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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국통일을 위한 재미동포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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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6-12-28 00:00 조회15,5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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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을 위한 재미동포의 역할

유태영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미국에 살고있는 우리 재미동포의 역사는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1905년에 하와이 이민 외 수는 약 7,200명 이였다. 미국의 이민법이 1965년에 개정됨으로 인하여 한국인의 이민의 물결은 해마다 급격히 증가되어 오늘의 재미동포의 수는 약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쟁의 탄압과 독재의 악순환으로 인한 절망으로 내몰린 한국의 민중은 빈부의 차이를 막론하고 역설적으로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나라 미국에 와서 평화와 안전을 찾으려 한 것이다.

200만의 재미동포들이 이 이민의 나라 미국 땅에서 평화의 씨를 뿌리고 안전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는 이 미국 땅이 정말로 옥토인가? 돌 짝 밭이며 혹은 가시덤불은 아닌가?

재미동포들이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있어서 도대체 우리는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에 대하여 한번 깊이 깊이 재조명을 해 보아야 하겠다.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은 우리의 생존의 문제이며 또한 재미동포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서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뿌리와 토양의 관계는 동전의 앞과 뒤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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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본래 이 미국대륙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대대손손 평화롭게 살던 아름다운 땅이었다.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의 수는 1490년대에 약 1,000만- 1,500만이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300년이 지난 후인 1,800년경에는 이 미국 땅에 생존해 나마있는 인디언의 수는 불과 60만- 80만으로 줄어들고 만 것이다. 어찌하여?

그 이유는 유럽에서 밀려온 백인들 때문 이였다. 희망의 새 천지, 하나님이 주신 새 천지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총과 포를 가지고 처 들어 온 백인들에 의하여 94%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처참하고 잔인하게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인디언들은 활과 창을 가지고 대항을 했지만 그때 벌서 화약을 가지고 총포를 만든 백인들에게 인디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한 자료에 의하면 그때 학살당한 인디언들의 피가 강이 되여 계곡에 흘렀으리라고 기록하였다.

오늘의 미국인들이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전통은 인디언들의 “피의 외침” 을 완전히 외면한 백인침략자들의 축제인 것이다. 오늘 현재 60만-80만 정도의 인디언 원주민들은 소위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서 살고 있는데, 사실은 말이 보호지 “놀고 먹고 살도록 가두어 놓은 감옥” 인 것이다. 이것을 “우민정책”이라고 한다.

일 하지 않고, 공부 안 해도 먹고 살 염려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자연히 오락과 향락에 빠지고 도박과 마약에 중독되고 만다. 백인들의 고등 수단에 의하여 힘없는 인디언들은 역사적으로 계속 멍이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흑인들은 어떠한가?
하늘을 지붕 삼아 태평천하를 누리면서 밀림 속에서 낙천적으로 대대손손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흑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백인들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여기는 내 땅이요, 내 고향이며 내 조국이다 “ 라고 외치면서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선가 생전에 처음 보는 낫선 백인들이 총과 칼을 가지고 떼를 지어 몰려오더니 총 칼로 위협하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노루사냥을 하듯 붙잡아서
손과 발에 쇠사슬을 채웠다. 백인들은 노루산양 하듯 붙잡은 흑인들을 강제로 노예상선에 태워 오래 동안 항해한 후에 내려놓은 곳이 바로 그들이 발견한 이른바 "하나님이 주신 아메리카 신대륙"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바로 미국의 흑인노예제도의 역사이야기이다.
배에서 내려놓은 흑인들은 노예 상품이 되여 동서사방으로 팔려 나갔는데 성과 이름은 주인이 붙여 주는 대로, 결혼도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자식을 낳으면 아이의 소유권도 물론 주인의 것. 1790년경에 미국의 흑인노예의 수는 약 50만 명이었는데 그 후 100년 후에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부르짖을 때 그 때 흑인의수는 1,400만 이었다.

흑인노예의 수가 50만 명일 때 미국의 목화 생산량은 1년에 1,000톤 이였는데, 흑인노예의 수가 400만으로 증가했을 때 미국의 목화생산량은 1년에 1,000,000만 톤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초창기의 기본산업은 목화생산 이었는데 경제의 급성장은 흑인노예 수의 증가와 정비례했던 것이다.

