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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통일운동 공동실천대회 발표]한국의 선거정국과 통일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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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2-07-07 00:00 조회4,0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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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지역에 산재해서 활동해 온 통일운동 일꾼들은 지난 7월4일부터 6일까지 로스엔젤레스 근교에 소재한 내셔널퍼리스트 산정 수양관에서 한반도정세 토론과 함께 미주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미주통일운동 공동실천대회>를 갖고 친교, 정세토론, 하나됨을 위한 여흥시간 및 이번 모임을 결속하는 결의대회도 가졌다. 뉴욕, 시카고, 워싱턴 디씨, 알라바마, 보스톤,샌후란시스코, 샌디애고, 로스엔젤레스 등지에서 참가한 통일운동 일꾼들은 수련회를 마치며 참가자 일동의 결의문을 채택, 발표했다. 이수련회 첫날 <한국의 선거정국과 통일노력>에 대해 발표한 내용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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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발표]

한국의 선거정국과 통일노력

*은 호기 (정치 평론가)

eunhoki-2.jpg 축구공에 채인 지방선거
한국의 지방선거(2002. 6. 13.)가 월드컵축구대회의 열기에 묻혀 냉랭하게 치러졌다. 선거 역사상 최저의 투표율(48.9%)을 기록했다. 물론 세계적인 행사(Event)인 월드컵경기도 중요하다. 애써 따온 대회이고, 한국의 숙원인 16강 진출도 걸려있어 국민적 축제일만도 하다.

그러나 주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그래서 진지해야할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본인 지방선거가

스포츠 이벤트에 밀려나서야 되겠는가. 집권 민주당은 당초에 월드컵축구경기의 열기를 지방선거에 연결시켜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선거가 축구공에 채여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이다. 언론매체가 온통 월드컵대회 기사로 먹칠되는 가운데 야당의 공격, 즉 김대중 정권의 실책과 부패현상만 크게 부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지지기반이랄 수 있는 젊은층의 투표의욕을 떨어뜨렸으니 말이다. 흡사 지난 4·13총선 직전에 6·15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 이용하려다 되 당한 거와 같은 꼴이라 할까?

이번 지방선거는 야당인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한나라당은 광역단체장(특별시장, 직할시장, 도지사) 16개 지역 가운데 서울, 인천, 경기
를 비롯 11개 지역을 휩쓸었다. 집권 민주당은 광주, 전남·북, 제주의 4곳에서만, 자민련은
충청남도 한 곳을 겨우 붙잡았다. 기초단체장(구청장, 군수, 시장)선거에서도 서울 25개 지역
(구청장) 중 22개 지역을 한나라당이 차지하는 등 전국 232개 지역 가운데 60%인 140개 지
역을 한나라당이 쓸었고, 나머지 44개 지역을 민주당이, 16개 지역을 자민련이 나눠 가졌다.
광역의원(특별시의회, 직할시의회, 도의회)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압승(64%)을 거두었다. 서
울시의회의 경우, 한나라당은 87석을 얻었는데 비하여 민주당은 겨우 14석을 얻는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15명)도 못하게 되었다. 비례대표의원을 뽑기 위한 정당투표에서도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29.1%를 크게 앞질러 52.2% 얻었다. 민주당, 자민련은 지역정당으로 확연히 수축되고 말았다. 양당정치를 선호해온 한국정치판에서 이토록 한 당의, 그것도 야당의
압승으로 끝난 선거는 일찍이 없었다.

7.4all.jpg 이번 선거는 오는 12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둔 선거여서 정당관계자는 물론 정치관측자들의 관심이 매우 컸다. 더욱이 지방선거 바로 전에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국민경선을 통해 민주당, 한나라당의 대통령후보가 확정된 바여서 대통령후보들이 앞장서 치른 선거였기에 두 후보에 대한 예비심판의 성격을 어쩔 수 없이 갖게 되었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김대중 정권의 심판, 결산으로 몰고 갔으며, 민주당은 재집권의 기초를 다지고자 안간힘을 썼다. 따라서 비록 지방선거였지만, 이번 선거결과를 김대중 정권의 거부로 받아들여도 크게 무리는 없을 성싶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 후 치러진 선거에서 번번이 패했다. 지난 4·13총선에서도 패한 거나 다름없었고, 몇 번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도 만족할 만 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크게 패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한 까닭은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대통령 아들, 처가의 치사한 비리 및 어정쩡한 처리가 직접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김
대중을 무조건 싫어하는 이른바 "영남정서"도 거듭 확인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대중 정권의 치적으로 인정받아 마땅한 "햇볕정책"의 거부라는 데 한국정치의 심각성이 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생각도 대북정책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
문에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가 크게 염려된다.

