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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문답]주체적 관점의 통일전선 이론과 통일정세 분석</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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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3-10-29 00:00 조회3,967회 댓글0건

본문

* 이 논문은 2003년 10월 21일 고려대 4.18기념관에서 발표된 통일학연구소 한호석소장과 21세기코리아연구소와의 대담 내용이다. 한호석소장과의 대담은 9월과 10월에 걸쳐서 전자우편으로 진행되었다.

문1

- 먼저 한호석 소장님의 건강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민족통신’을 통해 한 소장님의 최근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밝게 웃고 계신 모습은 코리아(COREA)반도의 낙관적 정세와 연동지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국을 떠나 물설고 낯설은 이국에서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염려됩니다.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한호석 소장님의 활동을 보면서 일제의 진주만기습을 과학적으로 예견하며 미국 내에서 강연과 집필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던 한길수 선생을 연상하곤 합니다. 우리는 한길수 선생이 해방 후 코리아에는 좌우합작정권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미국과 이승만정권의 반대에 부딪혀 고국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알고 있는데,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연구활동으로 2001년 말부터 국가정보원에 의해 귀국이 불허된 한 소장님의 상황과 연관지어 많은 생각이 교차하게 됩니다. 이번에 한통련 관련자들과 송두율 교수의 이남방문이 실현되는 조건에서 한호석 소장님의 이남방문이 안 되는 것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호석 소장님의 이남방문이 실현되고 직접 강연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앞당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입장과 계획을 갖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 얼마 전 케이비에스(KBS)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재미동포 독립운동가 한길수 선생에 관한 방영물은 나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재미민족민주운동권의 일원으로 일해오면서도 한길수라는 훌륭한 반일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한길수 선생의 반일독립운동행적이 발굴됨으로써 이승만을 수괴로 하는 악질적 친미정상배의 손에 의해서 끊어졌던 재미동포 반일독립운동사의 주체적 맥락이 살아난 것은 매우 기쁘고 뜻있는 일입니다. 나는 한길수 선생의 반일독립운동행적을 담은 텔레비전 방영물을 보면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첫째, 한길수 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 부모의 손을 잡고 하와이에 이민을 떠나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난 분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그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투철한 반일민족의식을 가지고 한(조선)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남다른 민족성과 주체성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한길수 선생의 삶과 투쟁은 오늘날 민족성과 주체성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미국화되기 위하여 별별 짓을 다하고 있는 남(한국)의 친미주의자들의 추악한 타락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둘째, 한길수 선생은 1940년대의 복잡한 정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던 분입니다. 한길수 선생이 해방정국에서 주장하였던 좌우합작정권이란, 요즈음 민족민주운동권에서 쓰는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통일전선에 기초한 자주적 민주정권입니다. 해방 직후의 정세에 어두웠기에 친미정상배의 괴수인 이승만과 손을 잡고 이른바 ‘반소·반탁운동’에 앞장서는 결정적인 과오를 범했던 백범 김구 선생과 한길수 선생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셋째, 나는 이번에 한길수 선생의 반일독립운동행적이 발굴됨으로써 그 동안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여기 저기 끊어져 있었던 재미동포 민족자주운동사의 주체적 맥락이 완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주체적 맥락은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미국 땅에서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며 힘쓰다가 비명에 세상을 떠난 반일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말까지 미·일 제국주의열강의 모순관계를 이용하여 반일독립운동을 추진하였고 해방 후에는 통일전선에 기초한 자주적 민주정권의 수립을 제창하였던 반일독립운동가 한길수 선생, 194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 반공주의 광풍이 몰아치던 워싱턴에서 민족자주·통일운동을 위한 선전사업에 힘쓰셨던 선각자 김용중 선생, 그리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년 동안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힘쓰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임창영 선생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나 자신의 개인형편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되어서 안 됐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몇 가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26살의 청년 유학생으로 뉴욕의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던 때가 1981년 7월이었으니, 올해로 22년의 세월을 미국 땅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때 나는 미국에서 5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얻고 서울에 돌아가 대학교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사회·역사적 현실을 아직 알지 못하던 철없는 20대 청년의 꿈은, 1983년 5월 어느 날 내가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영상자료와 기록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받았던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2년만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충격으로 나는 몇 날 밤을 지새우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재미민족민주운동에 참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뉴욕에서 청년학습회를 꾸리면서 민족민주운동에 첫발을 떼었던 때가 1983년 가을이었으니 올해로 꼭 20년 동안 외길을 고집스럽게 걸어왔습니다. 처음에 나는 민족민주운동을 해외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유학을 포기하고 남(한국)에 돌아가서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전두환 군부파쇼통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남(한국)에서 민족민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이전이었으며, 더욱이 남(한국)에서 운동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재미민족민주운동에 참가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재미민족민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면서 남(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나는 언제 다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조국의 남녘땅을 마지막으로 밟아보고, 서울에 살고 계시는 나의 부모와 동생들에게도 인사하려고 1984년 7월에 남(한국)을 잠시 찾았습니다.

1984년 이후 1990년까지 나의 손에는 미국체류허가기간이 만료된 여권 한 개와 얼마 되지 않는 비상금밖에 없었습니다.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민족민주운동을 전파하고 재미동포청년들을 조직하는 사업이 내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양순한 학자지망생이었던 청년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서 투쟁하는 활동가로 변모하였습니다.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활동하던 나는 살인범죄와 교통사고가 불시에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미국사회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일발의 순간도 몇 차례 넘겨야 했습니다. 나는 1994년 4월에 남(한국) 통일운동단체의 공식초청을 받고 서울 땅을 밟기까지 10년 동안 조국방문 금지조치에 묶여있었습니다.

