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7-04-03 00:00
[특별기고]남미 아르헨티나 키르체네를 대통령
 글쓴이 : minj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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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남미 아르헨티나 키르체네를 대통령

[뉴욕=민족통신 김봉호 편집위원]재미통일운동 지도자 유태영 목사(77,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이며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니콰라과, 에콰도르, 칠레, 브라질에 이어 이번에는 아르헨티나의 키르체네르 대통령의 이야기와 이 나라의 배경과 남미 좌파전선의 흐름현상에 대한 논문을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했다. 유 목사는 이번 글을 통하여 아르헨티나의 키르체네르 대통령이 국제금융기구(IMF)차관을 전액 상환하는 입장과 자세에 관하여 진단하며 남미지역의 반제반미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검증해 주었다.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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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키르체네르 대통령 IMF 차관 전액 상환

남미 나라들 “미국의존 벗고 우리끼리”정세 심화


<##IMAGE##> 아르헨티나를 생각할 때 “슬퍼 말아요 아르헨티나” 가 먼저 머리에 떠 오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에비타> 에 나오는 대사이다.

<에비타> 는 아르헨티나 퍼스트레이디이며 국모인 에바 페론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사랑의 삶의 일대기를 노래로 엮은 명작 뮤지컬 이다.

1978년 웨스트엔드 초연에서 2,900회를 공연 했고 그후 브로드웨이에서 1,567회 장기 공연을 했다. 토니상 7개 부문을 수상한 세계적 명작 오페라 이기도 하다.

가난한 농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삼류배우에서 1945년에 페론과 결혼하고 1946년에 국모의 자리에 올라 앉은 에바(애칭 에비타) 는 남편인 페론 대통령의 정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첬으며 아르헨티나의 현대사에 있어서 분기점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했다.

절세 미인이며 정열적인 에비타는 페론 대통령의 정치사상과 그의 정책에 있
어서 반미 반독재, 근로자 복지 정책, 복지국가주의적 행정,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헤택을 주는 사회제도, 철도 및 공익 사업들의 국유화등 엄청난 사회
주의 개혁정책을 시행하도록 크게 작용했다. 이와같은 에비타의 꿈은 아르헨티나의 어려운 상황에서 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혁신적 정책의 모험을 시도함에 큰 의미가 있다.


페론의 등장과 결혼, 에바 페론의 역할, 망명 생활, 망명 이후의 재집권등 파란만장한 페론과 에바 페론의 이야기는 아르헨티나의 현대사에서 놀라움을 떠올리게 하는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페로니즘” 과 “반페로니즘” 두 이즘이 교차하는 1946년에서 1976년까지 30년 동안의 시기는 아르헨티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등장한 페론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념적으로 좌익과 우익이 서로 넘나드는 폭 넓은 자유로운 시기이었다.

하지만 페론 대통령의 사망 이후에 뒤따른 그 다음 시기에 대하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더러운 전쟁의 시기” (Dirty War)이었다고 말한다.

페론 대통령이 사망 직후에 미국이 후원한 쿠테타로 1976년에 군사정권이 등장햇다. 미국에서 고문기술과 납치와 정보수집 방법을 훈련 받은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쿠테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통치 하에서 “더러운 전쟁” 은 8년동안 벌어졌는데 이 전쟁으로 3만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 되었고, 또 다른 3만여 명이 납치되고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14,000여 명이 법원의 소환도 없이 투옥 되었다. 이 때문에 5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부모의 납치와 사망으로 인하여 고아 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와 같은 참혹한 군사독재의 만행은 “오직 반공”이라는 단순 론리 하나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은 반공을 위하여 전국에 300여 곳에 “죽음의 수용소” 를 설치하고 저항세력을 탄압하는데 이용하였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일단 “반정부 인사” 라는 리스트에 오르기만 하면 반드시 수용소에 끌려 갔고 끌여가기만 하면 절대로 살아 나올 수 없었다.

