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3-02-13 00:00
미주이민사와 민족운동 발자취
 글쓴이 : yslee
조회 : 5,170  
한인들이 미주땅에 이민 온지 오늘 1월13일로서 꼭 1백년을 맞이한다. 미주이민 1백년과 자주, 민주, 통일운동과는 어떤 연관이 있으며 민족운동의 맥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청년운동가 하용진씨(통일맞이나성포럼 사무국장)가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한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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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전 독립 이후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이민 특히 정치이민의 피난처였다. 동서를 막론하고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한 정치망명객들이 미국에 와서 미국 헌법 중에서 자유를 보호하는 조문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런 관계로 미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은 각양각색의 정견과 정치행동일 것이다.

초기 한국이민들 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항의하면서 쓰러져가는 한국 말엽의 비통 속에서 뛰쳐나와 미국으로 이민 온 분들이 상당수가 된다. 특히 1876년 한일 수호조약 이후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이긴 후 미국과의 비밀조약인 카쓰라 - 태프트(Taft - Katsura) 조약을 맺고 적극적으로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후부터 이민이 증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이민의 수는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에 비하여 매우 적은 편이었다.

한국인의 미국(사실은 하와이였다) 이민은 1903년에 시작하여 2년 후인 1905년까지 65척의 선박으로 7,226명에 달했었다.* 그 중 637명이 여자였다. 1905년에 이민이 중단된 이유는 그해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인의 외국 출입이 정지당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도착한 7,226명 중에서 1,999명이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에 도착했는데 그 중에서 여자는 12명에 불과했었다.

(*미주 최초의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당시 조선 봉건 통치자들과 하와이 미국인 농장주들 사이에 임금노예로 계약된 101명의 조선인들을 실은 배가 제물포를 떠나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 이민자 그룹은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왔는데 이 시기는 한일합방과 미국의 동양인제외법 Oriental Exclusion Aot이 서명된 시기이다. 이 시기 천 건에 달하는 "사진신부"를 통해 많은 여성들이 이민 오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미국 또는 하와이 이민은 내부적 혹은 자의적 이라기 보다 외부적 조건*의 작용이 더 강했다. 지금까지는 미국에 이민한 이유가 살기 좋은 미국에 이민했다느니, 돈벌기 위한 모험이라느니, 외유의 목적이라느니 하고 이민한 사람들의 자의적 행동에 의한 것으로 말해왔으나 사실은 반대였다. (* 당시 하와이 수수 농장은 1882년 중국노동자들의 이민금지법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겪고 있었고 알렌과 존스-당시 인천영동교회목사-를 비롯한 국내의 미국 선교사들이 미국내 인신매매상들과 결탁하여 기아에 허덕이던 조선 민중을 하와이로 가도록 강하게 부추키고 선동하였다.)
그 때까지 수많은 중국인 이민이 하와이로 모여드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 1882년 하와이 총독정부는 중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했다. 한국인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 하와이로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민 중 상당수가 미국 본토서 요구된 철도 공사에 종사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다시 미국 본토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인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다음에는 철도공사장에서 입으로 옮길 수 없는 무자비한 노동의 수난을 당하였다. (이상 신성려 님의 하와이 이민약사 중에서)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부터 시작된 미주이민1세기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민족해방사이며 독재에 항거하고 분단된 조국을 잇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통일운동사이다.( 일제하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크게 1. 미국에 위임통치를 요청하던 이승만계의 친미외교론 및 독립청원론 2. 문명화와 자아수양을 부르짖던 안창호계의 실력양성론 및 민족개조론 3. 스티븐슨 저격 등 전명운, 이재명과 대동보국회의 테러활동 4. 군사학교설립과 군사훈련을 준비했던 박용만과 독립단의 항일무장투쟁 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처음 발 디딘 미국 땅에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자신의 저임금을 쪼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거나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했다.(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1년 9개월 동안 7천 여명에 불과했던 재미동포들이 20만 달러 이상의 독립성금을 모았고 -당시 이들의 한달 수입이 30달러였고 생활비가 20달러 가량 되었다- 이렇게 피땀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부된 자금의 액수는 총 280만불에 달하는데 이는 현재의 가치로 비교했을 때 몇 백 억불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편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군대에 들어가 비밀문서를 해독하거나 특수교육을 받고 일본 점령지에서 첩보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해서 미주동포사회는 이민자의 힘든 삶을 사는 속에서도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한 운동들을 면면히 이어 왔다.


[2]



60년대를 넘어서면서 미소간의 군사적 대치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미국의 산업구조는 군수산업과 우주항공 산업 등의 첨단과학사업에 주력케 된다.

이런 가운데 기존의 제조업 부분의 생산과 소비를 담당할 계층의 필요성에 의해 미국은 1965년 이민법의 개정을 통해 이민의 문을 대폭 개방하게 된다.

초기 하와이 이민이후 폐쇄되었던 이민은 50~60년대 전쟁고아와 국제결혼여성, 유학생과 종교재단에 의해 소수의 이민자가 유입되던 상황에서 70년대는 제2기 이민이라 불리는 본격적 이민의 새장이 열린 것이다.

한편 국내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부는 자신들의 영구집권을 위해 반공의 기치 하에 또다시 유신쿠데타를 자행한다.

이 무렵 전태일 열사의 항거에 고무되어 조국근대화의 미명아래 숨죽이던 노동자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학생들은 현 사회의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고 반유신, 반독재의 대열로 서서히 나서기 시작한다.

유신에 반대하여 애국민주세력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독재정권은 통혁당(68년), 인혁당(재) 사건을 비롯한 용공조작으로 애국민주화세력을 말살하고 긴급조치를 발동해 말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암흑세상으로 전 민중을 몰아 넣었다.



[3]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제거된 정치인과 유신의 횡포를 못 견딘 양심적 지식인들이 대거 확대된 이민의 길을 걸어 미주로 이동해 오게 된다.

국내가 유신에 의해 철저히 침묵을 강요받고 있을 때 이곳 미주에서는 이들의 주도로 반유신, 반독재투쟁을 외치며 조직화된다. 이는 일제하 국내의 억압상황을 피해 만주, 미주에서 독립운동의 근거를 마련한 것 같이 미주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숭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시 미주운동을 이끈 조직으로 뉴욕중심의 동부는 73년경 임창영, 노광욱, 지창보, 고원이 중심이 되어 재미민주한인협회가 결성되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 76년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으로 발전하면서 통일운동에도 주력하게 된다.