백인들과 흑인들이 절대다수인 미국에서 살다가 10년 만에 서울거리를 다시 걷게 되었던 1994년 4월 어느 봄날, 나는 종로거리 한 모퉁이에 서서 길을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종로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동지들과 벗들의 얼굴로 보이는 착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거리에서 아무나 붙들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였던 그 날의 체험이 나의 기억에서 지금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7년 동안 나는 남(한국)을 방문하면서 민족민주운동권의 집회에 참가하여 정치연설도 하고 정세강연도 하고 학습과 토론도 하였습니다. 2001년 9월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단체로부터 초청을 받고 정세문제와 운동이론에 관한 강연을 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내렸던 나는, 입국장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국정원의 입국금지조치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습니다. 두 번째로 조국방문 금지조치에 묶인 것입니다.

이번에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단체들과 진보성향의 사회단체들, 그리고 개별 정치인들이 망라되어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해외민족민주운동권의 선배님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이번에 범국민추진위가 초청한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선배님들은 30년, 40년 동안이나 남(한국)에 가보시지 못한 분들입니다. 나는 해외민족민주운동권에서 후배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국정원으로부터 두 번째로 조국방문 금지조치를 당한 것도 불과 이태밖에 되지 않는 처지이므로, 제1차 초청대상명단에서는 누락되었습니다. 범국민추진위에서 일하고 있는 실무자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제2차 초청대상명단에 올라있다고 합니다.

범국민추진위에서 나를 제2차 초청사업에 포함시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만, 나는 남(한국)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을 남(한국)에 일시적으로, 조건부로 입국시키는 것은 범국민추진위가 아니라 국정원이 주도하는 조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범국민추진위는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의 자유로운 조국왕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만, 그 노력은 악랄한 국정원에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범국민추진위의 자유왕래와 국정원의 방문불가 사이에서 찾아진 타협점은 결국 조건부 조국방문이었습니다. 국정원은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 가운데 누구는 국정원의 조사를 받지 않고 입국해도 되고 누구는 입국하면 반드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조건을 달아놓고, 자유왕래가 아니라 한가위나 음력설 같은 특정시기에 한정하여 입국을 허가한다는 조건도 달아놓았습니다. 해외민족민주운동권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국정원이 범국민추진위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자유왕래를 관대하게 허가해 주리라고 기대했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국정원이 해외민족민주운동단체와 해외운동권 인사들을 옥죄는 이른바 ‘반국가단체’, ‘이적단체’, ‘친북인사’라는 올가미를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조건에서,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이 국정원이 정해준 특정시기에 남(한국)을 잠시 방문한다고 해서 해외민족민주운동권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을 적대세력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여전히 틀어쥐고 있는 친미예속정권이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의 명예를 회복해 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착각 중의 착각입니다. 나는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지 않는 한, 해외민족민주운동권의 명예는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국정원이 특정시기에 한정된 조국방문을 허가한 것은, 만고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에 걸려 옥중투쟁을 하고 있는 민족민주운동 활동가를 한가위나 음력설에 잠깐 집에 다녀오라고 ‘선심’을 쓰고 다시 감옥에 집어넣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해외민족민주운동세력은 해외민족민주운동 인사들에 대한 국정원의 선별입국조치와 특정시기에 한정한 입국조치를 단호하게 배격하고,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을 더욱 힘있게 밀고 나가면서 동시에 무조건적인 조국방문과 자유왕래의 보장, 그리고 남(한국)에서의 사회·정치활동의 보장을 쟁취하기 위해 변함없이 투쟁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나의 주장과 견해는 30년, 40년 동안이나 남(한국)을 방문하지 못하신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남(한국)을 방문함으로써 국정원의 조국방문 금지조치에 일정하게 균열이 생기고, 남(한국)사회와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에 해외민족민주운동의 존재와 의의를 널리 알리게 된 정치적 성과를 무시하거나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국정원이 자기의 공작목표에 따라서 주도한 조건부 조국방문에 대해서 득실을 따져볼 때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회한 국정원과 직접적인 대결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해외민족민주운동세력이 청와대 주인의 희멀건 웃음에 현혹되거나, 혹은 국정원장이나 법무부장관의 부드러운 얼굴이나 쳐다보면서 방심하는 경우, 국정원으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아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국정원이 ‘선심성’ 조국방문 허가조치를 통해서 심리공작을 추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은 조국의 남녘땅을 일시적으로 방문하고 해외에 돌아간 인사들이 친미예속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도록 하여 투쟁강도를 이전보다 낮추도록 만드는 고도의 심리공작을 추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 심각한 사태는 국정원이 송두율 교수에게 이른바 ‘거물간첩’의 올가미를 씌우고, 한나라당과 조선일보 같은 악질적인 반북·반통일세력이 들고일어나 송 교수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아예 끊어버리고 해외민족민주운동권의 기를 꺾어버리려고 날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이 남(한국)을 방문하는 목적은, 남(한국)에서 국내의 민족민주운동권과 힘을 합하여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정당한 사회·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족상봉, 고향방문, 성묘는 사적인 문제이며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이 남(한국)에 들어가서 사회·정치활동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국정원이 해체되어야 합니다.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이 남(한국)에 들어가서 사회·정치활동을 하는 문제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국정원을 해체하는 문제는 뗄 수 없는 관계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외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이 언제 남(한국)을 방문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명백해집니다.

