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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5.18 항쟁에서 운동권이 배울 교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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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ohkilnam 작성일00-12-30 00:00 조회3,5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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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5.18 민중항쟁에서 얻는 교훈들

반미자주화 투쟁이 기본과녁이며 연합전선만이 승리를 담보한다

글: 노 길남(민족통신 편집인)

1980년 5월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이 항쟁은 반외세 자주화의 전기를 열어 놓은 대중적인 의거였다. 인류사에 빛나는 민중항쟁의 횃불이었다. 그러나 광주의거는 보수적 파쇼역량과 혁신적 역량사이의 일대 항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결에서 피 흘렸던 민중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아픈 좌절의 역사를 맛보게 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난지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의 역사에 사는 우리들은 지나간 피의 항전에서 O아야 할 교훈들이 무엇이며 향후 실천해 나가야 할 과제들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운동의 방향은 제대로 되었는가. 투쟁의 목적의식성의 한계는 없었는가. 각계각층들을 담아 넣어 통큰 연합연대를 이루는데 제한성은 없었는가. 투쟁의 구심을 이루는 과정에서 주력부대를 제대로 꾸렸는가. 조성된 정세분석에서 주관적, 객관적 상황을 올바르게 타산하여 진단했는가 등을 묻는다면 이들에 대해 우리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총화에 기초하여 향후 진행하여 나갈 투쟁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를 냉철하게 생각할 때라고 본다.


[1] 운동의 올바른 과녁 설정


지금도 운동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하지 못하거나 변혁이론의 상이함을 놓고 민중들 내부에서 옥신각신 하는 현상들을 보게된다. 청년학생계층이나 노동계층 등의 일각에서는 어떤 모순이 먼저고 나중이고 하면서 민중들끼리 논쟁을 벌이고 심지어는 앙숙처럼 지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해부해 보면 민중운동의 방향은 "반미자주화를 위한 투쟁"이 기본이다. 나라의 자주권이 송두리채 빼앗긴채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한국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면 운동의 방향은 과녁부터 잘못 설정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환상 때문에 5.18항쟁 당시 운동권조차 미국이 무언가 한국군부에 압력을 가해 줄 것을 기대 했던 것을 철저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변혁운동의 본질은 민족해방운동인 까닭에 운동의 방향은 반드시 "반미자주화투쟁"이 기본 과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2] 운동의 목적의식성 문제


투쟁의 목적의식성에 있어서도 5.18 민중항쟁은 시작부터 투쟁목표를 가지고 항쟁에 분기한 것은 아니었다. 평화적 데모가 무쟁항쟁화 되었던 순간도 자기 방어적인 자연발생적으로 연결된 운동이었지 무장항쟁화 하려고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5월25일 제3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에 나와 강연했던 한 시민군대표의 성명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18일 아침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앞으로"를 강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항쟁의 대중적 확산도, 무장항쟁에로의 질적 비약도 목적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직성의 한계성에서도 표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다이너마이트 뇌관제거사건"과 "독침사건"에서 25일밤 계엄군의 한 정보요원이 화순탄광에 근무하는 화약전문가로 가장하고 투항파 학생수습 위원장이던 김창길의 안내로 도청에 잠입하여 그곳에 보관중이던 다량의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제거해 버린 일이 있었다. 실은 이러한 경우 다이너마이트를 이유로 계엄군의 탱크진입을 막는데 위협적인 담보물로 쓸수 있었으나 타방의 공작에 말려 들었던 사건으로 기회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독침사건"도 계엄군 첩자였던 장계범이란 자가 도청에서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치며 쓸어지며 연극을 하는 바람에 이것을 계엄군이 간첩소행으로 퍼뜨려 광주시내에 유포시킨 음모였다. 치안질서 유지의 미숙성과 함께 비조직성의 문제를 노출한 결과였다고 분석한다.


[3] 운동의 연대연합의 중요성


운동이 고립되면 실패한다는 것은 귀중한 교훈이다. 5.18항쟁은 운동의 연대성이 확보되지 못해 좌절의 주요원인이 되었다는 교훈을 부각시킨 운동이었다. 운동의 연대연합의 중요성은 첫째 투쟁의 고립화를 막고 범민중적 대중화를 실현하여 그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한다는데 있으며, 둘째로는 타방의 물리력을 각개 분산시켜 반동적 집중공세를 저지 파탄시킨다는 데 있다.

광주항쟁은 호남지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고립 무원한 상태에서 계엄군의 집중공세를 받고 좌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항쟁은 무엇보다도 광주시내의 여러 계급계층간의 연대를 원만히 실현하지 못했다. 중소기업 중심의 노동자 계층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당시의 아시아자동차나 호남전기와 같은 대기업체 노동자들의 참여도가 매우 저조했다. 이러한 대기업체들은 미국과 한국당국자들의 경제적 지탱점의 하나였는데 이 기업들의 노동자들이 참여는 한미 양 당국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항쟁의 발전에는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군사병들과 중하층 장교들과의 연대에도 전혀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이들도 민족적 그리고 계급적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민중의 자제들이기 때문에 민족적 양심도 있고 겨레와 부모처자, 형제자매들에 대한 애정도 있다. 한국군은 실제적으로 미국의 용병이나 같기 때문에 이들이 민족문제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게된다면 민중들의 편에 서게 된다. 그 가능성은 4.19때에 검증된바 있었다.

