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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목사]브라질 진보계 지도자 룰라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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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7-03-24 00:00 조회12,8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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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민족통신 종합]재미통일운동 지도자 유태영 목사(77,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이며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은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니콰라과, 에콰도르, 칠레에 이어 이번에는 브라질의 노동자당 룰라 대통령의 재선성공의 배경과 남미 좌파전선의 확대 가속화 현상에 대한 논문을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했다. 유 목사는 이번 글을 통하여 "에과도르의 코레아 대통령, 페루의 중도좌파 가르시아 대통령,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 칠레의 중도좌파 바첼레트 대통령, 니카라과 의 오르테가 대통령,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 브라질 룰라 대통령, 아르헨티나등 12개 나라들이 남미국가공동체(CSN)를 형성하여 상호협력을 다짐함으로써 남미 내 좌파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남미지역의 반제반미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검증해 주었다.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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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집권 노동자당 룰라 대통령 재선 성공

남미 좌파벨트 확대 가속화

*글: 유태영 목사(재미통일운동원로)


<##IMAGE##> 브라질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인 루이스 룰라 대통령이 2006년 10월 29일에 실시된 대선 결선 투표에서 60.79% 의 특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남미의 좌파 대표주자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3선 재선의 승리는 남미 좌파벨트 행진의 선두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번에 두번째로 룰라 대통령의 재선 승리는 사실상 남미에서 반미반제 좌파전선(벨트)이 확대 되었고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을 확증 하였다.

에과도르의 코레아 대통령, 페루의 중도좌파 가르시아 대통령,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 칠레의 중도좌파 바첼레트 대통령, 니카라과 의 오르테가 대통령,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 브라질 룰라 대통령, 아르헨티나등 12개 나라들이 남미국가공동체 (CSN)를 형성하여 상호협력을 다짐함으로써 남미 내 좌파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남미 나라들에게 강요해 온 미국의 신자유주의 개방정책은 남미의 빈곤을 심화시킬뿐만 아니라 빈부의 양극화를 더욱 더 심화시켰다. 이로인하여 사실상 오늘 남미에서 친미 보수주의를 그냥 지키고 있는 나라는 콜롬비아, 과데말라, 멕시코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 3월8일 부터 14일 까지 6박7일간 부시 대통령은 남미 5개국을 순방 하고 돌아왔다. 부시 대통령은 순방 길에서 시종 남미의 빈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발언을 게속했다. 남미의 반미감정을 우려하는 부시의 초조한 심정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러면서도 부시는 빈곤을 퇴치하기위하여 미국의 신자유무역 정책을 선택하라고 강조하여 극히 모순된 자가당착 증세를 여전히 드러냈다.

부시 대통령의 거짓말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바로 그날 그 현장에서 신문 기자들의 보도를 통해서 폭로되었다. 부시와 함께 순방길에 나선 관료들 마저 도 여러 나라 신문 기자들과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주장하는 신자유무역은 절대로 남미의 빈곤층에게 이익을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에게 미국을 공격 하도록 기회를 제공해 줄뿐이며 남미의 나라들이 반미동맹을 맺도록 기회를 줄 뿐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우호적인 나라라고 생각하는 콜롬비아, 멕시코, 과테말라에서까지도 반미반제 시위를 강행하여 부시 대통령의 체면을 추락 시켰다.

콜롬비아, 멕시코등 친미적인 우파 나라의 학생들과 민중들이 반부시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했는데 부시는 콜롬비아에서 6시간 밖에 체류하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의 남미 5개국 순방길에서 첫 방문지인 브라질에서는 도착하 기도 전에 시위대 6천여 명이 극렬한 반미 시위를 벌였다. 또 브라질 중부지역 고이아니아에서는 농민단체 (MST) 수천명이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월마트와 맥도날드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편 분노한 시위군중은 미국 영사관을 공격 하여 건물 일부를 파손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브라질에서 부시 대통령이 통과하는 도로 주위 건물 벽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 들이 써 있었다. “ 나가라 부시“ “위선적 행동 금메달”.