서정균의 해외한민보가 미주민련의 대변지 역할을 하였고 자매조직인 이보배가 이끄는 여성동우회가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LA중심의 미서부는 김성락, 차상달, 홍동근이 중심이 되어 73년 8월에는 조국자유수호동지회가, 74년에는 남가주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어 조국의 민주회복과 유신철폐운동을 근간으로 김대중지지와 양심수 석방등 국내정치지원운동을 전개해 갔으며 70년대 말에는 노의선, 김성락이 주도하여 조국통일촉진회가 만들어져 이북알기사업을 전개하면서 통일운동에 발길을 딛는다.

이외 홍동근, 최진환, 홍윤호가 중심된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와 예정웅, 문성철, 김현경의 청년그룹이 결성한 4.19선양회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79년 10월에는 한인노동자 권익옹호를 위해 김용, 육재규, 조원제 등이 재미한인노동연맹을 결성하여 미주류 노동단체와의 연대와 국내민주화 지원활동을 전개해 나가기도 했다.

(* 71년 대통령선거 이후 해외도피 생활을 하던 김대중은 유신이 일어나자 해외에서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가는데 73년 7월 김재준 등 김대중을 지지하는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주본부를 구성한다. 한민통 미주본부는 김대중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다하였으나 친미, 반공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당시 임창영으로 대표되는 진보세력과의 대립적 양상을 띄고 있었다. 77년 6월 미조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두 세력이 모임를 갖게 되었으나 보수세력의 일방적 회의운영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양측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 이후 진보계는 앞서 말한 미주민련을, 보수계는 한국민주화운동연합(이는 곧 민주주의국민연합 북미주본부로 개칭)을 구성하게 된다.

이후 보수계는 별 활동 없이 지내다 82년 김대중의 제2차 미국체류기에 다시 활력을 되찾으며 82년 8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연합을 결성, 개량주의적 운동노선을 지속하다 이후 김대중을 따라 조직안의 명망가들이 잇따라 국내로 귀국하고 87년 대통령선거의 휴유증으로 퇴조의 기색을 보이다가 결국 미주운동에서 완전 퇴장하게 된다.

* 73년 한민통 미주본부가 결성된 후 김대중은 일본으로가 한민통 일본지부를 결성하던 중 박정희에 의해 납치 당한다. 이후 일본 한민통은 재일동포들의 민족민주운동을 꾸준히 이끌어 오면서 77년 8월에는 북미주-일본-유럽을 연결하는 해외운동연합체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해외한민련)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미주민련이 해외한민련에 가담했으나 87년 해체되었고 일본의 한민통은 80년대 말에 한국민주통일운동연합으로 개칭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오면서 줄곧 남한정부로부터 반국가단체의 누명 하에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결성 당사자인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결국 그 누명은 벗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70년대의 미주운동은 김대중이란 명망적 정치인의 지지와 유신독재에 대응한 국내민주화운동 지원으로 특징 지워지고 운동의 주체들도 소수의 명망 지식인, 종교인의 선각자적 투쟁에 머무르고 조직운동 경험의 미비로 비대중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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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철권 통치의 유신도 부마항쟁을 기점으로 그 파열을 맞게 된다.
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려 퍼진 한 방의 총소리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그것은 자유이고 희망이었다. 서울의 봄,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을 열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따사로운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국의 민주화와 새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자랑스러운 이민의 삶을 살고자 했던 동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유신독재를 피해 그리운 강산을 눈물로 떠나 미주로 이주해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감수해야했던 수많은 동포들에게 있어 그 감회는 더욱 가슴 뜨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기가 무르익기도 전 일단의 군인무리들이 정권탈취를 위한 음모들을 하나씩 진행시키고 있었다. 12/12쿠테타로 집권의 기반을 마련한 그들은 마침내 남도 광주에서 피의 살육을 자행하면서 이땅의 민주주의는 한낮 꿈으로 남아야했다.

5.18광주항쟁.
야수적 만행에 맞서 광주의 민중들은 의연하게 싸워 나갔고 장열한 죽음은 자주, 민주, 통일의 역사에 깊이 아로새겨진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운명을 규정한 일대변혁이었으며 이곳 미주에서도 운동사에 획을 긋는 계기가 된다.

분노는 산과 물을 건너 이곳 미주에서도 연일 광주의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영사관 앞에서 있었다. 오히려 국내의 모든 언론이 통제된 반면 미주의 동포들은 외신을 통해 광주의 진실에 대해 접근할 수 있으므로 해서 전두환 일파의 야심을 꿰뚫고 반 전두환 투쟁에 즉각 나설 수 있었다.

나성의 경우 그 투쟁의 중심에 김상돈을 대표로 국영길, 노길남, 김운하, 차상달을 중심으로한 한국민주화운동협의회(33개단체 가담)가 조직되어 전두환 일파를 규탄하는 집회와 대책회의를 통해 그들의 만행을 동포사회와 미국내 진보세력에게 알려 나갔다. 이후 한국민주화운동협의회가 "논단"으로 이어지고 김운하, 배강웅, 국영길, 예정웅, 노길남 등이 한민련 미주지부의 성원으로 활동하며 미주운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80년대초 광주항쟁 지도부의 일인이었던 윤한봉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미주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의식 있는 청년들이 윤한봉을 중심으로 뭉쳐 미전국적 청년조직인 재미한국청년연합(재미한청)이 결성되어 활동하게 된다

당시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의식 있는 청년들이 윤한봉을 중심으로 뭉쳐 미전국적 청년조직인 재미한국청년연합(재미한청)이 결성하고 87년 8월에는 재미한청을 지원하고 함께 활동해오던 중장년층의 활동가들이 한겨레운동 미주연합(한겨레)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로서 70년대까지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국내 민주화 지원 역량이란 인식의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미주운동이 80년대 광주항쟁 투쟁을 깃점으로 양적, 질적 변화를 가져와 단순한 국내운동 지원역량으로서가 아니라 동포대중사회 자체의 변화발전에 기반을 두고 동포대중들을 대상으로 실천활동을 전개하는 대중운동체로 거듭난다.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의 당당한 일 주체로써 해외(미주)운동의 위상을 정립하고 본격적으로 대중활동을 전개해 나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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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등장으로 미소간 무한 군비경쟁의 시대를 열고 냉전의 첨예한 대립은 결국 한반도의 대치상태를 더욱 격화 시켜간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해외의 동포들은 남북의 화해와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들을 끊이지 않았다.