과연, 남북화해정책("햇볕정책")은 축구공에 채여 날아가버리고 말 것인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북관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는 기회 있을 때마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짜증스럽게 비난
해왔다. 채신머리없이 구걸하면서, 마구 퍼주고, 그러면서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내지 못했
다고 몰아세웠다. 급기야 그는 관훈클럽 대통령후보 토론회(2002. 5. 22.)에서 6·15공동선언
제2항을 정식으로 문제삼기에 이르렀다. 폐기 내지는 수정을 주장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6·15공동선언은 (1)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2)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의 공통성 인정, (3) 이산가족 상호방문 및 장기수 문제해결, (4)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및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교류를 통한 신뢰구축, (5) 이상의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자회의의 조속한 개최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제1항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은 이미 7·4공동성명에서 확인된 바이며, 제3항 이산가족 문제와 장기수 문제는 이전 정권에서도 이루어졌던 사항이고, 제4항도 부분적으로 시행되었던 사항을 좀더 구체적으로 합의한 사항일 뿐이다. 제5항은 합의사항의 실천을 위한 부속합의사항이다. 따라서 6·15공동선언의 핵심은 제2항이며, 6·15선언의 성과라 할만 하다. 사실, 고려민주연방국
창설방안은 북의 통일정책의 알파요 오메가인 셈이다. 그런데도 북이 남의 연합제 방안을
인정했다는 것은 북의 대단한 양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6·15공동선언의 제2항을 부정하는 것은 곧 6·15선언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간 남북간에는 크게 세 가지의 합의, 선언이 있었다. 1972년 7월 4일의 「7·4남북공동
성명」, 1991년 12월 13일의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 그리고 2000년 6월 15일의 「6·15 남북공동선언」이다. 이 가운데서도
7·4공동성명과 6·15선언은 북의 수령, 지도자가 직접 나선 바여서 북에서는 헌법에 버금가는 무게를 가진다 하겠다. 그런 합의사항을 대통령후보가 정면에서 부정한다는 것은, 집권하면 북과의 대화를 끊겠다는 결심이라 보아도 그리 틀린 분석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간의 남북간의 합의가 순조롭게 지켜지고 이행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여곡절 속에서도 꾸준히 한발자국한발자국 힘들게나마 발전해왔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남북간의 합의는, 집권당사자들의 뜻이야 어찌됐던, 냉전구조의 청산을 문서로 합의, 국민에 약속한 것이며, 이를 근거로 통일문제를 국민이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남북문제가 어렵게 될 때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준거 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발전적 노력을 부정한다는 것은 매우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합의했다. 그러나 김 주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는 김주석 조문을 거절했다. 이로 인해 김영삼
정권은 정권이 끝날 때까지 북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씁쓸한 경험이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지금은 보수층을 겨냥해서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만일 대통
령에 당선된다면 그 역시 북한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통치방편으로라도 북한카드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아마 냉랭한 북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몇 배를 퍼주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퍼주기"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의 비판의 핵심은, "너무 퍼주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퍼주었기에? 그러나 통계를 찬찬히 살펴보면 결코 그렇달 수가 없다.

김대중 정부는 지난 4년간 정부차원에서 1억 9,000만 불을 지원하였다. 이는
김영삼 정부의 2억 6,000만 불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민간차원의 1억 4,000만 불을 합친다
하더라도 3억 3,000만 불에 불과하다. 지원 내용도 식량, 비료, 의약품, 옷 등 북한 동포가 먹고사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정부차원의 지원액을 연평균으로 따지면, 국방비(2001년 123억
불)의 0.6%, 국민총생산량(GNP)의 0.019%, 국민 1인당 부담율은 1달러 80센트이다. 이 돈을
들여서 평화의 틀이 다져지고, 국방비를 10%만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이런 장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같은 기간, 외국의 북한 지원액 12억 불(미국 5억 6,000만 불, 일본 2억 6,000만 불, 중국 2억 불, 유럽연합 1억 8,000만 불)에 비한다면 오히려 부끄러운 수치다. (자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무엇보다도 "퍼주었다"라는 말이 역겹다. 퍼주었다는 말은, 일단 "주고받는다"는 등식에서
출발한다. 주었으니 받아야하고, 받았으니 주어야한다는 말이다. 이는 한국의 미덕이기도 하
다. 그러나 이웃이 어려울 때는 사심 없이 거저 주는 것이 더 큰 미덕이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과 돈 몇 푼을 미끼로 거래를 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패덕(悖德)이라 해서 가장
손가락질 받는 짓이다.