부시 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한 후 16억 달러를 남미 나라들에게 원조 했다고 힘주어 과시했다. 이에 대하여 브라질 언론은 즉답으로 논평했다.

“남미 원조금 16억 달러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5일간 전쟁을 벌이는 비용이다”

부시 대통령은 브라질에서 “에탄올 동맹” 을 제안하면서 주요 의제로 내놓았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에탄올동맹을 제안한 것 은 대체연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맹을 제안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부시는 마음 속에 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의도는 차베스 대통령이 “오일 머니” 를 앞세워 남미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아가고 있는데 대한 견제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 언론들은 부시의 주장이나 약속이나 언질들은 모두 다 “ 말 잔치” 에
불과 한 것이라고 평가 했다. 브라질내 국제문제 전문가는 2009년에 집권 임기가 종료되는 부시 대통령의 이번 순방은 어차피 손이 묶인 상태에서 이루어진 순방이기 때문에 별로 기대할 것 없는것 이라고 평가했다.

룰라 대통령은 자기자신이 구두닦이 출신이며 가난한 노동자 출신이었음을 숨김 없이 드러내면서 친근하게 서민에게 다가 서곤 하였다. 브라질 역사 이래 제3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룰라 대통령은 27개 주 중에서 찬 반 성향으로 둘로 나누어진 경제적 분석에 의하면 단연코 서민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브라질의 어제와 오늘 500년 역사를 3기로 나눈다.
1. 포르투갈 식민지 시기 1500 – 1822
2. 브라질 독립 시기 1822 – 1889
3. 브라질 공화국 시기 1889 – 2007


<##IMAGE##> 브라질은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 식민지로부터 일어선 나라이다. 브라질은 유럽의 여러 인종과 나라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 포르투갈 전통문화와 혼합되어서 차츰 독자적인 브라질 문화를 형성 하였다. 특히 남부 지역에는 이탈리아, 독일과 프랑스등의 이민자들의 영향이 강하며 문화 수준은 복합적 이다. 면적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47%를 차지하 는 광대한 영토이지만 인구는 1억 8210만, 1km*당 20명 밖에 안 된다.

코리아 전쟁때 미국은 브라질에게 파병을 요청했는데 브라질 바르가스 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여 브라질 군인이 참전 하지 않었다. 하지만 1950년대에 유엔은 6.25전쟁 반공포로 50명을 브라질로 보냈다. 브라질은 유엔의 요구를 받아 들임으로써 브라질 이민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 그후 1963년에 제1차 이민단 으로 17세대 92명이 브라질 농장으로 이민왔다.


1. 브라질은 원주민 인디언의 땅

1500년에 포르투갈 탐험가 Cabral 이 목적지 인도를 향하여 항해 하던중 우연히 미지의 땅을 발견하여 상륙한 곳이 바로 오늘의 브라질 이었다. 그때 브라질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어느 때부터 살었으며 또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역사가들은 적어도 3만년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주민 인디언의 수는 370만 - 50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수는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수가 아니라 브라질 내에서 아마존 강변 지역을 중심하여 집중되여 살고 있던 원주민의 수를 말하는 것이다.

원주민들은 지역마다 여러 부족들로 갈라저서 제각기 부족의 전통과 특색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개 4개의 상이한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판단한다. 포르투갈 침략자들은 약 100만의 원주민들을 노동노예로 사용하면서 미지의 땅을 개척해 나아갔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양국간의 “해외영토분활조약”을 맺었다. 포르투갈은 자국의 영토를 확보한 후에 귀족들에게 분활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부여했다. 이것이 오늘날 까지 브라질에서 대토지 소유제의 기원이 되었다.