한국이민이 물결치기 시작하던 1960년대의 초반까지 만해도 버스나, 식당이나, 극장 등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흑인들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흑인노예제도를 반대하기로 유명했던 챨스 휘니(Charles Finney)목사는 자기 자신이 목회 하는 교회에서는 여전히 흑백차별을 계속하면서 목회를 했다고 하는 우수 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미국헌법에는 분명히 “모든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와 평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은 “백인들만을 위한 모든 사람” 이지, 흑인들이나 원주민 인디언들은 차안에 부재이었다.

이제는 우리 조선 민족의 문제는 과연 어떠한가를 간단히 요점을 간추려 살펴보자.

한미관계는1866년에 미국침략선 "제너랄 쉐먼호"가 대동강을 통하여 평양에 처음 침입해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평양에는 역대 왕능에 금괴가 파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불법적으로 평양까지 처 들어오는 모험을 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평양시민들이 강변에 몰려와 아우성을 치자 그 당시 미제침략자들은 총포를 발사하여 무고한 평양시민 12명이 사망했다.

그러던 중 대동강의 수위가 갑자기 줄어들자 "쉐먼호"는 양각도 서편에 좌초되고 말았다. 성난 평양시민과 수비군은 "쉐먼호"에 불을 질러 선체를 불태우고 19명의 승선 원들은 모두 불타 죽었다. 그 19명중에는 토마스(Thomas)라는 목사가 있었는데 이 토마스 목사는 본래 선교사로 중국에 와 있었는데 선교본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상선 쉐먼호의 통역관으로 왔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토마스 목사는 무서운 군인모양으로 항상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초기 기독교역사에는 이 토마스 목사를 첫번 순교자라로 미화되어 있었다. 이 또한 얼마나 우수 운 일인가.

그 당시 벌서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일본은 "쉐먼호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에 아부하는 편지(보고)를 보냈다. 미국 국무장관 해밀톤 휘쉬(Hamilton Fish)는 일본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을 했다. “귀하의 친절에 대하여 감사하며, 한국이 충분한 사과를 할 경우에 어떻게 보상을 받을 지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기 바라오”

한국을 가운데 놓고 일본과 미국은 벌서 이때부터 서로서로 밀어주고 도와주는 흥정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1년에 미국은 5척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침범했으며, 1878년에는 일본에게 화약 800만발을 제공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강화도조약”을 맺게 했다.
그리고 1882년에 미국은 강제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서울에서 전기 수도 등의 시설 권을 쟁취했다.

1905년에는 저 유명한 “테프트-가쯔라 비밀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먹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먹기로 밀약을 맺음으로서 “한일합방”이 손쉽게 성사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815를 해방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의 식민지” 로부터 “미국의 식민지”로 주소가 변경된 것뿐이었다.

1945년8월8일에 쏘련이 재빠르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자 미국은 전쟁이 좀더 오래 동안 계속될 줄 알고 소련의 선전포고를 환영했다. 하지만 상상 밖에 일본이 빨리 항복을 했기 때문에 소련이 압록강을 넘어 쉽게 남하하는 것을 막아야 하겠다고 미국은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38도선 분계선” 이였다. 소련군은 너무 남하했다가 미국하라는 대로 뒤로 물러가 38선 이북에 주둔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전승국 3상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10년”을 제안했다. 소련은 짧을수록 좋다고 하면서 5년을 주장했다.

미국은 소련의 역량을 속히 차단하기 위허여 태평양에 있는 미군을 서둘러서 급하게 9월18일에야 뒤늦게 남한에 상륙 시켰으며, 거짓말을 퍼뜨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 라고 거짓 선전을 하여 서울장안을 혼란시켜 놓았다. 서울언론은 처음에는 미국의 말만 듣고 “신탁통치환영” 했다가 몇 일 후에는 “신탁통치반대” 라는 소동을 부리면서 공연히 반소감정만 퍼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승만을 내세워 “친일주의자” 들을 “친미주의자” 로 변신시키면서 남쪽에 단독정권을 수립시켰다. 미국이 식민지통치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어느 나라에서나 순수한 “민족주의자”들은 취급하기가 매우 어렵고 골란 하지만 “기회주의자”들은 취급하기가 퍽 쉽다는 것을 경험상 익숙히 알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미국은 아프리카에서나, 남미에서 하였던 방법처럼 한국에서도 친일파들을 모두 다 등장시켜서 남쪽에 서둘러서 단독 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4.19 청년학생 의거로 한국에 민주화의 봄이 움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은 또다시 뒤에서 준비된 독재군사정권을 등장시켜서 미국에 충성하는 정권을 붙들어 매놓았다. 박정희 정권이 와르르 무너질 때 순진한 민중은 미국의 배후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한 채 너도나도 다 같이 민주화의 일꾼이 되자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 때 미국은 또 다시 어디에 숨겨두었던 “동기호테”라고 할수 있는 3총사.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을 미국의 준비된 각본의 주인공들도 내세워 한국정치무대를 좌지우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미국은 반세기 이상이나 자기의 이익에 충실하는 정치인들을 통해 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오늘의 한나라당은 어떠한가?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씩이나 패배한 후에도 변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일매국의 자식 아닌가? 친미 반 통일의 핏줄기 아닌가?