나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국정원이 해체되기 이전에는 남(한국)에 다시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조국의 남녘땅에서 정다운 얼굴들과 만나고 싶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충동을 냉정히 잘라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국정원을 해체하는 투쟁구호를 재미동포사회에서 더 열심히 외쳐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국정원을 해체하는 투쟁에서 승리한 국내 민족민주운동권 동지들의 초청을 받고 내가 조국의 남녘땅에 돌아가는 그날이 오면, 꿈에도 잊지 못할 통일조국의 미래를 그리며 미국땅에서 투쟁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선배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문2

- 우리 21세기코리아(COREA)연구소는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전략 및 정책 연구소입니다. 세워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실천적인 연구소, 대중적인 연구소를 지향하며 견실하고 진취적인 연구자들이 모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연구소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연구소의 하나가 바로 통일학연구소입니다. 격동하는 코리아반도의 정세를 민족주체적 시각에서 해부하며 실천적 의의가 큰 논문들을 연속 발표하시는 한호석 소장님의 연구활동은 우리에게 중요한 참고가 되고 있습니다. 이남의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연구소와의 첫 대담인 만큼 연구소와 관련된 질문을 몇 가지 했으면 합니다. 통일학연구소가 연구활동에서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무엇이고 통일학연구소의 성과적인 연구활동의 비결은 무엇인지, 그리고 해외의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연구소의 입장에서 이남의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연구소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이 기회에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통일학연구소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었으니 국내 동지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연을 이번 기회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인류는 미증유의 혼란을 경험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독일이 자본주의적 흡수통합을 실현하고,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되었습니다. 남(한국)에서는 1987년부터 용솟음쳤던 반파쇼민주화운동(흔히 반독재민주화운동이라고도 하는데, 파쇼독재를 반대한다는 뜻을 가진 반파쇼민주화운동이라고 해야 더 정확합니다)과 1988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조국통일운동의 열기가 한창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국제정세는 혼란의 극점으로 치달리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는 전환기에 남(한국)에서는 반파쇼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이 강화·발전되면서 민족민주운동이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으나,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에 몰아친 정세인식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민주운동에게 있어서 정세인식의 혼란은 패배를 의미합니다.

당시 해내외 민족민주운동권에서 거의 모든 활동가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혼란에 빠진 정세인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출로를 더듬어가고 있었습니다. 해내외 민족민주운동권에는 그 누구도 ‘길은 여기다’ 하는 힘찬 목소리로 출로를 열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힘겨운 경험을 통해서 내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에게 정세인식의 기초가 부실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이 왈칵 뒤집혀진대도 흔들리지 않을 그런 확고한 정세인식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는 생각, 그 생각이 혼미한 안개 속에서 출로를 찾아 헤매던 나를 붙들어주었습니다. 그 무렵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연구소를 설립하는 과제였습니다. 그때가 1993년이었습니다.

경험도 준비도 없는 조건에서 연구소를 세우는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았습니다. 선배님들과 동지들을 설득하고 준비하는 2년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통일학연구소는 해방 50주년, 분단 50주년이 되던 해인 1995년 3월 11일에 결성되어 뉴욕시에서 재미동포가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플러싱 한복판에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설립 이후 8년 동안 통일학연구소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초행길을 걸어왔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몇 사람으로 이루어진 이사회가 각자 주머니를 털어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재정난 때문에 통일학연구소는 다른 운동단체들과 공동으로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으며, 유급 연구원을 두지 못하고 자원봉사체제로 운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볼 때까지 밀고 나간다는 집념이 통일학연구소 동지들을 떠밀어주고 있으며, 조국통일의 미래가 우리를 앞에서 끌어주고 있습니다. 통일학연구소는 통일조국의 수도에서 연방통일정부의 수립이 세계만방에 선포되는 감격의 그날, 자기의 임무를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 날까지 통일학연구소는 안팎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일할 것입니다. 통일학연구소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첫째, 정세인식활동에서 주체적 관점을 세우는 원칙입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 객관현실도 다르게 보입니다. 모든 사물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인다는 말은 궤변입니다. 사물은 인식주체의 보는 자리(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리입니다. 관점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므로, 문제는 어떠한 관점에서 인식대상을 바라보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대상을 인식하는 여러 관점들 가운데서 주체적 관점이 가장 올바르고 과학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체적 관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주체적 존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유일한 주체가 되는 근거는 사람만이 세계를 대상으로 인식하고 자기의 요구와 지향에 따라 세계를 개조하려고 실천한다는 데 있습니다. 인식과 실천은 주체의 고유한 활동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인식과 실천은 주체적인 것과 비주체적인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주체적으로 된다는 것은 중심이 되어 책임을 지는 고유한 속성과 태도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중심이 되지 못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비주체적인 것입니다.

나는 정세인식활동에서 언제나 민족주체적 관점을 강조합니다. 민족주체적 관점은 우리 한(조선)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한(조선)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정세를 바라본다는 말은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근본요구를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에 놓고 정세변화를 읽는다는 뜻입니다.

민족주체적 관점의 반대편에는 외세중심적 관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외세중심적 관점이란 외세를 중심으로 하여 한(조선)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그릇된 관점, 비과학적인 관점입니다.