포르투갈 침략자들은 개척 사업의 용도에 따라 원주민 부족들을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동을 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원주민 부족들끼리 서로 충돌하고 대항하여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침략자들은 원주민들이 서로 충돌하고 싸우는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원주민 통솔의 방법으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침략 초기부터 다른 나라들보다 독특한 방법으로 침략정책을 시행했는데 해양무역의 종주국의 역할을 했다. 목재, 설탕, 포도주, 향료 등을 유럽으로 대량 수출 했다.

1549년에 포르투갈 총독부가 브라질에 신설되였다.

17세기 중엽에 아프리카에서 끌어드린 흑인만으로는 노동력이 부족하게된 포르투갈 침략자들은 “인디오 사냥부대”를 편성하여 아마존 깊은 밀림지대를 공략하여 인디언들을 대량 붙들어 노동노예로 삼았으며 그 밀림지대를 브라질 영토로 편입 시켰다. 이 시기에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금광이 발견되었다.

포르투갈 침략자들은 이 시기를 골드러시(Gold Rush)가 시작된 “황금시대” 라 부른다. 하지만 1700년대가 끝나고 1800년대가 시작될 무렵에 금광은 쇠퇴 해지고
그 대신 “커피시대” 가 왔다. 커피는 1727년부터 재배를 시작 했는데 1850년경 브라질이 커피생산 세계 제1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세계 총생산 절반(½)을 차지했다.


2. 포르투갈 통치에서 독립한 브라질

1807년에 프랑스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략함으로 포르투갈 황태자“ 돈 후안 6세”와 황태자 “ 돔 페드루” 두 형제인 황태자들이 브라질로 탈출해 왔다. 1816년에 브라질에서 돈 후안 6세가 왕위에 올라 푸르투갈과 브라질을 하나로 묶어 “연합왕국”을 건설 했다.

1820년에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호헌혁명이 일어나 프랑스는 물러가고 포르투갈의 국권을 회복하게 됬다. 국권을 회복한 포르투갈은 도피중인 황태자 돈 후안을 귀국 시켜 포르투갈의 왕위에 오르게 했다.

<##IMAGE##> 돈 후안 황태자는 포르투갈 본국의 왕위에 올라 귀환하여 브라질을 떠나 갔다.
하지만 작은 아들인 돔 페드루 황태자는 여전히 브라질에 남아 있게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연합왕국 이라고 했던 것은 무효가 되었고 브라질은 또 다시 예전대로 포르투갈의 남미 식민지로 여전히 남아 있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돔 페드루 나이 어린 황태자를 브라질에 그냥 남겨둔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데 브라질에서 큰 이변이 벌어 젔다. 브라질에 혼자 남아 있게 했던 작은 아들 돔 페드루 황태자가 1822년에 브라질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브라질 왕이된 황태자는 “돔 페드루 1세” 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브라질의 초대 황제로 왕위에 올라 앉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의 황태자 형제가 모두 다 두나라의 왕위에 올라 앉게 된것이다. 이것은 포르투갈 침략자들이 사전에 꾸민 고도의 정략에 의한 계획이었던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후 1824년에 브라질의 새 헌법이 제정 되었고, 이듬해인 1825년에 브라질은 자주독립을 선언했고, 포르투갈은 공식적으로 시인 했다. 독립을 시인했지만 독립한 브라질의 왕은 여전히 포르투갈의 황태자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절대군주적 헌법이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브라질은 1888년에 노예제도 폐지를 선포했다. 이것은 그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어쩔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하지만 대지주들과 군부는 노예제도 폐지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품고 1889년에 “공화혁명”이라는 반란을 일으켰다. 대지주들과 군부가 비로서 처음으로 포르투갈 왕정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반란 세력은 브라질의 제1 공화국을 설립을 선포했다.

포르투갈을 배경으로하여 왕권을 유지해 오던 왕가도 이제는 더 이상 브라질 에서 왕권을 지탱할 수 없는 새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1889년에 드디어 포르투갈은 브라질과의 400년의 역사적 깊은 인연을 깨끗이 청산하고 페드루 1세 왕가의 가족들은 모두 다 브라질을 떠나 포르투갈로 영구 귀국 했다.