한나라당 세력은 그 뿌리를 캐보면 반세기동안에 꼴통보수와 수구기득권으로 긁어모은 재산과 영향력으로 사대매국의 길로 들어서 우리 민족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에게 민족은 없다. 이들은 오로지 미국의 지배세력을 섬기는데 주구노릇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럼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패권주의 정책의 실패로 점차 사양길에 접어 든 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미 제국의 멸망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느가에 대해서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200만 재미동포와 그리고 700만 재외동포, 2500만 북녘의 동포, 4500만 남녘 동포들이여 이제 우리들은 미국을 바로 알고 환상에 젖는 의식에서 깨어나자.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는 오직 미 제국주의에 의한 수치와 비극의 역사뿐이다. 우리 7000만 동포들은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어제의 역사와 오늘의 역사 그리고 내일의 역사를 바르게 조명해 보아야 하겠다.

2. 재미동포 통일운동의 어제와 오늘

<##IMAGE##> 재미동포 사회에서 통일운동이 조직화하면서 시동을 걸기 시작 한 것은 1970년 초기 김대중씨의 제1차 망명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1973년 7월에 김대중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한민통미주본부”를 창설했다.

이 조직은 김대중을 지지하는 동포들과 김재준 목사를 따르는 기독교 인사들 그리고 임창영 박사를 존경하는 지식인들로 형성된 다양한 양상을 띄고 있으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위하여 산발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연적 현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운동의 성격과 방향이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변혁과 진보적 사상에 치우치는 운동의 성격으로 양분되는 현상이었다. 기독교적 운동의 동참자 가운데는 “적색공포증”적인 반응을 보이는 인사도 있었고 또 의식 수준이 그저 보수 야당적 사고방식을 고집하면서 운동에 가담하는 순진한 인사도 많이 있었다. 반공 반북의 틀에서 한 발 한 거름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반 독재 민주화운동에는 매우 적극적 이였다.

1970년대 초반에 있어서의 이상과 같은 상황을 이해한다면, 1977년 6월에 임창영 박사를 중심해 창설된 “미주민련”과, 1978년7월에 김재준 목사를 중심해 창설된 “민주주의국민연합”의 창설 배경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임창영 박사가 중심이된 “미주민련”은 재미동포 통일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반미자주와 사화변혁을 통일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삼는 새로운 운동 역량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미주민련은 처음부터 “적색공포증”과 “반공 반북”을 주장하는 기타 운동세력들로부터 자연히 멀어지는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주민련은 밖으로부터 휘몰아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싸워야 했고, 안에서 부딪치는 보수적 개량주의 운동노선과 싸워야하는 이중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주민련은 운동의 대중확보에는 늘 한계점을 안고 싸워야 했다.

한편 김재준 목사를 중심 한 “민주주의국민연합”은 주로 명망 있는 목사들과 기독학자회 회원들과 많은 종교인들이 가담하여 의식수준은 보수야당 또는 특정한 야당인사 지지와 감옥에 있는 민주화 반독재 투쟁인사들을 돕는 일에만 주력하면서 정의와 화해에만 매달려 있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반공 반북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사회변혁이나 진보적인 사상에는 “적색공포증”을 나타내기도 했다.

어찌되었던 암흑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위의 양대 운동 진영은 우왕좌왕하는 재미동포사회의 혼돈 속에서도 전열을 가다듬고 무엇인가 민주화와 통일의 돌파구를 찾으려 애 쓴 것만은 사실이다.