“죽음의 수용소” 에 끌려가면 눈이 가려진 채 다른 사람과 대화는 금지된다. 누구나 예외 없이 전기 고문을 당하고, 성고문도 당한다. 숨이 막힐 듯한 물고문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땅에 목만 내놓고 온 몸이 묻힌 채 뜨거운 햇볓과 폭우를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폭력적 구타는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사회전체가 공포의 소굴이기도 했다. 마치도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저항하던 세력에게 가하던 암흑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당시의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정권은 자신들이 저질러 죽인 저항인물들의 시체처리도 골치거리였다. 이 골치거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비행기로 싣고 대서양으로 날아가 사람들을 비행기 밖으로 떨어뜨리기까지 했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어 간 사람만도 수 천 명에 이른다고 하니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얼마나 혹독하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고문과 살해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임산부를 체포해온 군인들은 아기를 낳은 여성은 죽이고 아기는 군인들과 기업체 간부들의 호적에 올려 키웠다.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기들의 수는 500명 이상으로 추정하 있다. 그 아이들이 벌써 30살의 성인이 되었는데 이들 중 82명이 DNA 검사를 통해 혈육을 되찾았다.

수용서에서 테어나 군부가 키운 올해 28세의 마리아 호세의 이야기는 눈물겨운 사연이다. 마리아는 20세가 되어서야 어머니가 임신한 몸으로 수용소에 연행된 뒤 마리아를 낳고 살해된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마리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겪었다. 하지만 그 후부터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기들이 이미 20대 후반이지만 그들을 찾아 내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반공친미 독재 종식후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민중의 시위와 실종 된 가족의 유해라도 찾으려는 애타는 유족들의 항의는 오늘 까지도 끄치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장에서 게속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30분에는 어김없이 아르헨티나의 민주화의 요람인 마요광장에는 백발의 노인들이 잃어 버린 자식의 이름을 새긴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 또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군부독재 시절 “죽음의 수용소” 에서 복역중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살아남은
올헤 77세의 로페즈는 법정 예심에서 군사정권 당시 경찰 수사관들이 저지른 고문과 반인륜적 행위에 대하여 낱낱이 증언을 했다.

이제는 최종진술을 하기 위하여 내일 출두하게 되여 있는데 출두 바로 전날
이 77세의 로페즈는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졌다. 마치도 정형근의 귀신이 오늘 아르헨티나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모양을 방불하는 것 같다.

1970년대와 80년대 같은 시기에 한국과 아르헨티나에서 거의 비슷한 군부독재의 만행이 발생되었다.

이에 대하여 그 “닮은 꼴” 을 생생히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쿠테타와 독재만행은 미국의 지원과 미국의 묵인하에서 이뤄졌다. 이 사실을 오늘 아르헨티나의 정부와 민중은 공공연히 시인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같은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쿠테타가 일어났다. 또 광주 만행 사건도 역시 미국의 지원과 미국의 묵인하에 일어났다는 것은 만인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두 나라에서 행해진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있을까? 광주학살 만행의 주범은 전두환이며 전두환을 뒤에서 끝까지 보호해 주고 있는 세력은 미국의 중앙정보국 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할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1. 간추린 아르헨티나 역사


<##IMAGE##> 1516년에 J. D. 솔리스가 라플라타강을 발견하고, 1535년에 P. 멘도사가 이끄는 스페인 대규모 탐험대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그때 부터 벌써 원주민 대량 집단 학살은 시작되었다.

1580년에 스페인 침략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공략함으로 아르헨티나 에서 식민지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산악지대에는 공격적인 원주민 인디언들이 자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정착이 타지역보다 약간 늦어졌다. 그리하여 페루에 정착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남하하여 지금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서 집중하여 도시를 이루었다.

아르헨티나에는 값비싼 광물자원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주국 스페인은 관심을 다른 지역으로 돌리고 아르헨티나를 잠시 방치했다. 이로인하여 인구의 증가가 늦어졌다.

스페인 황제는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에 대한 “엔코미엔다” 라는 특별 제도를 허용했다. 이 제도는 스페인 왕정의 군인들이 직접 원주민을 공격하고 살해하여 령토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페인 이주자들에게 통치권을 위탁하는 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주민과 이주민사이에 접촉은 군사적 공격이나 전쟁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타지역 보다 에스파니인과 원주민 사이에 혼혈이 더 많아 젔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지역이 넓고 원시림 지대가 많이 있기 때문에 백인들의 침략의 속도가 늦어 진 탓으로 1883년 까지도 백인들이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원주민 인디언과 서로 대치한 상태로 남아 있는 지역이 있었다.

1806년에 영국군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공하여 스페인 부왕이 도망가는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인들이 선전하여 영국군을 격퇴시켰다.