미주의 선우학원과 유럽의 이영빈등 기독교학자들이 주도가 되어 1981년 11월말 비엔나에서 남. 북. 해외 기독자회의가 개최되어 분단 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남과 북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는 다음의 헬싱키대회에 까지 이어지면서 미주통일운동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직선제개헌의 쟁취로 불타기 시작한 6월민주화대투쟁의 열기가 이곳 미주에서도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성명과 집회가 연일 있었고 한때 최루탄추방대회에서는 아드모어공원을 발디딜 틈 없이 가득 매운 가운데 코리아타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6월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의 열망으로 국내와 마찬가지로 이곳 미주에서도 조직활동의 본격화가 시작된다. 그 대표적 단체로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의 결성을 들 수 있다.

비교적 북한방문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미주의 이산가족들은 자신의 혈육을 찾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들 가운데 몇 분의 학자들이 북한 방문기 <분단을 뛰어넘어>를 저술하게 된다. 이는 국내에 이북바로알기운동을 촉발케 하면서 그 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통일문제를 전면화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앞서 기독자회의가 계기가 되고 <분단을 뛰어넘어>가 고무 추동이 되어 87년 6월 양은식, 선우학원, 홍동근, 전순태, 서정균, 김현환, 김동수등이 중심이 되어 통협이 창단 된다. 통협은 이산가족찾기를 핵심사업으로 전개하여 이를 통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북을 방문하게 되고 미주통일운동의 역량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후 90년대초 미주범민련결성을 주도하는 등 미주통일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87년에는 LA에서 민주화운동의 물적토대구축과 중소상인의 조직을 위해 한민족연구회가 노길남, 유상준, 손세영 등이 중심 되어 결성되었다.
한민족연구회는 이후 민족상과 민족장학상을 제정 미주 운동의 활동을 고무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외 홍동근, 김현환, 홍근수, 강문홍, 강위조등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종교적 입장에서 통일에 접근하고자 했던 통일신학동지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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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10월 대부분 1.5세들로서 지배문화에 대항해 생산적, 민중문화를 퇴폐, 외래문화에 맞서 1.5세로서 자아를 확립하고 우리민족문화를 찾고 계승하기 위한 취지를 내걸고 박영준, 조준일, 육대성 등이 중심이 되어 민중문화연구소(민문연)가 창립된다.

민문연은 매년 봄, 가을로 범대중적 문화제를 개최하여 동포사회에 진보운동의 입지를 확대하였고 각 한인학생회를 통해 우리문화를 보급하고 민문연의 취지를 전파해 나갔다. 또한 6월 항쟁 당시 나성지역에서 대규모 민주화투쟁을 선도해 갔으며 이후 상항의 한인청년문화원(청문원), 뉴욕의 우리문화찾기회 등 미주 타 지역의 문화운동조직이 결성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민문연은 이후 민청, 우리문화공동체로 변화,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나성지역 청년조직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의의를 갖는다.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고조되어가던 민중의 민주화열기는 마침내 조국통일의 열망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88년 들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던 한 후보가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면서 4.19이후 암흑의 시대 속에서 신새벽 뒷골목에서나 외쳐야했던 조국통일이 급기야 전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고 전국 각 대학의지지 속에 6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수용하면서 88년은 마침내 통일운동의 새 원년으로 기록되게 된다.

그러나 6월의 학생회담은 노태우 정권의 필사적 저지로 말미암아 피 튀기는 공방 끝에 결국 무산되고 8월 15일 재차 판문점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결의한다.

88년 7월 어느 날 조국통일을 외치며 한 학우가 교내옥상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조성만-.

조국의 통일. 목숨 받쳐 싸워야할, 민족의 운명이 걸렸고 모든 모순의 근본이 깔렸고 그래서 조국통일 없이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통일만이 민족이 살길임을 알게 했다.

이제 암흑 속에 억눌렀던 조국통일의 함성은 전국 각지 각 단체의 지지를 받게 되고 이곳 미주에서도 지지성원과 더불어 통일운동의 불길이 당겨지기 시작한다.

이민자의 삶을 살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하고 그래서 조국, 민족이란 개념에 빠져 가끔은 허우적대는 그래서 건강하고 항상 주인 된 삶을 추구하던 일단의 청춘들이 "조국통일과 나"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88년 8월 10일 8.15남북학생회담을 앞두고 민족대단결, 자주, 평화통일의 원칙천명과 해외동포의 단결로 조국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내용의 미주청년학생조국통일투쟁선언문을 발표하고 육대성, 조준일, 박찬일, 박진아, 하용진, 이은주, 남관우 등이 미주청년조국통일협의회(청협) 발족을 선언하며 청년통일운동조직의 깃발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청협의 두 회원 육대성, 박진아가 8.15학생회담에 해외대표로 방북을 하게 된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청년학생들이 만날 그 역사적 현장에 미주의 두 대표가 참석하게 되면서 해외동포도 조국통일의 당당한 일 주체임을 입증하였다.

분단으로 인한 고통이 해외동포에게 예외일수 없었고 조국통일이 전 겨레의 삶을 규정하는 속에서 남, 북, 해외의 7천만 모두의 단결과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해외동포는 당연히 통일운동의 한 축을 지탱하는 주체임이 분명한 것이다.

청협의 두 대표는 북의 청년학생들로부터 연일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백두산으로부터의 통일대행진을 따라 8월 15일 마침내 남북학생회담의 장소인 판문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햇살무리를 밟고 나타나야할 남녁의 학우들은 그 시각 신촌의 아스팔트를 온몸으로 사슬을 만들며 한 보 한 보 전진을 위한 피나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위대한 싸움의 결과 87년의 민주화대투쟁의 여파와 함께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열어제치게 된다. 청협의 두 대표가 북부조국을 방문하고 조국의 청년학생들이 반통일세력들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즈음 민문연의 마당에서는 민문연, 청협 회원들이 회담성사를 위한 무기한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보름간의 기간동안 상항 지역의 동지들이 합류하는 등 각 지역 여러 단체와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격려를 보내주었다.

