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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콜롬비아 게릴라투쟁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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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8-05-24 00:00 조회11,1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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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민족통신에 남미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한 유태영 목사(재미동포전국연합 상임고문)가 이번에는 콜롬비아의 투쟁을 소개하는 글을 보내왔다. 콜롬비아의 독립으로부터 시작 게릴라 투쟁, 콜롬비아 혁명군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의 침략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투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유태영 목사의기고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반제반미 콜롬비아 게릴라투쟁의 한세기

남미에서 또 하나의 이락전쟁


*글: 유태영 목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상임고문,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남미대륙의 북서부 끝에 있는 콜롬비아 태평양 연안에 스페인 침략자들이 처음 상륙 한 것은 1499년 이였다. 침략자들은 그 지역에서 BC 10,000전부터 평화롭게 살고 있던 현지의 많은 인디언 Chibcha, Andean 그리고 Caribbean등 여러 부족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침략하여 1539에는 지금의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에 침략의 요새를 구축했다.

<##IMAGE##>1544년에 스페인은 남미침략의 속도와 지역을 확대하고 촉진하여 지금의 페루에 “식민총독부”를 설치하고 남미대륙 북서부 전역을 식민지화 하여 총독부가 총괄 통치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등 여러 지역들은 스페인 페루총독부의 관할구역에 속했으며 총독부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원주민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대량 살해 했으며 살아남은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았다. 침략자들은 노예가 모자라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대량 수입해 오기도 했다.

그 후 3세기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통치는 튼튼하게 확립 되였으며, 이로 인하여 유럽에서 스페인 왕국은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면서 태평세월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파냐 식민통치는 3세기가 지난 후에 서서히 사양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장군이 스페인을 침공하여 승리함으로 인하여 스페인제국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 이였다.

유럽에서 대세가 기울어진 스페인제국은 동시에 남미에서도 식민지 통치를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는 위력이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다.

1739넌 경부터 페루 총독부의 가혹한 지배권에서 부터 조금씩 벗어나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사회적 환경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대하여 민감한 지역들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 등 여러 지역들 이였다.

그러나 아직은 스페인 식민정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은 이 지역에 또 다른 총독부를 새로 설립하여 1800년대 초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 이 지역에 새로 설치된 총독부를 “그라나다 총독부” 라고 불렀다.

노예제도, 스페인의 과중한 세금, 관세, 상업의 독점 등에 대한 저항이 서서히 전 지역에서 불길처럼 일기 시작 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흐름이 바다의 물결처럼 “그라나다 총독부” 가 통치하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동서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1. 파란만장한 콜롬비아 독립


이 지역에서 독립 운동이 시작된 것은 1810년부터 이었다. 혁명적 지도자 나리뇨를 선두로 하여 최초의 독립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 했던 것이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처음 상육한 후부터 꼭311년 후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819년에 그 당시 남아메리카에서 혁명적 영웅으로 맹활약을 펄치고 있던 볼리바르 장군이 이끄는 독립혁명군이 “그라나다 총독부” 를 침공하여 에스스파냐군을 무찌르고 드디어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포했다.

볼리바르 장군은 오늘날까지도 남미에서 “볼리바르주의” 라는 명칭으로 그의 혁명정신과 업적이 민중들 속에서 기억되고 있다.

독립된 나라명칭을 “대콜롬비아공화국” (Republic of Greater Colombia) 이라고 명명했다. 독립된 공화국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 등 4개 지역들이 연방제로 구성된 신생 공화국 이였다.

연방제 국가로 독립을 했지만 10년 후인 1830년에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 두 지역은 연방제를 탈퇴하여 제각기 독립국으로 떨어져 나갔다. 두 지역이 떨어져 나간 주된 이유는 국가 형태문제, 정부 구성문제, Catholic 교회와의 관계문제 등 지역 간에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연방제 공화국을 창건한 후에 이 두 지역은 10년 동안의 서로 불편 한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적으로 각각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 후 콜롬비아와 파나마는 “ 대콜롬비아공화국” 이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새로운 국호를 채택 했는데 “콜롬비아공화국” 이라는 새 명칭을 가지고 다시 새 출발을 하였다.

새 출발을 하기는 했지만 “콜롬비아공화국”은 보수파와 자유파로 분열하여 서로 대립함으로 격렬한 싸움을 하는 불행에 또 다시 빠지고 있었다. 콜롬비아는 백인이 20%, 흑인4%, 인디오 원주민1%, 그리고 혼혈인구가 60% 이상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 인구는 전체의 14% 이며 주로 해안 평야지대에 살고 있다.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 착취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독립 후에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백인 대지주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 외국자본과 결탁한 소수의 지배세력들 이었다.