만약 외세중심적 관점에서 한(조선)반도의 핵문제를 바라보면, 미국이 핵문제를 통하여 북(조선)을 압박하면서 한(조선)민족을 임박한 전쟁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핵문제를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북(조선)이 핵문제를 통하여 미국을 압박하면서 한(조선)민족의 근본요구를 차츰 실현해나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외세중심적 정세관은 민족자주역량이 미약하여 패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반대로 민족주체적 정세관은 민족자주역량이 강인하여 승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민족주체적 관점과 외세중심적 관점 이외에 제3의 관점은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세분석가들이 외세중심적 정세관을 거부하고 민족주체적 정세관에 서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자료에 근거하여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원칙입니다. 천문학적인 분량의 정보자료가 출렁이는 인터넷 공간에서 요구되는 자료를 찾는 것은 마치 드넓은 바닷가 모래밭에서 쓸모 있는 조개껍데기 몇 개를 찾아내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뒤져서 겨우 한 줄로 표현되어 있는 정보를 찾아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인터넷 공간을 누비면서 새로운 정보를 찾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다른 곳에 출장을 다녀왔을 때 그 동안 밀린 자료검색을 한꺼번에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듭니다. 자료검색이 힘들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사물의 모습이 보는 눈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인터넷 공간에 흩어져 있는 정보도 보는 눈이 있어야 골라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중대한 정보가치가 있는 자료라도 전문가의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놓쳐버리게 됩니다. 어떤 때는 가치 있는 자료를 미처 찾지 못하여 집필을 중단하고 애를 태우기도 합니다.

정세분석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주관주의입니다. 객관적 현실이 인식주체의 주관적 의지와 요구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정세분석가에게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그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자료에 근거하여 대상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료를 조사하지 않고서는 글을 쓰지 말라, 이것이 통일학연구소가 견지하고 있는 연구활동의 원칙입니다.

셋째, 민족자주위업과 조국통일위업에 복무하는 원칙입니다. 통일학연구소는 돈이나 명예 같은 사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글을 쓰는 매문주의적 집필을 배격합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실천은 외면하는 행세주의적 집필도 배격합니다. 흥미로운 말을 늘어놓으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어보려고 하는 인기주의적 집필도 배격합니다.

통일학연구소는 우리 시대의 최고, 최대의 역사적 위업인 민족자주위업과 조국통일위업에 복무하는 목적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민족자주위업과 조국통일위업에 복무하는 것은 통일학연구소의 집필활동의 원칙이자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의 강화와 발전에 이바지하는 원칙입니다. 나는 우리 시대의 민족자주위업과 조국통일위업이 민족민주운동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대 위업이 목적이라면 민족민주운동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그 양대 위업을 수행하려면 무엇보다도 민족민주운동을 강화·발전시켜야 합니다. 통일학연구소는 정세연구활동을 통해서 민족민주운동의 이론분야를 강화·발전시키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다섯째, 개념을 과학적으로 정립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원칙입니다. 집필활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제는 개념을 사용하는 문제입니다. 상식의 틀과 여론의 허구에 묶여있는 개념을 풀어내어 과학적 개념으로 재정립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집필활동의 생명선입니다.

여섯째, 집필활동에서 우리글을 살려 쓰는 원칙입니다. 통일학연구소에서 발표하는 모든 글들은 우리글로 작성되고 있는데,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를 쓰지 않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우리글을 살려 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가장 투명하게 담아내는 소중한 틀입니다. 외래어와 외국어를 마구 쓰면서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더럽히는 것은 민족의식을 저버리는 반역입니다. 한자, 영어철자는 필요한 경우에 쓰되 반드시 묶음표에 넣어 적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감각 속에 파고 들어와 있는 한자식 표현, 영어식 표현을 솎아버려야 합니다.

문3

- 우리 연구위원들은 한호석 소장님이 단순한 정세분석가가 아니라 변혁 및 통일 운동이론에도 조예가 깊은 변혁이론가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민족민주전선이 수행하는 전략적 과업의 성격, 동력, 실현경로에 대하여」와 같은 논문은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의 목표와 수단, 방법을 체계적으로 해설하며 우리나라 변혁 및 통일 운동이론 발전에 큰 영향을 준 바 있습니다. 또한 한 소장님이 황장엽의 논문을 주체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비판한 것이나 최근 논문 「북(조선)의 선군정치와 한(조선)반도의 정세」처럼 이북의 선군혁명론을 알기 쉽게 설명한 것 등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소장님의 정세분석이 자료수집과 외국어실력보다 철학적, 역사적, 전략전술적 안목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며 우리 청년연구자들이 특히 이런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후배 연구자들이 어떠한 관점과 자세,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선배 연구자로서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 오늘의 현실은 어느 분야에서나 실력가를 요구합니다. 정세연구가도 자기의 실력으로 연구실적을 쌓아가야 합니다. 실력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정세연구활동은 형식주의, 행세주의, 인기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세연구가가 갖추어야 할 실력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세연구활동에서 주체적 관점과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주체적 관점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하였으므로, 이제는 주체적인 태도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정세연구활동에서 견지하여야 할 주체적 태도는 자기 머리로 이해하고, 자기 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체적 태도는 남의 것을 무작정 따라하는 모방행위를 버리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며 일하는 태도입니다. 연구활동에서 모방은 의미 없는 반복이지만, 창조는 새로운 이해, 새로운 서술입니다.

이론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전(text)의 문구를 그대로 반복하여 서술하는 것은 원전을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원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원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반복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의 의미를 신념화하고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해석·서술(해설)하는 것입니다. 원전은 영구·불변하지만 수용감각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끝없이 변화합니다. 이론활동에서는 원전의 의미를 변화된 정세를 반영하여 새롭게 해설하여야 하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화된 수용감각에 맞게 서술하여야 합니다.

둘째, 사색과 탐구의 열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색하고 탐구하는 사람만이 새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새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사색과 탐구의 열정이 사라지면 그것은 곧 인식활동이 멈춘 휴지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열정이 창조의 원천이라는 말은 언제나 진실입니다. 풀먹는 짐승들이 영양을 얻기 위해 쉼 없이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의의 있는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하여 논제 하나, 개념 한 가지를 놓고 깊은 사색과 탐구를 이어가야 합니다.