특히 보름간의 단식투쟁동안 동포사회에서 처음으로 이북바로알기운동이 진행되었는데 하루 두 차례 이북영화상영과 통일강연회를 개최하여 연일 백 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북부조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일대 전기를 마련케 했으며 이로서 미주통일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모두는 그렇게 승리한 것이다. 판문점에서, 최루가스 가득한 신촌거리에서, 그리고 쓰린 배를 움켜지고 있던 그 곳에서...

청협 결성 직후 그 산하 조직으로 남가주의 민주청년학생회(민청)가 10월1일, 북가주의 애국청년학생회(애청)가 11월 20일 건설되면서 미주에서 유일한 청년통일운동단체가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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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타오르기 시작한 통일에의 불길은 89년 들어 더 한층 조직적이고 전국적 경향을 띄며 확산되어 나간다.

1월 20일 6월항쟁 이후 대중적 기반을 토대로 전민련이 발족하고 이어 3월 1일 전농, 5월28일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전 계층 전 국민적 반독재민주화, 자주, 통일에의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노태우 정권은 외부적으로 소위 북방정책의 기조를 설파하고 내적으로는 보수대연합을 추진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통일운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더우기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결정통보로 7월 대회전을 예고하는 가운데 통일, 반통일의 한판싸움이 하루하루 긴장 속에 다가오고 있었다.

반제연대성, 평화와 친선을 구호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170여 개국 3만 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7월1~8일 까지 열렸다.

미주에서는 청협의 주도하에 시애틀의 통일형제회, 뉴욕의 기독청년학생회(기청), 조국사랑시카코등 미전역의 8개 단체가 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준비미주통일청년협의회(축준협)을 LA에서 결성한다.

축준협은 축전동참을 통해 미주청년학생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통일운동을 대중화, 활성화시킨다는 원칙으로 미주대표단을 구성하고 홍보지 <축준협>발간, 세미나등 각종 이북바로알기 사업 등을 설정하고 각 자의 지역에서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갔다.

7월에는 LA, 시애틀, 상항, 뉴욕, 와싱턴 DC, 시카코, 토론토의 전 지역에서 24명의 미주대표단을 확정하고 LA에서 통일한마당과 통일길놀이를 하고 아드모아공원에서 대표단 출정식 및 범동포통일촉진대회를 개최했다.
피부색, 종교,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반제연대, 평화, 친선을 부르짖었던 그곳에서 재일, 재독 등 해외의 동포청년들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통해 해외연대가 시작되었고 전대협대표 임수경이 등장하면서 분단 후 처음으로 남. 북. 해외의 청년학생이 어우러지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다.

남. 북. 해외의 통일열기가 하나로 결합되고 전세계에 한반도의 통일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외침으로 보여준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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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들어 이 세기 안에 반드시 조국통일을 이루어 내야할 사명을 통감하고 통일, 민주화세력은 투쟁의 강도를 높여 간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와 보수제도야당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보수야합 민자당을 탄생시킨다.

이제 싸움은 쓰러져 가는 소수 군부의 무리만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의 무리 전체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의 수레를 끄는 자들과 그것을 막고 선 자들의 싸움이...

이에 통일운동권도 하나의 힘으로 뭉치기 시작한다.
전민련이 8월 15일 범민족대회를 가질 것을 제안하고 남북해외가 개최에 전격 합의하였다. 범민족대회 그야말로 분단이후 남, 북, 해외의 전 민중이 만난다는 그 가슴 벅참, 하나가 되고 만다는 7천만의 의지로 전 국토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허나 노태우 정권의 양동술에 말려 남과 북은 결코 만날 수 없었다.

판문점의 대회장에는 북과 해외대표만이 참가하였지만 백두의 흙과 한라의 흙이 합장되었다. 남과 북이 만나야한다는 정당성을 설파하고 통일에의 의지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미주에서는 통협과 한민족연구회, 한겨레연합이 중심이 되어 미주대표를 구성하여 참석하였다. 나성에서는 범민족대회를 지지하는 통일한마당이 민문연과 청협의 주최로 개최되었다.

비록 자리는 다함께 하지 못했지만 범민족대회의 의의를 공감하면서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이어져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민족대단결의 기운과 범민족대회의 성과를 안고 1990년 11월 19일 베를린에서 남, 북, 해외의 대표가 모여 전민족적 민간통일운동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결성에 합의하고 이에 따라 미주에서는 통협, 청협, 한민족연구회를 비롯한 수 많은 가맹단체와 발기인으로 1990년 12월 3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미주본부(의장:양은식)가 결성된다. (* 범민련 북미주본부는 이후 범민련 카나다 본부가 독립하면서 범민련 재미본부로 명칭이 변경된다. 또한 범민련 미주본부는 나성에서 결성된 것과 별도로 또 하나의 본부가 재미한청, 한겨레연합이 중심이 되어 미 동부에서 11월 21일 결성(의장: 유태영)하였다. 이후 미 동부의 본부가 3여년 뒤 해체되고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미주범민련은 두 개의 본부로 대립되어 활동했었다.) 이로서 미주통일운동은 민족대단결의 기치 속에서 남, 북, 해외운동 3자연대의 막을 올리고 통일장정의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해외 민간 통일연대체인 범민련의 결성은 조국통일의 정당성을 민족사의 전면에 내세우고 각계각층을 통일운동전선에 집중하게끔 했다. 특히 범민련의 결성과정과 이후 남의 범민련 탄압으로 해외본부의 역할과 활동이 부각되면서 통일운동의 주체로서 해외운동의 위상을 다시금 입증하게 되었다.


[9]



91년 2월 청협의 주도하에 나성의 민문연, 상항의 청문원 회원 40여명이 나성 인근지역에서 "조국통일의 일보전진을 위하여"란 슬로건아래 <애국청년들을 위한 수련회>를 개최하여 범민련운동과 미주운동에 있어서 청년, 학생들의 역할들을 토론하고 보다 굳건한 연대를 결속하였다.