천신만고로 쟁취한 자주독립의 의미와 보람을 특권지배층 사람들이 완전히 왜곡 시켰으며, 이에 격분하여 나선 민중들은 소위 “자유파” 로 낙인을 찍히고 말았다.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들과 대자본가들이 서로 함께 결탁한 지배세력은 “보수파” 라는 명칭을 붙여 놓고 자유파와 상호간에 격렬한 분쟁이 발생하도록 뒤에서 유도했다.

콜롬비아는 독립쟁취 후 엘리트 중심의 중앙집권적 보수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연방주의적 성향의 진보주의 세력 간에 치열한 투쟁이 계속됐다.
무려 50여 차례의 폭동과 여덟 번의 내전을 겪는 동안 신생 콜롬비아 공화국에서 10만여 명의 민중들이 비참하게 희생 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서 신생국 콜롬비아는 또 다시 재난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됐다. 이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하여 콜롬비아에게 “운하건설권” 을 요구했다. 약세의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의 강요에 굴복하여 “파나마운하건설권” 을 무조건 승인해 주었다. 하지만 “콜롬비아의회” 는 정부가 승인 한 것을 거부함으로 인하여 미국과 불편 한 관계에 차하게 되었다.

미국은 파나마를 콜롬비아로 부터 독립하여 떨어져 나오도록 공작을 했다. 미국은 제 마음대로 파나마를 1903년에 독립을 시키고 말았다. 미국에 매수된 파나마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콜롬비아로 부터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 했다.

1914년에 콜롬비아는 할 수 없이 파나마를 독립국가로 공식적으로 승인 했으며, 또한 미국에게는 “파나마운하건설권” 을 공식으로 승인 해 주었다.

콜롬비아는 미국에게 파나마를 빼앗겼으며 또 운하건설권도 빼앗겼다. 미국은 11년 후에 콜롬비아에게 약간의 배상금을 지불함으로 문제를 완결했다. 콜롬비아 정권이 비극적으로 외세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이를 비판하는 국민의 외침은 자연히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콜롬비아 정권은 정당한 민중의 외침을 이념적으로 불순한 비난이라고 사실을 왜곡하여 탄압으로 일관 했다. 이때부터 콜롬비아 정권은 민중의 외침을 계속 묵살 하면서 보수적 우파의 소리 에만 귀를 기울였다.


2. 콜롬비아의 게릴라투쟁은 어떻게 시작됐나?



콜롬비아의 게릴라 투쟁은 어떻게 시작 됐으며 도대체 그 정체는 무엇인가?

먼저 콜롬비아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진보주의) 자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그 분쟁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보수주의자들은 예전의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의 지배체제를 할 수 있는 대로 그냥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면서 대지주들과 대기업들의 이익만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 특히 1952년 이래 콜롬비아의 우익 보수세력은 친미적 반공주의노선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으며 미국과 군사원조 협정을 맺기도 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콜롬비아의 자유진보 진영은 예전의 에스파냐 노예노동제도의 봉건적 사회제도의 유산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카톨릭 교회의 봉건적 지배체제를 반대 하면서 가난한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대변자로 역할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반제반미와 자주자립 정신을 투쟁의 기본 노선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기본 노선이 서로 상이함 으로 인하여 양 진영의 갈등과 투쟁은 항상 계속됐다. 그런데 승리하는 쪽은 항상 보수주의자들 이였다. 보수주의자들은 벌서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는 집권세력이었다.

콜롬비아에서 끝없는 내전과 게릴라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그 불씨는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콜롬비아에서 10년동안에 비극적 폭동으로 인하여 300,000명이 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 했다. 이와 같은 비극적 폭동의 시작은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등장한 Jorge Gaitan를 암살한 사건 때문 이였다. Gaitan 후보자는 토지개혁과 노동법 개정 을 과감하게 주장하면서 가난한 민중과 근로자들을 위한 유력한 후보자로 부상 했다.

하지만 Jorge Gaitan 후보자는 우익 강경보수파에 의하여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 보수파에 속하는 유능한 정치적 지도자들도 계속하여 암살로 제거를 당하고 있었다.

성난 서민층 대중은 길거리에 나와 분노를 터뜨리면서 폭력적으로 시위를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진보주의적 자유파 민중들은 이번에 치려지는 대통령선거에 일절 불참 할 것을 선언하면서 전국적으로 항의와 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콜롬비아 정권은 민중의 외침을 완전히 무사고 예정대로 대통령선거를 강행 했으며 Gomez가 단독으로 출마하여 보수파들만의 지지를 받으면서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3년 후인 1953년에 Rojas Pinilla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Gomez대통령을 밀어 내고 정권을 탈취 했다. 하지만1957년에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Pinilla장군은 개인적 부정과 부페로 인하 여 권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보수파와 진보파 어느 편이 결정적 승리가 없는 불투명한 국가적 현실 속에서 1958년에 “보수적 우파” 지도자들과 “진보적 좌파” 지도자들은 10년 동안의 분열 과 싸움에 대하여 지칠대로 지친것을 서로 시인 하게 됐다.