셋째, 글쓰기 훈련과 이론전개능력을 높이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본시 문장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글쓰기 훈련을 통하여 태어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란 이론전개를 뜻합니다. 이론전개능력도 끊임없는 훈련을 통하여 향상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고된 훈련의 땀을 흘린 사람만이 뛰어난 이론전개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론전개는 날카로워야 합니다. 두루뭉수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론에는 칼날이 서야 합니다. 관념의 우상을 깨뜨리고 낡은 관점을 탕탕 끊어버리는 예리한 칼날을 훈련의 불길 속에서 벼리는 투쟁이 요구됩니다.

넷째, 영어문서를 해득하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외면하고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파악하려면 미국에서 나오는 영어문서를 읽어야 합니다. 영어문서를 해득하는 것은 정세연구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입니다.

문4

- 앞서 밝혔듯이 우리는 한호석 소장님의 논문 「민족민주전선이 수행하는 전략적 과업의 성격, 동력, 실현경로에 대하여」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족통일전선은 반제자주의 강령과 조국통일의 강령이라는 두 가지 강령을 가진다는 대목은 우리 운동대오 내에 분분했던 반미구국통일전선과 남북통일전선의 상호관계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었다고 봅니다. 그 이후 우리 운동대오는 통일전선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 지역통일전선과 민족통일전선, 또는 지역적 민족민주전선과 전국적 민족민주전선에 대한 관계를 주체적 관점에서 해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을 힘있게 추진해 나아갈 수단의 문제, 통일전선의 문제에 대한 전일적 체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해 10월 19일이면 이 논문이 발표된 지 만 2년이 됩니다. 오늘 주로 통일전선을 주제로 대담을 나누게 되는 만큼 그 논문이 발표된 이후 한 소장님의 통일전선이론이 어떻게 심화되었는지 매우 기대됩니다. 한호석 소장님의 통일전선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서 다시 들었으면 합니다.



- 내가 「민족민주전선이 수행하는 전략적 과업의 성격, 동력, 실현경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작성한 때는 2001년 10월 19일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기관지 『민』으로부터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낮은 단계 연방제 실현의 연관성에 관하여 집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글을 집필하였습니다. 그 글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에서는 통일전선이론에 관한 인터넷 공간의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나도 그 글을 발표함으로써 국내 운동권 논쟁에 참가한 셈이 되었습니다.

나는 원래 통일학연구소에서 정세를 분석하는 논문을 발표해오고 있습니다만,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이 인터넷 공간에서 발표하고 있는 다양한 주제의 논문들을 읽으며 운동이론에 관해서도 공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21세기코리아연구소에서 위의 논문을 다시 거론하면서 통일전선이론에 관하여 글을 써달라고 요청하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거의 2년만에 통일전선이론에 관하여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은 내가 그 동안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몇몇 논자들이 인터넷 공간을 통하여 진행한 통일전선이론에 관련한 논쟁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의 중심내용은 나의 독창적인 견해라고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에서 인터넷 공간의 논쟁을 통하여 해명하였던 내용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글에는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몇몇 논자들이 인터넷 공간의 논쟁을 통하여 해명했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또한 이 글에는 내가 2001년 10월 19일의 논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문제들을 해명하고, 미처 명확하게 서술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명료하게 정리한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2001년 10월 19일의 논문에 대한 일종의 보론이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지난 시기 군부파쇼세력이 조국통일이라는 개념을 어이없게도 북(조선)의 대남혁명전략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남(한국)사회에서 조국통일이라는 말을 기피하도록 강요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국정원, 검찰공안부, 한나라당을 비롯한 남(한국)의 극우세력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통일전선이라는 개념을 북(조선)의 대남혁명전략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통일전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압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통일전선이라는 개념은 남(한국)의 대중에게 매우 낯선 것이며 심지어 민족민주운동권에서도 기피하거나 신비화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남(한국)의 극우세력들이 통일전선이라는 개념을 북(조선)의 대남혁명전략이라는 특정한 의미로 규정하고 그 개념사용을 금압한다고 해도, 민족민주운동권에서 그 개념을 기피하거나 신비화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통일전선이라는 개념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항일선열들이 사용한 것으로서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왜곡할 수 없는 민족사적 의의를 가진 개념입니다. 항일선열들은 통일전선을 협동전선 또는 연합전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일제 식민지시기의 신간회운동, 해방정국의 좌우합작운동, 군부파쇼시기의 유신독재반대투쟁과 6월항쟁은 모두 통일전선운동의 일환이었으며, 1980년대에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 결성된 범민련과 통일연대, 전국연합과 민중연대는 비록 완결되지는 못하였으나 모두 통일전선운동조직의 일종입니다.

지난날 민족민주운동이 군부파쇼세력이 움켜쥐고 있던 조국통일이라는 개념을 풀어내어 대중에게 돌려주었듯이, 오늘 민족민주운동은 극우세력이 금압하고 있는 통일전선이라는 개념을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의미로 규정하고 대중의 언어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글에서 통일전선이라는 개념을 여러 사회·정치세력이 공동목표를 설정하고 함께 투쟁하는 사회·정치운동의 기본방식이라는 뜻으로 규정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정치운동에서 진행되는 단결과 동맹, 연대와 연합을 과학적으로 해명한 개념으로 씁니다.