범민련의 결성과 통일운동의 확산은 남북해외 청년운동의 연대를 본격화하기도 하였던 바 91년 4월 제5기 전대협총회에서 "통일방안합의와 조국의 평화,민족대단결을 위한 남,북,해외 청년학생 통일대축전"을 조선학생위원회와 해외청년학생대표조직 앞으로 제안하고 그 회담 실무에 재일한국청년동맹(재일한청)과 함께 해외대표로서 초청을 받고 7월 청협은 베를린에 대표(박진아)를 파견하였다.

두 차례의 실무회담에서 청년학생통일대축전성사를 결의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 북, 해외청년학생 공동성명서를 작성 통일 3대원칙 확인과 한반도비핵지대화, 합리적통일방도, 자주적교류, 연대강화 등을 결의한다.

이후 합의에 따라 8월 15일 범민족대회와 1차 통일대축전 해외동포청년학생들의 집결지인 동경에 미주청년들이 참여하여 재일한청, 재일본조선청년동맹(조청)등 재일동포청년들과 연대를 맺는다. 한편 남한 국토종단행진과 통일대축전에도 해외청년학생대표로 청협대표(이은주)를 파견하여 전대협에 해외청년들의 연대의 뜻을 전하고 남측 통일대축전투쟁의 열기를 고조 시켰다. 10월에는 유엔총회기간동안 한반도의 평화와 미국의 대한내정간섭을 항의, 저지하기 위해 전대협대표(이두완)가 방미. 유엔, 필라델피아 등지를 순회하며 단식투쟁을 비롯한 항의투쟁을 미주청년들과 함께 전개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민청의 경우 90년대부터 심혈을 기울인 학내사업을 통해 UCLA내 학습조직인 새길을 내오면서 1.5세, 2세 학생들이 동포사회운동에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91년 3월에는 상항에서 버클리대학의 한국학위원회와 청문원 등의 진보단체들이 미국에서 분단 후 첫 합법적 행사로서 남(박형규목사, 이영희교수, 정현백교수)과 북(박영수 조평통 부위원장, 김경남 통일문제 연구원)의 학자들을 초청, <한반도 평화통일 위한 심포지움>을 개최하여 남북, 조미교류에 큰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강경대학생 치사정국으로 나성에서는 민청과 민문연이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 현 사태의 근본적 원인을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가 빗어낸- 결과임을 밝히고 노태우정권 퇴진운동을 전개 근 한달이 넘는 기간동안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내현황과 더불어 대중투쟁에 총력을 기울여 2차례의 애국동포결의 대회(아드모어 공원)와 성명서 배포 등의 선전, 홍보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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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소비에트해체후 세계사의 질서재편 속에 유일 강국의 전략을 수립한 미제는 걸프전의 여파를 업고 자신의 전략에 방해되는 "반미국가 길들이기"를 시도하면서 91년부터 제기하던 북한 핵소동으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돌입한다.

그러나 92년은 미주 청년운동에게 또 다른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해가 된다.

미국사회의 구조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낳은 4·29사태는 그간 활동의 주 내용을 통일과 남한의 민주화에 두었던 청년 단체들에게 자기 운동의 정체성을 묻는 계기가 되었다. 민청이나 민중문화 연구소 모두가 [자주적인 동포사회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중심으로 내 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포대중들과의 밀접한 유대를 위한 활동들은 실천적으로 준비되지 못했다는 자기 반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4.29사태후 범민련을 중심으로 나성운동권이 공동으로 대책위를 꾸려 동포사회 봉사활동에 나서기도 했으며 특히 청협의 경우는 각 시위장이나 학내에서 4.29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고 부시의 나성 방문시 대동포 항의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미주 운동은 청년단체들의 잠재적인 정체성 문제제기와 함께 여러 부분에서 폭 넓은 성장을 시작한다.

4월 이민노동자의 권익향상과 연대, 노동조건의 개선을 내걸고 홍순형, 박영준, 성낙영 등의 주도로 남가주 한인 노동상담소(이하 노동상담소)가 창립되어 미주 진보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가게 된다.

이후 노동상담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동법상담, 식당 및 마켓 노동자 정의실현운동, 이민노동자조합 결성, 여름활동가훈련, 국내노동운동 및 미국내 노동, 인권단체 등과의 연대활동을 지속시켜오면서 나성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사회운동단체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리고 92년 민중문화연구소는 문동호, 정준규, 박진만, 민규성, 전병학, 최경호 등이 "건강한 이민문화를 찾는 젊은이들의 모임 우리문화공동체"(이하 공동체)로 단체명칭을 변경하고 대중성을 지향한 문화활동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이후 우리문화공동체는 민문연 시기에 조직되어진 남가주지역 학내 풍물패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지속하면서 매년 정기문화제와 "지신밟기"행사들을 통해 동포사회에 우리문화를 알리고 2세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활동들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문화운동의 일대 성장을 가져오기도 했다.
UCLA의 문화패 한울림, UC 산타바바라의 한얼, (UC 샌디에고의 두레)가 대표적인 학내 문화모임 으로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 활동하고 있다.

92년은 청년통일운동에 있어서 의미 있는 한 해로서 미주 전국적 조직체에 대한 회의들이 있기도 했다.

5월 "92청년학생통일축전"의 성사와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결성을 위한 회의"가 베를린에서 열렸고 청협(하용진)이 재일 한청, 조청과 함께 해외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8월15일 범청학련을 결성할 것을 최종합의하고 7월 청협은 나성, 상항, 시카코, 뉴욕, 시애틀, 보스톤 등지의 활동가(총 24명)를 초청하여 <범청학련 결성을 위한 미주준비회의>를 나성에서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주범청학련 결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서 (범청학련에 대한 이해부족, 지역운동 활성화의 과제 앞에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전국조직의 부담성) 결국 범청학련 미주본부가 결성되지 못하고 청협의 단체차원에서 미주지역의 범청학련 사업을 담당하게 된다.

한편 10월경부터 두 달여에 걸쳐 황석영, 성낙영 등이 주도한 뉴욕, 남가주를 잇는 전국조직체구성에 대한 회의가 노동상담소, 공동체, 민청 차원에서 진행되기도 했으나 이 역시 불발도 끝나고 말았다.