지난 날 남쪽은 어쨌는가? 한국은 건국이래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른 말로 하면,
미국이 남한한테 "많이 퍼주었다." 한국이 어려울 때, 한국은 미국이 퍼주는 것을 먹고살았다. 그러면 미국이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즐겨 쓰는 말, "Give and take"도 모르고 퍼주기
만 했을까? 미국의 잇속 때문이었다는 것,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세계곳곳에 나가, 옛날에 미국기독교가 했던 것처럼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 해외선교비용은 「한국기독교세계선교단체협의회」를 통해서만 연 2,400억 원이 나가고 있으며, 개인, 교회, 기타 선교단체가 개별적으로 쓰는 비용까지 합치면
연 8,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차원, 민간차원을 모두 합친 남한의 북한 지원액은 고작 연 1,106억 원이다. 한국교회 일년 총예산 6조 원) 그래도 아무 말이 없다.

선교사업이라서다. 마찬가지다. 통일사업을 위해서는 더 "퍼주어야" 한다. 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서독은 1972년부터 89년까지 매년 30억 5,000만 불, GNP의 0.25%를 동독에 지원하였다.)

남한이 북조선을 돕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통일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의 필요 때문에도 북을 돕는다는 생각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남한의 정치발전과 경제안정, 그리고 통합적인 문화창달을 위해서다. 경제규모에 걸맞은 복지정책을 위해서라도 국방예산을 줄일 필요가 있어서다.

분단으로 인해 그간 남쪽은 왼쪽 눈을 감고 살았다. (물론 북쪽은 바른쪽 눈을
감고 살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도 어려운 세상에 한눈으로 살았으니 오죽했겠는가?

동족인 북한과 으르렁대고 살았으니 정치발전은 고사하고 늘 불안했다. 정치란 우에서 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져야 풍성해진다. 끄떡하면 빨갱이? 지금 한나라당이 김대중 정권을 "좌파적" 정권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한국정치에서 앞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경제는 어떤가? 외국자본과 얽히고 설킨 한국경제는 휴전선에서 사소한 일만 생겨도 금방
불안해진다.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문화란 그 사회구조의 통합적 반영이며, 동시에 사회를 보듬고 있는
그릇인 것이다. 그런데 한쪽 눈만으로 만들어낸 문화가 그런 기능을 하겠는가? 세계에 내놓
을 수 있겠는가? 북한과 화해가 필요한 까닭이다.

쌀만 해도 그렇다. 남한도 전체 식량사정은 매우 나쁘다. 식량자급율이 29%(사료 포함)라 한다. 그러나 쌀만은 남아돈다. 주체를 못할 지경이다. 한국 쌀값은 국제가격보다 훨씬 비싸서 팔 데도 없다. 창고도 부족할뿐더러 보관비용도 만만치 않다. (쌀 재고 적정량은 700만 석인데 금년말 재고 예상량은 1,380만 석이어서 수확 전에 5,000만 석(약 700만톤)을 처분해야 한다.) 이렇게 남아서 골치 아픈 쌀을 먹을 게 없어 고통받는 동족에게 준다해서, 그것도 차관 형식으로 주는 것이 그렇게 나쁜 짓일까? 퍼주는 것일까?

물론, 남북화해정책에 대한 한나라당의 터무니없는 공격이 먹혀 들어가는 데는 김대중 정부의 실책이 크게 작용한다. 끊이지 않는 권력형 부정부패, 받아들이기 힘든 인사정책(이를테면, 김대중 정권에 미국동포의 한국진출이 눈에 띄는데, 그들은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을 경제적으로 도왔고, 대부분 통일운동권과는 확연히 선을 그으면서 빨갱이논쟁을 일삼던 분들이다.), 전혀 준비 없는 "햇볕정책"의 강행(마땅히 사회개혁과 병행했어야 했다. 뒤늦게 언론개혁에 손댔지만 시기를 놓쳐 부담만 크게 안고 말았다), 독선적인 지도행태 등.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개혁성과 즉, 군부개혁, 군부통치의 역사적 청산, 금융실명제 등을 뒤엎으면서 단절을 시도했던 것도 한 요인이다.