먼저 통일전선운동사에서 통일전선의 개념이 정세의 요구에 따라 변천해온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세계적으로 진행되었던 여러 형태의 통일전선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때, 통일전선은 근로대중의 민족적 해방을 위한 통일전선과 근로대중의 계급적 해방을 위한 통일전선으로 구분됩니다. 반제자주화과업과 반파쇼민주화과업(또는 반독점민주화과업)이 서로 구분되는 것에 따라서 그렇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글에서 근로대중이라는 개념을 민중이라는 개념과 같은 의미로 씁니다.

반파쇼민주화와 반독점민주화가 구분되는 까닭은, 군부파쇼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개혁체제로 이행한 오늘의 남(한국)사회에서 반독점민주화과업이 새롭게 제기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반파쇼민주화과업이 파쇼통치체제를 타도하고 일반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반독점민주화과업은 독점자본주의체제(또는 예속적 독점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민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반독점민주화는 곧 반독점민주개혁이며, 반독점민주화운동의 목표는 민중민주주의의 실현입니다. 이른바 ‘탈자본주의 대안사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주적 민주주의)는 민중민주주의체제의 수립으로 실현됩니다.

1930년대부터 70년 동안 계속되어온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운동사에 나타난 통일전선 개념은 전국적 범위의 통일전선과 지역적 범위의 통일전선으로 구분됩니다. 나는 전국적 범위의 통일전선을 전역통일전선으로, 지역적 범위의 통일전선을 지역통일전선으로 부릅니다.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논쟁과정에서 이미 정리된 바대로, 지역통일전선은 독자적 지위를 가지는 전선이 아니라 전역통일전선의 일부인 것은 물론입니다. 전역통일전선의 개념은 반일민족통일전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반미구국통일전선으로 변천되었고, 지역통일전선의 개념은 반파쇼민주전선 민족민주전선으로 확대·변천되어왔습니다.

반일민족통일전선은 1930년대 이후 일제 식민지시기에 형성되었던 전역통일전선의 이름이었습니다. 반일민족통일전선은 한(조선)반도로부터 만주와 일본에 걸치는 넓은 범위에서 한(조선)민족이 반일민족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던 전역통일전선이었습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삼국파쇼동맹에 맞서 투쟁한 국제민주세력의 반파쇼투쟁이 승리하였던 1945년 해방 직후에 반봉건민주화과업(반봉건민주개혁의 실현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진하였던 전역통일전선의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족통일전선이라는 개념 앞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붙였던 것입니다.

반미구국통일전선은 1980년대에 반미자주화과업이 전면에 제기되었던 정세의 변화를 반영한 전역통일전선의 이름이었습니다. 구국이라는 개념은 조국이 위난에 처해있을 때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정권이 전두환 군부파쇼정권을 동원하여 광주민중학살과 대한항공 여객기의 소련영공 침입·피격,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과 대북 핵전쟁책동을 자행하고 있었던 시기에 위난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는 절박한 정세의 요구가 반미구국통일전선의 개념에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파쇼민주전선은 1960년의 4.19혁명부터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1990년대 초까지 남(한국)의 군부파쇼통치를 반대하여 투쟁하였던 지역통일전선의 이름이었습니다. 통일전선의 과업을 민주화과업에 집중시키는 측면에서 보면, 해방정국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과 1960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정세를 반영한 반파쇼민주전선은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정국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전역통일전선의 기초 위에서 반봉건민주화과업을 수행하였던 것에 비해서, 1960년부터 30여 년 동안 형성되었던 반파쇼민주전선은 남(한국)의 지역통일전선의 기초 위에서 반파쇼민주화과업을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남(한국)사회의 민주화과정은 변화된 정세의 요구에 따라 반봉건민주화 반파쇼민주화 반독점민주화로 변천되어 왔으며, 현재는 반독점민주화과업을 수행하는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민족민주전선은 1990년대 이후 자주, 민주, 통일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통일전선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민족민주전선은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반미자주화운동,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반독점민주화운동,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조국통일운동을 포괄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 새로운 내용의 통일전선입니다.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이 인터넷 공간에서 진행한 논쟁과정에서는 민족민주전선을 전역통일전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지역통일전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나는 민족민주전선을 지역통일전선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반미자주화과업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조국통일과업은 남(한국)에서도 수행되는 과업이며 한(조선)반도 전역에서도 수행되는 과업입니다. 그러므로 반미자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은 지역통일전선과 전역통일전선이 서로 겹쳐지는 부분에서 전개되는 운동입니다.