[11]



93년. 보수세력내 권력재편에 의해 근 30년에 걸친 군정이 종식되고 김영삼의 "문민정권"이 들어선다. 초기의 개혁적 조치는 진보진영을 당황케 하면서 일시 전선의 분열을 몰고 오기도 했다. 거기다 결성이후 줄곧 극심한 탄압을 받아오던 범민련운동의 전술과 (통일운동의)대중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통일운동의 위세가 꺽이면서 미주의 운동조직도 서서히 침체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청협은 1월 범청학련 의장단회의(베를린)와 재일동포청년학생 통일대행진 및 범민족대회(8월, 동경)에 참가하여 해외연대의 강화에 주력한다.

그러나 대중화에 대한 정체와 재생산구조를 확보하지 못한 청협은 4월 상임위에서 해체를 결정한다. (상항 애청이 해체됨으로서 협의체로서의 청협은 94년 초에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청협 차원의 사업, 활동은 이후 민청으로 이관 ,전담하게 된다.)

93년 하반기 미국의 북핵사찰 위협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팀스피리트훈련 반대 운동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오던 민청은 노동상담소, 공동체와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한 회의"(이하 평화회의)를 구성한다. 한때 이 회의를 통해 LA Times의 북한 폭격을 정당화하는 여론조사에 항의해 공동시위를 벌여 LA Times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 평화회의가 주도가 되어 94년 5월 한반도평화대회( Korea Peace Conference)가 나성에서 미 전국의 활동가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어 한반도평화를 위한 캠페인들을 전국적 차원에서 근 1년 동안에 걸쳐 전개해 가기 시작했다.


[12]



94년 김주석의 서거와 조문파동에 의해 김영삼 정권 하에서의 남북관계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을 넘게 되며 이후 문민정부아래서의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은 전례 없이 가혹해져 가고 "북핵사찰" 빌미로 한 백척간두의 위기상황이 한반도를 휩쓸었지만 제네바합의를 통해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 시기부터 미주운동과 국내운동과의 연대, 교류도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해 가는데 민청과 뉴욕의 1.5~2세의 청년들이 Korea Education & Exposure Program(KEEP)을 구성하여 조국방문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95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여름기간 조국을 방문하고 있는 KEEP은 한국의 역사와 진보적 통일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국내 진보단체 방문, 우리문화 배우기, 농촌봉사활동, 그리고 범민족 대회 참가 등 활발한 연대, 교육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KEEP의 창립과 활동은 미주 한인들의 통일운동과 동포사회 권익운동에 있어 1·5세~2세들의 확대 재생산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계기로 평가되어진다.

한편 이 당시 한호석, 정기열, 최관호, 한익수를 비롯한 비롯한 인물들이 한청, 한겨레에서 나와 뉴욕 통련을 비롯해 필라델피아, 워싱턴디시, 시카고 등지를 기반으로 한, 통일운동을 일대 강령으로 하는 협의체(동포회의)를 거쳐 98년에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94년 12월에는 뉴욕 통련과 범민련 재미본부 사이 전국조직체에 대한 논의가 한때 진행되기도 했고 뉴욕 통련 주최의 통일심포지움이 뉴욕에서 개최, 미 서부지역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미 동-서부 교류와 연대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13]



통일원년으로 설정한 분단반세기, 95년에 들어서 민청은 재일한청(김양국 학생위 위원장)과 조청(백일수 정치부장, 허영호 조선대학 학생회장)의 대표들을 초청한 가운데 <해외청년학생평화통일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이 심포지움은 미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해외의 청년학생들이 공식적 만남을 가진 것으로 해외청년학생들의 역할을 공유하는 속에서 연대를 폭넓게 하고 교류를 본격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재일동포들의 통일운동과 삶은 미주청년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기도 했다.

95년은 우리민족에게 있어 또 하나의 시련이기도 했다. 여름 북은 최악의 홍수를 겪으며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국제사회를 비롯 각 지역과 단체들이 북녘동포돕기 캠페인을 전개해 간다.
나성의 경우 노동상담소, 공동체, 민청 등이 " 북녘어린이돕기" 캠페인을 전개해 2~3년에 걸쳐 모금활동 등의 대중실천들을 하게 된다.

한편 90년대 중반 미 경제가 침체를 거듭하고 실업률이 증가하게 되자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보수세력들은 그 탓을 이민자들에게 돌리고 불법체류자를 비롯한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법안(Affirmative Action, 불체자 의료, 교육 금지, 영주권자 월페어 삭감 등)들이 연이어 상정되기 시작한다.

이에 나성에서는 노동상담소를 중심으로 미국의 진보적 단체와의 연대를 다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들을 전개해 나가기도 했다.

이 시련의 과정에서 미주의 동포들은 이전 공화당 일색의 지지를 뒤엎고 민주당으로 선회하는 정치적 대변화를 가져오고 시민권신청을 비롯 미주류사회와 동포사회의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는 의식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14]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전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악하고 연대사건을 비롯 학생, 통일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하던 김영삼정권이 IMF의 국난을 뒤집어쓴 채 물러가고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야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98년 오랜 정치적 탄압을 겪어왔던 김대중이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통일운동을 비롯한 진보운동은 일말의 기대를 안고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준비하게 된다.

민족민주운동전선의 재편과 분할 속에 범민련운동의 대중성을 비판하며 출범했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이 그간의 대중추수적 활동을 자아비판하며 조직지도부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하고 그런 가운데 침체를 거듭하던 범민련이 조국통일운동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면서 새로운 차원에서 통일운동이 전선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를 마련하며 제 2의 통일운동 전성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그간의 정체적 상태에서 미주운동조직도 수많은 시련의 시기를 거친다.
출범초기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었던 범민련 재미본부의 경우 축소를 거듭하며 연명을 유지해 가는 상태로 전락했고 미주청년문화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가장 활발히 문화운동을 펼쳐왔던 민중문화연구소의 후신, 우리문화공동체가 해체되었다.

그 외 80년대말부터 상공인조직으로 줄곧 세를 확보하며 활동을 해왔던 한민족연구회도 거의 활동중단상태에 머물렀고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 미주통일운동을 이끌었던 통협도 재미동포전국연합의 결성에 맞추어 발전적 해체의 길을 가게 된다.