부시 정부의 등장과 대북정책의 강경화
2001년 1월 부시 정부가 출범했다.
한겨울의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한국의 국회의원 30여명이 몰려왔다. 아마 나라별로 가
장 많은 숫자일 것이다.

취임식에 참석했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손뼉을 쳤다. 한국에 돌아가는 길에 로스앤젤레스
에 들른 한나라당의 한 부총재는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이야말로 바로 한나라당이 추구하
는 상호주의라고 기고만장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빗댄 말일 터다.

금년(2002) 1월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미국을 방문, 전쟁에 바쁜 체니 부통령의 환
대를 받았다. 야당총재로서는 드문 대우를 받았다. 이 총재의 보수적 성향과 북한에 대한 강
경한 입장이 맘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때부터 줄곧 북한에 대하여 강경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중동지역의 분쟁에 대해서도 생각 없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급기야 전대미문의 9·11사태가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계를 전쟁분위기로 몰아가면서 적과 동지의 2분법적 선택을 강요하고 들었다. 물론 북조선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2002년의 연두교서에
서 북조선을 이락, 이란, 시리아 등과 더불어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못박았다. 그 뒤 국방성이 의회에 제출한(2002. 1. 8.) 비밀문서『핵에 대한 입장 재검토(Nuclear Posture Review)』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의해 공개됨으로써(2002. 3. 9.) 부시 정부의 의도는 더욱 뚜렷해졌다. 이 문서는 핵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상당히 수정하고 있다.

즉, 비핵국가에 대해서는 핵공격을 않겠다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비핵국가라도 미사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핵공격을 할 수 있다면서 북조선을 비롯 이란, 이락, 시리아, 리비아, 중국, 러시아 등 7개국을 핵공격 대상국가로 잡고 있다. 또한 지하군사시설, 생화학무기 저장시설 등을 공격할 수 있는 제한적 소형핵무기 개발을 이 문서는 담고 있다. 북조선과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이전 클린턴 행정부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이러한 부시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달가워 할 리 없다. 그간 김대중 정부가
여러 모로 노력을 해오고 있으며, 지난 2월 부시 대통령의 한국 방문 때에는 국민적 항의에
부딪쳐 당황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는 이회창 후보
의 대북관이 맘에 들것이며, 이 후보 역시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라도 부시 정부의 정책
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임에 틀림없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한
참 뜨고 있을 때, "한국의 새 지도자군이 한국에서의 미국의 전통적 역할에 이의를 제기하
는 방향으로 한미관계를 재정립하려 들 것이다" 라는 국무성 동아태담당차관보 캘리(James
Kelly)의 발언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진보정당의 출현과 통일
이번 지방선거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진보정당의 득표율이라 할 것이다.

각급 선거와 지역에 의욕적으로 후보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은 2개 구청장(울산직할시), 11인의 지방의회 의원이 당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당투표에서도 민주노동당
은 8.1%를 얻어 6.5%를 얻은 자민련을 제쳤다.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유효표의 2%이상의 득
표를 규정한 정당법에 의하여 국고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제도권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이밖에 사회당이 1.6%, 미래연합이 1.1%를 얻어 전체 진보세력이 얻은 수치는 10%
를 넘고 있다.

사실, 해방정국에서의 진보세력의 위상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동학농민전쟁과 독립투쟁
을 거치면서 사회개혁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식민지구조를 전적으로 뜯
어고치고자 했던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구에 비하면 엉터리 통계이긴 하지만, 우파 1,200만, 좌파 1,400만, 중도파 1,100
만으로 나타나 있어 추세만은 알 수 있다. (1947년 미쏘공동위원회의 남한만의 통계, 『신동아』 1988. 8월호 227쪽) 이러한 사회구조가 미군정의 분단정책, 그 뒤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진보세력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반공히스테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국민학교 운동회의 청홍(靑紅)전은 청백(靑白)전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목에서는 빨간 넥타이가, 여자의 머리에선 빨간 스카프가 사라졌다. 심지어는 차이코프스키의 곡마저 연주가 금지되었다. 그러던 세상, 많이 바뀌었다. 빨간 셔츠가 월드컵축구 응원복이 되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되었으니.)