1810년에 아르헨티나의 백인 2세 (criollo) 들이 스페인 부왕을 강제로 퇴임시키
고 “집정위원회”를 설립하였다. 1816년에는 각 지방 대표들이 모여 정식으로 스페인 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유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독립한 아르헨티나에는 중앙집권파와 연방주의파가 서로 대립하여 내분이 계속 되다가 1826년에야 비로소 리바다비아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했다. 불행하게 리바다비아 대통령은 1827년에 사임하고 아르헨티나는 1835년까지 내전으로 진통을 겪게 되었다.

1800년대에서 1900년대로 넘어가는 한 세기 동안에 아르헨티나 헌법은 1825년, 1853년, 1860년, 1866년, 1898년, 1948년에 여러 차례 개정 되었다. 독립후에 발생한 쿠테타와 정권 교체는 그 수를 이루 다 파악하기 골란하다.

아르헨티나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켜 외화를 획득하는 기회를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역시 연합군에 대한 지지문제로 양론으로 갈라젔으나 대체로 중립을 지켰다.

아르헨티나에서 역사상 최초로 이리고엔 대통령의 급진당 정권이 1916년에 탄생 했다. 20세기 초에 급속히 발전하는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척됨에 따라 노동운동이 사화적으로 구조 속에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리고엔 대통령의 급진당 정권은 아르헨티나의 사회주의제도와 노동운동의 선구자가 될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리고엔 대통령의 꿈은 세계적으로 들어닥친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난관에 부딪쳤다.

1930년에 또 다시 보수주의 세력의 쿠테타로 인하여 좌익 급진당은 몰락했다. 강경보수파가 집권하여 3대에 걸처 정권을 잡음으로써 진보와 보수의 대립하는 정변은 10여년 게속 되었다.

1944년에 또 다른 쿠테타로 좌익 파렐정권이 등장했다. 파렐 정권하에서 페론은 부대통령, 국방장관과 노동부 장관등 중요한 요직을 맡었다. 페론은 파렐정권에서 실권을 잡음으로써 여기서부터 페론당과 페로니즘의 시발점이 되었다.


2. 페론은 누구인가


<##IMAGE##> 후안 페론 (Juan Peron) 은 1895년 10월 8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태리계 백인과 원주민과의 혼혈의 후손으로 태어 났다. 어려서 엄격한 천주교를 믿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6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엄격한 학창생활을 했다.

페론은 1915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되었다. 페론은 비교적 평범한 군인 생활을 하면서 사관학교에서 군사역사 교수로 봉직 했으며 군사역사에 관한 5권의 책을 출판 하기도 했다. 1928년에 미모의 여성 Aurella 와 결혼을 했으나 1938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페론의 군인정신은 불의에 항거하는 투지로 점차 싻트기 시작했다. 1930년에
독재자 Irigoyen 대통령을 타도하는 군민연합 쿠테타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36 년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되었다.

1938년에 페론은 군사 시찰단원으로 유럽 여행을 했는데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헝가리,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나라들을 시찰했다. 이 여행을 통해서 세계 정
치에 대하여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페론은 1941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령관급 장교들을 중심하여 GOU (Group of United Officers) 를 창설하여 나라를 위한 “형제애 운동” 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43년에 Castillo 대통령이 친 영국 대지주를 국방장관으로 임명 한데 대한 항 의에 주동적 역할을 했으며 대통령은 사직하고 영국으로 도망쳤다.

1944년에 쿠테타로 좌익 파렐 정권이 등장했고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부통령이 되었다. 페론은 부통령 뿐만 아니라 국방장관, 노동장관, 사회개혁 위원회 위원장등 국가 요직을 모두 맡음으로 좌익적 국정에 있어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페론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결정적으로 성공과 실패가 모두 가능한 운명적 획기적 시기 이었다. 페론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을 확장 했다. 사회개혁 운동을 단행하여 우익 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낡은 제도를 뜯어 고치려고 했다.

페론의 개혁정신을 “페로니즘” 으로 규정하고 조직적인 반페로니즘 운동이 시
작 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카토릭(Catholic) 교회가 선두에 나서서 반페로니즘을 선동하면서 군부의 우익 쿠테타를 지원했다.