재미동포 통일운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분단된 조국에 방문이며 또한 이산가족 방문사업 이다. 1970년대의 북부조국방문은 극소수의 인사들의 비밀에 속하는 방문이었다. 하지만 1980연대의 북부조국방문과 이산가족상봉은 “분단을 뛰어넘어” 저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선우학원 박사를 비롯한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사들의 방북활동은 암흑의 황무지를 개척해 나가는 길을 열어놓았으며 1987년에는 방북과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전담 추진할 수 있는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을 창립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위에 언급한 재미동포 통일운동조직과 단체 외에도 서부와 동부지역에서 수십여개의 크고 작은 운동조직과 단체들이 있었으며, 또 생겼다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는 단체들이 허다했다. 지면관계로 일일이 기록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 꼭 집고 넘어 가야 할 사항이 있다.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에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사이에는 일종의 이념논쟁들이 잦았다. 선민주 후통일을 주장하는 진영과 선통일 후민주를 주장하는 진영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대립은 잊을 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이 문제는 해소되었지만 이 문제로 양 진영이 겪은 갈등과 분열의 역사는 적지 않은 상처들을 남겨주기도 했다. 고 문익환 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은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지적하여 그러한 갈등과 분열에 도움말을 준 적도 있었다.

어제와 오늘도 마찬가지로 친미사대주의와 적색공포증이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있는 미주동포사회에 있어서 “선 통일”을 주장하면 좌경이니 친북이니 하면서 동포사회에서 외면을 당하였던 것이 지난 시기의 역사였다. 이것은 오늘에도 완전히 가셔지지는 않았다.

선 통일 논쟁에 대하여 차종환 박사의 글(미주한인 사회외 독립운동 P.536-537)과 은호기의 글(재미동포 민주화 운동의 현황-118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김대중은 늘 진보주의자로 몰려 곤욕을 치른 것이 사실이다. 김대중은 주한 미군을 전쟁 억지 세력으로, 평화유지군으로 보았다. 나아가서 더 포악한 군사독재의 출현을 막을 수 있는 민주주의의 장치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김대중은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을 동시적으로 접근하려는 자체를 “선통일 후민주”로 규정하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러한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대변하는 단체가 “민통연합”과 “한국민권문제 연구소”이다. 85년에 귀국한 김대중을 중심한 임원들은 “선민주 후통일”의 목표하에서 ”비용공비반미” 원칙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 했던 것이다.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화해의 문을 열어 놓는데 기여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하여 비판의 목적으로 이 글을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주동포 통일운동 역사에 있어서 선민주-후통일, 선통일-후민주 논쟁이 얼마나 혼란과 대립, 그리고 갈등을 빚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집고 너머 가기 위한 것뿐이다.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이 선통일 선민주 논쟁은 시기와 조건, 입장과 처지, 수단과 방법, 그리고 사적인 입장과 공적인 입장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오락가락 하면서 혼돈과 대립의 갈등을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아와 같은 논쟁과 갈등 속에서 오래 동안 미주 운동권에서 통일운동의 후퇴와 공백기가 오래 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1987년 2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드디어 역사적인 “조국통일북미주협회”(약칭, 통협)가 창설 되였다. 통협은 정치의식의 선진성과 통일이론의 역사성을 밝히면서 솔선수범의 용단으로 동포대중 속에서 민족 화해와 통일운동의 문을 열어 놓는데 있어서 큰 공헌을 했다.

선우학원, 홍동근, 현준기, 양은식, 김현환, 전순태 등 기타 여러 애국적 인사들은 일찍이 통일운동의 선두주자들로서 북부조국 방문과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뚫기 힘든 분단의 장벽을 너머 통일을 앞당기는 과업을 미주에서 처음 시작했던 것이다. 통협을 통해서 북부조국에 있는 고향을 방문하고 이산 가족을 싱봉한 재미동포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이로 인해 북부조국 알기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통협에 관련된 인사들과 진보단체 성원들이 재일동포 민족민주운동 단체, 특히 한통련, 한민련 성원들과 연계하여 범민족대회 준비위원회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이것이 결실을 맺게되어 드디어 1990년 8.15에 평양에서 역사적인 범민족대회가 열렸다. 이 연속선상에서 로스앤젤레스에 "범민련 재미본부"가 창설 되였는데 이 두 단체는 미주 통일운동 역사에 있어서 간과하지 못할 두 기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조국통일 범민족대회는 어떻게 처음 구상 되였던가?
조국통일범민족대회의 시작은 놀랍게도 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88년 8월에 남쪽의 민주민족운동단체 23개와 미주, 일본, 필리핀,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모인 평화운동가들 천여 명이 성균관대학 광장에서 “한반도평화통일을위한 범민족대회”를 북과 남, 해외에 공식 제안함으로서 처음 시작하게 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쪽 정부에서는 범민련 운동을 무조건 북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우겨대고 있으니, 죽은 사람이 친히 글로 남기고 간 유서를 대필이라고 우겨대는 안기부와 하나도 다름이 없다.

