-17 04:56:47 기타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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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빠진 것은 왜놈 통치 40년 동안 500만이 희생된 것과 말씀데로 1945.9.8일 날 침략으로 들어온 미제는 1950.6.24일까지 약 5년 동안 6.25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고 백선엽이가 말한 6.25가 아니고 6.23이라고 한것을 보면 이 5년 동안 5200번의 침략으로 북을 향하여 주야로 괴롭힌 것등을 조작하면서 6.25를 만들어 쫄딱망한 왜놈들을 경제에서 발목과 무릎, 허리까지 펴게해줘 부자가 되였고 유엔 16개국의 경제가 돌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왜놈 군대는 크게 6.25에 참전을 했다.

학생님의 댓글

학생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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