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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50년 세월 녹아내린 북녘동포들과의 2박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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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1-07-02 00:00 조회10,3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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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주(전국노점상연합 자주통일위원장)

정말 북으로 간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잠이 오지 않았다. 전국노점상연합(전노련) 대표로 금강산에 가게 된 김영덕 씨와 나는 과연 우리가 정말 북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설렘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고 새벽 5시에 북어국 한 사발 후루룩 마시고 집결장소인 경복궁으로 갔다.

0702jang3.jpg속초.
북으로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447명의 방북단 중 6인의 승선불허 방침을 접하고서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2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6인에 대한 승선불허 취하를 요구했지만 역사적인 민족통일대토론회 성사를 위해 6인을 남겨두고 승선을 해야 했다.

그때 일흔이 넘으신 범민련 김선분 선생님이 내 손을 꽉 붙잡으셨다.
“늙은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봐. 내 이름 대신 젊은 사람 이름을 넣었으면 한 명이 더 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평생을 통일운동에 바치신 선생님의 눈물 앞에서 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져만 갔다.

보고 느낀 것 그대로 가슴에 품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선생님께 드리며 설봉호에 올랐다. 내 몸이 북을 향한 갑판위에 놓여 있음에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눈앞에 두고도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리라.
여섯명의 동지를 남겨둔 방북길이었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뱃고동 소리. 정말 북으로 간다.

내집처럼 포근했던 북녘의 첫날밤

저녁 8시.
상쾌했다. 북녘은 상쾌한 바람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북녘 사람들은 친절했다. 복잡한 세관절차대신 친절한 웃음으로 대했다.

처음 만난 북녘 사람들 모습에서 내 눈이 가장 먼저 간 곳은 머리모양이었다. 사실 난 전투적이고 획일적인 기계집단일지도 모른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머리모양 또한 획일적인 상고머리일거라고 단정했었다. 하지만 긴머리에서 파마머리까지 다양한 그들의 머리모양을 보고 내가 얼마나 획일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던가를 깨달았다.

첫날은 별일없이 숙소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나중에 사람들을 만나 들어보니 출발 전날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방을 쓸 사람과도 통성명만 겨우 하고 말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만나는 사람마다
“잘 주무셨습니까?”
“네, 정말 푹 잤습니다”
북녘에서의 첫날밤은 내집처럼 편안하고 포근했다.

거, 내용이 들립네까? 우리끼리 이야기나 하자요

9시에 시작하기로 한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2시간30분을 버스안에 있어야 했다. 북측이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소속 6인의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남측당국이 방북단 중 6인의 방북을 거부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우리는 기다렸다. 50여 년을 기다렸는데 2시간30분쯤이야….

물론 북측은 방북대표단 전원의 토론회 참가를 허용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토론회 참가를 못할 뻔 했던 한 사람이 연회자리에서 그랬단다.
“솔직히 아까는 반공투쟁을 더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북에 와서 보니 느낀 것이 많다. 통일에 헌신해야 겠다.”
반공의식, 그것은 만나기만 하면 봄볕에 눈녹듯 그렇게 녹아버린다.

고성군 온정리 금강산호텔 앞. ‘자주통일’, ‘조국통일’을 흔들며 150여 미터를 길게 늘어선 북녘 동포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나는 옆에 있던 이중원 서울연대(준) 집행위원장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환희와 감격에 겨워 그 자리에서 채신없이 펄쩍펄쩍 뛰었을 지도 모른다.

토론회는 3시간반 동안 진행되었다. 솔직한 말로, 토론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앉은 북녘 동포들과 인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 내용이 들립네까? 우리끼리 이야기나 하자요.”
북녘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아예 청년학생들 쪽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까지 들렸다.

‘빈민’ 그게 뭡네까

토론회 후 한쪽 잔디밭에 앉아 통성명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전국빈민연합 산하 전국노점상연합 자주통일위원장 장봉주입니다.”
“… 빈민이 뭡네까?”
‘이런….’
‘빈민’의 개념을 20여 분동안 설명하고 나니 여가시간이 끝나버렸다. 북녘에는 ‘빈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0702jang2.jpg [사진은 김형직사범대학 최교수와 함께(가운데) 필자의 기념촬영]


토론회 후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미료 맛에 익숙해져버린 내 입맛에도 담백하고 깔끔한 그곳의 음식에 넋이 나가고 금강산의 화창한 날씨에 취해 그 독하다는 북녘술이 목을 타고 술술 넘어가기만 했다.

“이제 우리 조선사람들이 세계를 선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교육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지식산업이 세계를 움직입니다. 우리들은 자녀들을 조국의 일꾼으로 키워야 합니다.”

김형직사범대학 강좌장 최교수의 말이다. 예순이 넘은 최교수의 후대교육에 대한 열의는,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가난하면 대학을 갈 수 없는 이 땅의 교육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겐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최교수는 내 명함 뒷면에 ‘민족의 훌륭한 아들딸 되세요. 북녘의 할아버지가’라며 내 아이들에게 전하는 인사말을 남겨주기도 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금강산 관광을 위해 금강산주차장으로 향했다. 우리에게 금강산 안내를 하겠다며 나타난 자연을 닮은 ‘박송희 동무’. 나는 친근해진 그녀를 ‘송희 동무’라고 부르곤 했다. 스물 두살의 송희 동무는 마흔이 넘은 내가 보기에도 예쁜 사람이었다. 가벼운 분과 입술연지만으로도 이남에서는 볼 수 없는 미인이었다. 사리분명하고 논리적인 언변도 놀라웠다.