이발로스 장군이 이끄는 우익 쿠테타로 좌익 파랠 정권은 무너졌다. 페론은 중범죄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섬나라 감옥에 보내져서 감옥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르헨티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화적 사건” 이 발생했다. 에비타는 페론에게 해방자이며, 정치적 동지이며 그리고 열열한 애인 이었다. 에비타는 페론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노동자와 근로 대중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하여 노동자들과 근로자들을 총동원하여 반정부 데모를 감행하면서 페론 석방 운동을 전개했다. 페론 석방을 위한 민중들의 데모는 전국적을 확장되었고 정세는 급변하여 당국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에비타는 반정부 민중운동의 총본부를 감옥으로 정하고 본부장을 감옥에 있는 페론이 맡도록 사전에 비밀로 모의했다. 에비타는 감옥에 있는 페론에게 열열한 사랑의 연애 편지를 매일 썼다.에비타는 중요 정치인들을 백방으로 접촉하여 페론의 석방을 위하여 정치적 활약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지 않었던가?
1945년에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이 길거리에 나서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격열한 장면속에서 페론은 드디어 감옥에서 석방되여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 왔다. 바로 이 장면이 에비타 뮤지컬에 나오는 중심장면이다.

페론은 출옥하여 돌아 왔을 뿐만 아니라 부통령의 자리까지 복귀 했다. 석방되여 나온 페론은 1945년에 에비타와 행복한 결혼을 했다.


페론은 1946년 2월24일에 대선에 출마하여 54%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국모가 되었다. 페론 대통령은 1952년에 또다시 재선되여 1955년까지 집권했다. 페론은 아내인 아비타와 함께 노동자보호정책, 사회보장제도, 국가주도의 산업 등 큼직한 과제들을 풀어 나아가면서 사회주의 나라건설에 주력했다. 페론과 에비타의 해피 엔딩은 여기까지 지속 되었다.

페론의 권력이 막강해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 질 수록 페론을 반대하는 반페로니즘의 운동도 역시 막강해 졌다. 그의 진보적 지도력은 외세와 사대주의의 저항에 부딪친다. 여기에서 결정적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미국의 비밀 공작이었고, 이와 합세하여 방해했던 세력은 Catholic 교회의 구조적 반정부 조직이었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연합은 페론의 권력기반을 요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페론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패배의 원인은 페론의 애처 에비타의 사망 이었다. 1952년 7월 26일에 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비타는 암으로 사망했다.

에비타의 존재는 애인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등뼈와 같은 존재이었다. 페론정권의 지주는 에비타의 정열과 민중을 사랑하는 에비타의 이념이었다 .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페론은 태풍처럼 밀려오는 자본주의와 보수파의 반발과 그리고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의 동향 등으로 인하여 의기소침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페론의 통치력이 강력할 때는 페론정권을 반대하는 Catholic 사제들을 외국으로 추
방할 정도로 강경한 대통령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애처를 잃고 우울증에 빠진 페론은 날개 꺾어진 독수리 모양으로 원수들에게 공격의 기회만 제공해 줄
뿐 이었다.

1955년 9월16일 로나르다 장군이 주도하는 우익 군부 쿠테타로 페론은 파라과이 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18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하지만 군부가 장악한 아르헨티나는 평온하지 못했다. 노조는 없어지고 외국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정부와 민중 사이에 관계는 화해와 협력이 아니라 분열과 적대관계만 쌓여 갔다. 이러한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 되여 아르헨티나는 다시 홀란에 빠지게 되었다.

18년후에 민중의 봉기는 다시 극에 달하여 현직 대통령 Campora 는 1973년 7월에 민중의 봉기로 하야 했다. 이 때 또다시 망명중인 페론은 열광적인 민중의 환영을 받으면서, 이번에는 감옥에서 부터가 아니라 외국의 망명으로부터 귀환하여 62%의 민중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또 다시 당선 되었다. 세번째로 재집권을 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에비타가 없는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페론은 외국에서 18년동안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세번째 걸혼을 하여 Isabel 을 아내로 맞이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페론은 세번째 재집권을 하면서 Isabel 을 부대통령의 자리에 앉혀 놓았다.

세번째 재집권을 시작한 페론은 강경책을 피하고 온건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노선을 정책으로 내세웠다. 이로인하여 페론 진영 안에 강경노선과 온건노선으로 두파가 대립과 갈등으로 맞서게 되어 페론은 심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런 와중에 페론 대통령은 1974년 7월1일에 세번째 집권한지 8개월만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페론의 생애가 끝나자 그의 세번째 부인이며 또 부대통령이기도한 Isabel 이 정권을 계승하게 되었다. Isabel 은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경제위기와 우익 반동들의 테로로 인하여 1976년에 해임 당했다. Isabel 은 아직 생존해 있으며 현재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다.