지금까지의 통일운동권을 일반적으로 평을 한다면 사실 “선민주 반독재 민주화”차원의 운동이였다.” 선통일”이라는 주장은 아직 소극적이었고 제대로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즉 선민주 후통일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운동권이었다. 하지만 미주에서 조국통일범민족대회추진본부가 결성됨에 따라서 운동의 반향과 운동의 범위는 확장되고 강화되는 계기가 마련 되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참가하여 통일운동을 과감하게 추진 할 수 있게 되였던 것이다.

미국지역의 서부에서 뿐 만 아니라 동부와 중부 전 미주에서 총망라한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초청되고 동참하여 공식적으로 1990년 12월8일에 로스앤젤리스에서 처음으로 “범민련 재미본부”를 창립하였다.

미주범민련본부는 조국통일을 위한 특수 사명을 가지고 북과남, 해외의 3자 연대 하에 미주에서 주어진 통일운동을 수행한다. 창립 초창기에 미주에서 창립에 참가한 인사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무순, 다음 명단은 주로 임원들이며 명단에 빠진 분들도 있음을 밝혀 둔다)
"임창영,홍동근,차상달,전춘림,선우학원,최정열,이승만,정기열,강은홍,배강웅,김승자,이승호,정일웅,김정식,김현환,김태정,노길남,장주암,전순태,신범타,박재진,신상철,이재호,긴우하,예저웅,이서명,긴기항,한동상,최덕화,이우근,육제규,남관우,유상준,강원진,한호석,강와모,김숭경,이만영,이행우,유하상,현준기.강위조,양은식.유태영,은호기..."

분단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미군과 군사독재정권이 엄존하고 있는 대한민국 땅에서 선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선민주 후통일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한계점을 가히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역사적 민족 비운 속에서 미주 범민련은 창립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동포사회에서 "선통일 자주평화통일"을 외치면서 잠자는 역사의식을 깨우는 운동을 전개 해 왔다.

한국의 운동권이 본의 아니게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이론논쟁의 늪에 빠져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미국에 있는 범민련은 민족모순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길이 올바른 통일의 정도인 것을 밝히면서 꾸준히 조국통일 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다.

이상으로 1970년대부터 미주에서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해 온 발자취를 간추려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뒤를 돌아보면서 잘못을 발견 해 내기 위함이며 그리고 다가오는 새 해 2007 새해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3.통일운동의 오늘의 과제

<##IMAGE##> 통협과 범민련은 서로 “쌍두마차”를 이루워 동포사회에서 통일운동의 확고한 자리매김을 해 왔다고 자부 할 수 있다. 이 두 조직은 이전까지의 조직 역량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서부와 중부, 그리고 동부지역에 이르기까지 동포 사회에서 조국통일 운동을 힘차게 전개 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까지 두개의 단체가 서로 “쌍두마차”를 이뤄 통일운동을 잘 해 왔지만 , 이제부터는 큰 변화가 생겼으니 또 다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체재로 통일운동을 진행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것은 1997년 1월3일에 재미동포전국연합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창설되면서 운동양상은 다소 변화를 가져왔다.

통협과 범민련 그리고 재미동포전국연합, 이 세 단체가 통일운동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쌍두마차가 이제부터는 3자 일체의 조직 체제로 변화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시냇물이 처음에는 혼자 따로따로 흐르다가 나중에는 강물이 되여 함께 흐르듯이 통협과 범민련 그리고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조국통일운동의 강물이 되여 미주 동포 사회에서 유유히 함께 흘러가게 된 것이다. 통협의 전통이 새로 태어난 조직들에게 전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통일을 향한 새 해를 맞이하여 앞으로 추진해야 할 여러 가지 과제들을 생각해 본다.