분단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통일전선은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또는 반봉건민주화운동, 반파쇼민주화운동)을 포괄하는 민족민주전선이고, 거기에 조국통일운동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통일전선은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에 더하여, 분단현실에서 형성된 특수한 형식과 내용의 통일전선운동이 포함됩니다. 그 특수한 통일전선운동을 조국통일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조국통일운동은 제국주의세력과 그 예속세력의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고 연방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통일전선운동입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나라의 통일전선도 조국통일운동을 포함한 적이 없습니다. 조국통일운동이 통일전선에 포함된 것은 세계변혁운동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한(조선)반도에서 형성되고 있는 통일전선의 역사성과 특수성입니다.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이 그 포괄범위를 조국통일운동으로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전선의 전략과 전술이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통일전선운동은 사회체제를 개조·변혁하는 운동이며, 조국통일운동은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고 분단된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운동입니다. 통일전선운동은 통일전선전략에 따라 수행되며, 조국통일운동은 조국통일 3대 강령과 6.15 공동선언에 따라 수행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좁은 의미의 통일전선은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우리 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넓은 의미의 통일전선은 그 두 운동에 더하여 조국통일운동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조국통일운동은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서 6.15 공동선언이 천명한 조국통일과업에 동의하는 모든 민족구성원들이 참가하는 가장 폭넓은 통일전선운동입니다. 조국통일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조국통일운동은 남(한국)의 대북 화해·협력운동과 공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친미예속정권의 대북 화해·협력사업을 지지해줄 수도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통일전선운동도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서 단결하는 운동이므로 조국통일운동과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통일전선은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을 포괄하는 운동이므로, 반미자주화과업과 반독점민주화과업에 찬동하는 사회·정치세력들에 의해서 추진됩니다. 반면에 조국통일운동은 비록 반미자주화과업과 반독점민주화과업에는 전면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일단 조국통일과업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들이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통일전선의 성격과 임무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통일전선운동의 발전단계와 정세의 요구에 따라 계속 변화·발전합니다. 4.19 혁명으로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시기에 지역통일전선의 성격은 군부파쇼통치를 철폐하고 일반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반파쇼민주화운동으로 이해되었고 그에 동의하는 다양한 사회·정치세력들이 손을 잡고 반파쇼민주화과업을 수행하였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 지역통일전선의 성격은 반파쇼민주화운동 단계를 넘어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 단계로 진입하였으며 그 포괄범위를 조국통일운동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지역통일전선이 반파쇼민주화운동 단계를 넘어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의 단계로 진입하고 그 포괄범위를 조국통일운동으로 확대함으로써 내외조건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지난 시기의 지역통일전선에 포괄되는 범위는 이른바 재야세력과 야당세력까지 확대되었고, 재야세력과 김대중·김영삼을 대표로 하는 야당정치세력이 반파쇼민주화운동의 주도세력으로 행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역통일전선이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의 단계로 진입하자, 재야세력이나 김대중·김영삼을 대표로 하는 야당정치세력은 지역통일전선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그 대신 1987년 여름의 노동자대투쟁과 1980년대 말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반대하는 농민투쟁 이후부터는 노농대중이 지역통일전선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오늘날 지역통일전선이 그 포괄범위를 조국통일운동으로 확대하자, 재야세력이나 김대중·김영삼을 대표로 하는 야당정치세력이 분리되어, 김대중을 대표로 하는 정치세력을 비롯한 일부세력은 대북 화해·협력세력으로서 조국통일운동과 공조하게 되었고, 김영삼을 대표로 하는 정치세력을 비롯한 일부세력은 조국통일운동을 반대하는 민족분열주의세력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남(한국)의 지역통일전선은 반미자주화운동, 반독점민주화운동, 조국통일운동을 포괄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선도적 역할을 하는 운동은 반미자주화운동입니다. 지역통일전선이 수행하는 전략적 과업은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과업,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과업,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과업이지만, 그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과업은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과업입니다.

만일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과업을 중심에 놓고 지역통일전선을 형성할 경우, 그 통일전선은 전역통일전선에서 떨어져 나가 독자적 지위를 갖는 지역주의적 편향(인터넷 논쟁에서 등장했던 상대적 독자성론)에 빠지게 되며, 또한 반독점민주화운동에 지나치게 기울어짐으로써 친미예속정권을 제거하는 투쟁만을 앞세우는 좌경적 편향(좌파급진주의적 편향)에 빠지게 됩니다. 만일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과업을 중심에 놓고 지역통일전선을 형성할 경우, 그 통일전선은 계급적 원칙을 망각하고 친미예속정권을 화해·협력대상으로 보는 우경적 편향(우파민족주의적 편향)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과업을 중심에 놓고 통일전선을 형성하여야, 지역주의적 편향과 좌우경적 편향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이미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인터넷 논쟁에서 정리되었던 바대로, 오늘 지역통일전선의 성격과 임무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강조해야 할 것은, 그 운동이 반미자주화운동을 선차적으로 추진하고 반미자주화과업을 중심적으로 수행하는 통일전선운동이라는 사실입니다. 반미자주화운동의 선차성과 반미자주화과업의 중심성을 관철하는 과제는 지역통일전선만이 아니라 전역통일전선에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통일전선의 중심축인 반미자주화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미국을 반대하는 모든 형태의 반미운동을 덮어놓고 반미자주화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화운동이 미국을 반대하는 모든 형태의 반미운동과 구분되는 근거는, 그 운동이 제국주의 대 식민지 문제와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제국주의 대 식민지 문제와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 문제를 포괄하지 않는 반미운동은 반미자주화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일반적인 의미의 반미운동이라고 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반미운동은 외세인 미국을 반대하는 반외세운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반미자주화운동은 미국의 식민지지배와 식민지초과이윤수탈을 반대하고, 미국의 사회주의 고립·말살책동을 반대하는 가장 철저한 반제운동이며, 반독점민주화운동, 조국통일운동과 결합되어 있는 통일전선운동입니다.