이러한 상황과 조건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진보세력을 대표해 제3대 정부통령선거(1956. 5.)에 출마, 유효투표의 30% (216만 표)를 얻어 기세를 떨쳤다. (대구를 비롯 전국 20여 지역에서 조봉암 후보가 앞섰다. 물론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급서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기세에 겁먹은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하였고(1959. 7. 31.), 진보당(1955. 12. 진보당 발기, 1956. 1. 진보정당추진위원회 구성, 1956. 11. 진보당 창당)은 맥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4·19혁명 후 진보주의가 다시 숨을 쉬는가 했더니 곧 이어진 군사쿠데타로 더욱 힘들어
졌다. 그러나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진보세력이 결집되었으며, 이우재, 이재호, 장
기표 등 이른바 운동권 인사 중심으로 진보정당인 민중당을 결성, 대통령 후보(백기완)까지 냈으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이내 해체되고 말았다.

이번의 민주노동당의 제도권진입 성공은 정치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며, 한국정치의 장
래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당장의 역할에는 회의적인 면도 없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한나라당후보보다는 오히려 민주당후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오는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도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당을 더 힘들게 할 가능성을 떨쳐버릴 수 없다. 민주당의 진보주의 색채와 대북정책이 상처를 입는다면, 이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과거 민중당이 해체되면서 민중당의 면면들이 민주당보다는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또한 통일문제에 관한 한 상황변화를 꾀하기보다는 상황변화만을 이용하려 들던 지난날의 행태도 새삼 새겨볼 대목이다. 하기야 민주노동당으로서는 통일문제를 정면에서 들고 나온다는 것이 아직은 터를 다지는데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가능하다. 결국, 당분간 민주당과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보수세력인 한나라당과는
유연한 관계를 가지면서 자기들 세력 넓히기에 힘 쓸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정계인맥·관계를 보아도 그렇고.

정국변화와 해외동포의 통일노력
한국정치는 분석적으로 내다볼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정치판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
들 역시 가늠키가 쉽지 않다. 한국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은 많지만, 정치수준은 관심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엉뚱한 면이 없지 않다. 상황인식이 약하고, 자기 생각이 뚜렷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현상 같다.

오는 11월의 대통령선거도 지난번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구도
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세 김씨는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것이며, 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통일노력에 대한 공약이 힘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표를 깎아먹을 것이다. 어느 때나
다름없이 미국과 일본이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북한의 영향력이 선거
에 미칠 것이다. 관심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놀러가느라 투표율은 낮아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난 5년간 기득권에 위협을 느꼈던 보수세력이 기를 쓸 것이다. 그렇다면은?

사회개혁과 통일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는 12월의 대통령선거에 대한 기대는 접어둘
수밖에 없다. 물론, 돌출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정계개편, 제3당
출현에 따른 대통령선거구도의 변화, 병역비리 같은 엉뚱한 변수 등이 결과를 예측키 힘들
게 만든다. 그러나 투쟁과 혼란의 시대가 다시 올 것으로 일단 보아야 한다.
따라서 어렵게 넓혀진 통일의 문을 지키려는 노력이 치열해질 것이다. (남북교역량은 연평균 3억 3,000만 불로서 남한의 200여 개 기업체가 북한에 진출하고 있으며,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해 각분야의 교류도 활발해져 연평균 약 6,000 명이 북을 방문하였다.-통일부)

해외동포, 특히 미주동포의 통일노력과 결심이 요구된다. 그 어려웠던 1980년대의 개척자
적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다시 온다. 당시로서는 북조선과의 접촉 같은 것은 엄두를 낼 수 없는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나 10년 후에는 어떠한가? 아무렇지 않게 되지 않았는가?

지금에 와서는 해외동포의 통일노력은 표도 나지 않게 되었다. 북한 방문이 한국에서보다는
쉽다는 것 빼고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일프로그램이나 규모가 해외동포사회로서는 당
해낼 수 없도록 발전했다. 이제, 80년대의 개척자정신으로 돌아가되 다시 10년을 내다보고
큰 걸음을 내디딜 때가 되었다.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그러나 가야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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