(1)전략과 전술

왜정 때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은 민중을 향하여 외치기를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라고 외쳤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변하고 위장하는 미국의 조선반도에 대한 전략과 전술에 대하여 그 어떤 정치인보다 못하지 않게 전략과 정책에 대한 식견과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 동문서답하는 수준으로는 곤란하다.

타방을 바로 알아야만 우리의 운동 역량을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권 내부에 있어서도 자체적 전략과 전술에 대하여 모두가 높은 수준으로 향상하도록 훈련을 쌓아야 한다. 보통 신문 기자 수준보다는 훨씬 높은 자리에서 정치문제와 사회문제 민족 문제 등에 대하여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

615 공동선언을 일부에서는 “해빛정책”이라고 해석하면서, 옷 벗기기- 퍼주기라고 비난을 하면서 왜곡된 신문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김대중 전대통령의 대미 대일 정책은 무엇에 근거한 정책 이였는지, 노무현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 실천정책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파악하면서 통일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미관계가 호전되어 환경이 좋아지면 예상치 않았던 대중들이 몰려온다. 그러다가 조미관계가 지금보다 더 악화되어 전쟁의 위험성이라도 보이게 되였을 때는 몰려 왔던 대중들이 사라지는 경우들도 많았다. 그런 때를 대비하여 우리 통일운동권은 미리부터 전략과 전술을 준비해야 한다.
통일운동은 끝이 잘 안 보이는 장기전이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2) 6.15 공동선언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대책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모독하고 악용하는 세력도 미주 운동권 안에서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비록 수구 꼴통 분자들과는 다소 구분이 되지만 "비반미 비친북”이라는 묘한 이중적 모순된 사고 방식을 가지고 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한국의 일부 석연치 않은 운동단체와 손을 잡으려 하고 있어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미주위원회를 구성하는 그 첫번 모임에서 미주범민련과 재미동포연합이 배제된 분이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친북 단체라서 안 된다"는 논리였다. 친북 단체 인사들이 섞이면 한인회 등 여러 보수 단체들을 영입하는데 지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행이 이 첫 모임은 그러한 모순된 논리 때문에 뉴욕조직 결성이 원천 무효로 처리되었으나 그 후에 약간 수정된 상태에서 결성이 이뤄지고 말았다. 문제점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오늘 미주의 우리 통일운동권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6.15 공동선언의 실천 진행과정은 반드시 3자연대의 체제 하에서만 활동을 전개해야 하며 어떠한 개인이나 어떤 개별 단체(예, 민화협)와 연계하여 6.15정신에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다가오는 2007년 새해에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로 인한 문제점들이 말끔히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3)한국에서 맹렬히 투쟁하는 진보적 세력과의 연대

한국의 진보세력은 4.19 의거를 비롯하여 광주항쟁 등 60년 간 사회 변혁을 위해하여 줄곧 투쟁 해 왔다. 사회변혁 운동의 기반은 노동계급과 농민 근로 대중 그리고 젊은 청년 학생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핵심을 이뤄왔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 진보세력들이 모두 다 함께 뭉쳐 외세를 몰아 내고 자주 평화통일을 위한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 재미동포 진보진영도 한국의 진보진영과 연대하여 유대를 강화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족한 점을 그들로부터 채우고, 그들의 부족 점을 우리가 보완해 줄 수 있다면 이것이 연대연합운동의 혜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제국주의의 나라 미국에 살면서 그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개인적으로나 조직 차원에서 한층 더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교류와 연대를 통해서 미군철수와 자주평화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아가는 힘찬 2007년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4)남미의 진보주의 세력과 국제연대