양측은 사상과 이념을 포기하거나 혹은 서로 어떤 종류의 야합을 시도한 것은 절대 안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10년 동안에 300,000명의 생명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감 을 서로 실감하고 정치적 합의를 보게 됐다.

양편의 합의에 의하여 “국민전선” (National Front) 이라는 연합정부 형식의 정권 을 창출하는데 합의 했다. “국민전선” 은 대통령은 양측에서 교대로 선출하고, 내각은 양편이 서로 절반씩 차지하는 분배식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국민전선” 은1958년에 시작하여 1974년까지 16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면 “국민전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국민전선”은 비극적으로 희생된 3십만의 생명에 대한 민족적 양심으로 책임 의식이 있는가? “국민전선”은 쫓겨난 농민들과 해고된 실업자들을 빨갱이들이라고 몰아치는 우파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국민전선”은 집권 16년 동안에 절대빈곤층 비율이 25%에서 50%로 증가한 것에 대하여 책임감이 있는가? “국민전선”은 시급한 농지개혁법안과 노동자 권익을 위한 법 개정을 위하여 결사 투쟁 할 것을 결의했는데 그 결의를 잊어 버렸는가?

“국민전선” 은 우파든 좌파든 저들끼리의 상생의 기회로 전락하여 민중에대한 약속이나 민중의 희망은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콜롬비아의 절대 다수인 농민들과 근로대중은 “국민전선” 에 동참한 “진보적 좌파” 정치인들에대하여 실망과 베신감 을 느끼고 있었다.


“국민전선” 에 대한 민중들의 실망과 분노는 기존의 게릴라 투쟁에 휘발유를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다
.
콜롬비아의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 하에서 오히려 저항조직들은 보다 더 강화 되였고, 보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게 하도록 하는 또 하나의 시발점과 기폭제가 되고 있었다.

콜롬비아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가 없는 곤란한 사정을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을 하려면, 한국의 김영삼을 생각하면 된다. 김영삼은 “삼당합당”을 통하여 정권을 잡은 후에 지금까지 함께 투쟁을 해 온 민주인사들과 동지들에게 등을 돌리고 오히려 원수로 변했다.
김영삼은 중앙정보부를 폐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이용하여 민주투사들을 탄압하여 정권의 안전을 유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반통일 친미 정책을 오히려 노태우 보다 더 강하게 추진하는 우익분자로 변신 하였다.


3. 콜롬비아 혁명군(FARC) 의 조직과 활동 전개



콜롬비아의 “보수주의 우파” 든 “진보주의 좌파” 든 모든 기성 정치인들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에 분노를 느끼게 된 민중들은 참되고 새로운 해방의 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국민전선” 이 16년을 낭비하고 또 다시 저들끼리 “보수당-자유당 양당 체제” 를 유지하면서 반민족 친미 노선을 고수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실정 이었다.

노동자 농민 지식인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반정부 반군들은 아직 개간되지 않은 “마르께딸리아 정글과 오지” 로 숨어 들어가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콜롬비아 혁명군(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Colombia)을 조직 선포하여 전국 단일 조직으로 출범했다. 그뿐만 아니라 콜롬비아 혁명군은 1964년7월에 “토지개혁 강령” 을 전국에 발표하면서 콜롬비아 혁명군은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쿠바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함으로 인하여 충격적 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1964년에 콜롬비아 “민족 해방군” (ELN)을 조직하여 주로 농촌 중심의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시종 FARC와 게릴라 활동을 동조하고 있다.

마르깨딸리아 정글에서 콜롬비아 혁명군을 조직한 기원에 대하여 그들 자신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전통적인 정당들, 보수당-자유당의 야합으로 인하여 발생된 재앙을 겪으면서 마르께딸리아 정글에 집결한 게릴라들은 생산물을 운반 할 수 있는 길과 아이들을 교육 할 수 있는 학교를 건설했다. 당시 준군사집단 이었던 반정부 단체인 파라호스와 밀접한 연대를 맺었다.

한편 콜롬비아 정부는 우리들을 매카시적 방식으로 몰아 부치면서 산적, 무법자, 국제공산주의의 첩자들이라고 협박 했다.