3. 브라질의 좌파정권 시대 대두

1800년대에서 1900년대로 넘어가는 브라질의 사회적 현실은 정치적 사막에 씨를 뿌리고 내일의 열매를 기대하는 사람과 같은 형편이었다. 400여년의 긴 침략의 역사를 뒤에 남겨 놓고 마지못해 떠나간 포르투갈 왕권정치의 낡은 풍토의 해빙을 그리 쉽게 단시일 내에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권정부가 물러간 후에 제 1 공화국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군부와 소수의 부유층들은 반역적 이었고 불법적 이었으며 만사에 무질서 하게 행동 했다. 1889년에 공화국의 첫번 대통령으로 데오도로가 취임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부자들의 독재를 공식화 하기위한 수단에 불과한것 뿐 이였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브라질에 선거제도가 도입되기는 했다. 하지만 2천2백만 인구중에서 62만명만이 선거권 을 행사할 수 있는 부자들과 군인만을 위한 선거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왕정은 늦게나마 없어졌다 할지라도 그후에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정권이 들어서기까지는 몇십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1930년에 비로서 처음으로 브라질에 민중을위한 바르가스 시대가 열였다.바르가스는 역사적으로 쌓이고 쌓인 착취와 억압의 정치적 제도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적 지평을 열어 나아갈 것을 꿈꾸었다.

바르가스는 공장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정치력을 강조 했으며,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 엘리트들의 특권을 제한시키는 정책을 구상했다. 그리하여 1933년에 제헌의회가 신설되었고 1934년에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로인하여 브라질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의 색채가 뚜렷하게 밝혀졌으며 그것은 대통령 선거에서 앞도적으로 당선되는 계기를 만드렉 되었다.

바르가스 대통령은 국유철강회사를 신설하여 민족공업 육성에 주력했으며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하여 노동자계급을 보호 하고 육성 하는데 힘썼다. 하지만 400년간 뿌리 깊이 박혀져 있는 피침략의 잠재의식과 기득권 세력들의 거부반응은 말로 형언 할 수 없이 어려운 태산이며 굳은 장벽 이었다.

이 험한 산을 넘고 굳은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바르가스 대통령은 비상 수단 으로 강권을 발동하여 이른바 자칭 쿠테타를 일으켰다. 쿠테타가 발동하여 국회는 폐지되고 정권의 주요 직책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게 되었다.

이로인하여 한편 노동법에의한 노동자 임금보장과 노동법의 도입이 추진되고 외국자본의 엄격한 규제가 시행되고 외국어 교육에도 엄격한 제한을 두게 되었다. 사회주의적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정책이 과감하게 추진되었다.

1955년에 바르가스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하여 쿠비체크가 브라질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기는 했으나 정세는 불안해 졌으며 그 틈을 타고 미국의 외국자본이 브라질로 뜷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IMAGE##> 1965년에 미국이 지원하며 브렁크 장군이 주도하는 군부 쿠테타로 인하여 브라질은 그동안 쌓아 놓은 민족주의적 공과는 사라지고 민족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체포와 고문, 투옥과 추방으로 친미 우익 군정이 15년동안 게속되었다.

15년 군정의 결과는 무엇인가?
원조와 차관도입으로 외세의존도는 태산처럼 높아졌다. 로열티 지불형태로 많은 국내자본이 외국으로 유출되여 대외채무만 누적되었다.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여 군부정권의 교체를 요구하는 민원의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브라질의 최초의 좌파 사회주의정권의 창시자 바르가스 대통령 사망후 21년 만에 또 다시 브라질에 새봄이 돌아 왔다. 1985년에 시르네이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시르네이 대통령은 군정을 종식 시키고 민정을 정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정치 제도의 시발점을 다시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대통령 직선제도입, 공산당 합법화, 국가보안법철폐, 군의 역할은 국방에만 국한 시키는등 많은 법과 제도를 창설하고 도입했다.