“다음에 만나면 이남에 있는 훌륭한 청년을 소개해 주겠습니다”
“북측에도 훌륭한 신랑감 많습니다”
송희 동무의 언변은 분명 자긍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한창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내 출입증을 빤히 쳐다보던 송희 동무가 놀란 눈빛으로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어머. 선생님. 생일이….”
‘610415’
놀랄만 했을 거다. 김일성 주석과 태어난 날이 같았으니…. 놀라는 송희 동무의 모습이 너무 흐뭇해, 우리 부모님이 바쁘셔서 한달 늦게 출생신고를 했다는 말을 삼켜버렸다.

난 송희 동무에게 약속했다. 다음에 남북농민들이 금강산에서 만날 때 같이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보낼 테니 통일되면 우리 다시 만나서 사진보며 옛날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해가며 금강산을 내려온 우리는 양지바른 자리에다 북녘에서 마련해준 김밥을 차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은 다섯인데 김밥은 네줄이었다.
“우리야 내려가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남녘 동무들은 배타고 먼길 가야할 사람들인데 든든하게 먹어야지요.”
북녘 친구들은 부득불 먹지 않겠다며 우리에게 양보하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우리네 인심이 그러한가. 기어이 끌고 와서 자리에 앉혔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 게 우리 민족 인심인데 김밥 한 조각을 먹더라도 나눠먹어야지요.”
이렇게 서로서로 양보하다 결국 김밥 한 줄이 고스란히 남아 버렸다. 그래도 배는 한없이 불렀으니 그게 좋았다.

여기저기 둘러앉아 김밥을 먹는 동안 봉사를 하던 봉사원 동무들이 노래공연을 했다. 물론 그들의 노래실력은 김원중, 문희옥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다시만나요’를 부를 때에는 모든 사람이 울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도 울었다.

0702jang.jpg [사진은 금강산에서 오광남 동무와 함께(왼쪽에서 두번째)

어느덧 통일전사가 되어

2박3일간 만난 북녘 친구들 중 기억에 가장 깊이 남는 사람은 범민련 북측본부에서 일하는 오광남 동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마흔살의 그는 얼굴이 검은, 동네아저씨 같은 친근한 사람이었다. 광남 동무는 무던히도 말수가 적었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웃는 얼굴의 광남 동무가 난 참 좋았다. 만약 북측이 남쪽으로 내려온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내려오라고 신신당부했던 그 광남 동무. 그러면 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표단에 참가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던, 말수가 적어 오히려 정겨웠던 그 북녘 친구가 떠나기 전에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장봉주 동무, 이중원 동무, 조국통일 운동 열심히 합시다.”
‘그래. 통일운동을 하지 않으면 난 사람이 아니다. 이제 나도 통일전사다.’ 어느새 내 심장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물론 방북대표단 모두의 마음이 나와 같지는 않았다. 금강산 관광을 할 때 내가 반해버린 송희 동무에게 누군가가
“북에서는 ‘아가씨’라고 부르면 무척 싫어한다면서요?”
“글쎄요. 문화적 차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럼 아가씨라고 부르면 되겠네.”
나는 순간 성질이 나서 ‘그러지 말라고’하며 빽 한마디 내던졌다.

현대가 방북교육을 할 때 당부하는 것 중에 하나가 ‘단어사용’인데 특히 안내원들에게 ‘아가씨’라는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남에서도 ‘아가씨’라는 말은 썩 좋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 아닌데 이북에서는 특히 심하다. 물론 그 상황을 유연하게 풀어간 송희 동무의 너그러운 태도에 고마움과 느낀 바도 컸지만 미안함과 부끄러움 또한 숨길 수가 없었다.

‘통일전사’를 키워내는 북녘 햇빛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김승교, 심재환 변호사가 술 두병을 든 채 갑판위에서 술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함께 있던 실천연대 윤한탁 선생님과 강진구 집행위원장, 이중원 서울연대(준) 집행위원장의 오라는 손짓에 어느새 술판이 마련됐다. 전상봉 한청 의장이 합세하고 어느새 20여 명이 모여앉아 토론회의 감동을 나누고 있었다.

한창 술을 먹다가 배멀미를 느껴 라면을 한그릇 먹은 후 쉬엄쉬엄 1층, 2층, 3층을 다니며 사람들을 살펴보았더니 우리와 마찬가지로 술 한잔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앉아 있는 곳은 달랐지만 오고가는 이야기는 하나였다.

‘50년 세월을 녹여버린 2박3일간의 북녘 동포들과 함께 한 시간.’
그것은 ‘통일전사’를 키워내는 햇빛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전빈련은 14년간 통일운동보다는 생존권 투쟁에 관심을 두고 사업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어렵게 올해에야 비로소 자주통일위원회를 건설하고 통일운동에 나섰으나 아직까지 많은 빈민들이 함께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본 금강산에서의 통일, 그 순간에 내가 느낀 환희. 첫 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더 큰 환희를 안겨준 통일의 그날을 이 땅 수많은 빈민들의 손으로 열어나가자는 결심으로 나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통일의지로 의기충천한 441명의 통일전사를 태운 설봉호는 그렇게 쾌속으로 남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출처:자주민보 200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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