90년대 중반 상항 애청의 해체로 홀로 청년통일운동의 맥을 이어오던 민청도 1.5세, 2세 중심의 사업방향이 난관에 부딪치고 재생산구조확보의 실패로 정체상태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외 90년대 중반을 거치며 뉴욕의 기청, 우리문화찾기회 해체를 비롯해 각 지역의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이 해체되고 활동의 축소가 거듭되어 가는 속에서 그나마 뉴욕, 워싱턴디시(우리문화나눔터가 이 시기에 조직)의 동부 일부와 서부의 나성지역만이 미주운동의 불씨를 남겨놓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2000년에 다시금 불꽃을 일으키며 맹렬히 타오르게 된다.



[15]



미주의 조국통일 운동단체들은 여러 사건과 상황에 발맞추어 자신들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동안 여러 통일운동 단체들이 정부에 요구하던 민간차원의 교류확대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른바 "햇볕정책"이 시작되고 한국뿐만 아니라 미주에서도 민간차원의 교류의 폭이 확대되었다. 경제·문화부문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발한 남·북 만남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97년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이하 동포연합 중심인물- 함성국(회장), 현준기, 윤길상, 유태영, 김현환, 김봉호 등 )은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미주동포사회에서 대북교류의 중심적인 단체로 자리잡았다. 동포연합은 미주 동, 중, 서부로 분화하여 이산가족찾기사업을 비롯한 대북교류활동과 이북바로알기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간다. 조직화에 있어 나성의 경우 80년대를 걸쳐 범민련의 활동에까지 미주통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통협이 해체되고 그 일원들의 대다수가 재미동포서부연합(회장: 현준기)으로 옮겨간다.

또한 1998년 1월 1일 워싱턴디씨에서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연합 중심인물- 이행우(의장), 한호석, 최관호, 김정주, 한익수, 이재수 등)이 건설되어 미주통일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며 국내통일운동(전국연합)과의 강고한 연대를 구축하고, 조직내 통일학연구소(소장: 한호석)를 통해 미주통일운동의 이론화작업에 주력하고,민족통일학교(교장: 송학삼)를 설립, 통일운동 일꾼 양성과 통일운동의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97년 국민승리21의 후원을 시작으로 진보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창당한 민주노동당을 지원하는 민주노동당미주후원회(중심인물- 공봉국(회장), 김윤경, 정건이, 김일선, 백민 등)가 나성에서 결성되었다. 99년에는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한반도 통일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일간 인터넷 신문 민족통신(중심인물-노길남(대표), 이용식, 백승배, 장소암, 손세영,김영희, 최지윤, 김지영 등)이 설립되어 국내와 미주운동의 정보교류를 통한 연대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16]



2000년 6월 15일 . 분단 반세기의 대결을 접고 남북의 정상이 평양에서 만났고 우리민족의 힘으로 통일의 방도를 찾고 통일을 달성하자는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다.

경천동지. 그것은 반세기 오욕과 굴종을 뒤집는 대반전이었으며 외세에 의해 고통을 감내해 왔던 우리민족에게 21세기가 주는 거대한 희망이었다. 그것은 반세기를 지탱해온 냉전의 벽을 최후로 무너뜨리며 세계의 양심에게 보내는 한민족평화의 메시지였다.

6.15선언의 발표 이후 한 민족, 한 핏줄임을 실감하면서 남북간의 교류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전 분야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어 갔다.
특히 각계 각층 민간사이에 있어서의 교류는 가히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활동적이었다.

이산가족 서울, 평양 교차 방문, 6.15 금강산 대토론회, 남북농민, 노동자대회, 8.15민족통일대축전의 대규모 남측대표단 방북 등 그것은 실로 용솟음치는 통일 대하의 거대한 물줄기였으며 온 겨레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 감격이었다.

한편 98년 핵사찰을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위기상태에서 극적인 타결을 통해 관계개선을 모색하던 조-미간에도 6.15선언 이후 조명록 특사와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교차방문이 진행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에의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어 가기 시작했다.

민족화해와 교류가 확대되고 조국통일의 함성이 심장과 국토에 물결치면서 6.15를 사수하고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한반도는 물론 이곳 미주에서도 움틀거리기 시작했다.
국내는 통일운동 제 단체가 뭉친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가 2001년 3월 결성되었고 이 곳 미주에서는 범민련재미본부, 동포연합, 자주연합을 비롯한 통일운동단체들이 새로운 전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17]



6.15선언의 민족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미주에서의 움직임은 이곳 나성에서, 통일맞이 나성포럼의 결성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6.15선언 직후 나성지역에서 청춘을 받쳐 통일(민청), 문화(공동체), 노동(노동상담소) 분야에서 활동해왔던 청년활동가들이 변화된 정세에 적극 대처할 수 있는 조직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깊은 논의에 들어갔다.

2월 9일 조국통일 3대원칙을 기본지침으로 자주적 동포사회건설, 남, 북, 해외간의 교류와 연대확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정착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을 내걸고 6.15선언의 미주지역 실천을 담보하기 위해 송현정, 정준규, 박진원, 홍순형, 하용진, 이용균, 박진만, 김현정 등이 주위의 지지와 격려 속에 통일맞이 나성포럼을 결성하게 된다. (88년 창립 13년 동안 미주청년 통일운동을 담보했던 민청이 나성포럼으로 발전적 해체를 한다.)

미주통일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게 된 나성포럼의 결성으로 6.15선언 이후 고무되기 시작한 나성지역의 통일운동이 활동에 큰 활력을 얻게 된다.
또한 나성포럼은 지역운동의 오랜 숙원이었던 전임 상근제를 도입하여 지역운동의 실무를 담보해 나갔고 단체간의 연대를 강화해 가는 속에 청장년을 통일운동의 주력으로 나서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실천활동에 있어서도 공개포럼 개최나 타블로이드판 대중지 발행 등을 통해 6.15선언이후 열려진 공간에서 대중화에 적극 대처해 나가고 있다.

그 외 6.15의 변화는 각 분야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던 바 우리문화공동체는 해체 후 김정열, 문동호, 방연선, 전기선, 전병학 등이 당시의 기관지 월간 열림을 재조직화해 정기적 모임을 갖고 건강한 동포사회를 지향하는 잡지 발간을 꾸준히 전개해 오고 있다.