과거에는 남미를 서구문명의 연장선에서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최근 남미의
나라들은 이제는 절대로 미국이나 유럽의 일부가 아니며 착취의 대상도 아니라고 외치면서 반미 반제와 자주 자립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큐바, 베네주엘라, 에쿠아돌, 볼리비아, 니카라구아 등 신흥 반미 좌파정권들이 등장하여 남미에서는 지금 “반미열풍”이 세게 몰아치고 있다. 재미동포 진보진영은 이들의 반미투쟁을 격려하면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베네주엘라 차베스 대통령을 비롯하여 진보적인 여러 대통령들에게 축하의 메시지도 보내고 또한 남미의 지도자들과 민중에게 연대를 위한 호소문 등을 보내는 운동도 2007년에는 추가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서 조국반도의 미국간섭 문제를 함께 극복해 나아가는 연대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북부 조국의 선군정치와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이 제3세계 운동과 함께 한다는 연대운동도 동시적으로 전개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우리 재미동포도 미국시민으로서 미 당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당당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의 조국통일 운동과 평화운동은 우리 민족에게만 혜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통일과 평화는 인류사회에도 크게 공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재미동포들은 남미 계 인민들과 제3세계 인민들과의 유대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재미동포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우리 조선민족의 같은 핏줄을 이어 받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하여 같은 민족인 재미동포 운동권에 속 해 있는 성원들은 우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축하를 보낸다. 동시에 우리는 한편으로 우려하고 염려하는 심정으로 마음의 불안과 갈등을 느끼고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단순히 우리와 같은 핏줄기이라는데 의미가 있기 보다는 그의 배후에는 민주화 투쟁으로 쟁취한 김대중 대통령 정권시대와 현재 노무현 대통령정권 시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개의 정권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오늘의 유엔은 과연 어떤 유엔인가? 한국전쟁(625 전쟁)때 휴전협정을 맺은 유엔의 당사국들은 미국과 중국과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 세 나라뿐 이였다. 오늘의 유엔은 이 당사국 세 나라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유엔 사무총장은 그의 출신 나라 배경이 어느 나라이던 아무 관계없이 오직 한반도의 휴전과 정전협정의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국제적으로 공정해야 한다. 문제 해결은 오직 당사국 세 나라가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새로 임명을 받은 반기문 사무총장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재미동포 운동권은 반기문 사무총장을 민족적 차원에서 두 손 합장으로 열열히 성원 할 것 이다. 그리고 한편 미국을 추종하는 강대국들이 게속해서 조선반도 문제를 깔보고 불공정하게 처리한다면 재미 운동권은 그저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지 않고 곧바로 유엔으로 달려 갈 것이다.

미국이 휴전협정을 어기고 북을 향해 선제공격을 게속 준비하고 있기때문에 북은 할 수 없이 피나는 노력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였다는 사실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확실히 인정하고 있으리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미국의 자본주의 위력에 이끌리여 국가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팽개치고 미국에 맹종하고 있는 오늘의 국제사회에서 사무총장 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으신 우리와 같은 핏줄의 반기문 총장의 용기와 분투를 기원한다. 반기문총장의 몸은 비록 유엔 속에 있지만 반기문 총장의 정신과 양심은 우리 민족 속에서 우리의 얼과 함께 있으리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지켜 볼 것이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절반의 반”이 아니라 “온전한 반”이 되어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확실히 결단하는 참된 “반”이 되기 바란다.

6.재미동포와 미 주류사회 양심운동과의 결합

미국의 평화운동, 사회정의 운동, 그리고 정당정치인들 가운데 양심적 정치인들과의 연대운동 등으로 조국반도의 문제를 향상시키는 데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 운동은 근년에 와서 로스엔젤레스, 뉴욕, 워싱턴 디씨 지역에서 활성화되고 있는데 한층 더 발전시키는 과제만 남겨두고 있다.

7.재미 동포 사회에서 홍보 사업

재미동포 운동권 안에는 유능한 학자들과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인재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지식과 연구 자료들을 개인의 소유로 끝나게 하지말고
운동 조직 안에서 활용하고 재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그럴라면 회보나 소식지 등 여러 가지 방도를 과거의 소극적 태도보다 새해부터는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겠다.

InterNet에서 무진장의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대중적 일반 동포 사회는 정확한 정보의 어두운 면의 여지가 그대로 나마있는 실정이다. 동포 사회에 실감이 나는 홍보정책을 강구하여 물심으로 투자를 해야 하리라. 인쇄물이나 기타 수단을 개발하여 동포 가정들에 직접 가 닿을 수 있는 방도를 참모들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에 노력하기 비란다.

물론 우리에게 이미 있는 “민족통신”과 “평화통신”을 조국반도 문제의 홍보 매체로 적극 후원하고 지원하는 사업도 앞으로의 통일운동을 위해 큰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2007년은 재미동포사회도 범민련 운동을 포함하여 6.15공동위 실천운동, 진보단체들의 성장운동, 시민단체를 포함한 동포사회 연대운동, 미국주류사회 연대운동, 남미 등 제3세계 연대운동, 그리고 남녘과 북녘과의 연대운동 등이 좀더 비약하는 해가 될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나의 발표를 마친다. (끝)

2006년 12월27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제18차 범민련 재미본부 총회 세미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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