3. 공포가 지배하는 아르헨티나

<##IMAGE##> 1976년에 Isabel 대통령을 해임시키고 정권을 탈취한 군부는 1976년3월에 “군사평의회” 라는 명칭으로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독재 권력 기구를 창설했다. 의회와 법원을 해산하고 혹독한 군정이 새로 시작되었다.

“더러운 전쟁” (Dirty War of 1976-1983) 은 이때부터 이렇게 시작 되었던 것이다.

군장성 3인방은 “반공을 국시로 한다” 는 전제하에 좌경의 뿌리를 뽑는것이
사명이라고 주장 했다. 폐론과 에비타가 뿌려 놓은 사회주의 운동의 씨앗을 말살 시키려고 했다.

니카라과의 친미 독재자 소모사 와 칠레의 최악의 독재자 피노체트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잔인하고 포악한 반민족적 친미 악당 세 사람이 아르헨티나의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는 비운을 맞는다.

3인방 독재 체제는 군 장성 J. 비델라, E. 비올라, L. 갈티엘리 세 인물들이었다.이 세사람의 명령으로 30,000 명이 죽었고, 30,000 명이 납치와 고문을 당했으며 14,000 명이 이유도 모르면서 투옥 되었다. 도시마다 공공 건물을 개조하여 수용소 300개를 만들러 놓고 정부에 대하여 반대를 말하기만 하면 공산주의자 라고 정죄하고 무조건 수용소에 잡아 넣었다. 일단 수용소에 가기만 하면 인생이 끝장나는 것으로 공포사회 분위기가 아르헨티나 전국을 휩쓸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오늘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때 군인들은 신 처럼 행동 했다” 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때 군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약 너는 죽는다고 말하면 너는 죽는다” “너를 산다 하면 너는 산다” 그때 8년동안 사람들의 생사는 군인들의 기분에 좌우 되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는 6/25 전쟁 같은것을 모르는 나라이다. 38선도 없는 나라 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렇게도 반공이라고 하는 그 하나 때문에 독재를 하면서 동족을 무자비하게 죽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미국의 안보를 위하여 약소국들이 이용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 나라의 기득권자들과 결탁하여 약자들을 학대하면서 이득을 취하고 종속관게를 맺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영원한 부자가 되고 약자들은 영원한 약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튼튼 한 세계적 사회 구조를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부패한 종교가 강자들의 편에서서 부귀를 신의 축복이라고만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설명들은 단지 하나의 추상적 논리에 불과하다. 그러면 실제적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미국의 중앙정보국 공작 때문이며, 이 공작에 의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다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남미에서 미국의 중앙정보국이 어느 정도 공작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실 하나를 소개한다.

“ 미국의 신구교 선교사들이 명백한 CIA 의 소스가 되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아마 유일한 정보원이 되고 있을 것이다. 1만2천명의 미국인 선교사들이 남미 각 지역에서 CIA 와 협력 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 났다. 1960년-70년대에 미국정부의 남미정책이 “ 경제개발과 반공주의” 라는 정책에 선교사들이 모두 동조 했다.”

한 퇴직한 CIA 요원은 남미에서 활동했던 1970년대 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기랄, 나는 목표를 한걸음 이라도 달성하는 것이라면 누구든지 다 이용 했다. 나는 불교 승려, 카톨릭 사제들 그리고 카톨릭 주교까지 이용했다. 미국 CIA 가 남미에서 우익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선교사들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 독재 정권들이 반공주의적이라고 주장 했기 때문 이었다.”

위와 같은 예들은 수천 수만가지가 있다.
어쨌던, 1983년에 그 무시무시 했던 “ 더러운 전쟁” 독재 정권은 8년만에 물러가고 아르헨티나에 또 다시 민주화의 새 봄이 오기 시작했다.

1983년에 민정 이양을위한 대통령선거에서 급진 시민당의 R. 알포신이 취임 했다.
1989년에 선거를 통한 승리와 1994년에 재선의 승리로 페론당의 C. 메넴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으로 두번 취임했다.

2001년에 두알레 대통령 (임시)이 취임하여 집권을 했다. 2003년과 2006년에 페론당의 키르체네르 대통령이 초선과 재선에 승리하여 현제 두번 취임하여 집권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는 “더러운 전쟁” 이 물러간지 20여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남아 있다. 그 수수께끼와 과제는 “더러운 전쟁” 의 전범자들을 아직도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범자 3인방 군인 중에서 두목인 비델라 장군에게 사형이 선고 되었다. 그리고 비욜라 장군에게는 17년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1985년에 선고를 해 놓고 1990년에 이들을 모두 다 사면을 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아르헨티나의 오늘의 사회적 구조를 살펴보았다. 아르헨티나의 인종 구성은 원주민과 흑인, 백인과 백인혼혈인 들인데 백인들이 주로 도시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백인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폴랜드, 프랑스, 독일, 유태인들인들이다.