당시에 각계각층의 민중들의 공동연대운동을 주도할 연합체가 성숙되지 못한데도 연대운동의 한계가 노출되었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라고 있었는데 이 연합체는 반파쇼민주주의 연합전선적 조직체로서 14개의 민주화단체들을 망라하고 있었으나 광주항쟁과 같은 고차원적 운동에 대한 전국적 연대를 실현하기에는 그 상층의 보수성이 너무도 강했다. 연합체가 운동간, 지역간 상호연대를 원만히 실현할 수 있는 참다운 조직체로서 되고자 하면 (1) 소속과 정견의 차이를 공동의 이해관계로 반영하는 투쟁의 좌표와 구호를 명백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2) 각계층의 요구수준에 따라 낮은 형태의 공동투쟁으로부터 높은 형태의 공동투쟁으로 발전 확산시켜 나가는 전술을 올바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3)부문운동이나 지역운동간 행동통일, 운동의 시공간적 일치성이 보장되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하는데 국민연합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구비하지 못했던 체질의 한계성을 노정 하였다.

물론 지역감정이 작용한 것도 있었다. 미국은 박정권으로 하여금 영호남을 차별화하여 호남지역 주민들을 차별시 하는 정책의 노우하우를 암암리에 지도하면서 분리하여 정복하는 전술을 펴온 데도 원인을 O아 볼수 있다. 여기에서 민중언론들 혹은 투쟁을 이끄는 매체들의 활동 취약성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투사회보"를 포함하여 "민주시민회보"등의 민중언론들이 시민들의 투쟁의식 고취와 행동통일을 이룩하는 데 일정정도 기여했으나 계엄당국의 여론조작과 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데에는 역부족으로 나타났다. 투쟁구호, 행동질서, 군중집회와 데모진행방식, 희생자 장례문제 등만을 중시하는 쪽으로 편집되는 바람에 계엄군이 제도권 언론들을 위협하여 한동안 광주항쟁이 일체 보도가 중단되어 암흑기를 맞은 적도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것들을 대치할 만한 보도기능이 이뤄지지 못했다.

여기에서 공동연대 투쟁문제는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지금 남녘에는 불행하게도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두 개로 나뉘어져 진통을 앓고 있고 청년학생운동은 오랜세월 엔앨이니 피디니 하면서 함께 공동투쟁전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답답함이 운동권 내부에 깔려 있고 기타 운동권 단체들 내부에 이러저러한 문제들로 서로들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상황이 현실로 노출되고 있어 이에 대한 적극적인 타개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 있다. 변혁운동에 있어 민중역량의 단결 단합된 연합전선이 구축되지 못하고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원하는 속도로 굴려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일제 36년과 미제식민지 생활 55년에 우리 모두에게 주는 따거운 교훈들이다.


[4] 운동의 구심체 문제


5.18항쟁은 운동의 구심 형성과 그 역할이 가지는 중대한 의미를 부각시켜 주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80년 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제주도를 포함 전국에 확대되고 18일 전남대의 가두시위를 기점으로 하여 1단계는 18일부텨 21일까지 4일간으로 이 기간에는 항쟁이 발단되어 전면적 무장항쟁으로 발전되어 광주시가 시민의 손에 장악되었던 시기이며, 그리고 22일부터 27일까지 6일간의 기간에는 해방된 광주에서 민중자치가 시행되다가 계엄군의 무력진입으로 항쟁이 좌절되는 시기로 구분된다.

1단계에서는 투쟁 지도부의 부재기간이다. 청년학생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민주운동 지도층 인물들은 체포 구금되거나 거의가 현장을 벗어나 피신한 상태였기에 조직적인 비상동원체제가 마비된 시기였던 관계로 비조직적인 투쟁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시기에 무장한 시민들을 이끌어 갈 지도부체제가 갖춰지지 못했다. 2단계에서는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5.18사태수습대책위원회(일반수습위)와 학생수습대책위가 구성되었고 항쟁 마지막 단계에 와서 민중민주항쟁지도부가 조직되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한계성은 (1) 지도부의 인적구성에서의 한계성, (2) 지도부 내부의 분열문제, (3) 무장항쟁과 같은 고차원의 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력 한계성 등으로 나타났다.

민중운동의 지도부 구성은 기본동력으로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의식화된 진보적 지식인들을 비롯 각계층의 대표들로 광범위하게 짜여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또한 하나의 이념, 하나의 조직으로 대오를 꾸려야 하는데 분열된 상태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한계를 안고 있었다. 무기반납 문제를 두고서도 강온파로 분열되어 지도부의 위상과 역할을 다 하지 못했던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항쟁 후반 말기에 창출된 민중민주항쟁지도부는 광범위한 기층민중과 진보적인 학생출신 인물들로 구성됨으로써 인적구성의 한계와 내부의 노선상 문제를 극복하긴 했으나 당시의 복잡한 상황에 대한 사태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여 상황에 대처하는 전략전술과 능동적 자세를 구사할 수 있는 지도력에는 취약점을 노정시켰다.


[5] 맺는말


20년전 5.18 민중항쟁에서 얻은 교훈들은 이 시대에 애국활동을 하고 있는 해내외 민중들에게 실로 귀중한 이정표들로 되고 있다. 이 귀한 교훈들이 오늘의 투쟁선상에서는 해소되었는가를 물을 때 우리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운동의 과정에서 대중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투쟁성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는지. 반대로 투쟁성을 강조한 나머지 대중성을 중시하지는 않았는지. 조직성에 치중한 나머지 원칙만 내세우면서 사람과의 사업을 경시하지는 않았는지. 조직이기주의로 광범위한 계급계층을 묶어 세우는데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조직전체의 단결단합에 해가 되지는 않았는지. 크고 작은 문제로 동지들간에 앙숙이 되어 청산의 대상들 보다도 더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스스로 묻고 반성하는 기회가 될 것을 애국활동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에게 제언한다. 광주항쟁에서 뼈저린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들이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대오에 참여하는 모든 애국동포들의 거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00년 5월17일]


민족통신 5-17-2000 노 길남 편집인 rohkn@minj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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