이후 콜롬비아 정부군의 공세가 임박해 오자 우리는 의회, 교회,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으나 정부와 미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우리농민들은 마루란다를 중심으로 하여 최초에 48명이 무장 했다. 1964년5월27일에 미국은 마르깨딸리아를 포위하고 미군이 직접 지휘하면서 우리를 위협했다. 이때. 마르깨딸리아에 집결했던 그룹이 “콜롬비아 혁명군”의 모체가 됐다. 이후 37년 동안 미국과 콜롬비아 친미정권은 우리를 향하여, 콜롬비아 작전 – 전멸작전 – 협공 파괴작전 등 다양한 명칭으로 군사작전을 했다. 최근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시작한 “플랜콜롬비아” 도 역시 그 작전의 연장이다.”

케네디 시절에 국제적 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위하여 콜롬비아의 게릴라를 절멸시키려고 “플랜 콜롬비아”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지금 부쉬는 공산당이 아니라 마약으로 침략과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콜롬비아에서 게릴라와 마약(guerrillas-narco) 두 마리 파랑새를 잡으려고 케네디 시대부터 부쉬 때 까지 수천 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파랑새는 콜롬비아에 있지 아니하고 백악관 지붕에 앉아 있는 것을 부쉬는 모르고 있다.

미국의 콜롬비아 개입은 물론 석유의 이권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남미에 뿌리 깊은 볼리바르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여러 이웃 나라들 때문에 미국이 콜롬비아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 미국의 입장은 편할 수 없다. 미국은 콜롬비아에서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콜롬비아 게릴라는 미국의 말처럼 공산주의 자들이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우리에게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다른 뿌리가 있다. 우리의 뿌리는 혁명적 크리스천이었던 CameloTorre신부(1929-1966)와 체 게바라 등 다른 많은 라티아메리카의 영웅들의 민족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라고 주장한다.

콜롬비아 게릴라들은 민중들의 자기결정, 소수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자들의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는 원주민, 흑인, 빈민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콜롬비아 게릴라는 세계 어느 곳에 있는 게릴라들과 비교할 수 없다. 그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1) 게릴라의 지도체제는 농민이거나 농촌과 깊은 연계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2) 지리적으로 게릴라 활동에 유리하며 지형에 친숙하다. (3)게릴라들은 선거혁명 보다는 정치협상에서 사회 경제적 개혁을 더 중요시 했다. (4) 콜롬비아 게릴라들은 완전히 스스로 재정을 조달함으로 외부의 압력이나 요구에 종속되지 않는다. (5) 게릴라들은 1984년--1990년에 정부와 평화협정 시기를 가졌다. 그때 3000명의 중요한 운동지도자들이 전격적으로 암살을 당했다. 여기에는 물론 미국의 정보원들의 개입되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게릴라들은 미국은 물론이고 제도권과 기득권자들과 융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미국은 콜롬비아의 게릴라를 소탕하기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이른바 “플랜 콜롬비아” 라는 작전계획을 세워 놓고 케네디 때부터 오늘까지 활용하고 있다. 이 계획에 의하여 준군사집단인 콜롬비아 민병대 (연합 자위군-AUC) 를 조직하여 운영 하고 있다.

10,000명으로 추산되는 민병대의 주요 임무는 반정부세력을 제거하기위하여 납치와 암살 그리고 매수작전을 펴고 있다. 미국은 콜롬비아의 테러집단 명부에 FARC / ELN은 넣으면서 AUC는 제외하고 있다. 민병대는 마약조직에 깊이 침투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미국은 300명으로 추산되는 군사 고문단이 이 민병대를 용병화하여 이용하고 있으며, 용병들은 10만 달러를 연봉으로 받는다고 한다. 미국은 콜롬비아 군부 내에서 협조적인 간부들에는 보상하고. 미국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에게는 징벌하거나 금전적인 지렛대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의 힘이 콜롬비아에서 막강하지만, 실제 콜롬비아 인민들의 시각은 냉담하다. 그들은 미국이 콜롬비아의 내전을 민족전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콜롬비아 농민들의 눈에 비친 미국은 화학 고엽제를 더 많이 사용, 코카나무보다 다른 농작물들을 더 많이 박멸시키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제거하기 위하여 더 많은 군사력이 필요한 나라라는 것을 의미한다.

군인들이 마약퇴치를 한다고 농민들을 좇아내고 가정을 파괴시키면 시킬수록 그 집의 자식들은 곧 바로 게릴라가 된다는 사실을 미국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미국이 콜롬비아 게릴라에 대하여 과소평가하고 있는 점은 FARC는 기본적으로 농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을 받쳐 투쟁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릴라들에게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정의를 실현 시키는 것뿐이며 사회복지에 복무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이데올로기 이다.

게릴라들의 활동은 농민들과 호흡을 같이 하고 농민들이 스스로 무장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는 이유는 게릴라들의 삶은 전적으로 농민들의 삶과 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반제반미 콜롬비아 게릴라투쟁이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오늘까지 지속 됐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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