1994년에 민주주의적 민선에 의하여 사회학자이며 사회민주당 소속 카르도조 후보자가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카르도조 대통령은 브라질 역사상 최초로 재선에 성공하여 1998년 10월에 제2기 집권을 시작하였으며 2003년에 후임자 룰라 대통령에게 브라질 통치권을 이양 했다.

4. 노동자당 룰라 대통령의 제2기 집권

브라질에서 사회주의적 민족의식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 바르가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77년이 경과된 2007년에 를라 대통령이 61%대 35% 의 격차로 상대방을 물리치고 재선에 승리 했다.

룰라 대통령 당선후 그의 여러 발언중 가장 주목을 끄는 말은 “중남미 통합의 목적은 중국보다 강력한 통합중남미의 건설이다” 라고 했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이게 하는 발언인가?

미국은 안중에도 없다고 하는 당당한 룰라 대통령의 발언은 베네수엘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룰라 대통령과 차베스 대통령의 주도하에 남미공동시장 (메르코수르)이 앞으로 추진될것이며 이것은 유럽연합 의회와 같은 영향이 전 세계에 미칠 것이다.

룰라-차베스 단합은 명실공히 남미좌파 단합이며 미국에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악몽이 되고 있다. 이 악몽을 깨쳐 보려고 부시 대통령은 뒤늦은 중남미 순방길에 나서 보았지만 그 결과는 가는 곳마다 썰렁한 반응만 맛보고 돌아 왔다.

룰라 대통령은 아주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을 토해내는 인물이다. 베네수엘라를 방문 했을때 “브라질은 베네수엘라가 필요하고, 베네수엘라는 브라질이 필요하다”라고 솔직히 발언하여 청중의 인기를 끌었다. 이말에는 모든것이 다 포함된 뜻 깊은 발언이다.

룰라 대통령은 지금까지 세계의 관심거리 중의 하나인 아마존 열대우림 보호를 위하여 브라질 정부의 절대적인 주권행사를 발휘하였다. 그는 2020년까지 에너지를 보다 싼 값으로 공급하기 위하여 4개의 원자발전소를 추가 건설할 것을 발표 했다.

룰라 대통령은 누구인가?

<##IMAGE##> 1964년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 쿠테타 시기에 룰라는 젊은 나이로 반정부 좌익 노동 운동가라는 죄목으로 투옥을 당했다.

그 당시 쿠테타는 미국이 사전에 면밀히 계획했으며 6척의 군함이 해상에서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었다.쿠테타가 성공한 후에 미국의 원조와 자본은 쏟아져 들어 왔으며, 군인들은 미국의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1964년 쿠테타 정권시기에 일시적이나마 친미적 노선을 따른 것만은 분명한 사실 이었다. 그러나 그후 민정이양 후에는 곧 자주노선 쪽으로 돌아 섰다. 브라질은 백인 흑인 인디오의 혼혈인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룰라 대통령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진보적 지도자였다. 그는 구두수선공, 금속노동자, 노동자당 당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노동자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민주화 이후 대통령 선거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도전해 3전4기로 정권창출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룰라는 변함없이 노동자와 빈민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보수진영과 대립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브라질은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한 나라인데 그 동안 치룬 선거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가난한 자와 부자라는 대결구도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탄생한 좌파 지도자이다.

룰라 대통령 은 지금 “브라질 정신 고양” 을 주창하며 사회주의 자주노선을 힘있게 외치고 있다. (끝)

3/24/07 유 태 영


[남미 진보지향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과 지도자들]


(1) *[특별기고]*남미의 해방자-우고 차베스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2)*[특별기고]*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사회주의로 안정기반---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3)* [특별기고]시민혁명의 선두를 달리는 에콰도르 코레아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4)*[특별기고]민족해방 지도자-니콰라과 오르테가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5)*[특별기고]유태영 목사: 칠레의 진보여성 대통령-바첼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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