현재 남(한국)에서는 반전평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반전평화운동은 전쟁위협과 평화파괴의 주범인 미국을 반대하는 반미운동입니다만, 그 운동은 반미자주화운동의 전술단위에 지나지 않으며 독자적인 전략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1960년의 4.19 혁명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근 30년 동안 역량관계의 변동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면서 군부파쇼통치를 반대하고 일반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형성되었던 반파쇼민주전선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과업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노동대중의 주도적 역할을 보장하는 문제와 노농대중의 중심성을 보장하는 문제입니다. 노동대중의 주도적 역할을 보장하는 문제와 노농대중의 중심성을 보장하는 문제는 노동대중이 영도하는 노농대중의 동맹을 형성하는 것에 의하여 해결됩니다. 이 문제도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인터넷 논쟁과정에서 정리되었습니다. 노농대중의 동맹은 근로하는 계급의 전략적 동맹이며 통일전선의 사회·정치적 기초입니다. 노농대중의 동맹은 사회·정치적 자주성을 실현하려는 대중의 근본요구를 가장 집중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근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동대중이 통일전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동대중이 다른 모든 계급, 계층과 달리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전투적이며, 가장 강한 조직력을 지닌 계급이기 때문입니다. 노동대중은 사회의 계급구조 자체를 철폐하라는 근본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점에서 선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농민대중이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달리 노동대중은 어떤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않은 무산계급이므로 가장 철저하게 가장 전투적으로 투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노동대중은 중화학, 전기, 통신, 철도, 항만, 운수 등 기간산업부문의 고도로 조직화된 생산체계에서 노동하고 있는 유일한 계급이므로 다른 계급, 계층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조직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동대중은 지구력을 가지고 완강하고 철저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여타의 대중운동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투쟁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노동대중이 통일전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해서, 통일전선을 노동운동의 범위 안에서 협소하게 형성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만, 노동대중과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과 친미예속정권의 지배와 수탈을 당하고 있는 농민대중은 노동대중의 가장 믿음직한 동맹자가 됩니다. 노동대중과 농민대중은 통일전선에서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어야 하며, 노농대중의 동맹역량은 통일전선의 기본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노농대중이 의식화되고 조직화되기 이전 시기에 전개되었던 반파쇼민주화운동에서는 청년학생계층과 지식인계층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청년학생계층은 지역통일전선의 선봉에서 투쟁해온 세력입니다. 4.19혁명부터 6월항쟁까지 전개되었던 반파쇼민주화운동의 투쟁구호는 노농대중의 생존권 문제까지 포괄하지는 못했고, ‘이승만 하야’, ‘삼선개헌 반대’, ‘유신헌법 철폐’,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처럼 노농대중의 계급적 이익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투쟁구호를 들지 못했던 반파쇼민주화운동이 청년학생계층과 지식인계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전선운동이 반파쇼민주화운동의 단계를 지나서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의 단계에 진입한 오늘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일 제국주의와 남(한국)의 예속적 독점자본주의 대 노농대중의 모순이 격화되고, 노농대중이 민족·계급적으로 각성하였습니다. 노농대중은 지난 시기 청년학생계층과 지식인계층들이 전개하여왔던 반미자주화운동과 반독점민주화운동에 진출하여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으며, 6.15 공동선언 이후에는 조국통일운동에도 진출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청년학생계층은 노농대중과 더불어 지역통일전선의 주도역량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만, 노농대중과 통일전선에서 견고하게 결합되지 못한 까닭에 지역통일전선의 주도역량으로서 자기의 역할과 임무를 만족스럽게 수행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노농대중과 분리되어 있는 청년학생계층은 지역통일전선의 주도역량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정세는 청년학생운동역량과 노농대중운동역량을 통일전선으로 견고하게 결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일 제국주의와 남(한국)의 예속적 독점자본의 경제적 수탈은 남(한국)사회가 고도로 자본주의화되어야 가능한 것이고, 자본주의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더욱 가중됩니다. 1990년대 이후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남(한국)사회에서 노농대중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날로 가중되고 있는 추세는 노농대중의 민족·계급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통일전선을 더욱 강고하게 형성시키는 객관적 조건입니다.

남(한국)사회에서 이처럼 노농대중의 민족·계급적 각성이 높아지고 통일전선을 형성하기에 유리한 객관적 조건이 조성되어 있는데도, 지역통일전선운동이 비약적으로 강화·발전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나의 판단으로는, 핵심주체의 역할이 아직 미흡한 수준에서 수행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통일전선의 핵심주체에 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인터넷 논쟁과정에서는 통일전선에서 차지하는 지도핵심세력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나는 통일전선의 객관적 조건이 아무리 유리하게 조성되었다고 해도 지도핵심세력이 미약하면 통일전선이 강화·발전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통일전선의 객관적 조건이 좀 불리하여도 지도핵심세력이 강하면 통일전선은 강화·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역통일전선을 강화·발전시키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지도핵심세력의 역할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남(한국)사회의 지역통일전선을 이끌어 가는 지도핵심세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세력은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를 옹호·고수하며 오로지 통일전선의 승리를 위하여 헌신·분투하고 있는 민족민주운동권의 핵심역량을 말합니다. 민족민주운동권의 핵심역량은 지역통일전선의 지도핵심세력입니다.

민족민주운동권의 핵심역량은 지역통일전선을 책임지는 지도핵심세력으로서 정세를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지역통일전선의 전략과 전술을 높은 수준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민족민주운동권의 핵심역량이 지역통일전선의 전략과 전술을 수행하는 데서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파민족주의세력, 좌파급진주의세력, 대북 화해·협력세력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친미예속정권을 대하는 문제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통일전선에서 제거대상, 투쟁대상, 동맹대상, 공조대상, 중립화대상을 구분하는 복잡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중요성은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인터넷 논쟁에서 강조되었고, 이론적으로 해명된 바 있습니다.

국내 민족민주운동권의 인터넷 논쟁에서 해명한 것과는 좀 다르게, 나는 통일전선에서 제거대상, 투쟁대상, 동맹대상, 공조대상, 중립화대상을 구분합니다. 통일전선을 타도대상과 동맹대상으로만 구분했던 전통적인 통일전선이론은 오늘 남(한국)사회처럼 사회·정치세력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을 전면적으로 해명하기 힘듭니다. 모든 투쟁이 투쟁대상을 제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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