유태인들은 약 30만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면서 뉴욕 다음가는 세계
적 유수의한 유태인게 회사들을 운영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후 나치스 잔당 6만명이 아르헨티나에 이주하여 살고 있다는 것도 특기할 사실이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90%가 Catholic 이며 사회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회구조가 “더러운 전쟁”의 민족 반역적 전범자들이 사면을 받고 뻐젖이 살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오늘 한국에서 5.18 민중항쟁의 전범자와 18년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계통의 전범자들이 하등의 처벌 없이 뻐젖이 살고 있는 사실은 둘이 똑 같은 맥락이라고 판단 된다.

그 똑 같은 맥락이란 친미 군사 재벌과 친미 기득권 세력들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끊임 없는 공작에 이용을 당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맥락이 풀리지 않는한 아르헨티나의 공포는 살아지지 않을 것이다.

4. 키르치네르 대통령, 부시에 앙심

지난 3월9일 부시 대통령이 남미 순방길에 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장 에서는 대대적인 반미 반 세계화 집회가 열렸다. 남미 나라들을 분열 시키려는 부시의 잔꾀에 대하여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더러운 전쟁” 발생 28주년 기념식에서 독재 시대 고문장소에 “기억의 기념관”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독재 정권 시대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과거 정권들이 침묵해온 것을 국민에게 사과하면서 범죄자들에대한 단호한 처벌을 약속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40년 군부 독재로 눈덩이 처럼 쌓인 국제금융기구(IMF)의 차관 95억 달러를 깨끗히 청산하고 아르헨티나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 같은 정책은 한국이 보여진 친미사대주의 정책과는 대조를 이룬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을 중심하여 룰라 대통령과 차베스 대통령 등 남미 지도자들은 남북을 연결하는 1만 킬로미터(km)의 가스관을 6년안에 완공 할 것을 전망하고 있다. 이들의 꿈은 외교 안보 경제에 있어서 대미 의존을 벗어나 역내 안보 강화와 경제권을 나토와 유사한 기구로 창설할 것을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82년 군정시절에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군도 영유권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했으나 패배했다. 영국은 1765년에 상육했을 때 무인도 인것을 영국이 먼저 점령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가 1810년에 스폐인에서 독립할 당시 분명히 아르헨티나 영토로 편입시킨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영국에게 물러서지 않을 것을 벍혔다.

페로니즘의 조상인 페론은 여성 지도자 에비타를 아내로 맞이하여 사상과 이념에 있어서 강력한 동반자로 활약했었다. 마찬가지로 키르체네르 대통령도 그의 아내가 같은 페론당 소속으으로 상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동반자로 활약하고 있다.

페론이 1943년 처음으로 좌파 페론당을 창설하였으며 그후 페론당은 줄곳 의회에서 페로니즘의 전통을 이어왔다. 키르체네르 대통령의 영부인 크리스티나도 제2의 에비타로 불리울 만큼 미모의 여성이며 정열적인 꿈을 소유하고 있는 여성정치인이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여동생 알샤도 정부의 사회개발 장관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페론당은 근로 대중을 중산층으로 육성하여 중남미를 하나로 묶어 단합 시키는 선구자적 길을 달리고 있다.

키르체네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와 근로 대중을 반드시 중산층으로 만들어 내는것이 자신의 사명이며 목표라고 주장한다. 페로니즘의 씨앗은 중남미 여러 나라에 뿌려져서 포플리즘 연대의 결실을 반드시 거두어 들일 것 이라고 주장 한다.

아르헨티나의 2003년 대선에서 1.2.3 위의 득표자 모두가 좌파 페론당 소속의 후보자들 이었다.

페론당의 창시자 후안 페론은 노조를 바탕으로 기득권과 투쟁하면서 주권문제와 함께 인권문제 등을 개척하면서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선구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페론이 죽으지 33년이 되는 오늘날 키르체네르 대통령은 석유 생산국과 석유 소비국의 균형을 위해 국유화 조치를 인정하겠다고 언명했다. 페론과 페론당의 사기와 전통을 축하하며.(끝)

유태영 3/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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