2001년 중반에는 육영빈, 전진경, 남장우, 남기원, 김현숙, 고동환 등 영어권 사용의 1.2세, 2세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운동단체 민들레가 조직되어 민족, 통일운동의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민들레 산하의 새땅소리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 참여해 정치운동에 문화매체를 적극 활용하면서 문화선전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또한 2002년 2월 "맑은 세상 만드는 노래, 참된 세상 일구는 마음"이란 슬로건으로 미주최초의 전문노래패 노래지기(회원: 김하림, 최정휘, 정은경, 박진만)가 탄생하여 동포사회와 이민자 삶의 모습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공연하는 등 문화운동에 있어서 보다 세련되고 다양한 시도들이 나오게 되어 미주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나성과 함께 미주운동을 지탱하고 있는 뉴욕의 경우, 90년대 중반에서 시작된 KEEP의 참가자들이 중심이 되어 실천활동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1999년 1.5세, 2세의 전문직 청년(서승혜, 김은희, 염기숙, 육영운, 박혜정, 강병철 등)들이 노둣돌을 조직한다. 노둣돌은 미주운동사 처음으로 1.5세, 2세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시킨 민족민주운동단체로 교육분과, 의료분과들의 전문역할을 통해 동포사회운동을 전개해 가는 한편 통일분과의 활동을 통해 동포사회에 통일운동 당위성 등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면서 미주 청년통일운동의 선봉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특히 2001년부터 "이북바로알기"운동의 차원에서 매년 추진하고 있는 DPRK Education & Exposure Program(DEEP)은 미주청년통일운동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큰 관심을 불러오고 있다.

노근리사건이 폭로되어 한국전쟁당시의 미군범죄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자 남북해외가 공동으로 미군의 범죄를 규명하기 위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가 발족되고 정기열, 정유미, 이화영 등이 전민특위의 공동사무국을 맡아 활동을 전개하고 나성에서는 범민련 재미본부, 나성포럼, 민주노동당 미주후원회, 민족통신, 동포연합 서부위가 전민특위 서부위원회(위원장:서정균)를 구성한다.

2001년 6월에는 전민특위와 미국의 대표적 반전진보단체인 International Action Center(IAC:국제행동센터)가 주관이 되어 코리아국제전범재판과 코리아 평화대행진을 뉴욕과 워싱턴디시에서 개최한다.

한국전쟁기간과 분단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의 미군범죄를 폭로하고 미국에 전 세계 양심의 이름으로 유죄를 선언한 이 행사에는 전국연합, 한총련, 재일 한통련, 한청등 남, 일본, 유럽, 카나다, 미주 각지역 등지의 여러 단체와 인사, 세계 각지의 진보적 외국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미주운동사 최대의 행사가 되기도 했다.

그 외 미 동부지역을 기반으로 한 단체(동포연합, 자주연합, NAKA)들이 중심이 되어 6.15통일시대에 공동의 연대전선 구축과 역할분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민협과 6.15미주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18]



21세기의 거대한 희망.
6.15선언으로 인해 조국통일이 단지 우리의 소원이 아닌 다가올 엄연한 현실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희망 앞에 우리는 또 하나의 난관을 만나게 되었다.
개표 부정의 우여곡절 속에 연방대법원을 통해 대통령직을 탈취한 부시는 취임하자마자 군수업자의 이해를 반영한 NMD정책을 밀어부치며 다시금 세계를 군비경쟁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전임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백지화하면서 한반도를 긴장정국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부시의 폭거와 전횡이 전 세계를 위협하는 가운데 전대미문의 911사태가 터졌다. 기다렸다는 듯 부시는 빈 라덴 사냥을 핑계로 전쟁에 돌입했다. 마침내 아프카니스탄 폐허를 자축하며 자원독점의 길을 터고 군사기지를 확보한다. 그리고 오늘은 또 다른 먹이감을 찾아 페르시아만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테러와의 싸움에 편승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학살을 자행한다. 한편 911을 빌미로 미국의 극우세력들은 자국내 이민자들을 탄압하고 삶을 옥째이기 위한 법안들을 속속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안하무인. 부시의 오만은 갈수록 그 증상을 더하고 마침내 2002년을 들어서자 북을 "악의 축"이라 칭하고 선제 핵 공격도 불사하겠다며 우리민족에게 일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미국의 폭력적 방식에 의해 6.15선언에 따른 민족화해와 남북교류의 춘풍이 일시에 위협을 받고 긴장이 고조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명백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반세기의 점령기간 동안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에 기대어 온갖 만행에 체질화된 주한미군의 오만 무례함이 마침내 길 가던 두 여학생을 전차로 치어 죽이면서 분노가 폭발하였고 반미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엄중한 역사의 물음 앞에 놓여 있다.
전진이냐. 예속이냐.

6.15선언후 조국통일의 열망과 분위기가 더 높아졌고 우리민족끼리 기필코 통일의 문을 열고 말겠다는 결사의지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고 나선 외세와 반통일세력들과의 마지막 한판 승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6·15남북공동선언의 성과를 지켜내고 확대시키는 역할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보다 폭넓고 대중적인, 실천적인 미주통일운동의 전망을 위해 역사의 고비마다 선두에서 투쟁을 이끌었던 이 땅의 "청춘"들이 단결의 기치를 들고 앞장서 나설 때이다.



[19]


의미 있는 변화, 02년 10월 11일 뉴욕에서 통일맞이 나성포럼, 노둣돌, 자주연합(청년위원회)의 대표자들이 모여 (민들레와 우리문화나눔터의 대표들도 업저버로 참가) 미주운동의 단결을 촉진하고 6.15시대를 주도하는, 미주청년운동체의 건설에 합의하고 뉴욕, 워싱턴디시, 나성을 연결하는 연대체로서 재미청년연대(Corean Action Network for Democracy & Unification : CAN-DU)를 결성하였다.

글쓴이: 하 용진 (통일맞이 나성포럼 사무국장)

* 자료수집에서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의 소견이나 잘 못 기술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언제든지 기다립니다.앞으로 계속하여 보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연락전화는 213-700-0615 혹은 전자주소 tongil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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